슐츠의 자막공방/존 말코비치의 25시 (1996)

헤르만 괴링

슐츠105 2011. 9. 21. 17:04

 

1차대전 당시의 괴링

 

 

 

 

헤르만 빌헬름 괴링(Hermann Wilhelm Göring. 1893년 1월 12일 ~ 1946년 10월 15일)은 나치당의 초기 멤버이자, 초기 SA지휘관을 지냈고, 게슈타포를 창설했다. 1935년 재군비선언 이후에는 공군 원수로 공군을 창설하고 육성했다. 그 자신이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전투기 에이스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형 집행 직전에 자기 감방에서 자살했다.

 

유년기

아이티 주재 독일제국 총영사관인 하인리히 에른스트 괴링과 그의 2번째 부인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1893년 바이에른에서 태어났다. 괴링이 3살되던 무렵인 1896년, 아버지가 영사관직에 은퇴하여 가족들과 함께 독일에서 살았다. 어린시절 괴링은 뉘른베르크 가까이에 있는 펠덴슈타인이라는 작은 성(城)에서 자랐는데, 1913년까지 그 성의 주인은 어머니의 연인이자 아이들의 대부(代父)이기도 했던 유대인 리터 폰 에펜슈타인 헤르만이었다.

 

 

군인생활

직업군인으로 훈련받은 뒤 그는 1912년 장교로 임관되었으며, 초창기 독일제국 공군에 들어가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두드러진 활약을 했다. [1]1918년 독일의 위대한 비행사 리히트호펜 남작 만프레트가 복무했던 유명한 비행중대의 사령관이 되었다. 독일이 항복한 뒤 혼란한 시기에 민간인들이 군장교들을 제대로 처우하지 않는 것에 몹시 분개하여 독일을 떠났다. 이후 괴링은 덴마크스웨덴에서 민간 비행사로 일했으며, 그뒤 스웨덴의 남작 부인 카린 폰 로젠을 만나 그녀가 남편과 이혼한 뒤인 1922년 2월 3일 뮌헨에서 결혼했다.

 

나치스당 입당과 활동

괴링은 1921년 아돌프 히틀러를 만났으며, 1922년말 소규모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나치스)에 입당했다. 전직 장교로서 히틀러의 나치스 돌격대(Sturmabteilung/SA)를 지휘했으며, 1923년 11월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려고 성급하게 일으켰다가 실패한 '비어 홀 폭동'에도 가담해 허벅지에 심한 상처를 입기도 했다. 그를 체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으나 부인과 함께 오스트리아로 달아났다. 상처의 아픔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모르핀을 상용하다가 심하게 중독되어 1925년~1926년 2번이나 스웨덴 롱브로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2]

1927년 독일로 다시 돌아온 괴링은 독일 산업계와 접촉하는 데 성공하여 다시 당 지도부 자리에 앉게 되었고, 1928년 선거에서 나치당이 얻은 12개 의회의석 가운데 하나를 차지했다. 그뒤 하원에서 인정받는 당 지도자가 되었고 1932년 7월 선거에서 나치당이 230석을 차지하였을 때 국회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국회에서 괴링의 유일한 관심은 1933년 3월까지 국회가 겉으로나마 내세웠던 민주주의 체계를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84세의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에게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역대 총리들, 특히 쿠르트 폰 슐라이허프란츠 폰 파펜을 계략에서 앞질러 결국 1933년 1월 30일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그러나 독재권력을 얻기 위한 싸움은 계속되어 1933년 3월 23일에야 히틀러에게 독재권력을 주는 수권법(授權法)이 통과되었다. 괴링은 끈기있게 밀고 나가 독일에서 제일 크고 영향력있는 프로이센 주(州)의 내무장관직을 맡았다. 이 직책을 이용하여 프로이센 경찰을 나치화했으며 비밀경찰 게슈타포를 창설했다. 또한 다루기 힘든 반대파들을 교정하기 위한 강제수용소를 만들었다. 1933년 2월 27일 나치가 선동한 것으로 추측되는 의사당방화사건이 일어나자 '공산주의자들이 쿠데타를 모의했다.'는 구실로 독일 공산주의자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했고, 몇몇 사회민주당 의원들도 체포해 다음달 수권법이 통과되는 데 방해가 되는 영향력있는 반대파들을 제거했다.

히틀러의 가장 충성스러운 지지자로서 괴링의 위치는 1930년대말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거의 마음대로 국가직책을 골라서 역임했다. 그는 독일제국 항공분야의 총책임자, 새로 편성하여 1935년 3월까지 민간사업체로 위장했던 독일 공군(Luftwaffe)의 최고 사령관, 1933년에는 독일 수렵지 및 산림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1934년 6월 나치당이 돌격대 지도자 에른스트 룀을 숙청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으나 같은 해 안보책임자 직책을 하인리히 히믈러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게슈타포와 강제수용소에서 손을 떼었다. 1937년에는 1934년부터 히틀러의 경제장관으로 재직한 히알마르 샤흐트를 쫓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히틀러는 1936년에 이미 샤흐트와 의논도 하지 않고 괴링에게 전시경제(戰時經濟)를 위한 4개년계획의 책임을 맡겼었다. 괴링은 또한 히틀러의 순회대사도 계속 맡았다.

독일 국민뿐 아니라 외국 대사와 외교관들 사이에서도 괴링은 나치 지도자들 가운데 가장 인기가 있었으며, 자신의 확고한 지위를 이용하여 재산을 모았다. 그는 성격이 무자비했는데 그것은 1938년 오스트리아에 독일과 '합병'(Anschluss)을 맺도록 협박한 전화대화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독일에 사는 유대인뿐 아니라 히틀러에게 무너진 여러 나라에 살고 있던 유대인을 경제적으로 수탈한 사람도 바로 괴링이었다.

괴링은 첫번째 부인이 1931년 죽은 뒤 1935년 4월 10일 여배우 에미 조네만과 재혼했다. 첫번째 부인에게 그랬듯이 2번째 부인에게도 그는 헌신적인 남편이었다. 사냥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베를린 북쪽에 있는 쇼르프하이데에 드넓은 산림지를 소유했고, 그곳에 1933년부터 그의 야망에 어울리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저택을 짓기 시작했으며 첫번째 부인을 기리는 뜻에서 그 저택을 카린할이라고 불렀다. 바로 이 카린할에 자신이 모아들인 막대한 예술 소장품의 대부분을 보관했다. 1938년 6월 2일 에미는 괴링의 유일한 자식인 외동딸 에다를 낳았다.

제2차 세계대전

1939년 스웨덴의 산업가 비르거 달레루스와 협상에 실패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괴링은 진정으로 전쟁을 피하거나 늦추기를 원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의 군사행동이 계속되면서 폴란드 레지스탕스를 박살내고 여러 나라를 차례로 약화시킨 전격작전을 실행한 것은 바로 괴링의 공군이었다. 그의 방종한 기질은 혹독한 전쟁을 견뎌내거나, 전투기보다는 폭격기 생산을 선호한 히틀러의 맹목적 편견에 반대하기에는 너무 약했다. 히틀러가 북유럽에서 지중해와 북아프리카로 전선을 확장함에 따라 독일 공군의 방위능력은 약해졌고, 독일 공군이 영국과의 전투에서 지고 연합군의 독일 폭격을 막지 못하게 되자 괴링은 체면을 잃었다. 그는 건강을 구실로 은퇴했는데 이는 히틀러도 바라던 바였다. 괴링은 카린할에 보관한 사치품을 즐겼고, 점령국의 유대인들에게서 약탈한 예술품들로 소장품은 계속 늘어났으며 그의 호의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에게서 많은 선물을 받았다. 그는 엄청나게 뚱뚱해졌으며 모르핀에서 추출한 약인 파라코데인을 지나치게 써 자주 약물중독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약물중독 때문에 감정의 기복이 심하여 기분이 좋아졌다가 곧 우울해지기도 했으며 자기중심적이며, 허황하여 눈부시게 찬란한 의상과 군복, 훈장들과 자기과시욕을 만족시킬 보석들을 좋아했다. 히틀러는 괴링의 결점을 알면서도 자신의 정권과 깊게 밀착된 괴링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1939년에 히틀러는 괴링을 자신의 후계자로 선포했으며 1940년에는 '위대한 독일제국 원수'(Reichsmarschall des Grossdeutschen Reiches)라는 특별계급을 주었다. 다른 나치 지도자들은 편파적인 처사로 이루어진 그의 지위에 분개하거나 방종한 그의 성격을 경멸했지만 히틀러는 전쟁 마지막 기간까지 그를 해임하지 않았다. 괴링은 히틀러가 베를린에서 포위되어 절망적으로 되었다고 생각하고 1939년에 내려진 포고령에 따라 총통의 권력을 계승하려고 기도했다가 히틀러에게 해임당했다. 그런데도 히틀러가 자살한 뒤 그는 자신을 전권대사로 대우해주기를 바라고 스스로 미군에게 항복했다.

말년

전범으로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 약물중독에서 완전히 벗어난 괴링은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자신을 훌륭히 변호할 수 있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인기있는 피고인이며 역사적 인물이라고 여겼으며 히틀러 정권이 저지른 끔찍한 만행과 자신은 관계가 없고 그 모든 것은 하인리히 히믈러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비밀리에 저지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유죄판결을 받고 나서 교수형 대신 총살형을 바라는 탄원을 올렸으나 거절당하자 사형집행이 하달된 날 밤 뉘른베르크에 있는 감방에서 극약을 먹고 자살했다. 이러한 사실은 포마드 용기 안에 독약 캡슐을 내내 숨겨왔다는 내용이 적힌 쪽지가 1967년에 발견됨으로써 비로소 밝혀졌다.

 

 

참고 자료 링크 : http://blog.naver.com/dltkddl16/90089974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