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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 (Sophie Scholl The Final Days, 2005)

슐츠105 2013. 1. 21. 19:57

전쟁, 드라마 | 독일 | 119 분 | 

감독 마크 로드문트

출연 줄리아 옌체 (소피 막달레나 숄 역), 제럴드 알렉산더 헬드 (로버트 모어 역), 파비안 힌리히스 (한스 숄 역), 요하나 가스트도프 (엘제 게벨 역)

 

줄거리
히틀러를 향한 용기의 칼날 - 백장미단
히틀러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무렵 독일에서는 히틀러 정권에 저항하는 학생 모임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난다. 뮌헨에서 결성된 백장미단 역시 히틀러 정권을 비판하면서 독일 국민들을 일깨우기 위해 저항하는 학생 단체. 사랑과 시와 재즈를 읊조리는 여느 순수한 여대생과 다름 없었던 스무 한 살의 여대생 소피 숄. 그녀는 오빠 한스가 가입되어 있는 백장미단에 가담하게 되고, 젊은이들의 움직임을 도모하기 위해 행동을 결심한다.

 

영원한 자유를 향한 용기 – 소피 숄
백장미단의 유일한 여성 멤버가 된 소피 숄. 그녀는 1943년 2월 18일, 오빠 한스와 함께 이른 아침 학교에서 히틀러를 비난하는 전단을 몰래 뿌리던 중 발각되고, 현장에서 체포된다. 자신과 오빠 그리고 동료들을 보호하기 위해 거짓 진술을 하는 소피. 그러나, 증거를 잡아낸 게슈타포 심문관 로버트 모어 앞에서 그녀는 끝내 진정한 자유와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하는데….

 

 

 

 

 

 

 

 

 

 

 

 

 

 

 

 

 

백장미단 사건 (Die Weiße Rose)

(출처 : http://blog.naver.com/mirejet/110096614508)

 

백장미단은 뮌헨대학의 학생으로 구성되어 1942년부터 1943년까지 활동한 반나치스 운동단체이다.

한스 숄과 그의 누이동생인 조피 숄을 필두로 크리스토프 프롭스트, 뷜리 그라프, 알렉산더 슈모렐의 학생 3인과 쿠르트 후버 교수 등도 반나치 활동에 참가했었다.

 

원래 백장미단에 참가했던 학생들은 프랑스 침공전과 동부전선에서 종군한 경험이 있던 독일육군 귀환병이었다.

독일청년운동에서 영향을 받은 한스 숄과 프롭스트는 폴란드의 유대인 거주지의 상황과 동부전선의 참상을 목격한 후 전쟁을 받아들일 수 없었는데 더우기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국방군의 패배에 의해 독일의 패전을 예상했다.

백장미단 구성원은 나치스의 유럽지배를 부정하고 기독교의 인내와 정의를 신봉했다. 성서, 노자, 아리스토텔레스, 괴테, 쉴러 등에서의 인용에서 보이듯 독일의 지식계급의 전형을 표방했는데 이들의 선전문은 처음에 바이에른, 오스트리아 등 독일 남부를 거점으로 배포되었다. 이것은 반(反)군국주의의 메세지가 남부에서 보다 쉽게 퍼지리라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백장미단은 1942년 6월부터 7월에 걸쳐 4종류의 삐라를 작성하고는 이를 우편 등으로 배포했다. 1943년에 들어서자 1월에 5종류의 삐라<전 독일인에게 고함>을 작성하여 각지에 배포했다. 그리고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이 한창이던 1월말에 독일군의 항복소식을 듣고는 2월에 6종류의 삐라<학우들에게>를 작성했다.

모든 삐라는 읽기쉬운 독일어로 쓰여 백장미단은 독일국민들에게 자신들의 주장을 널리 알리려 했다.

6종류의 삐라는 2월 14일과 16일 밤에 뮌헨 시내까지 뿌렸지만 아직 많이 남은 상태여서 백장미단 일원은 이를 뮌헨대학에 뿌렸다.

2월 18일 11시 전에 숄 남매는 대학으로 가서는 아직 잠겨져 있는 강의실의 앞과 복도에 삐라를 놓은 후 마지막으로 남겨진 삐라를 가지고 3층으로 올라가서 조피가 이를 뿌렸다. 이 모습은 나치당원이며 대학의 직원이던 야곱 슈미트에 의해 발각되어 숄 자매는 현장에서 바로 체포되어 게슈타포로 연행되었다.

다음날에는 프롭스트도 체포되었는데 심한 고문에도 숄 남매는 두 사람만이 공모했을 뿐 친구들은 아무 관련이 없다며 끝까지 비밀을 지키려 했다. 숄 남매와 프롭스트의 재판은 2월 22일에 개최되었는데 이들은 롤랜드 프라이슬러가 재판장으로 있던 인민법정(독일민족재판소)에서 반역죄로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받고는 길로틴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 후 슈모렐, 그라프와 후버 교수도 체포되어 4월 19일에 사형선고가 내려졌는데, 슈모렐과 후버 교수는 7월 13일에, 그라프는 10월 12일에 역시 길로틴으로 처형되었다. 그 외에도 삐라의 인쇄와 배포를 도운 혐의로 프롭스트의 미망인과 고아들을 후원했던 사람들까지도 체포되어 6개월에서 1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백장미단의 일원들, 왼쪽부터 한스 숄, 조피 숄, 프롭스트(볼펜을 쥔 오른쪽 사람). 이들은 모두 길로틴으로 처형되는 비극을 맞이했는데 조피 숄은 처형당시 고작 21세에 불과했다.

 

 

전후 백장미단의 활동이 알려지게 된 것은 작곡가인 카를 오르프가 연합군의 고문당시 자신이 백장미단의 창설자 중 한 사람인 것을 밝히면서 드러났다. 오르프는 후버 교수의 친구로, 이 증언에 의해 석방되었지만 당시 증언의 진실성에는 의문이 남겨져 있다.

백장미단의 활동이 상세히 밝혀지자 개인적 야심과 권력에 물든 나치스의 광기에 사로잡혔던 학생들은 전후 이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한편 백장미단의 멤버들을 사형에 처했던 인민법정의 재판장인 프라이슬러는 1945년 2월 3일에 미군의 공습으로 사망했다.

숄 남매를 체포하여 3,000마르크의 상금을 받고 승진했던 대학직원인 슈미트는 미군에게 체포되어 5년형을 살다가 그 후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슈미트는 형기를 마치고 1951년에 출소했는데 <나는 의무를 다했을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형무소에 2번이나 탄원을 요청했었다.

전후 독일에선 백장미단의 활동, 그 중에서도 숄 남매에게 각별한 칭송이 쏟아졌다. 뮌헨대학의 대강당 일각에는 이들 남매를 기리어 Geschwister Scholl Platz(숄 남매광장), 인근 광장은 Professor Huber Platz(후버교수 광장)이라고 명명되었다.

1968년에 뮌헨대학에 설치된 정치학 연구소는 Geschwister Scholl 연구소라고 명명되었다. 또 1980년부터 바이에른 주 출판협회와 뮌헨시는 숄 남매상을 설립하여 이들 남매의 평소 소신이던 자유, 시민, 도덕, 지적인 용기 등과 관련된 출판물에 대해 표창하고 있다.

그리고 뮌헨 뿐만 아니라 독일 각지에서도 숄 남매의 이름이 붙여진 광장이나 거리가 많다. 또 독일 국내의 학교에서도 가장 많은 학교명도 Geschwister Scholl Schuule(숄 남매학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