슐츠의 자막공방/끝까지 살아 남아라 : 제2차 세계대전 (2016)

2차대전 중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슐츠105 2017. 4. 18. 01:10

2차 대전 와중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가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최종 형성된 것은 20세기 초반으로 독일 나치주의, 그리고 당시의 다른 극우 사상들과 매우 유사한 특성을 갖는다. 극단적인 불관용, 직접적 정치행동, 폭력적 성향, 소수자들의 권리 부정이 이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특징이었다. 


                                 리보프(서우크라이나)에 있는 스테판 반데라 동상. (사진출처=공개자료)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사회 내부의 비우크라이나 분자들을 최대한 무자비하게 탄압하면서 민족을 '철권'으로 일으켜 세워야 한다고 여긴다. 문제는 그들이 말하는 '비우크라이나 분자들'이 우크라이나에서 '다수'를 점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우크라이나 서부에서 가장 우크라이나어 사용인구가 집중된 갈리치나에서도 이러한 '불순분자들'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며 동남부 지역에서는 절대적인 다수를 점하고 있다. 만약 우크라이나 서부 출신들이 평화적인 방법으로 권좌에 오른다면 그것은 반대파와 협상을 할 필요성을 인정하는 어느 정도 온건적인 세력일 것이다. 하지만 쿠데타로 권좌에 오른 것은 과격파이며 이런 상황에서 우크라이나의 내분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되고 있다. 


                                                   로만 슈헤비치 (사진출처=공개자료) 

2차 대전 당시 주로 서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스테판 반데라와 그의 오른팔 로만 슈헤비치가 이끄는 우크라이나 반란군이 활동했다(두 명 모두 빅토르 유셴코 우크라이나 전 대통령에 의해 사후 우크라이나 영웅의 칭호를 얻었으나, 2010년 빅토르 야누코비치 차기 대통령에 의해 박탈당했다). 이들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역사에서 가장 잘 알려진 대목이다. 

반데라주의자들과 독일 점령군과의 관계는 복잡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무엇보다 자신의 주적이 소비에트 연방이라는 사실에 입각해 행동했다. 이러한 접근방법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자체의 성격에 근원하는 것으로 그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인의 주적은 '모스칼리(москали)', 즉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가치를 공유하지 않는 러시아인 전체를 지칭한다. 여기에 폴란드인과 유대인도 포함되었다. 

서우크라이나 땅이 폴란드에 속해있던 1939년 이전까지 스테판 반데라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기구(OUN-B)는 반폴란드 정치 및 파괴 공작을 담당했으며 이후 소련 정부로 그 타겟을 변경했다. 나치독일의 제3제국은 반데라주의자들의 활동이 자신들에게 유익할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예를 들어, 독일은 "우크라이나 땅을 불순분자, 즉 무엇보다 유대인과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정화"시키겠다는 우크라이나인들의 욕망을 이용했다. 

하지만 독립국 우크라이나를 꿈꾸는 반데라의 생각을 나치독일은 지지하지 않았으며 결과적으로 반데라는 독일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어 1944년까지 수감됐다. 물론 다른 수감자들과 비교하면 상당히 안락한 여건으로 그는 수용소 생활을 보냈다. 독일 점령 기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SS '갈리치나' 사단, '나흐티갈' 대대, '우크라이나 용병', 현지 경찰과 같은 나치독일군 조직에 소속되어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독일군에 소속되지 않은 부대들도 자신들이 역사적으로 우크라이나 땅이라고 생각하는 지역에서 인종청소를 실시했으며 그 과정에서 주기적으로 독일 점령부대와 군사적 충돌을 빚기도 했다. 널리 알려진 사건으로는 1941년 우크라이나 서부에서의 유대인 학살 사건, 그리고 폴란드 역사학자들의 자료에 따르면 폴란드계 국민 약 15만 명이 살해된 1943-44년의 이른바 '볼린 학살극(Волынская резня)' 같은 비극이 있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이론과 행동에 동의하지 않는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들도 테러의 대상이 되었다. 

1944년 독일군은 진격해오는 소련 붉은 군대와의 전투를 위해 우크라이나반란군(УПА)을 지휘하도록 반데라를 강제수용소에서 석방했다. 반데라주의자들이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인 것인 1944-45년, 그리고 냉전이 시작되면서 영국과 미국 정보기관들이 그들과 협력을 개시한 전후 초기였다. 하지만 1950년대 중순이 되자 파괴활동은 사그라들었고, 많은 이들이 평화로운 삶으로의 복귀를 원했다. 반데라 자신도 전후 뮌헨에서 영국 정보부를 위해 일하면서 그 보호 하에 살다가 1959년 KGB 요원 보그단 스타신스키가 쏜 청산가리 주사액이 담긴 특수총탄을 맞고 죽음을 맞이했다. 


             스테판 반데라의 신분을 증명하는 서류("독일 강제수용소 우크라이나인 정치범 연맹" 회원증). 이 서류에는 '스테판 포펠(Stepan Popel)'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다. 키예프 소재 우크라이나 국립 역사박물관 '스테판 반데라: 증명서들' 전시회에서 공개됐다. 

함께보면 좋은 자료

 

악마와의 계약? 우크라이나의 파시즘 운동, 1929~1945

  • 구자정 ( Ja Jeong Koo )
  • 한국외국어대학교 러시아연구소, <슬라브 연구> 31권4호 (2015), pp.1-59
  • ---> http://kiss.kstudy.com/journal/thesis_name.asp?tname=kiss2002&key=3387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