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 독일군의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 봉쇄 당시 번화가인 네프스키대로 주변에서 쓰러져 죽은 시체들을 수습하고 있다. '알려지지 않는 레닌그라드 봉쇄, 1941~1944'(림부스 출판사 2002년)에서 발췌
1941년 12월 28일 새벽 12시 30분에 제냐 언니가 죽었어요.
1942년 1월 25일 낮 3시에 할머니가 죽었어요.
1942년 3월 17일 아침 5시에 레카 오빠가 죽었어요.
1942년 4월 13일 밤 2시에 바샤 아저씨가 죽었어요.
1942년 5월 10일 낮 4시에 레샤 아저씨가 죽었어요.
1942년 5월 13일 아침 7시 30분에 엄마가 죽었어요.
사비체프 집안 사람들이 죽었어요. 모두 죽었어요. 타냐만 남았네요.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란 옛이름을 되찾은 러시아 제2의 도시 레닌그라드에 살던 타냐 사비체바란 이름의 열 살 갓 넘은 소녀가 일기장에 남긴 글이다. 이 어린아이가 공포 영화를 생각나게 하는 이 섬뜩한 글을 써야 했던 상황을 이해하려면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처참한 사건이었던 레닌그라드 봉쇄를 알아야 한다.
1941년 6월 22일 새벽 소비에트 연방을 기습 공격한 독일군은 붉은 군대를 잇달아 격파하며 거칠 것 없이 전진했다. 히틀러는 소련을 공격하는 독일군을 북부집단군, 중앙집단군, 남부집단군으로 나누었는데, 이 세 대부대의 최종 목표는 각각 레닌그라드, 모스크바, 키예프였다. 빌헬름 폰 레프 장군이 이끄는 50만 병력의 북부집단군은 18일만에 무려 600킬로미터를 전진했고, 여름이 끝날 무렵에는 선봉 부대가 목표인 레닌그라드의 도심에서 겨우 10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다가섰다. 기습 공격에 나선 지 79일째인 9월 8일에 독일의 북부집단군은 레닌그라드를 에워쌌다. 이른바 ‘레닌그라드 봉쇄’가 시작됐다.
레닌그라드를 포위한 독일군은 섣불리 도시 안으로 들어서지 않았다. 정규군은 물론이고 총을 들 수 있는 레닌그라드 젊은이를 모조리 동원해서 결사 방어에 나선 소련군을 상대로 시가전을 벌인다면 승리야 하겠지만 독일군도 감당하기 어려운 피해를 입을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레닌그라드는 지상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그리고 “민간인 생명을 구하는 데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고 선언하면서 인구 330만의 거대도시 레닌그라드를 점령하지 않고 굶겨 죽이기로 작정했다. 독일군은 도시를 포위해서 물자 반입을 철저히 틀어막고 맹렬한 포격과 폭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워낙 짧은 시간에 포위되는 바람에 봉쇄에 미처 대비하지 못한 레닌그라드에는 식량이 턱없이 모자랐다. 더구나 도시의 대형 식량창고가 공습으로 잿더미가 되면서 그나마 있던 비축 식량도 사라졌다.
적과 사투를 벌이는 붉은 군대 군인과 공장에서 무기를 생산하는 육체 노동자에게 줄 식량도 바닥을 드러내는 판에 일반 시민에게 줄 빵은 없었다. 혹독하기 그지없는 겨울이 다가오는 가운데 식량 위기는 나날이 깊어갔다. 식량 비축분은 이미 11월 1일에 7일치로 떨어졌고, 어떤 때에는 하루치밖에 남지 않았다. 철저한 배급제가 실시되었다. 원칙은 간단했다. ‘방어에 유용한 일을 하는 이는 먹이고 그렇지 않은 이는 먹이지 않는다.’
1941~42년 겨울에 가장 심할 때에는 빵 125g이 레닌그라드 일반시민의 하루 배급량이었다. 식빵 세 조각으로 하루를 버텨야 했다는 뜻이다. 배고픈 시민들은 새나 고양이를 잡아먹고 가죽 구두와 허리띠를 삶아먹는 것은 물론이고 도배 벽지 뒤에 붙은 풀을 긁어내어 수프를 끓이기도 했다. 온도계의 수은주가 0 아래로 떨어져 영하 30도에 다가서는 혹한을 뚫고 식량 배급소에 가다가 쓰러져 거리에서 그대로 숨을 거두는 이가 속출했다. 배급량이 30g만 늘어도 시민들은 기뻐서 눈물을 흘렸다. 굶주림에 견디다 못한 나머지 이성을 잃고 죽은 사람의 살덩이를 찾아 다니는 자들을 단속하는 부대가 따로 편성될 만큼 사태는 심각했다.
굶주리고 추위에 지쳐 기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사망률은 나날이 치솟았다. 하루에 1,000명이 숨지는 일이 드물지 않았고, 1일 사망자 수가 5,000명에 이를 때도 있었다. 행정이 마비된 상황에서 정확한 통계 수치를 산출하기가 불가능했고, 이 해 겨울에만 100만 명을 웃도는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고 추산된다. 어린 타냐만 남겨놓고 하나하나 쓰러져 죽어간 사비체프 집안 식구도 이들 가운데 일부일 따름이다
이런 피해를 무릅쓰고라도 레닌그라드는 지켜내야 했다. 레닌그라드 시민이 만약 희생을 감당하지 못하고 항복한다면 독일의 북부집단군이 이때 팽팽한 결전이 벌어지던 모스크바 전선에 고스란히 투입될 것이고, 그 결과로 모스크바가 독일 손에 들어간다면 소련은 그대로 무너질 터였다. 더구나 레닌그라드는 소련 해군 발트해 함대의 거점이자 소련 공업생산량의 10분의 1을 차지하는 군수공업의 요충일 뿐만 아니라 소비에트 연방의 기원인 러시아 10월혁명의 요람이며 볼셰비키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의 이름이 붙은 도시였다. 레닌그라드의 상실은 물리적 측면과 더불어 심리적 측면에서도 헤어나기 힘든 충격을 소련에게 안겨주어 항전 의지를 꺾었을 것이다.
레닌그라드 시 당국은 어떻게든 활로를 찾아야 했다. 그 활로는 시 외곽의 동북부에 있는 거대한 라도가 호수였다. 극지방에서 휘몰아치는 겨울 바람에 호수 표면이 얼어붙었다. 얼음 두께가 20센티미터가 되면 짐을 가득 실은 화물차가 지나갈 수 있게 된다. 시 당국은 라도가 호수 얼음 위에 30킬로미터의 길을 냈고, 이 경로를 이용해서 11월 20일부터 시민을 먹여 살릴 식량을 들여왔다. 독일군 항공기가 폭탄을 떨어뜨려 얼음을 깨뜨려도 몇 시간이 지나면 호수 표면은 다시 꽁꽁 얼어붙었다. 한겨울에 얼음 두께가 1미터에 이르자 화물차 수백 대가 한꺼번에 오갈 수 있게 되었다. 식량을 실은 트럭들이 분주히 레닌그라드로 들어왔고, 적재함에 어린이와 병약자를 싣고 돌아갔다. 이 길이 바로 그 ‘얼음 길’ 또는 ‘생명의 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죽음의 길’이기도 했다. 독일군의 공습으로, 아니면 얼음이 얇아 깨지는 바람에 호수 밑으로 빠져버린 화물차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닌그라드 민관군의 결사 항전은 라도가 호수의 얼음 덕분에, 그리고 목숨을 걸고 그 위를 오간 용감한 운전기사들 덕택에 유지될 수 있었다.
1941년 9월 8일에 시작된 레닌그라드 봉쇄는 1944년 1월 27일까지 872일 동안 지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레닌그라드의 시민과 군인은 상상을 뛰어넘는 고통을 이겨내야 했다. 굶주리고 추위에 떨면서도 시민들은 각기 맡은 일을 해내서 도시의 기능을 유지하고 수비 부대를 도왔다. 소련이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도 소방대원으로 활동했다. 독일군의 포성이 들리는 가운데 그가 악상을 얻어 지은 7번 교향곡 ‘레닌그라드’는 라디오를 통해 항전 의지를 돋웠다. 뼈만 앙상히 남은 레닌그라드 교향악단 단원들은 무료 연주회를 열어 시민과 군인의 지친 심신을 달래주었다. 농업연구소의 연구원은 굶어 죽어가면서도 연구용 곡물 종자를 지켜냈다.
1917년 10월 25일에 볼셰비키 지지 세력의 겨울궁전 점령 작전의 신호가 되는 공포탄을 쏘아 10월혁명의 상징이 되었고 레닌그라드 도심을 지나는 네바 강에 영구정박한 순양함 아브로라 호에서 떼어낸 함포를 사용해서 독일군과 맞설 만큼 레닌그라드 전선의 붉은 군대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 독일군과 싸웠다. 독일군은 레닌그라드 방어부대가 제대로 응사하지 못하도록 러시아인 노인과 아녀자를 총알받이로 앞세우고 전진하기까지 했다. 이토록 무자비한 독일군 부대에 맞서 붉은 군대 병사들은 눈물을 머금고 소총 방아쇠를 당길 수밖에 없었다. 봉쇄 기간 동안 죽거나 사로잡히거나 실종된 붉은 군대 군인이 100만명을 넘었다. 부상자 수는 250만 명에 이르렀다. 여기에 민간인 사상자까지 보태면, 총 사상자 수가 무려 400만 명을 웃돌게 된다.
함께 지내던 가족을 모두 잃은 레닌그라드의 소녀 타냐의 운명도 눈물을 자아낸다. 혼자 남은 막내 타냐는 1942년 8월에 다른 아이 139명과 더불어 레닌그라드에서 소개되어 안전한 도시로 옮겨졌지만, 이듬해 여름에 병으로 눈을 감았다. 시집간 타냐의 큰언니가 레닌그라드 봉쇄가 풀린 뒤에 친정에 들러 가족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죽은 어머니의 웨딩드레스 상자에서 타냐의 일기장을 발견했다. ‘900일의 레닌그라드 봉쇄’에서 벌어진 비극의 한 단면을 알려주는 그 일기장은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 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지금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가면 도심 한복판에서 ‘영웅 도시 레닌그라드’라고 씌어있는 커다란 표지판을 볼 수 있다. 소련 시절에 워낙 남용되어 가치가 떨어진 낱말이 영웅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 시기의 레닌그라드를 떠올리면 영웅 칭호가 조금도 아깝지 않다. 레닌그라드가 만약 무릎을 꿇었다면 오늘날 유라시아 대륙의 패권자는 독일 나치즘과 독일의 동맹국 일본의 군국주의였을지 모를 일이다. 20세기 현대사의 흐름은 레닌그라드가 발휘한 불굴의 의지로 말미암아 바뀐 셈이다.
류한수 (상명대, 유럽 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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