슐츠의 자막공방/[일드] 군사 칸베에 (2014)

큐슈의 세키가하라, 이시가키바루 전투

슐츠105 2015. 3. 4. 22:03

큐슈의 세키가하라, 이시가키바루 전투

 

 

 

1 ---> http://historystory.tistory.com/m/post/472#

 

2 ---> http://historystory.tistory.com/m/post/473#

 

 

 

펌---> ttp://beholderer.egloos.com/1085906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56호(2002년 12월호) 50~65쪽의 기사인, 카와이 히데오河合秀郞 씨가 집필한《쿠로다 죠스이의 세키가하라》를 번역한 것으로, 1600년 9월에 일어난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쿠로다 칸베에(黑田官兵衛, 죠스이如水)가 큐슈에서 벌인 전투의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NHK 2014년 대하드라마인《군사 칸베에》가 슬슬 마무리를 지어가고 있는 지금, 곧 TV에서 방영될 세키가하라 전투 파트에 앞서서(or 함께) 이 글을 읽어주시면 더욱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 내전의 불씨 - 도요토미 관료제의 함정과 파벌항쟁


십인중十人衆 체제의 붕괴

케이죠 3년(1598) 8월 18일, 극동을 피로 물들인 짧은 여름이 끝났다. 그 날, 두 번에 걸친 조선침략에 좌절하여, 국내외의 인명人命을 자기 허영의 제물로 삼은 타이코太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너무 어린 후계자 히데요리秀賴의 장래에 대한 불안감에 떨며, 도요토미 가문 멸망의 공포에 짓눌리면서 세상을 떴다.

상궤를 벗어난 시의심으로 히데요리의 잠재적 적대자를 매장시켜 온 히데요시는, 건강을 해친 이후로는 정신적 활력을 잃고, 히데요리를 지키기 위한 정치적 판 짜기에 열을 올렸다. 그리하여 완성된 것이, 도자마外樣 제후들을 대표하는 나이다이진內大臣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 다이나곤大納言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 / 츄나곤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 / 츄나곤 우에스기 카게카쓰上杉景勝 / 츄나곤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이상 5명의 다이로大老와, 후다이譜代 제후들을 대표하는 아사노 탄죠쇼히쓰 나가마사淺野彈正小弼長政 / (마에다前田) 토쿠젠인 겐이德善院玄以 / 이시다 지부쇼우 미쓰나리石田治部小輔三成 / 마시타 우에몬노죠 나가모리增田右衛門尉長盛 / 나츠카 오쿠라쇼우 마사이에長束大藏小輔正家 이상 5명의 부교奉行로 이루어진 집단지도체제였다. 중앙집권적 독재로 제후들 위에 군림해 온 히데요시는, 그들 십인중으로 대표되는 제후들 앞에 무릎을 꿇고, 그들의 충성과 온정에 기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십인중에 의해 주도되게 된 도요토미 정권은, 타이코가 유산으로 남긴 지나치게 거대한 부채에 의해, 히데요시의 죽음과 동시에 붕괴하기 시작했다. 다이로 필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히데요리의 훈육자인 마에다 토시이에를 두 개의 정점으로 삼은 집단지도체제는, 결과적으로 5다이로들의 세력균형과, 이를 감시하는 5부교의 조정능력에 모든 것이 걸려있었다.

히데요시가 장기적인 안정적 현상유지를 기대한 집단지도체제는, 복잡하게 얽힌 도요토미 정권의 정치적 대립관계를 2대 파벌로 집약시키고, 그들의 세력균형을 통해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도록 의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톱니바퀴가 잘 굴러갈 때에는 괜찮으나, 한 번 역학관계에 어긋남이 생기고 균열이 일어나면, 복구하는 것은 대단히 힘들었다.

그리고 히데요리가 오사카로 자리를 옮긴 직후인 케이죠 4년(1599) 1월, 그 톱니바퀴는 어긋났다. 정권 중핵에서 커다란 문제가 드러나게 된 것이다. 사건의 중심인물은 다름아닌, 정권의 수반이어야 할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히데요시라는 유일절대의 구심력을 잃은 제후들이, 이중삼중으로 복잡하게 뒤섞인 치열한 파벌항쟁을 격화시키고, 최종적인 해결책을 요구하며 폭주하기 시작한 건,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이에야스는 이 격화해 갈 정쟁에 대비해 자기 파벌을 강화하고 확대하기 위해 노력하여, 타이코의 유명遺命을 거역하고 비밀리에 후다이 제후들의 유력자들과 혼약을 맺은 것이었다.

결국 이 사건은, 연립 정권의 상대자인 마에다 토시이에와의 정치적 타협에 의해 유야무야되었고, 애매한 정치적 결착이 나는 과정 속에서, 정권을 담당한 십인중의 기량과 정치수단에 격차가 있음을 드러냈다. 거기에다 그 직후인 윤 3월에는 토시이에가 죽었기에, 복잡하게 뒤엉킨 정쟁의 최종적 승리자를 가리고 싶어하던 중소 제후들을 이에야스 밑으로 결집시키는 효과가 났다.

이후, 십인중의 주도권 다툼이라는 정권 중핵에서의 항쟁은 급속히 격화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이에야스는 모리 테루모토와 연대하여 마에다 히젠노카미 토시나가(前田肥前守利長, 역주 : 토시이에의 장남)를 굴복시켜, 태반의 후다이 제후에게 지지받는 사실상의 단독정권을 성립시켰다. 이로서 도요토미 정권의 집단 지도체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이러한 이에야스 지지파 제후들 중에서, 가장 일찍 이 대립의 정치적 결착에 넌더리를 느끼고, 최종적 해결수단으로서의 군사력 행사를 각오한 부자父子가 있었다. 과거 코데라(小寺, 쿠로다黑田) 칸베에노죠 요시타카官兵衛尉孝高란 이름으로 알려지고, 도요토미 정권에서는 카게유노스케勘解由次官라는 관직명으로 불리던 죠스이켄 엔세이如水軒円淸와, 그 아들로 부젠 나카즈豊前中津 12만 석을 영유하는 영주, 쿠로다 가이노카미 나가마사黑田甲斐守長政였다.


중요시된 죠스이의 존재

애초부터 도요토미 가문의 후다이 가신단에는, 히데요시가 단기간에 급속히 세력을 불렸기 때문에 충분한 관료집단을 조직할 만한 인적 여력이 없었다. 기껏해야 최하층 호족, 어쩌면 토민土民의 신분에서 기어 올라왔기 때문에, 히데요시는 수족이 되어 가신단을 통괄할 만한 누대의 노신老臣들을 갖지 못했고, 친동생인 다이나곤 히데나가大納言秀長를 제외하면 혼인관계만으로 구성된 일족들一門衆과, 오다 가문織田家에서 단계적으로 배속된 요리키들與力衆, 두각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역시 단계적으로 조직한 근신단近臣團이라는, 그야말로 긁어 모은듯한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코 많다고는 할 수 없는 이들 각각의 구성인원은, 인정사정없는 도태의 파도에 휩쓸려 늘었다 줄었다 하기를 반복했다. 키노시타 토키치로木下藤吉郞 시대는 물론, 하시바 치쿠젠노카미羽柴筑前守라는 이름을 쓰고 있던 때에도 히데요시는 만성적인 인재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만성적인 충만감 결여는, 인재수집에 대한 히데요시의 병적인 탐욕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최초의 표적이 된 자들이, 오다 가문으로부터 맡겨진 요리키들이었다. 키노시타 ~ 하시바 시대에 긁어모은 자들로 이루어져 불안정했던 도요토미 가신단은, 오와리尾張 출신의 아사노 나가마사 / 하치스카 히코우에몬 마사카쓰蜂須賀彦右衛門正勝 / 마에노 쇼우에몬 나가야스前野勝右衛門長康, 미노美濃 출신의 타케나카 한베에 시게하루竹中半兵衛重治, 오미近江 출신의 미코다 한우에몬노쇼 마사하루神子田半右衛門尉正治, 그리고 하리마播磨 출신의 쿠로다 죠스이들, 이런 요리키 무장들에 의해 지탱되어 어쨌든 기능부전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아사노 나가마사 / 하치스카 마사카쓰 / 타케나카 시게하루 세 사람은, 당시 아직 코이치로 나가히데小一郞長秀라는 이름을 쓰던 친동생 히데나가와 함께, 사실상의 효죠슈(評定衆, 역주 : 합의에 의해 중요한 일을 결정짓는 조직)를 형성하고 있었다. 히데요시가 아직 키노시타 토키치로였던 당시 이미 그 가문에는, 도자마 세력에 의존하는 체질이 완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 요리키들이 도자마 취급을 받고 있던 시기는, 텐쇼 10년(1582) 6월에 끝이 난다. 혼노사 정변으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횡사하고, 히데요시의 세력권 확대로 인해 가신단이 비대해지면서, 요리키들은 얼마 안가 후다이譜代가 되었다. 죠스이도 히데요시의 재통일 사업을 도와 군사적으로 중요한 국면에 등장하게 되어, 텐쇼 13년(1585)의 시코쿠四國의 진이나 텐쇼 14년(1586) ~ 텐쇼 15년(1587)에 걸친 큐슈九州의 진에서는 도요토미 정권의 군 감찰관軍目付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전후에는 행정에서도 부교로서도 활약했다.

이러한 죠스이의 공적에 대해서, 히데요시는 그 해 7월 3일, 부젠豊前의 미야코京都 / 츠이키筑城 / 코게上毛 / 시타게下毛 / 나카츠仲津 / 우사(宇佐, 남서부 제외) 6군을 하사했다. 쿠로다 가문은 12만 석의 후다이 제후로서, 키쿠企救 / 타가와田川 2군 6만 석을 영유한 모리 이키노카미 요시나리毛利壹岐守吉成와 함께 큐슈 북쪽 끝이란 전략적 요충지를 위임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쿠로다 가문의 12만 석은, 보통의 12만 석이 아니었다. 쿠로다 / 모리 양 가문의 석고에 우사 군 남서부를 합치면, 부젠 1개 지방 8개 군의 표고 14만 석을 5만 석 가량 초과하게 되는데, 이것은 아마 쿠로다 영지 12만 석이, 옛 영지 4만여 석과의 합계였기 때문으로, 새로이 받은 영지는 7만 석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부젠에서의 켄지檢地는 장대를 도입한 실제 측정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자주신고를 차출하는 것으로 석고가 정해졌다. 모리 영지의 2군이 평균 3만 석이었다고 하기에, 쿠로다 영지의 실제 석고는 거의 18만 석에 달한다는 설도 있는데, 만약 1군 평균 2만 5천 석, 우사 군의 남서부를 1만 석으로 추정해도, 적어도 14만 석 이상이 된다. 에도江戶 초기의 켄지로 인해 부젠의 석고는 23만 1680석으로 늘어났기에, 쿠로다 영지의 추정 실제 석고는 새로운 영지만으로 14~17만 석. 옛 영지와 합치면 18만~20만 석. 죠스이는 표준 석고에서는 산입되지 않은 6만 ~ 9만 석 정도의 역을 지지 않는 영지를 히데요시로부터 부여받게 된 것이다. 이것은 석고로는 대영지라고 할 수 없으나, 은전恩典으로서는 파격적인 대우였다.

표준 석고에 의한 서열도, 하치스카 가문의 17만 7600석에 이어, 이요 5군에 11만 3200석을 받은 후쿠시마 사에몬다유 마사노리福島佐衛門大夫正則 / 와카사 1개 지방과 오미의 옛 영지를 합쳐 11만 2500석이 된 아사노 나가마사를 상회하였다. 제 2세대의 마사노리 / 이시다 미쓰나리 / 가토 카즈에노카미 기요마사加藤主計頭淸正 / 고니시 셋츠노카미 유키나가小西攝津守行長들에 대한 영지 가봉도 20만 석 전후에서 끝난 걸 생각하면, 죠스이는 도요토미 가신단 중에서도 최상위 계층을 형성한 중심의 1인이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통일정권의 완성은, 도요토미 가신단의 인재들을 결핍시키고 고갈시켰다. 특히 지방관료로서 요지에 배치해야 할 10만 석 이상의 가신이 결정적으로 부족하여, 히데요시는 중신들을 일본 각지에 봉하고, 그래도 부족했던지 도자마 제후들에게까지 손을 뻗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수 만석 급의 중앙관료가 십 수 만석 급의 지방관료를 지도하고, 십 수만석 급의 지방관료가 수십 만석 급의 도자마 제후를 통제하게 되는 이상한 구조가 완성되었다.

거기에다 관료의 대다수를 구성한 도요토미 가신단은, 중신들의 단결에 의한 하극상을 경계하는 히데요시 자신이 그렇게 조장한 바도 있어서, 횡적인 결속이 정말로 취약했다. 이시다 미쓰나리를 중심으로 한 중앙관료와, 지방의 전략적 긴요지에 배치된 죠스이와 같은 지방관료와의 사이에서는, 히데요시의 신임을 둘러싸고 다투는 형태의 주도권 싸움이 펼쳐졌고, 군사면에서는 현지 지휘관과 그들을 감찰하는 감찰관들 사이에서의 대립이 현재화되었다.

의사적擬似的으로 단결하고 있던 도요토미 가신단이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구심점을 잃고, 어이없이 분열한 것은, 그 본질적인 취약성에 의한 결과로, 당연한 결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아이즈會津 정벌에 모든 것을 건 쿠로다 부자父子

도요토미 가신단의 분열에 파고들어, 다수파 공작에 성공한 이에야스는, 케이죠 5년(1600) 3월, 작년 겨울에 굴복시킨 마에다 토시나가에 이어, 새로이 다이로大老 하나를 넘어트리려고 했다. 타겟은 케이죠 3년(1598)에 아이즈로 영지를 옮기게 되어, 새 영지에 상주하여 정쟁의 소용돌이로부터 멀어져 있던 우에스기 카게카쓰上杉景勝였다.

이에야스는 카게카쓰가 말을 바꿔가며 오사카로 올라오기를 거절하고 있다는 이유로, 5월에 들어 아이즈 정벌의 호령을 내렸다. 아이즈 정벌의 동원발령에 이에야스와 세 명의 부교는 적지 않은 배려를 했다. 주력군이 될 오우(奧羽, 무츠와 데와. 도호쿠 지방) / 간토關東 / 호쿠리쿠北陸 지방 제후들에게는 100석 당 3~5명을 동원하라는 높은 군역이 부과되었으나, 일본 서부의 영주들 다수에게는 참진을 요구하지 않았고, 참진할 경우에도 지각하는 게 인정되었다.

큐슈의 제후들에 이르러서는, 참진할 경우도 100석 당 반 명이나 2명 정도로, 이에야스 편으로 간주되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같은 경우 영지에서 움직이지도 않았다. 단순히 아이즈까지 가는 거리가 멀다는 이유가 아니라, 조선출병에 의한 피폐, 특히 케이죠의 진(정유재란)에서의 인적 / 경제적 타격이 컸던 일본 서부 영주들에게는,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때 쿠로다 가문이 동원한 병력은, 통설에 의하면 18만 석의 3인 역에 해당하는 5천 400명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치쿠젠 나지마名島 35만 7천 석을 지배하는 츄나곤中納言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의 동원병력이 2인 반 역보다도 약간 적은 8천 명(케이죠 5년 8월 5일자로 사나다 부자真田父子 3명에게 보낸 이시다 미쓰나리 편지에 첨부되어 있는 인원기록에 의한다) 이었던 데 비해, 쿠로다 가문의 군역은 이상할 정도로 높다. 통설이 특별히 기록하고 있듯이, 영지에 최저한의 수비병을 남기고, 자군의 장병들을 죄다 카미카타(上方, 교토 / 오사카 지역)로 올려보낸 것치고는 적지만, 그래도 큐슈에서는 비교할 영주가 없을 정도로 높았던 것이다.

그런데 영지의 수비를 맡은 죠스이는 오사카와 나카즈中津 사이의 중계항인 빈고備後의 토모鞆와 스오 지방의 카미노세키上關에 미리 하야부네早船를 대기시켜 놓았다. 이로써 오사카로부터의 소식은 고작 3일 만에 나카즈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오사카에 머무르고 있던 나가마사도, 아이즈에 내려감에 따라 오사카 저택의 방비를 둘 다 6천 석 녹을 받는 쿠리야마 시로우에몬 토시야스栗山四郞右衛門利安와 모리 타헤에 토모노부母里太兵衛友信에게 맡겼다. 그 자신이 이끄는 군세는, 4488석의 쿠로다 산자에몬노죠 카즈나리黑田三佐衛門尉一成를 제외하면, 고토 마타베에 모토쓰구後藤又兵衛基次 / 케야 몬도 타케히사毛屋主水武久 / 스가 로쿠노스케 타다토시管六之助忠利 등 1천 석 미만의 중견 가신들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다. 영지에는 죠스이의 친동생으로 2천 석을 받는 슈리노스케 토시노리修理助利則와 4천 556석을 받는 즈쇼노스케 나오유키圖書助直之, 6천 석의 이노우에 쿠로우에몬노죠 유키후사井上九郞右衛門尉之房를 남겨놓은 후에 말이다.

오사카의 방비와 본 영지에 가문에서 가장 많은 녹을 받는 세 노신老臣을 집중시켜 놓고, 오사카 <-> 나카즈 간의 정보전달 속도를 최대한으로 높인 배경에는, 죠스이와 나가마사의 어떤 노림수가 숨겨져 있었다.

이에야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죠스이와 나가마사도 역시, 실각하고 본거지인 사와 산성佐和山城으로 물러나 은둔하고 있던 이시다 지부쇼우 미쓰나리가 아이즈 정벌의 틈을 노려 거병할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그들의 상당히 부자연스런 병력배치의 노림수는, 아이즈 정벌로 인해 기민하게 대응할 수 없는 이에야스를 대신하여, 죠스이가 인솔하는 쿠로다 군의 손으로 "소규모 거병" 을 진압하고 논공행상에서 다른 가문을 크게 제친다는 것이었다.

아이즈 정벌에 참가한 쿠로다 군의 규모도, 이 계획에 따라 설정된 최대한의 병력이었다. 영지의 상황이나 가문 내 통제 등의 조건에도 영향을 받았겠지만, 당시 영주들의 영지는 본 영지의 수비병력을 포함하여 100석 당 7인 역 정도까지는 동원할 수 있었다고 보여지며, 경제적 여력만 있다면, 참진을 명령받은 제후들은 자발적으로 규정 이상의 병력을 동원하여 도요토미 정권에 봉공할 수 있었다. 쿠로다 가문의 경우도, 나가마사가 이끄는 주력이 통설로 5천 400명 정도였다고 한다면 영지에는 4인 역 정도의 여력이 남아있게 되고, 죠스이도 마찬가지로 5천 400명 정도의 야전병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는 말이 된다.

이만한 병력이라면, 미쓰나리와 같은 몇 명의 중소 제후가 거병한다 치더라도, 신속히 오사카로 올라간 죠스이가 오사카에 있는 이에야스 파 영주들을 장악하여 조기에 그들을 진압하는 건, 충분히 가능했다. 죠스이와 나가마사가 각자 활약함으로써 쿠로다 가문은 크게 비약할 수 있을 것이다.


◆ 서군 거병 - 쿠로다 부자에게 이용당한 이에야스의 전략


죠스이 지원을 겸하고 있던 나가마사의 뒷공작

그러나 카미카타에 일어난 변고는, 이에야스나 죠스이 / 나가마사의 예상을 완전히 배반하는 것이었다. 이시다 미쓰나리는 일찍부터 그 거취를 의심받았고, 일부에서는 무장봉기의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었으나 실제의 거병은 전략적으로는 지극히 어중간한 시기에, 그러나 상상을 초월한 규모로 실행되었다. 우에스기 영지 주변에 배치되고 있던 군대가 아직 진격조차 개시하지 않았던 7월 17일, 마에다 / 마시타 / 나츠카 세 부교의 연서장連署狀으로《나이후(內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잘못된 점들》이란 문서가 제후들에게 보내진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다이로들의 서명은 없었으나, 모리 테루모토는 이렇게 되기 이전에 오사카로 입성해 있었고, 우키타 히데이에도 오사카로 들어와 오랫동안 군세를 머무르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의 거병인 이상, 세 부교의 이에야스 탄핵이 두 다이로의 가담으로 이어지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모리 / 우키타 두 다이로와 부교들 전체가 거병한 이상, 그들은 도요토미 정권의 정당한 군세가 된다. 그 규모는 미쓰나리와 그와 연관된 자들이 단독으로 거병할 경우보다 적어도 10배에 달하였기에, 마찬가지로 도요토미 정권의 정규군인 아이즈 정벌에 참가한 군대에 대해서도, 자웅을 겨루기 힘든 대군이 될 것은 의심할 수 없었다.

세 노신을 두 명까지 잡아두어 변고가 터졌을 때 대비했다곤 하나, 예상을 아득히 넘은 규모의 서군을 상대론 오사카의 쿠로다 저택에 대기한 병력만으론 저항할 방도가 없다. 쿠리야마 / 모리 두 카로우家老는 그 날 당장 나카즈에 서군 거병을 보고하는 하야부네를 보내고, 동시에 죠스이와 나가마사의 아내를 경호하여 오사카를 탈출했다.

이러한 흉보가 죠스이와 나가마사에게 각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20일 전후의 일이었다. 간토에 있는 나가마사는 19일 단계에서 마시타 나가모리가 이에야스에게 보낸 급보문서의 사본과, 24일이 되어 드디어 후시미에 도착한 18일 시점에서의 거병에 대한 정보에 의해, 큐슈에 있던 죠스이는 20일에 도착한 하야부네의 보고에 의해, 차례대로 서군의 거병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앞에서 서술한 대로, 그들의 예상을 크게 배반한 경악스러운 것이었다. 동서에서의 연대로 제후들을 제치고 이에야스에게 공헌하겠다는 죠스이와 나가마사의 계획은 이 단계에서 수포로 돌아가고, 거기에다 전략을 조기에 바꾸어야 할 시기에 그 둘은 일시적으로 연락이 끊겨, 독자적인 판단으로 행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군 거병의 보고를 알게 된 후의 나가마사의 활약, 특히 정략면에서의 활약은, 이에야스에게 천하를 쥐어 준 최대의 요인으로 여겨질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고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나가마사가 담당한 뒷공작의 대상 -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와, 모리 가문의 중신重臣 킷카와 히로이에吉川廣家 - 가 전술상의 열쇠를 쥘 중요한 존재가 될 거라고, 공작을 개시한 당초에 예측했을 리는 없다. 최종적으로는 결전의 귀추를 결판낸 뒷공작이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결과론에 지나지 않았고, 코뱌야카와 / 킷카와를 내통시키기 위한 나가마사의 심상치 않은 열의는 그러한 결과론만으론 설명되지 않는다.

그리고 실제로, 나가마사가 열의를 보인 배경에는, 단순히 이에야스만을 위해서였던 게 아니라, 그것과는 전혀 별개의 극도로 사적인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할 만한 근거가 있다.

앞에서 서술한 대로, 나가마사는 아이즈 정벌에 적지 않은 군대를 이끌고 참전했으나, 그런 한편으로는 영지에 있는 죠스이도 적지 않은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도요토미 정권 내부의 주도권 다툼에 편승하여 큰 공을 세워, 쿠로다 가문의 비약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아버지와 아들 모두 자기 가문의 존속과 발전을 제 1의 목적으로 삼고 있을 터였고, 만약 그것이 이에야스가 단독으로 실권을 장악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진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결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상황 아래에서 나가마사가 서군의 거병 단계에서 먼저 생각한 것은, 모리 테루모토를 포함한 일본 서부 제후들의 거병이라는 현실, 특히 테루모토가 서군의 총수가 되고 코바야카와 군이 후시미 성 공격 / 포위에 가담해 있는 상황에서 영지를 보전하는 것이었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동쪽으로 모리의 영지, 육지로 이어진 서쪽으론 코바야카와 영지와 경계를 맞대고 있는 쿠로다의 영지는, 동쪽과 서쪽에서 협공당할지도 모르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양 가문이 서군으로서 큐슈에서 군사행동을 일으킨다면, 죠스이가 총동원한 병력에다 로닌郎人들을 모집한다고는 해도, 영지에 남아 있는 병력만으로는 할 수 있는 행동이 제약된다. 아무리 죠스이의 수완이 두 가문의 제장들보다 뛰어나다고는 해도, 히데요시의 선전으로 그 수완이 전설처럼 여겨져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해도, 방어전에 나서는 것이 고작이라는 점은 피할 수 없다.

죠스이가 방어전에만 치중하게 되면, 서군의 거병으로 새로이 드러난 기회는 뻔히 보면서 놓칠 수밖에 없게 된다. 이에야스를 따르고 있는 나가마사로서는 자기 의사대로 병력을 움직일 기회가 없었으나, 이 때 큐슈는 미쓰나리와 연줄이 있는 제후들이 대규모로 오사카로 올라갔기에, 중소 제후들의 영지가 다닥다닥 모여있는 부젠과 분고豊後 지방이 빈 집 상태나 마찬가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출처:《역사군상》쿠로다 칸베에의 세키가하라 (2)

 

 

개전 전야의 큐슈 정세

죠스이가 큐슈를 통괄하는 역할을 부여받은 텐쇼 15년(1587) 당시, 분고豊後 지방과 부젠豊前 우사 군宇佐郡 남서부는, 분고 오토모 가문大友家의 마지막 당주이자, 히데요시로부터 하시바羽柴 성을 쓰는 것을 허락받아 분고 지주豊後侍從로 불리던 사효에노카미 요시무네左兵衛督吉統의 영지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분로쿠 원년(1592)에 큐슈의 다른 제후들과 함께 조선으로 건너간 요시무네는 다음 해인 분로쿠 2년(1593)에 명나라의 반격이 시작되었을 때, 평양에 있던 고니시 셋츠노카미 유키나가를 버리고 도주했다가 영지를 모두 몰수당하고, 오토모 가문은 카이에키改易당하게 되었다.

오토모 가문이 영지를 잃으면서 그 땅의 태반이 도요토미 가문의 직할령이 된 분고는, 미야베 나카츠카사쿄 호우인(宮部中務卿法印, 오미近江 출신의 요리키로 히데요시의 가신이 된 미야베 케이준宮部繼潤) 등의 대관에 의해, 군 단위로 분할지배되었다. 그 후, 그들의 태반이 행정관이나 감찰관으로 조선에 건너가자, 그들에게 은상으로 주어지는 땅이 되어, 행정관 계통의 중소제후가 난립하게 되었다.

분로쿠 2년(1593) 시점에서의 다섯 대관 중, 쿠니사키國東 / 하야미速見 / 히타日田 / 쿠스玖珠 4군을 지배하고 그 중 2만 석을 임시로 급부받던 미야베 케이준을 제외하면, 나머지 4명은 이 때 영지를 하사받았다. 오노 군大野郡 5만 3천 201석의 대관이 된 오타 히다노카미 카즈요시太田飛騨守一吉는 오노 군 내에 1만 석, 나오이리 군直入郡 3만 2980석의 대관이 된 쿠마가이 쿠라노죠 나오모리는 나오이리 군에 3천 석, 오이타 군 5만 7천 929석의 대관 하야카와 슈메 나가마사早川主馬長政는 오이타 군 내에 1만 석을, 카이부 군海部郡 4만 4천 800석의 대관인 카키미 이즈미노카미 카즈나오垣見和泉守一直는 카이부 군 내에 2천석을 각자의 영지로 삼았다.

그들은 분로쿠 3년(1594) 이후 점차적으로 영지를 가봉받아, 오타 카즈요시는 우스키臼杵 3만 5천 석 / 카키미 카즈나오는 토미쿠富來 2만 석 / 하야카와 나가마사는 후나이 2만 석 / 쿠마가이 나오모리는 아키安岐 1만 5천 석의 영주가 된 모양이나, 정확한 수치는 확실히 알 순 없다. 그러나 어찌됐든, 그들 모두의 영지는 결코 많은 것이 아니었다.

이 외에도, 나카가와 히데시게中川秀成 / 모리 타카마사毛利高政 / 모리 시게마사(毛利重政, 키즈키杵築 성주가 되었으나, 1597년 사망. 그 후 호소카와 씨가 입성하였다) / 타케나카 이즈노카미 시게토시竹中伊豆守重利들이 분로쿠 2년(1593) ~ 케이죠 3년(1598) 사이에 입봉하게 되었으나, 나카가와의 영지 6만 6천 석(요리키 영지를 포함하여 7만 석 정도)을 제외하면, 그들 모두가 수만 석 이하 영주에 지나지 않았다.

이시다 미쓰나리의 매부라고도 사위라고도 전해지며, 케이죠 2년(1597) 경에 입봉한 것으로 보이는 후쿠하라 우마노스케 나오타카(福原右馬助直高, 나가타카長堯 / 나가나리長成로도 불림)의 경우에도, 6만 석이라고도 12만 석이라고도 하는 영지의 태반은 지배를 위임받은 도요토미 직할령으로, 거기에다 어중간한 영지 삭감에 의해 영지의 일부가 이동했다고 여겨지기도 하여, 결코 많은 영지를 부여받은 것이라곤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과는 별개로 키즈키 6만 석이 호소카와 엣츄노카미 타다오키細川越中守忠興에게 주어져, 타다오키는 본 영지와 떨어진 영토가 된 이 땅의 접수와 처치를 위해 중신 마쓰이 사도노카미 야스유키松井佐渡守康之를, 성주 대리로 아리요시 시로우에몬노쇼 타츠유키有吉四郞右衛門尉立行를 파견했으나, 그 병력은 1천 명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거론된 여러 영지는, 태반이 얼마 안 되는 수비병력에 의해 지켜지고 있었다.

분고 제후들의 영지는, 일체적인 방어체제는 커녕 실제로는 진영구분조차 확실히 되지 않았고, 영지를 지키는 가신들은 카미카타(上方, 일본 중부 교토 / 오사카 지방)에 머물러 돌아오지도 못하고 있는 주군의 지시가 없는 한, 성을 지키면서 그 때마다 적대세력을 격퇴하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유일하게 진영구분이 명확한 것은, 당주 이하의 주력부대가 아이즈 정벌에 참가하여 그대로 동군에 눌러앉아버린 호소카와 가문 정도이다.

큐슈에서의 대박을 노리던 죠스이와 나가마사에 있어서, 군침을 흘릴 만한 땅이 되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이를 위협할 만한 경합세력 역시 적었다. 고쿠라小倉의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 / 요시마사吉政 부자는 모두 카미카타에 있었고, 후시미 성 공략에 참가한 이후도 서군 주력에 속해 있었다. 모리 가문과 코바야카와 가문은 주력군이 카미카타에 있었던 데다 오랫동안 죠스이가 지도를 하고, 나가마사가 전쟁을 같이 치뤘기 때문에 그 속내를 잘 알고 있었다. 쿠로다 영지에 직접 침공한다면 몰라도, 경쟁상대로서는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았다.

히고肥後는 삿사 나리마사佐佐成政가 입봉 직후 일어난 잇키一揆로 인해 다음 해인 텐쇼 16년(1588)에 인책을 받고 자살한 후, 히토요시人吉 2만 5천 석의 사가라 가문相良家을 제외하면, 고니시 유키나가의 우토宇土 14만 3천석과 가토 기요마사의 쿠마모토熊本 19만 5천 석으로 분할되어 있었다. 이 중 고니시 군은 서군에 가담하여 카미카타에 있었고, 가토 군은 우선 고니시 영지에 대한 대처를 우선해야 했다.


죠스이의 전략전환

이와 같이, 당초의 예정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으나, 쿠로다 가문은 부자가 동서에서 이에야스에게 가담하여 은상을 이중으로 받을 절호의 기회를 맞고 있었다.

그러한 이상, 나가마사에게는 쿠로다 영지 동쪽과 서쪽에 경계를 접하고 있는 강적들을 어떻게 해서든 무력화시킬 필요성이 있었고, 죠스이도 나가마사가 그렇게 하리라고 기대하며, 대치하는 데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고 분고를 평정할 필요가 있었다. 즉 나가마사의 공작은 이에야스에 은혜를 팔기 위한 것임과 동시에, 쿠로다 가문을 둘러싼 전략정세를 조금이나마 유리하게 가져가야 한다는 필요성에 의한 것이었다. 모리 가문의 중신과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를 뒷공작의 상대로 정한 이에야스의 의향은, 그런 나가마사에 있어선 자기 영지를 보전하는 데 있어 바라마지 않던 바였다.

그러나 서군의 지배영역에 의해 분단됨으로써, 죠스이와 나가마사가 서로 연락하여 서로의 의도를 조율할 수단은 일시적으로 상실되었다. 이 단계에서 부자간의 연락이 충분히 이루어졌으리라곤 생각하기 힘들고, 나가마사는 아버지가 자신의 움직임을 예측하여, "이에야스로 하여금 공작 대상들을 쿠로다 가문에 유리하게 유도시키겠다" 고 추측하여 주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가마사는, 이 도박을 놀라울 정도로 완벽하게 성공시켰다. 당초에는 형세를 관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영지의 죠스이도 독자적으로 모리 가문을 농락하는 데 나서, 나가마사와의 연락회복을 기다려 적극책으로 나갈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었다.

죠스이는 7월 하순 단계에서 병력증강을 개시하여, 이에 따라 긁어모은 야전병력은 거의 9천 명에 달했다. 나가마사를 따라 종군한 병력까지 합치면, 부젠 6군에 지나지 않는 영지에서 1만 4천 400명이라는 대동원에 성공한 것이다.

물론 군역 명단에 오른 자들을 한계까지 동원해봐도 이만한 병력은 모이지 않는다. 죠스이는 5천 400명의 정규병에다가, 돈을 마구 뿌려 새로이 등용한 로닌들이나 임시고용한 부정규병사를 3천 600명 정도 긁어모은 것이다. 이 모병비용을 합친 경제적 부담은 보통이 아니었다. 수세 일변도인 상황에서는 본전을 회수하지 못하는 건 물론이며, 공세로 나선다고 해도 어지간히 큰 공을 세울 필요가 있었다.

죠스이의 전략적 방법론은 나가마사의 그것과 표리일체를 이뤘고, 기틀을 하나로 모은 것이었다. 모리와 코바야카와를 무력화시킴으로써 자기 영지의 안전을 확보함과 동시에, 이에야스의 적대진영을 공작으로 무너뜨린다는 사실로 은혜를 팔고, 그 후에 공세로 전환하여 서군 제후의 영지를 제압한다, 는 것이었다. 그리고 8월에는 나가마사와의 통신이 회복되었다 보이는데, 모리 / 코바야카와 양 가문에 대한 공작의 창구는 나가마사에게로 일원화된다.

모리 / 코바야카와 양 가문의 위협이 제거됨으로서, 문자 그대로 서군 제후들로 가득 차 있다는 느낌을 주게 했던 큐슈 동부에서 고립된 섬과 같았던 쿠로다 영지와 호소카와의 비 본토 영지는, 반대로 동군의 공세거점이 되어 서군세력을 붕괴시키는 발판이 되었다. 영지의 분포도를 분류해보면, 여전히 큐슈의 동군은 고립된 소수파에 지나지 않았으나, 부젠과 분고, 치쿠젠 뿐만 아니라 치쿠고筑後나 휴가日向 지방의 서군 제후들 대부분도 스스로 병사를 이끌고 카미카타에 있었기 때문이다.

죠스이는 이들 세력들이 카미카타에서 동군주력과 대치하여, 본거지로 돌아올 수 없게 된 순간을 노려서 치고 나가기 위해 자복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수를 친 건 죠스이가 아니었다. 9월에 들어서자마자, 이번에도 죠스이의 예측을 배반하는 형태로, 북 큐슈의 정세에 이변이 생긴 것이다.

서로 대치하고 있던 상태인 큐슈에서 감연히 일을 일으킨 건, 당시 츄안中庵이라는 호로 불리던 오토모 소겐大友宗嚴. 분로쿠 2년(1593)에 영지를 몰수당하고, 처음에는 모리 가문에 / 다음에는 사타케 가문에 맡겨져 있던 오토모 요시무네大友吉統였다.

가문 재흥을 조건으로 옛 영지 분고의 제압을 요구받아, 처자를 인질로 잡힌 요시무네는 유유낙낙히 이를 따랐다. 반강제적으로 무기와 전쟁비용을 받고 상당한 수의 로닌을 모집하여, 바닷길로 이동을 개시한 것이다.

요시무네가 분고 침공을 시도하려 한다는 건, 하야부네의 활약으로 며칠 만에 죠스이의 귀에 들어갔다. 요시무네가 분고에 상륙하면 오토모 가문의 옛 신하들이 달려와, 그 병력은 더욱 더 팽창될 것이다.

이 요시무네의 잠재적 동원력에 주목한 죠스이는, 단순히 오토모 군의 침공을 저지하는 게 아니라, 아군으로 끌어들여 활용하는 방안을 생각했다. 죠스이는 즉각 설득을 위한 사신을 보냈다. 큐슈의 진(=히데요시 생전의 큐슈 원정)에 선발대로 온 이래, 죠스이는 여러 번 요시무네의 편의를 봐 주었으며, 오토모 가문의 중신들을 지도해 왔다. 분로쿠의 조선출병(임진왜란)에서는 나가마사가 오토모 군까지 아울러 총괄하고 있었고, 쿠로다 가문과 오토모 가문은 오랜 시간에 걸쳐 친밀한 관계에 있었다.

그런 죠스이가 도리를 이야기하여, 오토모 가문 재건의 최량수를 제시한다면, 겁 많은 멍청이로 알려져 있던 요시무네가 납득할 가능성은 높았다. 그리고 표면적인 서군의 우세에 현혹된 요시무네가 주저한다고 해도, 그 가신들은 죠스이의 의도를 이해해 줄 것이다. 죠스이가 수천의 병력과 함께 과거 시마즈 군을 상대로 완강히 저항한 오토모의 옛 신하들을 노고 없이 손에 넣는다면, 분고 제압은 전격적으로 완료될 것이다. 조선출병 최대의 추문을 불러 일으킨 당사자인 요시무네의 동향이, 얄궂게도 죠스이 전략의 중요한 열쇠를 쥐게 되었다.

 

 

▲ 거병 - 큐슈에 일어난 군사적 진공상태 -


이시가키바루 전투

그러나 죠스이의 기대와는 달리, 요시무네는 생각을 바꾸지 않은 채 (9월) 9일 벳푸우라別府浦에 상륙했다.

죠스이의 예상대로, 나카가와 히데시게의 요리키與力가 되어 있었던 타와라 죠닌田原紹忍이나 무나가타 가몬 시게쓰구宗像掃部鎭續 같이 요시무네의 밑으로 달려온 옛 신하들은 모두 요시무네에게 생각을 바꿀 것을 요구했다. 그 중에서도 카미노세키上關에서 우연히 요시무네 일행과 만난 요시히로 카헤에 무네유키吉弘加兵衛統幸는, 몸을 의탁하고 있던 치쿠고 야나가와柳川의 타치바나立花 영지에서 에도로 향하여, 이에야스의 인질로 잡혀 있던 요시무네의 장남 요시노리義乘를 옹립하여 아이즈 정벌에 참가하려고 했었기에 필사적으로 요시무네의 마음을 바꾸려고 했던 듯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출병 당시 분로쿠 2년(1593)의 (황해도) 봉산鳳山 철퇴사건과 마찬가지로, 요시무네는 요시히로 무네유키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타테이시 성立石城을 수축하여 본진을 그 곳에 두고서, 타와라 죠닌들을 호소카와 령 키즈키 성 공략에 파견했다. 이 때 이미 일족과 부하들을 데리고 온 옛 신하들이 분고 각지에서 속속들이 참진하여, 오토모 군의 병력은 이제 3천 명을 상회했다. 여기에 힘입어 요시무네는, 과거의 봉산 철퇴의 실점을 만회하기 위하여, 얄궃지만 이번에도 무네유키의 의견을 물리친 것이다.

한편으로, 오토모 군이 상륙한 때와 같은 9일 아침에 죠스이도 행동을 개시했다. 오토모 측에 어떠한 사정이 있든, 이빨을 들이민 이상 철저하게 때려눕혀야 한다. 빈집과 다름없는 큐슈에서, 서군 최대의 야전병력인 오토모 군을 격파하고 그 위협을 조기에 제거할 수 있다면 분고는 물론이고, 큐슈 정부 전역을 죠스이의 뜻대로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카즈中津를 출진한 죠스이는 다음 날인 10일에 분고로 침입, 타카다 성高田城에 다다랐다. 타케나카 (한베에) 시게하루竹中重治의 사촌에 해당하는 성주 타케나카 시게토시竹中重利는, 오다와라小田原의 진(=히데요시의 간토關東 평정전)에서 히데요시의 호위 기마무사 대장을 맡고, 케이죠의 조선출병(=정유재란) 때는 선봉 감찰관으로 출진한 바 있는 전형적인 도요토미 관료였는데, 아이즈 정벌에 참진하기 위해 오사카로 올라갔다가 그대로 서군에 포섭되어 있었다. 성주의 부재로 거취를 결정하지 못하던 타카다 성은, 대군을 앞에 두자 싸우지 않고 항복하여, 시게토시의 장남 시게쓰구重次가 병사 200명을 이끌고 쿠로다 군에 가담하게 되었다.

이어서 토미쿠富來 / 아키安岐 두 성을 공략하기 위해 동진하던 죠스이는, 아카네 고개赤根峠에 도착한 시점에서 오토모 군이 키즈키 성을 포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성을 포위한 오토모 군은 2천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나, 그들의 절반 이상이 되는 병력을 보유하고서도 호소카와 군은 굳이 성내에 농성해 있었다.

어찌됐든 오토모 군을 무력화시킬 필요가 있는 이상, 죠스이에게는 일전을 벌여 요시무네를 굴복시키든가, 오토모 군을 가루가 될 정도로 공격하여 박살내는 선택지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토모 군이 타테이시 성에 농성해 저항하게 되면, 단기결전을 벌일 가망은 없다. 키즈키 성은 오토모 군을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로서, 가능한 한 계속 저항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만큼 계산했으면서도 죠스이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된 오토모 군의 전의를 오산하고 있었다. 오토모 군은 고작 3일만에 키즈키 성의 니노마루二の丸까지 함락시켜, 호소카와 군의 용장 마쓰이 야스유키를 궁지에 빠뜨렸다.

의외로 건투健鬪하는 오토모 군에 맞서, 죠스이는 병력을 분산시켰다. 4번 부대인 이노우에 쿠로우에몬井上九郞右衛門에게 5번 부대인 노무라 이치우에몬野村市右衛門 / 고토 사몬後藤左門, 6번 부대의 토키에 헤이다유市枝平大夫 / 모리 요헤에母里與兵衛, 7번 부대의 쿠노 지자에몬久野次左衛門 / 소가베 고우에몬曾我部五右衛門 / 이노우에 쿠로베에井上九郞兵衛 / 쿠로다 야스다유黑田安大夫들을 배속시켜, 3천 명 정도의 별동대를 편셩시켜 키즈키로 향하게 한 다음, 토미쿠에는 선봉부대인 모리 타헤에母里太兵衛를 보내 견제하게 하고, 자신은 2번 / 3번 부대와 하타모토 부대를 이끌고 아키로 향한 것이다.

★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중앙의 정세 (1)


 

9월 1일
이에야스, 에도 출발
9월 3일
이에야스, 오다와라 출발.
도쿠가와 히데타다 코모로 도착
9월 6일
이에야스, 스루가 시마다 도착.
히데타다, 사나다 마사유키의 우에다 성 공격 개시.
9월 9일
이에야스, 미카와 오카자키 도착
9월 10일
이에야스, 오와리 아츠다 도착
9월 13일
이에야스, 기후 성 도착



이 대담한 선택은, 병력을 분산하는 게 하책이라는 걸 알고 있는 오토모 군의 제장들을 동요시켰다. 쿠로다 군이 전군을 이끌고 밀어닥칠거라 착각한 오토모 군은, 원군에게 포착되는 것을 피해 신속히 키즈키 성의 공략을 단념하고, 12일에 타테이시로 후퇴했다.

이를 본 쿠로다 군 선봉의 제장들은, 죠스이로부터 자중할 것을 재촉받으며, 섣부른 교전을 금지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즉시 추격할 것을 결단했다. 추격을 주장하는 자가 적지 않았던 데다, 오토모 군을 이대로 돌려보내게 되면 호소카와 군 제장들의 체면이 세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노우에도 결국 추격을 강행하기로 마음먹고, 호소카와 군 1천 명을 가세시킨 쿠로다 군은, 오토모 군을 쫓아 타테이시로 향했다.

이 폭주에 대한 보고는, 그 날 일몰 전에 죠스이의 귀에 들어갔던 듯 하다. 이노우에들이 오토모 군을 쫓아 남하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죠스이는, 아키 성을 내버려두고 전장으로 급행했다. 13일, 죠스이로부터 후미 부대로 임명된 쿠리야마 시로우에몬이 쿠로다 군을 추격하기 위해 성에서 출격한 쿠마가이 군을 분쇄했다. 그러나 죠스이는 이 때 이미 키즈키를 향해 출발한 후라, 아키 성을 공략할 기회는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그 정도로 서둘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죠스이는 제 때 도착하지 못했다. 13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죠스이와 그 주력군이 없다는 것을 눈치챈 오토모 군이, 거의 비슷한 숫자인 이노우에 별동대를 격파하기 위해, 타테이시 성에서 치고 나간 것이다.

조선 출병 이래, 겁 많고 무능하다는 평판이 퍼진 요시무네였지만, 물러날 길이 없는 상황도 한 몫하여 이 날 아침에는 상당히 분위기가 달랐다. 총합 4천 명 정도의 병력을 앞뒤 3열로 배치하고, 본진을 타테이시 마을 밖까지 진격시켜 지츠죠지 산實上寺山에 진을 친 쿠로다 / 호소카와 군에 대항하여, 선진과 제 2진을 타테이시 교외에 있는 이시가키바루까지 진격시켰다.

이시가키바루는 거대한 화산탄이 산재해 있는 황야로, 중앙 부근에는 그 이름대로 동서 6정(대략 650m)에 걸쳐 높이 1장(약 3m) 정도의 화산탄이 마치 이시가키(石垣, 돌담)와 같이 열을 지어 늘어서 있었다. 정말로 대군의 진퇴에는 어울리지 않는 지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험준한 지형은, "이시가키" 를 선점할 수만 있다면, 병력적으로 불리하고, 유력한 지원부대도 없는 오토모 군에게는 바라 마지않는 견고한 진채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승산이, 평소와는 다르게 요시무네를 적극적으로 과감하게 만들었다.

이 때 오토모 군의 선봉이 된 요시히로 무네유키와 무나가타 시게쓰구는 "이시가키" 를 확보하지 않으면 아군은 반드시 패배한다고 생각하고, 죽음을 각오하여 필사적으로 전진했다. 쿠로다 군 쪽에서도 선봉인 토키사카 / 모리 / 쿠노 / 소가베 들이 "이시가키" 를 탈취하기 위해 남하했기 때문에, 전투가 개시되자마자 양군이 어우러진 대난전이 펼쳐졌다.

노회한 오토모 군의 사무라이 대장들에 비해, 죠스이의 지휘가 닿지 않는 쿠로다 군은, 제장들의 연계가 미흡했다. 선봉만으로 2천 명을 상회하는 병력을 갖고서도, 좌우 양익을 통해 오토모 군을 옥죄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돌출했다가 허점을 찔려, "이시가키" 남쪽에 남겨져 있던 쿠노 지자에몬 / 소가베 고로우에몬이 차례대로 전사했다.

전투는 용이하게 결착이 나지 않고, 일몰에 이르기까지 오래도록 이어졌으나, 요시히로 무네유키가 이노우에 쿠로우에몬과의 일기토에서 중상을 입게 되자, 오토모 군의 선봉은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패주하는 오토모 군을 추격한 쿠로다 군은, 무나가타 시게쓰구를 포함한 장병 500여 명의 목을 베었다. 그러나 추격은 오래 가지 못했다. 병력을 모두 사용하고, 전 부대가 모두 소진되어 있었기에 쿠로다 군은 일몰과 동시에 지츠죠지 산까지 후퇴한 것이었다.

이 때 요시무네는, 아직 수중에 하타모토(旗本, 친위대) 부대와 후미부대를 남겨놓고 있었다. 요시무네가 이들을 투입했다면 전세를 역전시키지 못할 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죠스이와 그 주력이 어디 있는지를 확인할 수 없었기에 예비병력의 투입을 주저하다, 결국 요시무네는 승기를 놓치고 말았다. 말하자면 죠스이의 그림자에 위협받아 패한 것과 같았다.

죠스이가 이 승전보를 받은 것은, 전장에서 2리 정도 떨어진 히지日出를 통과한 직후의 일이었다. 케이죠 5년(1600)의 동란 중 큐슈에서 벌어진 유일한 야외결전에, 죠스이는 적을 보지도 않고 승리를 거둔 것이다.


★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중앙의 정세 (2)


 

9월 14일
이에야스, 아카사카 도착.
쿠이세 강 전초전에서 서군 승리.
9월 15일
세키가하라에서 양군 격돌. 동군 승리.
9월 16일
이에야스, 사와 산성 공략을 개시.
9월 17일
사와 산성 함락되다
9월 19일
이에야스, 쿠사즈 도착.
고니시 유키나가 생포되다
9월 21일
이시다 미쓰나리, 생포되다
9월 24일
모리 테루모토, 오사카 성 퇴거
9월 27일
이에야스, 오사카 성 입성
10월 1일
이시다 미쓰나리, 고니시 유키나가들 처형되다
10월 10일
이에야스, 모리 가문과 화해



 

출처:《역사군상》쿠로다 칸베에의 세키가하라 (4)

 

 

 북 큐슈 평정되다

죠스이가 드디어 지츠죠지 산實上寺山에 도착했을 무렵, 승기를 완전히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요시무네와 오토모 군은 여전히 타테이시 성에 농성해 있었다. 이는 배후에 토미쿠富來 / 아키安岐 등을 적대세력으로 두고 있는 죠스이에 있어서 상당히 성가신 사태였다.

쿠로다 군의 사상자는 수적으론 그리 많지 않았으나, 이는 급히 병사로 동원된 자들이 전장에서 재빨리 도주하였기 때문이지, 전장에 머물러 싸움의 중핵을 이룬 쿠로다 가신단의 타격은 결코 적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쉽게 보충할 수 없는 장성將官급의 가신을 잃은 것은 치명적으로, 죠스이는 더욱 더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인 14일, 죠스이는 모리 타헤에를 요시무네에게 사자로 보내어, 항복권고를 했다. 무리하게 공격하여 손해를 늘리는 것을 두려워했기도 했고, 항복한 성의 병사들을 가담시켜 손실을 메우려 하는 의도도 있었다.

이 책략은 맞아 떨어져, 요시무네는 죠스이의 진에 타와라 죠닌을 파견하여 항복했다. 요시무네와 그 측근 몇 명은 나카즈로 호송되었고, 배하의 장병들은 그대로 쿠로다 군에 편입되었다. 최대의 위협을 제거한 죠스이는 병사를 쿠니사키國東 반도로 돌려 아키 성을 포위했다. 여기에서도 죠스이는 우선 성을 포위하고 위협한 후,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조건으로 항복을 권고하여, 포위한지 3일만에 성문을 열게 했다.

그러나 토미쿠 성의 경우는 그 수가 통하지 않았다. 성내에서는 일치단결하여 부재중인 당주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 것이다. 죠스이는 전원의 목숨을 살려주는 것을 조건으로 교섭했으나, 성 병사들의 저항은 10일간 계속되었고, 성주 카키미 카즈나오垣見一直가 전사한 것이 성내에 알려진 이후에야 성문을 열었다.

그렇지만, 목숨을 살려주는 조건으로 참진을 요구하는 죠스이의 공작은 대단히 호평을 얻었고, 항복한 성의 장병들 태반은 쿠로다 군에 가담했다. 죠스이의 기세는 멈출 줄을 몰랐고, 여기에다 "세키가하라에서 이에야스가 이겼다." 는 소식이 전해지자, 쿠로다 군은 갈수록 그 병력이 증대되어, 서군에 가담한 분고의 제후들은 줄을 이어 죠스이의 군문에 항복했다.

그러던 중에, 우스키 성에 농성한 오타 카즈요시太田一吉의 저항은 예외적으로 격렬했다.

카즈요시는 니와 에치젠노카미 나가히데丹羽越前守長秀 / 니와 카가노카미 나가시게丹羽加賀守長重 부자父子의 가신이었으나, 나가히데가 죽은 후인 텐쇼 13년(1585)에 집안소동이 터진 니와 가문이 감봉당했을 때 히데요시의 직속 신하가 되어, 그 이후로 각지를 전전하며 부교奉行나 대관으로 발탁된 유능한 무사로 도요토미 관료 중에서도 군사관료적인 성격이 강했다. 조선 출병에서도 여러 차례 조선으로 건너간 바 있으며, 동서 어느 쪽의 진영에서도 출진을 요청받지 않았던 건 아마도 케이죠 2년(1597)의 울산성 농성전에서 입은 부상이 원인이라 생각된다.

그러하였기에, 카즈요시의 저항에는 죠스이도 고전하게 되었다. 9월 15일에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 주력이 대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이후에도 저항을 포기하지 않고 농성하다가, 10월 4일에 드디어 힘이 다해 항복하기까지 거의 반 달 이상이나 버텨낸 것이다.

그러는 동안, 죠스이는 패배한 서군 제장들이 오사카 농성을 단념하게 영지로 돌아올 가능성에 대비해, 분고 앞바다에 수군을 배치하는 한편으로, 큐슈 동해안 각지의 동군 쪽 성들과 복속해 들어온 서군 쪽의 성에 경계할 것을 명령했다. 쿠로다 나가마사가 킷카와 히로이에를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건 이미 죠스이도 알고 있었고, 히로이에가 찬성하지 않으면 모리 군이 오사카에 농성할 가능성은 한없이 낮아지게 된다. 필연적으로 서군에 가담한 큐슈의 제후들은 영지로 돌아오려고 할 것이고, 그들 영지에서의 항전을 저지하기 위해선, 그들이 돌아오는 그 자체를 저지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죠스이가 동원할 수 있는 수군력은 별 볼일 없는 정도로, 정보의 유입은 차단하는 정도라면 가능할지 몰라도, 서군 제후가 제대로 된 병력으로 돌파하려고 한다면, 이를 완전히 저지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해상에서의 요격은 약한 적에 대해서만 유효했고, 강적에 대해서는 일단 상륙시킨 후, 육로로 영지에 도망쳐 들어가는 도중에 포착섬멸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죠스이는 거의 무상無傷에 가까운 타치바나 군의 통과를 방관해야만 했다. 시마즈 군에 대해서는 분고 모리에森江에서 그들을 습격한 군선이 이쥬인 히사토모伊集院久朝 이하 38명의 목을 베었으나, 육상에서도 시마즈 군은 봉쇄선을 우회하고 빠져나가 버렸다. 결국, 죠스이의 경계망은 가장 경계해야 할 시마즈 가문이나 타치바나 가문에 대해선 전혀 기능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큐슈의 전황은 동군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추이가 계속되었다. 분고 평정을 9월 말쯤에 거의 완료한 죠스이는 10월 4일에 부젠으로 돌아가, 우선 모리의 영지인 카와라다케 성香春嶽城을 포위하여 항복시키고, 그 병사들을 앞장세워 고쿠라小倉로 밀고 들어가, 성문을 열게 했다. 카와라다케 성 포위 ~ 고쿠라 개성開城까지 10일이 걸렸다는 사실을 보면, 이에야스의 승리를 알게 된 죠스이가 보다 더 신중해진 것은 틀림없다.

죠스이는 오토모 요시무네를 붙잡은 시점에서 토도 타카토라藤堂高虎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는데, 그러는 김에 "큐슈는 정복하는 대로 영지로 주겠다" 는 것을 확인받고, 거기에다 자신과 나가마사의 공적을 개별로 평가해 달라고 이에야스에게 요청해 줄 것을 의뢰했다. 그리고 죠스이의 활약에 대해서, 이에야스 쪽에서도 온갖 포상을 줄 것을 암시하는 서신이 보내져 왔다.

그러나 죠스이는, 이것들이 공수표가 될 것이라는 걸 예감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에야스가 승리하면서, 성주가 서군으로 출정한 성 대부분은, 놔 두어도 알아서 항복하리라는 게 자명했기 때문이다. 죠스이가 멋대로 큐슈를 평정하는 걸 인정하게 되면, 카미카타에서 서군 영주들을 격파한 제장들에게 줄 영지가 부족해진다. 죠스이는 거기까지 내다보고, 말하자면 접수대행자의 수수료벌이 정도로 생각하였기에 극력 손해를 피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 후에도 죠스이는 큐슈 각지에서 싸워나갔다. 치쿠젠 아키즈키秋月를 경유하여 북방에서 치쿠고 지방으로 들어가, 모리 히데카네毛利秀包의 쿠루메 성久留米城을 항복시키고, 이어서 오즈大津에서 도망쳐 돌아온 타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의 야나가와 성柳川城을 포위하여 항복을 권고했다. 둘 다 피를 흘리지 않고 성문을 열게 한 것이었다. 10월 하순에는 치쿠고 평정이 완료되었고, 휴가日向의 이토 가문은 죠스이의 지도에 따라 아키즈키 가문의 지성支城인 미야자키 성宮崎城을 제압했다.

큐슈에서 서군에 가담한 제후는, 11월이 되면 시마즈 가문만을 남겨놓았을 뿐이었으나, 그 시마즈 가문도 동군을 맞아 싸울 상태는 되어 있지 않았다. 키리시마霧島를 넘어 영내로 도망쳐 들어온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주종 80여 명은, 10월 3일 초라한 몰골로 오오스미大隅 토미쿠마 성富隅城에 도착했으나, 요시히로의 직할 군세가 받은 타격은 단기간에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심대했다.

주력결저에 참가하여, 세키가하라로부터 퇴각하는 도중에 전멸한 시마즈 군은 병력 자체는 1천 명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그 중에는 요시히로의 중신과,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 / 요시히로의 조카(막내동생 이에히사家久의 아들)로 휴가 사토하라 2만 8천 석을 영유하던 시마즈 토요히사島津豊久 등, 시마즈 가문의 중핵이 되는 무장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태반은 전사하고, 나머지 제장들 다수도 요시히로와 흩어져 도피행을 계속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요시히로 직할군은 야전병력으로 기능할 수 없다. 한 쪽 날개를 꺾인 것과 마찬가지인 시마즈 가문으로선, 죠스이들의 공격을 막아낼 만한 여력은 이미 남아있지 않았다.

카미카타에서의 주력결전에 말려든 후쿠하라 / 쿠마가이 / 카키미들은, 서군 주력이 세키가하라로 전진轉進하였다가 패배한 이후에도 오가키 성大垣城에 농성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18일, 동군과 내통한 사가라上良 / 아키즈키 / 타카하시高橋 등의 제장들에게 습격받아, 쿠마가이와 카키미는 그 자리에서 살해당했다. 살아남아 항복한 후쿠하라 나오타카福原直高도, 이세 아사쿠마朝熊에 유폐된 후, 10월 2일에 자살했다. 영주를 잃은 그들의 영지는 깡그리 몰수당했다.

단고丹後 타나베 성田邊城 공격에 참가했던 하야카와 나가마사도 영지를 몰수당했으나 목숨은 건졌다.

죠스이에게 항복한 오타 카즈요시도 목숨을 건졌다. 우스키의 오타 가문은 종시 큐슈에서 싸우고, 그리고 처분당한 유일한 가문이 되었으나, 죠스이는 이 드센 무사武辺者에 상당히 감복한 듯, 중재를 서서 영지 몰수만으로 끝나게 해 주었다.

최종적으로, 부젠에서는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와 그 자제들 전원이, 분고에서는 오타 / 후쿠하라 / 하야카와 / 쿠마가이 / 카키미 다섯 가문이 카이에키(改易, 영지를 몰수당함) 당했다. 11월이 된지 얼마 안 되어, 이에야스로부터 정전을 명령받은 큐슈의 동군제후들 모두가 작전행동을 중지한 시점에선, 이들 여섯 가문의 영지를 포함한 부젠 / 분고 두 지방과 치쿠코 지방 절반이 모두 죠스이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들은 죠스이 개인의 공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세키가하라 결전 이전, 즉 9월 15일 이전에 죠스이가 함락시킨 성은 분고 타카다 성 뿐이었기 때문이다. 죠스이가 요구하고 요구한 조건들은, 결국 완전히 무시당한 것이다.

한편, (쿠로다) 나가마사의 수수하고 견실한 정략은 세키가하라의 주력결전의 승패를 좌우하게 된 엄청나게 화려한 결과를 낳았기에, 대단히 높은 평가를 받았다.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는 일군의 장으로서, 결전장에서도 바로 정면에 있는 이시다 군을 무너뜨리기 위한 전술을 위해 온갖 지혜를 짜내기도 했으나, 나가마사가 치쿠젠 나지마名島 52만 3천 석으로 영전한 건, 사실상 이 뒷공작(역주 : 코바야카와 히데아키 / 킷카와 히로이에를 동군으로 배반시킴)에 의해 확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가봉폭은 도쿠가와 일족들을 제외한 동군 제후들 중에서 3등인 34만 석에 달하여, 쿠로다 가문은 도요토미 가문 후다이 제후들의 최상층부를 점하던 20만 석 전후의 중견영주에서, 도쿠가와 일족들을 제외하면 전국에서 다섯 번째로 큰, 당당한 대영주로 비약한 것이다.

▲ 세키가하라 전투 후 주요 영주들의 석고 증감


 

영주
세키가하라 이전
세키가하라 이후
가봉량
증감폭
유우키 히데야스
10만 1천 석
67만 석56만 9천석
▲▲▲
가모 히데유키
18만 석
60만 석42만 석
▲▲▲
마쓰다이라 타다요시
10만 석
52만 석42만 석
▲▲▲
이케다 테루마사
15만 2천 석
52만 석36만 8천 석
▲▲▲
마에다 토시나가
83만 5천 석
119만 5천 석36만 석
▲▲▲
쿠로다 나가마사
18만 석
52만 3천 석34만 3천 석
▲▲▲
모가미 요시아키
24만 석
57만 석33만 석
▲▲▲
후쿠시마 마사노리
20만 석
49만 8천 석29만 8천 석
▲▲▲
가토 기요마사
25만 석
51만 5천 석26만 5천 석
▲▲▲
다나카 요시마사
10만 석
32만 5천 석22만 5천 석
▲▲▲
호소카와 타다오키
18만 석
39만 9천 석21만 9천 석
▲▲▲
아사노 요시나가
16만 석
37만 6천 석21만 6천 석
▲▲▲
코바야카와 히데아키
35만 7천 석
51만 석15만 3천 석
▲▲
야마노우치 카즈토요
6만 9천 석
20만 2천 석13만 3천석
▲▲
토도 타카토라
8만 석
20만 석12만 석
▲▲
다케다 노부요시
4만 석
15만 석11만 석
▲▲
이코마 카즈마사
6만 5천 석
17만 1천 석10만 6천 석
▲▲
가토 요시아키
10만 석
20만 석10만 석
▲▲
오쿠다이라 노부마사
2만 석
10만 석8만 석

호리오 타다우지
17만 석
24만 석7만 석

테라자와 히로타카
8만 석
12만 석4만 석

나카무라 타다카즈
14만 5천 석
17만 5천 석3만 석

사토미 요시야스
9만 석
12만 석3만 석

쿄코쿠 타카토모
10만 석
12만 3천 석2만 3천 석

다테 마사무네
58만 5천 석
60만 5천 석2만 석

하치스카 요시시게
17만 7천 석
18만 7천 석1만 석

쓰쓰이 사다쓰구
20만 석
20만 석

호리 히데하루
30만 석
30만 석

시마즈 요시히로
56만 석
56만 석

모리 테루모토
120만 5천 석
36만 9천 석- 83만 6천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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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스기 카게카쓰
120만 석
30만 석- 90만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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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 결과는, 죠스이에게 반드시 불만족스런 결과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 해 큐슈에서 벌어진 일련의 전투에서, 도요토미 형 군사관료제도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이자 그 선구자이기도 한 죠스이는, 정략에서 전술에 이르기까지 충분히 솜씨를 짜내어 그가 가진 기술을 집대성해 유감없이 발휘했다. 스스로의 군역軍歷과 도요토미 정권의 대미를 스스로 자작하고 스스로 연기하여 장식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