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개/2차대전 아시아 & 태평양전선

도라 도라 도라 (Tora! Tora! Tora!, 1970) 평점 7.5

슐츠105 2011. 9. 28. 17:20

드라마, 전쟁 | 미국 , 일본 | 144분 
감독 리처드 플레이셔, 마스다 토시오, 후카사쿠 킨지 
출연 마틴 발삼, 조셉 코튼, 미하시 타츠유
 

줄거리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아침, 미합중국 태평양 함대는 일본군의 공격으로 그 일부가 파괴되었다. 일본군의 이 공격으로 미국은 제2차 대전에 참전하게 되었고, 본 영화에 묘사된 사건과 인물은 모두 역사적 사실에 충실한 것이다.}

  독일, 일본, 이태리의 3국 동맹계약이 이루어지자, 일본 군부는 미 함대들이 모여있는 핵심요지, 진주만의 기습 공습을 결정한다. 그러나 이 극비의 공습작전은 항공모함을 통해 공격이 아니라, 전투기들을 동원한 극비의 침투작전, 여러 차례 거듭되는 비행사들의 훈련을 통해 진주만 기습작전을 빈틈없이 꾸민 일본 전투기들은 마침내 진주만을 향한다. 한편, 이를 까맣게 모르는 진주만의 미국 사령관은 전투기들과 항공모함들을 공습받기 쉽게 한곳에 모아 배치해 놓고, 방심한 채 휴일을 보내려 한다. 그러나 일본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주시하던 미 정보부에서는 일본대사관에 도착하는 비밀암호를 해독하여 일본의 전쟁 위협을 경고하지만 상부에서는 이를 무시하고, 거듭되는 암호해독문서조차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마침내 죽음의 'D-데이'. 이미 진주만의 상공에 도착한 일본 전투기들은 작전성공을 알리는 암호 '도라 도라 도라'를 외치고, 환호성을 지르며 무차별 폭격을 시작한다. 미 항공모함들과 전투기들은 모두 박살나 버리고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채 불바다로 변하는 진주만. 일본은 공습 후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 미국인들은 이 야비한 행위에 대해 경악을 금치 못한다. 다행히도 진주만 섬 근처에 정박 중이던 미 항공모함과 전투기들은 폭격을 피하고, 곧이어 일본군과의 전투에 돌입하는데.  

 

 

 

 

 

 

 

 

 

 

 

 

<진주만 공격>

 

진주만 공격(한자: 眞珠灣攻擊, 일본어: 真珠湾攻撃 しんじゅわんこうげき, 영어: Attack on Pearl Harbor)은 1941년 12월 7일 아침, 일본 제국 해군 비행기들이 미국 하와이 주의 오아후 섬 진주만에 있는 미국군 기지에 가한 기습 공격이다.
 
1941년 12월 7일 아침, 일본 제국 해군이 진주만에 대한 공격을 가했다. 하와이 주 오아후 섬에 위치한 진주만에 대한 기습 공격은 미국 태평양 함대와 이를 지키는 공군과 해병대를 대상으로 감행 되었다. 이 공격으로 12척의 미 해군 함선이 피해를 입거나 침몰했고, 188대의 비행기가 격추되거나 손상을 입었으며 2,403명의 군인 사상자와 68명의 민간인 사망자가 나왔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사령관은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의 시작으로 폭격을 계획하였고, 나구모 주이치 부사령관이 지휘를 맡았다. 일본군은 이 작전에서 64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태평양 함대의 항공모함 3척 및 유류 보관소와 병기창은 항구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피해를 입지 않았다. 미국은 이와 같은 자원을 이용해서 6개월에서 1년 사이에 원상 복구를 할 수 있었다. 미국 국민들은 진주만 공격을 배신행위로 보고, 일본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일치단결하여 복구에 전력을 기울였으며, 이는 훗날 일본 제국의 패망으로 이어졌다. 진주만 공격은 진주만 폭격, 진주만 전투 등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진주만 공격 또는 단순히 진주만이라고 더 자주 불린다.
 

일본의 준비
 
일본은 만주를 점령한 몇 년 뒤인 1937년부터 중국과 전쟁을 하고 있었다(중일전쟁). 1941년에는 일본과 미국과의 오래된 긴장이 더 고조되었다. 미국과 영국은 일본에 무기 제조에 필요한 고철 수출을 금지했으며, 석유 수출 금지, 미국 내 일본 재산 동결, 일본 선박의 파나마 운하 통과 거부로 중국 내에서의 군사행동을 위축시키고자 했다. 1941년 11월 26일의 헐 노트를 마지막으로 외교적 노력은 절정에 다다랐고, 도조 히데키 수상은 자신의 각료들에게 이것이 최후통첩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석유 봉쇄는 유전이 없어서 대부분의 석유를 미국과 인도에서 수입하던 일본에게 치명적인 위협이었다. 일본의 지도자들은 세 가지의 선택을 할 수 있었다.
 

미국과 영국의 요구에 응하여 중국에서 철수하는 것.
유류 부족이 군사력 약화를 가져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
충돌을 확대하여 동남아시아의 자원 획득을 시도하는 것.
 
일본의 지도자들은 이 세 가지 중에 마지막을 선택하였다.
 

진주만 공격의 목표는 미국의 태평양에서의 해군력을 무력화하여 전면전이나 동시 다발적인 준비된 공격을 잠시나마 막는 것이었다.
 
11월 26일은 일본의 연합 함대가 진주만을 향해 출정한 날이다. 일본은 미국이 제시한 헐 통지문 내용과 상관없이 그 이전부터 전쟁을 준비해 왔었다. 그 근거로 일본이 전쟁을 준비한다는 보고서를 주일 미국 대사관의 조지프 그루(Joseph Grew) 대사가 본국에 송신하였으나, 유럽 내 전쟁 문제에 몰두하던 미국 정부는 그것을 묵살하였다.
 
진주만 공격 직전상황
 
일본군의 공격 임박설에 대한 사전 정보들은 많았으나, 아무도 이 정보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1941년 1월 주일대사 조셉 그류는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 계획 정보를 입수했다. 공격개시 수시간 전에 진주만 외곽에서 한 대의 잠수함이 발견되고 다른 한 대는 원인 불명인 채 침몰되었으며, 오아우 북쪽 해안 레이다 기지에서는 거대한 비행물체가 포착되었다. 많은 관리들은 일본군의 공격임박설을 알고 있었으나, 그 대상이 일본으로부터 5,000 마일 떨어진 진주만이 아닌 필리핀이라고 생각했다. 1941년 진주만의 일요일 아침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하루의 일과가 진행되었지만, 진주만 북쪽 200마일에서는 차가운 물살을 가르며 항진하는 항모 위에서 항공기들이 발진하고 있었다. 일본군 항공기의 라디오에는 하와이 방송국에서 흘러 나오는 달콤한 음악이 들려 오고, 하늘에는 구름 한점 없어서 공격 목표물을 훤히 볼 수가 있었다고 그 당시 공격에 참가했던 일본군 해군 소령 미쯔오 후지다시는 회고했다.
 

미군 비행기들과 함정들은 태풍경보에 따라 비행장과 항구에 집결되어 있었고, 7시 30분 암호명 "도라도라"의 1차 공경은 시작되었다. 일본군의 공격형태는 두 방향으로 섬에 진입하여 여기서 다시 소그룹으로 나뉘어 진행되어 고공폭격기의 지상 비행장과 격납고에 폭격과 뇌격기의 함정 어뢰 공격이 시작되었다.
 
공격 개시 수 분 내에 조용한 진주만 아침의 정적은 일대 아수라장으로 변했으며, 캘리포니아호는 2발의 폭탄을 맞고서 선체의 구멍이 생겨 기름이 누출되기 시작했다. 또 웨스트 버지니아호는 폭발로 휘청거리기 시작하더니, 바닷속으로 침몰했으며, 3발의 폭탄을 맞은 오클라호마호는 선체가 뒤집혀 25피트 진흙 바닥으로 가라 앉기 시작했다. 폭발로 피해 물로 뛰어들어 선체에 올라가 있던 미 수병들도 예외 없이 일본군의 기총사격 희생물이 되었다. 네바다호에서는 국기 게양식 의식이 진행되어 군악대의 주악 속에 국가가 연주되고 있을 쯤, 요란한 굉음을 내고 돌진 하면서 기총사격을 가해오는 일본군의 공격 때문에 의식은 급속도로 진행이 되고 나서 각자 자기 위치로 달려 가는 일대 혼란이 발생했었다. 

갑자기 울려오는 사이렌 소리에 일요일의 단잠에서 깨어난 미군들은 재빨리 배치 지역으로 달려가 대공사격을 가하기 시작했으며, 미군의 대응 정도는 일본군이 생각한 것보다 빨랐다고 당시 공격에 참가했던 일본군 조종사는 말했다. 하지만, 때는 너무 늦었고 진주만의 하늘은 먹이 사냥에 나선 일본군 비행기의 굉음으로 뒤덮였고, 수리선 베스탈호는 2발의 폭탄을 맞았다. 그리고 아리조나호는 연료저장실에 폭탄을 맞아 불덩어리 파편들은 다른 선박으로 튕겨져 연쇄 폭발을 일으켰다. 천지를 진동하는 폭발음은 순식간에 불꽃을 잠재워 버렸고, 이것은 마치 생일 잔치의 촛불 끄기 장면과 같았다. 폭탄을 맞아 화염에 타고 있는 로오 전함 주위의 바다는 누출된 기름으로 인하여 불타고 있고, 여기에서 나온 질식 연기로 천지는 밤이 되어 버렸다. 일본군의 기습공격 진행속도가 워낙 빨라서 여기에 대항하는 미군기의 대응은 미비하고, 기지에서 발진한 미군기의 숫자는 극소수였다. 함정이나 지상기지에 있는 미군들은 손에 잡히는 무기, 소총, 권총, 기관총 등으로 대항하여 일본기 29대를 격추했는데, 이 때 25여만발의 탄약이 소비되었다. 10시경에 일본기의 공습이 끝나고 전원 항모로 귀대한 다음, 뒤늦게 수색 작업에 나선 미군의 대응은 허위로 끝났다.

 

미군들의 피해는 엄청났으며(전함 18척, 항공기 177대, 인명 2,403명), 인명 피해 2,403명중 1,100명이 아리조나호에서 발생했다. 그러나 사실상 미군의 피해는 일본군이 생각했던 것보다 미비했으며, 파괴된 전함 5척(아리조나, 오클라호마, 유타, 카씬, 다우니스)만이 복구 불능 상태였다.

기타 공격 대상이었던 연료 저장소, 잠수함 수리소, 함선 수리소 그리고 이 당시 진주만에 없었던 태평양함대 등에 대한 공격은 실패했다. 후지다 소령은 실패한 목표물에 대한 2차 공격을 상부에 요청했으나 나구모 제독은 1차 공격이 미군 함대의 기능을 충분히 마비시켰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소령의 요청을 기각했다. 그러나 제독의 이러한 상황 판단은 큰 과실이었으며, 미군의 전투력 회복은 생각보다 빠르고, 더 강해졌다.

 

진주만공격 이후상황
 
루즈벨트대통령은 12월 7일을 치욕의 날로 선포한 3일뒤, 미국의회는 단 1사람(미국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에도 반대했던 몬태나의 지넷 랭킨 공화당 의원)을 제외한 전원의 찬성으로 일본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 미국인들은 일본이 본토로 쳐들어 올것을 대비해 전쟁준비를 했고, 애국심에 군대에 자원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한인들은 진주만공격 이후 일본인에게 반감을 사게된 미국의 생각을 반겼으며 미 정부에 한인으로 구성된 미 육군부대를 훈련시켜줄것을 요청하기도 했다.캘리포니아 주 방위군 휴스대령은 한인 중대를 조직하는데 협조해 주겠다는 약속을 해왔으며 이에 나이가 18세부터 64세까지인 한인들 50명이 지원했고 중국인들과 필리핀인들도 가세하여 동양인 대대가 구성 되었다.이 대대의 이름은 '맹호군'이었고 대대장은 김용성이었다. 맹호군의 정식 인가가 1942년 4월 26일에 나왔고 대대기가 수여되었다.
 

진주만 기습은 예견되었나?

1941년 초 일본군 통합 함대 사령관인 야마모토 제독은 진주만 공격의 타당성 조사를 비밀리에 지시했다. 미국에서 하버드대학을 다닌 그로서는 어느 누구보다도 미국의 산업능력, 자원의 풍부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장기전에서는 승리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또 진주만을 기습공격하여 미군의 함대의 기능을 상실 시키고 나서, 그 공백기에 동남아로 진출하여 강력한 방어막을 구축했다. 그 다음에 두 대양에서 1, 2년의 소모전을 벌인 후에 미국, 영국 정부와 협상을 통한 영토 분할에서 우위를 점령하려는 작전계획을 구상했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해 보면 진주만 공격은 방어적인 개념이 강한 기습공격이라 볼 수 있다.

그는 비밀리에 일을 추진하면서 한편으로는 문제해결을 위한 외교적인 협상을 계속하였다. 1942년 루즈벨트 대통령은 또 다른 평화안을 제안했다. 즉 미국은 일본이 만약 점령지로부터 군대를 철수하고 중국 정부와 평화회담을 재개한다면 일본과의 정상적인 통상관계를 재개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이러한 미국의 제안이 일본 정부에 전달되기도 전에 일본군의 전함과 수송선이 동남아시아의 이동 소식으로 들려왔다.
11월 6일 6대의 일본 항모들은 본토 항구를 빠져 나와 진주만으로 향하는 항해를 시작했는데, 미국 상선에 의한 포착을 피하기 위해 항로를 안개가 짙게 깔리는 얼류선 열도와 미드웨이 사이로 잡았다.

12월 2일 본국 정부로부터 최종 작전명인 "climb Mt. Nitaka"가 하달되었고, 동시에 다른 함대는 동남아 방향으로 향진하고 있었다. 이러한 비밀군사 작전을 수행하면서도 일본 정부는 겉치레에 불과한 협상을 계속했는데, 12월 7일 워싱턴 시간으로 정각 1시에 미국 정부에 전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해독상의 문제로 인해 통지사항은 정해진 시간에 전달되지 못했다.

미군 정보부에서는 이러한 교신 내용을 사전에 도청하여 해독했으며, 이것이 의미하는 것을 무엇인지 파악했지만 정확한 시간을 알지는 못했다. 단지 예방책으로 샌프란시스코, 파나마운하, 하와이 그리고 필리핀에 있는 미군기지에 경계 명령만을 하달했다. 하지만 그 시간에 이미 일본기들은 1,264일의 시간이 소모된 태평양 전쟁의 서곡을 위해 진주만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진주만 기습과 관련된 음모론
 
태평양 전쟁 발발과 관련하여 미국이 일본의 공격을 유도했다는 소위 “음모론”이 떠돌고 있고, 그 중 하나가 진주만 공격 당시 미 해군이 일부러 격침되어도 상관없는 구식 전함들만을 배치했다는 주장이 있다. 실제로 애리조나호 등 정박 중이던 미군 전함들은 1941년 기준으로 취역한 지 30년 가까이 된 전함이었다. 가장 젊은 편인 애리조나호도 취역 연도가 1915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상황을 모르는 오해에 불과하다. 미군은 1922년 워싱턴 군축 조약에 따라 1920년대 이후에 신형 전함을 한 척도 건조하지 못했다. 워싱턴 군축 조약 결과 미국을 비롯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은 일정한 비율의 전함만을 보유할 수 있었을뿐더러 신형함 건조는 제한되었다. 이미 건조 중이던 전함 및 대형 중순양함은 1920년대에 항공모함으로 용도 변경되었다(1920년대와 30년대에 각국이 항공모함을 취역시킨 원인은 항공모함의 가치에 주목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일찌감치 군축 조약에서 탈퇴한 일본은 신형함 건조를 1930년대 초부터 진행해 왔으나, 미국은 1937년 이후부터 서둘러 신형함 건조를 시작했고, 1941년 12월까지 신규 건조된 최신형 전함은 단 2척이었다. 위의 피해 현황에도 나오지만, 전쟁 초기 군함이 부족했던 미국은 가능한 한 인양하여 수리한 후에 재투입했다. 문제가 된 구식 전함 가운데 애리조나호와 연습 표적함이던 유타호를 제외한 나머지 전함은 모두 일선에 복귀하였다.
 
뒤늦게 신형함 건조를 시작한 탓에 가용 가능한 군함은 구식함뿐이었던 미군이었지만, 일본군은 그 함대가 두려워 조기에 기습했던 것이다. 참고로 신형함 건조 시작 이후에도 미군은 전함이 모자라 진주만 공격 당시 파손된 구식 전함을 수리해서 다시 전투에 투입했다.
 
특히, 만약 미군이 일본의 공격을 유도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굳이 일본이 진주만을 습격하게 둘 필요도 없이 차라리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중간 해역에서 요격하여 참전 명분은 명분대로 얻고 훨씬 적은 피해로 일본을 무력화할 수 있었을 것이나, 실제로는 진주만이 궤멸만 간신히 면할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는 점에서도 미국이 일본의 공격을 유도했다는 설은 신빙성이 부족하다.

미국 군사 역사상 유례없는 이 재난은 상당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허즈번드 키멀 제독, 월터 쇼트 소장, 오아후 섬의 해군·육군 사령관들은 해임되었고 곧 공식조사가 시작되었다. 몇몇 역사가들은 진주만 공격을 초래해(또는 적어도 그 공격을 중지시키지 못해) 미국이 추축국과의 싸움에 개입하도록 했다는 이유로 루스벨트 대통령을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중의 조사를 통해 미군 장교들은 일본이 언젠가 공격해올지 모른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 공격이 언제 어디에서 일어날지 예상하지 못한 사실이 밝혀졌다.

 

진주만 공격 후 일본인들의 피해
 
일본의 진주만 공격후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들은 큰 반감을 사게 되었다. 미국정부는 이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일본인수용소를 만들었고, 2차세계대전이 끝날때까지 일본인들을 강제수용시켰다. 당시 미국 내에 거주하던 한국인들도 일본인으로 분류되어 강제수용되었다. 미국은 일본인과 한국인을 동일시하는 것에 대해 "한국에 사과하고 싶다"고 샌프란시스코 강화 회의에서 발언했다.
 

애리조나호 기념관
 
진주만에 있는 애리조나호 기념관(USS Arizona Memorial)은 진주만 공격때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애리조나호의 이름을따서 만들었다.애리조나호는 그 당시 공격을 받은 지 불과 9분만에 침몰하였고,총 인명피해 2403명중 1177명이 이곳에서 일어났다. 선체를 옮기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가 그 위에 기념관을 만들었다.이 기념관을 설계한 사람은 알프레드 프레이스이고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대통령인 루즈벨트가 1958년에 기념관 창설을 허용해서 그로부터 3년 후에 완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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