슐츠의 자막공방/비니스 힐 60 (2010)

이프르의 갱도지뢰

슐츠105 2011. 9. 20. 18:06

출처 : http://glob.egloos.com/2188585  문제중년의 잡설

 

 

벨기에의 서플랑드르주에 이프르(Ypres)란 동네가 있죠.
이미 17세기까지 영국과 프랑스가 한번씩은 찝적대봤고 나름대로 서부플랑드르에선 중
심지역으로 유서깊은 동네입니다.


1차대전중 이프르와 그 근방에서는 무려 5번의 큰 전투가 벌어집니다.


1914년 10월 19일부터 11월 24일까지 벌어진 1차 이프르 전투(First Battle of Ypres)


1915년 4월 22일부터 5월 25일까지 벌어진 2차 이프르 전투(Second Battle of Ypres)


1917년 6월 7일부터 14일까지 벌어진 메씨느의 전투(Battle of Messines)


1917년 7월 31일부터 11월 10일까지 벌어진 3차 이프르 전투(Third Battle of Ypres)
혹은 패씬데일 전투 (Battle of Passchendaele)


1918년 9월 28일부터 10월 2일까지 벌어진 이프르 전투(Battle of Ypres)


결국 전쟁말에는 유서깊은 이프르시는 거의 박살나버립니다.
지금도 이 지역에는 당시의 참호망이나 불발탄등이 발견된다고 하죠.


tunnel mine(갱도 지뢰라 번역해봤습니다.)은 바로 3번째 메씨느의 전투에서 사용됩니
다.
요약하자면 허버트 플러머 장군(Herbert Plumer)의 2군이 1917년 6월 7일에 독일군 방
어선 지하에 묻어둔 19개소의 초대형 지뢰(사실상 지하실에다 폭약뭉치를 쌓은)를 터
트렸다라는 거죠.


메씨느는 이프르 남동쪽의 평야인데 중간중간에 해발 200미터 정도의 언덕들이 있고
여기에 독일군들이 1914년말부터 진을 치고 있었죠.
이들은 이 지역에서 작전을 하려면 침묵시켜야할 귀찮은 존재였습니다.


플러머 장군은 1916년초에 이곳을 공격하기로 작정하고 전통적인 공격법대신 22개의
초대형 지뢰를 독일군 방어선밑에다 묻고 1917년 6월 7일 03시 10분에 일시에 터트린
후, 포병과 전차, 그리고 가스 살포의 지원을 받으며 보병을 밀어넣어 점령한다는 계
획을 잡습니다.
지뢰 매설 작업은 18개월전부터 비밀리에 진행되죠.


1916년 8월 24일, 쁘띠 듀브(Petite Douve) 농장이라 불리던 곳에 있던 지뢰가 독일군
에게 발각되어져 파괴됩니다.
또한 몇몇 장소에서는 땅파다 갱도를 발견한 독일군과 작은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하죠.
이런 와중에도 작업은 계속되어져 8km에 달하는 갱도가 파여지고 계획대로 21개소의
지뢰원이 완성됩니다.


폭발된 지뢰원의 이름과 매설된 폭약량
Hill 60A - 53,500파운드
Hill 60B - 70,000파운드
Hollandscheschour 1 - 34,200파운드
Hollandscheschour 2 - 14,900파운드
Hollandscheschour 3 - 17,500파운드
Kruisstraat 1 - 30,000파운드
Kruisstraat 2 - 30,000파운드
Kruisstraat 3 - 30,000파운드
Kruisstraat 4 - 19,500파운드 (이건 Kruisstraat 1과 연결된 겁니다.)
Maedelstede Farm - 94,000파운드
Ontario Farm - 60,000파운드
Peckham - 87,000파운드
Petit Bois 1 - 30,000파운드
Petit Bois 2 - 30,000파운드
Spanbroekmolen - 91,000파운드
St.Eloi - 95,600파운드
Trench 127 L - 36,000파운드 (L: Left, R: Right)
Trench 127 R - 50,000파운드
Trench 122 L - 20,000파운드
Trench 122 R - 40,000파운드


1917년 5월 21일부터 2,500문 이상의 각종 화포가 동원되어져 사전 포격이 시작되죠.
6월 7일 02시 50분, 그 때까지 쏟아넣던 포격이 잠시 중지됩니다.
포격후 보병의 진격이 있다는 뻔한 패턴을 신물나게 겪어봐서 뻔히 알던 독일군들,
모두가 엄폐호에서 나와 각종 화기와 기관총등등을 준비하고 조명탄을 쏴올립니다.


"제군들, 우리는 내일의 역사를 바꿀 수는 못하지만 곧 지형은 바꿀 수 있을걸세.'
--- 6월 7일의 공격전 플러머 장군이 부관들에게 한 말.


20분간의 적막끝에 03시 10분, 21개소의 지뢰원중 19개소가 폭발합니다.
공격준비중이던 영국군은 지평선을 가득 메운 불기둥(pillar of fire)을 봤고
아마추어스럽게 낚인 방어중이던 독일군 1만여명이 날아가버렸으며 살아남은 자들은
그 때까지 누구도 듣지 못한 인류사상 최대의 폭음과 진동에 공황에 빠져 무력화됩니다.
이 폭음은 더블린의 다우닝가에 있던 로이드 죠지(Lloyd George)도 들을 정도였다고
하죠.

 

 

 

 


곧 연합군들은 무인지대나 다름없는 독일군 방어선을 돌파 3시간내에 목표지점들은 별
다른 피해없이 점령하고 다른 곳에서의 진격도 순조롭게 진행되어 그날 정오까지 원하
는 목표를 모두 점령합니다.
6월 8일에서 14일까지, 독일군의 역공이 가해지나 이번에는 그 지역의 점령된 언덕들이
들의 발목을 잡게되고 결국 공격은 저지됩니다. (이 와중에 수많은 양측 병사들이 이전처럼
무의미하게 희생됩니다.)


한편 매설된 21개소의 지뢰원중 터지지 않은 2개소는 사실상 위치를 잘못 짚고 매설된
경우였고 곧 포기됩니다.
문제는 그 속에 들어있는 폭약은 여전히 살아있는 상태였고 지금까지 그 지역 주민들
을 불안하게 만드는 존재로 남아있습니다.


막간극으로 1955년 6월 17일, 38년전의 전쟁의 상흔이 벼락에 폭발합니다.
다행이 희생자는 1마리의 운없는 황소였다고 하죠.
나머지 1개의 지뢰는 정확한 위치가 규명되지 않은 채, 부분적인 발견이 이뤄진 상태
라 합니다.


교훈:
1. 만약 저기에 쥐님께서 계셨더라면 지뢰망이 아니라 지하 운하망을 만드셨으려나?


2. 낚이지 말자.

 


p.s:
폭약 갱도도 지뢰로 취급됩니다.
그리고 유서깊은 것이죠.


1차대전때 메씨느 전투에서처럼 터널파고 폭약 매설해서 윗쪽 날려버리는 것은 상당히
오래된 일입니다.
유럽쪽 기록을 본다면 1403년, 피사(Pisa)와 플로렌스(Florence)간의 싸움에서 피사를
둘러싼 성벽 지하에서 통로를 타고 들어가 화약을 터트려 성벽을 내려앉힌게 최초였다
하죠.
지하라 했지만 사실 이건 피사측이 '비상사태를 대비해 파놓고 잊어먹고 있던 통로'였
다는게 심난.
교훈이라면 개구멍 팠으면 관리를 잘해라가 아닐지. (뭐 어느 성도 개구멍 간수 잘못해서
실함된 사례가 있습죠. 개구멍이라기 보다는 깜박하고 잠그지 않은 오물장 입구라 하지만.)
그 후, 몇번 이런 지하에 폭발물 심어두고 터트리기가 있었다하지만 몇가지 문제도
있었다고 하죠.


1. 그 때는 화약류의 가격이 비싸서 하기에는 부담이 많았다.
    예산은 인간 세상을 지배하죠. 아마.


2. 부실한 건축기술덕분에 갱도파다가 붕괴나 산소부족등으로 사고 발생이 있었다.
    뭐 갱도파다 문제생기는건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니.


3. 상대방이 알고 역습을 가해 실패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면 두더쥐의 싸움이 된다는게.


한편 이 갱도 지뢰는 자신의 노트에 음란한 노래도 적어넣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영
감님의 노트에서도 연구성과(?)가 발견됩니다.

 


p.s:
특기할 사항으로 이 동네에서 1915년 4월 22일에 현대적인 화학전이 벌어졌다는 걸겁
니다.
이미 1914년, 프랑스가 독일군에 대해 최루제를 사용한 적이 있고 독일도 곧 화학제를
사용한 포탄을 실험해봤습니다만 이 날은 포탄정도가 아닌 살포로 방향이 잡혔죠.


그 날 아침 독일군은 5,700여개의 금속통을 전선으로 가져와 밸브를 열었고 곧 캐나다
군 병사들은 황녹색의 구름이 그들을 향해 오는 것을 봤고 곧 그 구름속에서 기관지,
폐, 눈이 타는 듯한 고통을 느껴야 했죠.
독일이 염소 가스를 살포했으니.


곧 독일군의 공격이 진행됐고 방어중이던 캐나다군은 뒤로 후퇴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실재 가스의 효과는 생각보다 높지는 않았다고 하죠.
무엇보다 캐나다군을 괴롭힌건 가스가 아닌 독일군의 포병이었고 캐나다군은 제대로된
포병 지원을 받을 수 없던 상태였으니.


전투가 최고조에 이른 24일 하루동안 3천여명의 캐나다군 병사들이 전사했지만 캐나다
군은 독일군의 진격을 격퇴했고 이전에 있던 지역까지 다시 탈환했다 하죠.


독일군으로선 주공이 아닌 신병기인 독가스를 실험해본다는 의의가 컸던 2차 이프르
전투는 예상외로 잘싸운 캐나다군 때문에 공격은 돈좌됐고 염소가스가 화학병기로선
좋은 효과가 없음을 확인하는 정도로 끝나버립니다.


이 때, 참전한 한 캐나다군 군의관(John McCrae 중령)은 포격에 의해 갈갈이 찢겨진
땅위에 붉은 양귀비(poppy)가 핀 것과 좀 더 높은 지대에 있던 독일군 참호를 향해 겹
겹히 누워있는 시체들을 보고 시를 적게됐죠. (이미 양귀비는 나폴레옹 시대부터 전사
자의 피를 먹고 포탄이 간 땅위에 피는 꽃으로 알려졌고 그래서 전사자의 꽃으로 알려
집니다. 오늘날도 유럽등에서는 리멤버런스 데이때 양귀비를 단다 하죠.)
이 시는 지금은 캐나다에서 국민적인 시로 초등학교때부터 암송시킨다고 하죠.


In Flanders fields the poppies blow
Between the crosses, row on row,
That mark our place; and in the sky
The larks, still bravely singing, fly
Scarce heard amid the guns below.
We are the Dead. Short days ago
We lived, felt dawn, saw sunset glow,
Loved and were loved, and now we lie
In Flanders fields.
Take up our quarrel with the foe:
To you from failing hands we throw
The torch; be yours to hold it high.
If ye break faith with us who die
We shall not sleep, though poppies grow
In Flanders fiel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