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개/2차대전 아시아 & 태평양전선

전쟁영웅의 공포 (First to Fight, 1967)

슐츠105 2013. 5. 18. 10:15

전쟁 | 미국 | 97 분

감독 크리스챤 니비

출연 차드 에버레트, 마를린 드빈, 딘 야거, 바비 트롭

 

줄거리
잭 코넬(채드 에버렛 분)은 직업 군인으로 해병대 하사이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1942년 반격에 나선 미군은 태평양의 섬을 차근차근 탈환해나간다. 어느 상륙작전에서 코넬의 분대는 단독으로 일본군 1개대대 병력을 섬멸하고 그 공로로 그 공로로 코넬은 일약 소위로 특진하고 미국 최고의 무공훈장을 받는다.

코넬은 귀국하면서 대원들, 특히 더없이 친하게 지내던 카나반 중사와 헤어지는 것이 마음 아프다. 훈장을 받은 코넬은 해군 대위 오버만(보비 트롭 분) 등 다른 수상자 셋과 함께 전국을 순회하면서 전시채권 판매를 위한 홍보활동을 한다.

그 과정에서 인솔 직원인 미모의 페기 샌포드(마릴린 드빈 분)와 가까워져서 결혼까지 한다. 약혼자를 전쟁에서 잃은 페기는 또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불행을 겪을까봐 코넬과의 결합을 무척 망설였으나 코넬은 다시는 출전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고 두 사람은 결혼하여 꿈같은 신혼생활을 한다.

지금의 보직은 훈련소 교관. 페기와 코넬의 사랑은 이루말할 수 없이 깊고 페기는 아이를 갖는다. 때마침 그토록 친하던 카나반 중사의 전사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페기와의 약속도 있고 또 임신까지 한 아내를 두고 전쟁에 나가겠노라 자원할 수가 없어 갈등하는 코넬...

 

 

 

 

 

 

 

 

 

 

 

 

 

 

 

 

 

 

 

 

 

 

 

존 '마닐라' 바실론 하사(Staff Sergeant John 'Manila' Basilone)

1916년 11월 4일 ~ 1945년 2월 19일)

뉴욕 주 버팔로 레리탄 출생

 

 

 

 

존 바실론 하사는 미국인이라면 한번 쯤은 들어볼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직도 미국인들 사이에서 전쟁 영웅으로 평가되며 태평양 전쟁의 최초 명예 훈장 수훈자입니다.

 

그는 1916년 11월 4일, 뉴욕 주의 버팔로의 레리탄이란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1934년 미 육군에 입대하여 마닐라에서 근무했으며 이 때, 그의 별명은 '마닐라 존'이 되었습니다.

 

1937년 군을 제대하여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에서 해병대에 지원하여 미국 제 1해병사단 7연대 기관총반에 배치되었습니다.

 

 

 

 

(당시 바실론 하사의 연대장이었던 루이스 '체스티' 풀러 대령, 미 해병사상 가장 화려한 전적을 지닌 해병 중 한명, 한국전 참전)

 

 

 

 

(미해병 제 1사단 패치, 숫자 1에 씌여진 영어는 1사단의 최초 격전지였던 '과달카달'을 의미)

 

제 1 해병사단은 일본이 태평양의 패권을 장악하자 일본의 영토확장을 중지하기 위해 호주 북부의 섬으로 파견되었습니다.

그 섬의 이름은 '과달카날' 이었습니다.

 

 

 

(과달카날 지형도)

 

 

 

(당시 일본 제국 영토)

 

과달카날에서 강력한 저항을 받을 것이라 예상한 미국의 예상과 달리 상륙 지점은 매우 안전했으며

적이 아닌 아군이 있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미국은 이걸보고 과달카날 전투가 금세 끝날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상륙한 날 밤, 과달카날 연안에 정박했던 미 해군 함대가 일본 함대와의 전투에서 패배해 퇴각하고 맙니다.

 

결과적으로 당시 먼저 상륙했던 1연대는 섬에 홀로 남게 되었습니다.

일본군을 다음 날 밤부터 반자이 돌격을 전개하면서 미군을 압박했습니다. 하지만 막강한 화력의 1연대가 일본군의 맹공을 잘 막아내면서 퍼텨냈습니다.

 

그리고 풀러 대령이 이끄는 7연대가 지원병으로 도착하게 됩니다.

하지만 7연대도 고전을 면치는 못합니다. 물자가 부족한데다가 일본군의 수가 워낙 많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바실론 하사가 이끌던 2개의 기관총반은 연대본부에서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 진을 치고 대기 중이었습니다.

일본군은 이곳도 공격했죠. 탄약이 많이 부족했던 바실론 하사의 소대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습니다.

이 곳에서 바실론 하사는 영웅적인 전적을 세웁니다.

 

바실론은 맨발로 수백미터의 관목숲을 뛰어 연대본부에서 탄약을 받아 다시 진지로 돌아오는 목숨을 건 왕복 경주를 치릅니다.

그 상태에서 수 명의 일본군을 사살했으며 진지에 탄약을 나르고는 곧장 다른 병사가 쓰던 기관총을 장전하고 일본군을 향해 난사했습니다. 바실론 하사는 참호의 끝으로 가 적이 돌격해 오는 방향 약간 측면에서 기관총을 난사하였으며 바실론 하사의 소대는 성공적으로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냅니다. 이 전투는 바실론을 포함해 15명이 일본군 3000명을 사살한 전투였습니다.

  

이 작은 전투의 전적으로 그는 과달카날 전투 승리 후, 잠시 머물게 되는 호주 멜버른에서 명예 훈장을 수여 받습니다.

 

 

 

(미국 군인으로써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영광, 명예 훈장(Medal of Honor))

 

  

이후 그는 본국으로 귀국했으며 전쟁 채권 홍보 등의 일을 했으며 미국 내에서 전쟁 영웅으로 대접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1년 간 전쟁 채권 홍보 일을 했으며 그 사이 계속 국가에 군 재복귀를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전쟁 채권 홍보가 절실했던 정부는 허가하지 않았죠.

후에 바실론 하사의 끈질긴 요청에 정부도 어쩔수 없이 그를 중사(Gunnery Sergeant)로 승진 시키면서 훈련 교관으로 캘리포니아의 캠프 펜들턴 해병대 캠프에 배치시킵니다.

  

그는 후에 이오 지마(유황도) 전투에 참전하게 되는 제 5 해병사단 베이커 기관총 중대에 소속되었습니다.

그가 캠프 펜들턴에 출근한 첫 날, 모병된 병사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빈 막사를 둘러보러 왔을 때,

바실론 중사는 스티브 '클리포드' 에반스 일병(PFC Evans), 찰스 '척' 테이텀 일병(PFC Tatem)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이미 해병대에서 복무했으므로 그 경험을 살려 일본의 악독한 자살돌격에 견뎌낼 수 있는 병사로 훈련 시켰습니다.

여담으로 들은 말이 있다면 그는 매일 아침 5시부터 병사들을 기상시켰으며 어느 날 아침 기상 때 에반스는 옆 자리 테이텀에게 속삭임으로 이렇게 불평합니다.

"빨리 전장에 나가서 일본놈들 싸다귀나 날리고 싶다.

 

그 불평을 들을 바실론 중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일본 병사들을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상관하진 않겠다. 하지만 너희의 그 망할 자신감으로 적을 과소평가 하지 말란 말이다. 알아 들었나!!"

 

캠프 펜들턴에서의 또다른 이야기도 있습니다.

바실론은 이곳에서 여성 예비군 소속의 레나 메기 병장(Sergeant Rena Mae Riggie)를 만났습니다.

 

처음엔 메기 병장은 바실론 중사의 작업을 차버리지만 바실론 중사의 열정적인 애정공세(?)에 결국 결혼하게 됩니다. 그리고 몇 달 동안 행복한 신혼을 보내게 됩니다.

  

바실론 중사와 5사단은 이오 지마 전투에 참전하게 됩니다.

 그는 이오 지마 첫날 선두에 서서 상륙을 방해하는 일본군 벙커를 성공적으로 제거하고 해변가의 길을 열었지만 1945년 2월 19일 전투 첫날 자신의 부하 분대장들과 작전 구상도중 날아온 일본군 박격포에 의해 3~4명의 부하와 함께 사망하고 맙니다. 후에 극작가로 유명해지는 당시 바실론의 소대에 소속되있던 윌리엄 랭스포드는 이렇게 회고합니다.

 

"1945년 2월 19일 아침, 우리는 이오의 레드 비치를 기습해서 적의 박격포와 포화 세례를 받으며 검은 면을 오르기 시작했다. 바실론은 나보다 일파 먼저 상륙했다.
해변의 토치카 한 개를 해치운 바실론은 몇 명의 해병 대원을 모이게 한후 그들을 추가 지원 병력과 무기를 가져오는 동안 위치를 지키게 했다.

가는 도중에, 바실론은 심한 포화 속에 해변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셔먼 탱크를 발견했다. 벙커를 때려부수는데 셔먼 탱크의 유용성을 알고 있는 바실론은 셔먼을 안내하면서 완전히 노출된 가운데 목표물을 가리켜주었다.

우위에 서자, 바실론은 그가 편성하기 시작하던 공격조를 위한 부대원을 다시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가파른 화산 해변을 다시 가로질러 가야 할 것이었는데, 거기엔 많은 해병대원들이 적의 무자비한 포격과 잘위장된 토치카에 꼼짝 못하고 있었다.

정오가 가까워져오는 시각이었고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그의 목숨은 몇번이나 위험에 처했었다. 마치 총알이 그를 피해가는 것 같았다. 많은 병사들이 존 바실론이 해변에 쓰러지는 것을 봤다고 말한다. 한 병사는 바실론의 다리가 지뢰에 날아갔다고 말했다. 많은 병사들은 마지막 말을 들었다고 주장하고, 어떤 병사는 바실론이 자신의 권총으로 안락사시켜달라고 빌었다고 말한다.그러나 모두 허구이다.

가장 신빙성 있는 증인은 로이 엘스너이다. 사령부의 요리사로서 펜들턴에 있을 때부터 기관총 훈련을 지켜봤고 바실론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다. 그와 몇몇 동료들이 사령부를 찾고 있을 때였다고 한다. "모토야마 1번 필드에서 몇백 야드 지점에서, 우리는 폭발 소리를 들려서 [필드 쪽으로] 쳐다봤죠. 바실론과 그와 같이 있던 세 명이 쓰러지는 걸 봤죠."

정오가 어느 정도 지났을 무렵, C 중대가 반마일 진격하고 평편한 필드를 깨끗하게 쓸어놓은 모토야마 1번 비행장 가장자리에서 나는 한 무리의 검게 변한 시체들을 발견했는데 한 그중 한 명이 내 시선을 사로 잡았다.그는 마르고, 창백한 어린애였다. 헬멧은 반쯤 벗겨져 있었고, 자켓은 뒤로 찢기고, 입은 벌려진채 전투낭 위로 휜 자세로 얼굴은 위를 향하고 누워 있었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짧게 자란 먼지투성이 머리 아래 핼쓱하고 생기없는 얼굴의 누군가를 흐릿하게 알아보았다. 누군가 말했다. "그건 바실론이야."

주변을 돌아 다니며 물었다. 이게 바실론이야?"
아는 사람이 말했다. "맞어. 박격포가 직격에 성공했던 순간에 부하들에게 작전 지시를 하고 있었지. 박격포에 모두 죽은 거라고." 나는 앉아 시체를 면밀히 살폈지만, 만져보진 않았다. 포탄은 발에 떨어지면서, 고환과 목과 왼팔에 파편을 날렸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말랐고, 영양 실조에 걸린 애 같았다. 다친 양손은 배를 덮고 있었다. 이것이 과달카날의 영웅, 국가의 기쁨, 해병대의 자랑 그리고 나의 친구였던 존 바실론의 최후였다."

 

 

 

(USS 바실론 호의 기공식에 참가한 레나 바실론 병장)

 

그는 사후 해군 십자 훈장(Navy Cross)도 수훈받으므로써 미 해병 유일 명예 훈장과 십자 훈장을 모두 수여받은 군인이 되었습니다. 또한 그를 기려 명명된 구축함 USS 바실론 함이 건조되고 고속도로도 개통되었습니다.

 

 

 

(해군 십자 훈장(Navy Cross))

 

 

 

(구축함 USS Basilone 호, 1977년까지 사용됨)

 

또한 그의 얼굴이 담긴 우편이 아직까지 사용 중이며 그의 고향 레리탄에서는 매년 그를 기리는 행사가 열립니다.

 

 

 

(알링턴 국립 묘지의 바실론 중사의 묘지)

 

레나 바실론은 남편의 전사 통보를 32세 생일날 통보 받습니다. 결혼 한지 고작 7개월 된 때 였습니다.

재혼하지 않고 살다가 1999년 사망합니다.

 

에반스 일병은 이오 지마 전투에서 사망합니다. 당시 나이는 17세였다고 합니다.

 

테이텀 일병은 이오 지마 전투에서의 공적을 인정 받아 동성 훈장(Bronze Star Medal)을 수여 받습니다. 현재까지 생존해 있는 것으로 확인 됬습니다.

 

[출처] 아직 미국인의 가슴속에 살아 있는 전쟁 영웅, 존 바실론 하사관|작성자 HardTek

 

 

다른 정보는 ---> http://olpost.com/v/1347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