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개/2차대전 첩보-레지스탕스

작전명 발키리 (Valkyrie, 2008) 7.1

슐츠105 2013. 1. 21. 20:03

스릴러, 전쟁 | 독일, 미국 | 120 분 |

감독 브라이언 싱어

출연 톰 크루즈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버그 역), 케네스 브래너 (헤닝 폰 트레스코프 역), 빌 나이 (프레드리히 올브리히트 역), 톰 윌킨슨 (프레드리히 프롬 역)

 

줄거리
강직한 성품의 클라우스 폰 슈타펜버그 대령은 조국과 국민을 위하는 충성스런 장교이지만 히틀러가 독일과 유럽을 파멸시키기 전에 누군가 그를 막을 방법을 찾아내기를 희망한다.

북 아프리카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은 슈타펜버그 대령은 독일 사령부로 발령을 받으면서 권력 최상위층까지 숨어 있는 비밀 저항세력에 가담, 히틀러를 제거하기 위한 직접적인 행동에 나서게 된다.

히틀러가 비상시를 대비해 세워놓은 일명 `발키리 작전`을 이용 히틀러를 암살하고 나치 정부 전복을 계획하는 것. 전 세계의 미래와 수백만의 안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목숨이 달린 위험한 작전 최전선에 서게 된 슈타펜버그 대령은 히틀러를 직접 암살해야 하는 긴박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데...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1944년 7월 20일, 아돌프 히틀러에 반대하는 반나치 인사들이 일으킨 쿠데타 시도였다. 7.20 쿠데타 등으로도 불린다. 히틀러를 암살하기 위해 시한폭탄을 사용했으나 히틀러는 살아남았고, 오히려 대규모 검거 선풍이 불어 많은 장군과 정치인들이 숙청당했다.

 

 

 

배경

반 히틀러 세력 형성1933년 나치당 1당 독재 체제를 굳힌 히틀러는 1934년,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하자 절대 권력자가 되었다. 정계, 관료, 경찰 등 모든 분야에서 그의 심복들 또는 심복까지는 아니더라도 나치들을 심었다. 오직 국방군, 그 중에서도 육군의 일부 장교단은 나치에 반발하며 히틀러에게 반대하는 세력을 형성했다(민간인 저항 세력은 제외한다). 공군은 헤르만 괴링이 창설하여 이끌었으니 문제될 게 없었고, 3군 중에서 가장 미약했던 해군은 처음부터 정치와 선을 그어 놓고 있었고, 히틀러에게 군인으로서의 충성만을 다 바쳤다. 제1차 세계 대전부터 전공을 세워 온 보수적인 경향의 육군을 히틀러는 두려워했고, 언젠가 히틀러는 측근에게 "그들은 길들이기 어려운 투견"이라고까지 말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국방군을 내버려 둘 수는 없었기 때문에 나치는 유언비어로 국방군 장성들의 군복을 벗겼다. 우선 국방장관으로 있던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원수의 재혼녀가 창녀라는 소문을 퍼뜨려 쫓아내고 이어 육군 총사령관 베르너 폰 프리치가 동성애자라며 쫓아낸다. 그 후 히틀러가 국방군 총사령관으로 빌헬름 카이텔을 임명하고, 이어 알프레트 요들 상급대장을 국방군 작전부장이라는 요직에 앉히면서 마침내 나치는 국방부까지 손에 넣는다.

나치의 이런 행동에 제1차 세계 대전 때부터 독일을 위해 싸워 왔던 노장들은 앙심을 품고 반나치를 결성한다. 그 중심엔 독일 육군 장군 중에서 가장 존망받는 육군참모총장 루트비히 베크 장군이 있었다. 이들은 히틀러를 암살하기 위해 많은 준비를 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그러나, 히틀러 암살 계획을 작전으로 실행하기도 전에 1939년 9월 1일 전쟁이 시작되어 폴란드가 점령되고, 이어 1940년 프랑스가 항복하면서 히틀러와 나치에 대한 대중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졌다.

결국 반나치들은 때를 기다리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마침내 기회가 온다.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이 모스크바 점령에 실패하면서 장기전으로 비화되고, 이어 1942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 제6군이 항복하면서 독일이 엄청난 피해를 입자 히틀러의 입지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반나치들은 그들의 세력을 은밀히 키워나가면서 히틀러를 암살할 기회를 찾는다. 7.20 사건이 있기 전부터 히틀러를 암살하려는 기도가 자주 있었지만 히틀러는 그 때마다 기적적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그리고 마침내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성공하면서 이들이 기다려 온 운명의 시간이 다가온다.

 

발키리 작전

발키리 작전(Operation Walküre)은 잘 알려진 대로 원래는 히틀러 암살과는 무관한 작전계획이었다. 이 작전은 전쟁이 격화되고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발생할 수 있는 비상상황에 대한 예비 계획으로 마련되었다. 독일은 이미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도 전선에서의 붕괴가 아닌, 체제 내부에서의 혁명으로 붕괴된 경험을 갖고 있었다. 1918년 11월 수병 폭동에서 시작된 독일혁명(이른바 11월 혁명 Novemberrevolution) 이 삽시간에 권력 기반을 무너뜨리면서 빌헬름 2세의 퇴위와 강화로 이어졌던 것이다. 물론 나치 독일은 이미 대전 이전부터 공산당 등 좌파 반체제세력에 대해 무자비한 탄압을 실시한 뒤라 이런 식의 체제전복 가능성은 적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 때와 다른 유형의 불안 요인이 상존했다.

우선 연합군이 독일 영내 깊숙이 전략폭격을 하고 있었다. 1943년 7월 함부르크 대공습(고모라 작전)과 같이 도시 하나를 통째로 불지옥으로 만들어 버리는 폭격 — 7박 8일간 이어진 공습으로 25만 채의 집이 소실되고 5만 명 이상의 시민이 사망 — 은 국민의 저항의지까지 송두리째 날려 버릴 수 있었다. 폭격 속에서 행정 및 치안조직이 무력화되면 암약하는 반체제세력이 어떻게 준동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또한 나치 독일의 전쟁기구가 이미 전 유럽에 의지하고 있다는 점도 문제였다. 독일은 전쟁수행에 필요한 자원과 노동력 상당 부분을 강점지역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들은 당연히 독일의 지배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독일 점령기구의 감시가 느슨해지면 폭력적인 봉기에 나설 위험이 농후했다.

독일 수도 베를린은 이러한 불안요인이 혼재된 곳이기도 했다. 베를린 일대에는 독일의 중요한 산업시설이 있었는데, 부족해진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 끌어 온 해외 노동자들의 거주구역이 대전 기간에 크게 성장했다. 연합군이 대규모 전략폭격과 함께 공수부대를 낙하시켜 이들 해외 노동자와 합세하여 독일의 심장부를 마비시킨다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회자되었다.

발키리 작전은 이런 반체제봉기가 벌어질 경우에 국방군 병력이 나서서 치안을 회복하기 위한 작전계획이었다. 이에 필요한 병력은 당연히 주요 도시 인근의 후방 위수병력이 도맡아야 했다. 전쟁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전선에 배치된 야전부대를 빼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방에서 신병을 훈련시키고 부상병, 휴가병을 재편성하여 전선에 보내는 역할을 하는 예비군(Ersatzheer) 조직이 작전의 실행을 주도하는 것도 당연한 귀결이었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으로 따지자면 동원 지정이 되지 않은 예비군들이 유사시 북한군 특수부대의 후방 침투를 대비해 향방작계 훈련하는 상황을 연상하면 된다 — 발키리 작전은 말하자면 일종의 향방작계였다.

이 작전은 총통의 직접 명령에 의해 발령되는 것이 원칙이나, 예비군 총사령관의 명령에 의해서도 발동될 수 있었다. 유사시 "발키리(Walküre)" 라는 작전지령이 내려지면, 각 해당 부대들은 미리 지급받은 봉투를 뜯고 그 안에 지정된 담당 방어시설로 출동해야 한다. 이곳을 장악하고 예비군 사령관의 이어지는 추가 명령에 따라 반체제세력의 준동을 진압하는 것이 이들이 부여받은 임무였다. 전시의 비상상황을 생각하면 하나같이 자연스러운 조처이므로, 히틀러가 발키리 작전의 준비를 승인한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히틀러 암살 음모자들은 이를 역이용하려는 생각을 해 냈다.

작전 내용은 이러하였다. 7월 20일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동프러시아에 있는 히틀러의 볼프샨체에 들어가 히틀러를 폭사시키면 프롬 장군이(그는 아직 반나치에 들어갈 지를 결정하지 않았다.) 발키리 작전을 발동, 예비군을 동원해 나치 친위대를 전부 체포하고, 이어 베크 원수를 독일 총사령관으로 추대하고 연합군과 협상해 가며 소련을 막는다는 계획이었다.

폭탄은 국방군 정보부(Abwehr)의 사령관인 카를 카나리스 제독이 연합군이 레지스탕스에게 전해주기 위해 공수할 때 은밀히 구한 것이었다. 이 폭탄은 파편에 의한 살상이 아닌 화력에 의해서만 살상을 일으키는 폭탄인데 폭탄에 부속된 캡슐을 깨뜨리면 캡슐의 액체가 신관을 녹이고, 이어 뇌관을 건드리면서 폭발하는 폭탄이었다. 이런 폭탄을 사용한 이유는 볼프샨체의 경계가 워낙 철통 같아서 호신용 권총은 물론 결혼 반지까지 전부 내어 놓고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도저히 금속 폭탄을 사용할 수 없었다. 슈타우펜베르크는 북아프리카에서 근무할 당시 폭탄에 피격당해 오른 팔과 왼 손가락 2개를 절단하고 눈 하나를 잃은 장애인이었다. 군부에서는 그에게 제대할 것을 권유했지만 그는 거부하고 대신 예비군 참모가 된 것이었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이 힘든 몸으로 매우 정교한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매일매일 이 캡슐을 깨뜨리는 훈련을 해야 했다.

 

경과

히틀러는 조그만 상처만 입었을뿐 죽음에 문턱에는 갈 수는 없었다.

 

볼프샨체

1944년 7월 20일 오전 10시, 예비군 부사령관 프리드리히 올브리히트 장군이 베크에게 "오늘은 기분이 좋으신가요?" 라고 전화를 걸었다. 쿠데타 개시를 알리는 신호였다. 한편 오전 7시, 슈타우펜베르크는 이미 그의 부관인 베르너 폰 헤프텐과 함께 랑스도르프의 비행장에서 동프러시아 라스텐부르크 비행장으로 날아갔다. 오전 10시 15분, 라스텐부르크에 도착한 일행은 20분 뒤, 볼프샨체에 도착했다. 볼프샨체에는 3개의 검문소가 있었지만, 슈타우펜베르크는 무사히 검문소를 통과했다. 오전 11시, 슈타우펜베르크와 헤프텐은 총통 본영의 참모 멜렌도르프와 함께 점심 식사를 했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정오 무렵에 대기실에서 카이텔을 만나 프롬 장군의 국민척탄병 보고서를 가져왔다고 보고했다. 이때 카이텔은 총통이 베니토 무솔리니와 회담이 있기 때문에 일찍 회의를 끝내야 하며 장소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렸다. 원래는 지하 벙커의 회의실에서 회의를 했었으나 이 날 마침 재공사를 해야 해서 위층의 개방된 회의실에서 회의를 했던 것이다. 카이텔과 회의실로 가던 슈타우펜베르크는 가는 길에 볼프샨체의 통신감인 에리히 펠기벨을 만났다. 벨기벨은 슈타우펜베르크에게 "모든 일이 잘 되기를 빈다."고 말했지만, 그 말의 뜻을 아는 사람은 오직 그 두 사람뿐이었다.

회의실에 거의 다 와 가던 슈타우펜베르크는 갑자기 모자와 벨트를 두고 왔다며 다시 대기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가방 속의 폭탄 캡슐을 꺼내 조심스럽게 캡슐을 깼다. 시간은 오후 12시 32분이었다. 폭탄은 예정대로라면 10분 뒤에 터질 예정이었다. 슈타우펜베르크가 대기실에서 나오자 카이텔은 지각을 했다고 호통을 쳤고, 슈타우펜베르크는 그에게 사과했다.

오후 12시 36분, 회의실로 들어가기 직전, 슈타우펜베르크는 베를린으로부터 급한 전화가 올 것이니 오는 즉시 알려 달라고 통신 교환수에게 말했다. 이것은 카이텔이 일부러 이 말을 듣게 해서 빠져나갈 길을 미리 만들려는 계책이었다. 당시 회의실 내에는 히틀러를 비롯, 몇몇 장성과 그들의 부관, 타이핑하는 사람 2명까지 해서 총 25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마침 육군 참모총장 호이징거가 동부전선과 이탈리아 전선 상황을 브리핑하고 있었다. 슈타우펜베르크의 등장에 잠시 회의장은 조용해졌으나 금방 무시당하고 회의는 속행되었다.

슈타우펜베르크는 히틀러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호이징거의 부관 하인츠 브란트 대령과 공군 참모총장 코르텐 사이에 서 있다가 몰래 가방을 히틀러 옆에 테이블 기둥 옆으로 옮겨 놓고 아무도 몰래 회의실을 빠져 나왔다. 폭파까지 5분 남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이변이 발생했다. 슈타우펜베르크가 나가고 나서 바로 브란트가 지도를 보기 위해 몸을 일으키다가 테이블 기둥 옆에 있던 슈타우펜베르크의 서류가방을 발로 건드렸다. 브란트는 가방 때문에 히틀러가 거추장스러워 할 것이라고 여기고 폭탄을 자기 쪽, 즉 테이블 바깥쪽으로 끌어 당겼다. 카이텔은 호이징거 다음이 슈타우펜베르크였기 때문에 그가 있던 곳을 바라봤지만 그는 없었다. 당황한 카이텔은 순간, 회의실로 들어오기 전에 슈타우펜베르크가 베를린으로부터 전화가 올 것이라고 한 말이 떠올라 밖으로 나갔지만 그곳에도 슈타우펜베르크는 없었고, 결국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려고 했다.

오후 12시 42분, 호이징거의 브리핑은 거의 다 끝나가고 있었다. "소련군은 막강한 병력으로 주나의 서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선봉은 이미 주나부르크 남서 지구에 도달했으며 페이푸스호 주위의 아군을 즉각 후퇴시키지 않으면 파국이..." 이 말과 동시에 폭탄이 터졌고, 순식간에 회의장이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카이텔은 회의실 문 앞까지 왔을 때 갑작스런 폭발에 놀라 뛰어 들어갔다. 회의실 내에는 폭탄의 화염이 가득 퍼졌고, 지붕은 거대한 구멍이 났으며 창문은 모두 깨져 버렸다.

이 순간, 슈타우펜베르크는 펠기벨의 사무실에 있다가 폭발음을 듣고 펠기벨과 악수한 뒤 헤프텐과 함께 볼프샨체를 떠났다. 검문소를 모두 속이고 마지막 검문소에서 '44분, 슈타우펜베르크 대령 통과.'라는 기록을 남긴 채 슈타우펜베르크와 헤프텐은 도망쳤다. 중간에 길가에서 헤프텐은 폭탄이 터지지 않을 경우 쓰려고 했던 제 2의 폭탄을 분해해 길가에 버렸다. 볼프샨체의 펠기벨도 통신선을 절단해 볼프샨체를 고립시킨다. 오후 12시 55분, 라스텐부르크의 비행장에 도착한 슈타우펜베르크와 헤프텐은 비행기를 타고 베를린으로 출발한다.

한편, 폭탄이 터진 회의장은 완전히 아수라장이었다. 폭탄을 자기 쪽으로 끌어 놓았던 브란트와 타이피스트 베르거, 공군 참모장 코르텐, 히틀러 수석 부관 슈문트 등이 현장에서 즉사했고, 이외의 많은 사람들이 중경상을 입었다. 히틀러도 얼굴이 새까맣게 탔고, 다리에 약간의 화상과 고막 파열, 그리고 팔에 나무 파편이 박혀 이후 팔에 가끔씩 마비 증상이 발생하게 되었다. 기절한 히틀러를 회의장 밖에 있던 카이텔이 뛰쳐 들어와 불길을 헤치며 끌고 나온다. 결국 히틀러는 이 불구덩이 속에서 살아났다.

오후 1시 15분, 펠기벨은 예비군 사령부로 전화를 걸어 올브리히트에게 히틀러가 아직 살아 있다고 보고했다. 올브리히트는 당황했지만, 아직 베크와 슈타우펜베르크가 도착하지 않았으니 기다리자고 했다. 이렇게 시간은 점점 흘러갔다. 이 무렵, 볼프샨체에서는 SS 사령관 겸 경찰 총장인 하인리히 히믈러가 사건 현장에 도착해 사건 파악을 위해 베를린에 있는 제국사법경찰 사령관인 아르투르 네베에게 전화를 거나 네베는 사건 조사를 거부한다. 그 사이 펠기벨은 아무도 몰래 볼프샨체의 통신선을 절단하고, 볼프샨체는 몇 시간 동안이나 외부와 고립된다. 히틀러는 병원으로 급히 이송되었다.

처음엔 아무도 슈타우펜베르크를 의심하지 않았다. 이 폭발이 연합군의 정밀 폭격이나 이미 오래 전부터 폭탄이 비밀리에 설치된 것으로 여겼으며 모두 그가 죽은 줄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교환수와 카이텔이 슈타우펜베르크가 사라졌다고 했고, 검문소에서도 폭파 직후 슈타우펜베르크가 볼프샨체를 떠났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가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다. 그러나 통신선이 절단되었기 때문에 복구될 때까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오후 4시,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은밀한 회담을 가졌다. 히틀러는 무솔리니에게 자신이 테러를 당한 회의장을 공개했고, 현재 전황이 이처럼 위험하지만 결국엔 자신이 살아남은 것처럼 결국엔 승리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무솔리니는 이에 대해 감동을 받고 이 사건이 자신에게 큰 용기와 희망을 주었으며, 결국 우리가 승리할 것이라고 했다. 오후 5시, 무솔리니와의 회담 중에 통신선이 복구되었며, 사방에서 반란 소식이 보고되었다. 히틀러는 1934년 SA 대장 에른스트 룀의 사건 때보다도 더 무시무시한 복수를 할 것이며,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조리 다 죽여버릴 것이라며 분노했다.

 

베를린

오후 3시 45분, 베를린에서는 슈타우펜베르크와 헤프텐이 랑스도르프 비행장에 도착했고, 급히 발키리 작전이 개시되었다. 오후 4시, 베를린 방어 사령관 파울 폰 하세 장군을 비롯한 반나치들은 친위대 사령부를 봉쇄했고, 올브리히트는 프롬 장군을 찾아가 예비군 동원을 요구했다. 아직까지도 결정을 못하던 프롬은 총통이 죽었는지 증거를 대보라고 했고, 마침 볼프샨체의 통신선이 복구되어 프롬은 그곳으로 전화를 걸었다. 마침 전화를 받은 카이텔은 히틀러가 살아있다고 말했고, 프롬은 반란에서 손을 떼기로 마음 먹는다. 올브리히트는 일단 도망쳤고, 그 무렵 베크가 베를린에 도착했다.

오후 4시 30분, 베크, 올브리히트, 슈타우펜베르크는 행동을 개시했고, 슈타우펜베르크는 파리에 있던 사촌 동생 폰 호파커에게 파리에서 행동을 개시하라고 했다. 이들은 프롬을 만나 혁명을 같이 할 것을 종용했지만 프롬은 거부하고 슈타우펜베르크를 체포하려고 하나 대세에 밀려 오히려 그가 체포되어 감금된다.

오후 5시, 슈타우펜베르크를 체포하러 온 친위대 장교와 병사들이 체포되고, 반나치들이 행동을 개시해 베를린의 나치들을 체포한다. 오후 6시, 반란군이 부대를 이동해 친위대와 보안국 사령부를 점령하기 위해 부대를 이동시켰다. 그러나, 오후 6시 28분에 히틀러가 라디오 방송에 나왔다. 히틀러는 방송에서 자신이 살아있으며 음모자들은 반드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라고 연설했고, 이 방송이 나온 이후 음모자들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오토 에른스트 레머는 선전부 장관 요제프 괴벨스를 체포하기 위해 선전부로 들어갔다. 그러나 상관에게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레머는 괴벨스가 히틀러와 전화 연결을 시켜 주자 마음이 변했다. 올브리히트도 크람프니츠 사관학교장인 글레제머 대령을 찾아가나 학교장은 이를 거부한다. 이미 올브리히트에 앞서 오토 스코르체니가 찾아와 그에게 충성에 대해 설명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올브리히트는 그를 감금하고 전차부대를 출동시키나 학교장은 탈출에 성공해 전차대가 티어가르텐 승리의 탑까지 진격했을 때 그들을 제지하고 학교로 복귀시킨다.

레머는 반란에서 손을 떼고 반란군을 체포하기 시작했고, 하세 장군은 동조자를 찾았지만 히틀러가 살아있음이 확인되면서 더이상 반란에 손을 드는 사람은 없었다. 헤프텐은 혁명이 실패했다는 것을 깨닫고 암살 기도와 관련된 문서를 소각하기 시작한다. 오후 10시, 반란군에 속했던 장교 10여 명이 갑자기 배신을 하고 반란의 주동자들을 체포한다. 슈타우펜베르크는 도주하다가 남아 있던 왼팔에 총탄을 맞고 쓰러져 끌려갔다. 감금되어 있던 프롬도 구출되었고, 친위대와 보안국을 포위하고 있던 반란군의 헤르푸르트 장군은 히틀러에게 전화해 지금 반란군을 진압하고 있다고 말하며 배신한다.

7월 21일 자정, 이미 반란군과 접선한 것을 덮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던 프롬은 재빨리 군법회의를 열었다. 메르츠 폰 크비른하임, 올브리히트, 슈타우펜베르크, 헤프텐에게 사형이 내려지고 베크는 자살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베크는 두 번의 자살 기도가 모두 실패했고, 결국 사살당한다. 사형수들은 뜰로 끌려나와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비치는 가운데 사살당한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우리의 신성한 독일 만세!" 를 외치며 최후를 맞이했다. 프롬은 에리히 회프너 상급대장 또한 죽이고자 했으나 워낙 절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죽이지는 못했다.

오전 12시 30분, 처형 장소에 갑자기 오토 스코르체니 소령이 들이닥친다. 그는 상황을 보고 현재 남아 있는 자들만으로도 뭔가 얻을 수 있을거라 여기고 남아 있던 프롬, 회프너, 에르빈 폰 비츨레벤 원수 등을 현장에서 연행한다. 오전 1시, 히틀러는 라디오 방송에서 매우 분노한 목소리로 반드시 배신자들을 응징하겠다고 하며 베를린에서의 반란은 실패했다.

 

파리

파리에서도 음모 가담자들이 행동에 나섰다. 그들은 히틀러가 죽었다고 믿었고, 즉시 파리에 주둔하고 있던 게슈타포, 친위대, SD 요원들을 체포하여 구금하였다. 특히 프랑스 주둔 게슈타포 총책임자였던 카를 오베르크를 체포하는 데 혈안이 된다. 오후 6시, 서부전선 사령관 권터 폰 클루게는 반란자들의 발키리 작전을 보고받았다. 클루게는 베크에게 전화를 걸어 총통의 생사 여부를 물었고, 당연히 베크는 그에게 히틀러가 죽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클루게는 의심을 품었고, 오후 8시에는 라 로슈 기용의 사령부로 발키리 작전을 수행하라는 지령이 내려지나 거부한다. 이에 반란을 일으키자는 권터 블루멘트리와 한스 슈파이델은 클루게와 심한 논쟁을 벌였다. 이때, 호파커 등 반란자들이 도착해 이미 게슈타포를 비롯한 나치 일당을 체포했다면서 같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종용했다. 하지만 클루게는 거절했다. 클루게가 반란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반란의 실패를 의미했다. 클루게를 비롯한 반란자들은 같이 저녁 식사를 했다. 클루게는 이 자리에서 도망칠 것을 권유하나 이들은 거부했다.

오후 11시 30분, 반란군은 1,200여 명에 달하는 게슈타포, 친위대, 보안대 등의 나치 일파를 체포해 형무소에 수감시킨다. 또한 오베르크와 1940년부터 프랑스에 게슈타포를 뿌리박히게 했고, 실질적인 총책임자라 할 수 있는 헬무트 크노헨은 파리 콘티넨탈 호텔에 감금된다. 그러나 21일 오전 1시, 베를린에서의 반란이 실패했다는 히틀러의 성명이 발표되자 반란이 크게 흔들린다. 이후 오전 1시 30분, 독일 서부 전선 해군 사령관 크란케 제독이, 체포된 나치 일원을 석방하지 않으면 해군 육전대 1천 명을 투입해 반란을 진압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오전 2시, 블루멘트리는 파리 군정 사령관 칼 하인리히 폰 스퇼프나겔 대장에게 그의 해직을 알린다. 크란케는 계속해서 해군 병력을 투입하겠다고 위협하고 있었다. 이때 파리 주재 독일 대사 오토 아베츠가 중재에 나서며 교전을 막고자 노력한다. 오전 3시, 아베츠 대사는 오베르크와 스퇼프나겔을 중재해 나치 일원의 일제 석방과 반란군의 안전을 원칙으로 한다는 협의 하에 파리에서의 반란도 종료된다. 협상 이후 반란군과 친위대 장교들은 샴페인을 마시며 서로를 위로했다.

 

결과

히틀러는 "배신자" 들을 남김 없이 죽여 버릴 것을 명령했고, 나치는 롤란트 프라이슬러 판사를 재판장으로 하는 재판을 열었다. 반란자들 거의 대부분은 이미 혹독한 고문을 당했었고, 재판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사형이 언도된다. 약 7,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체포되었으며, 이 중 약 5,000명 정도 되는 사람들에게 사형이 언도되었고, 거의 대부분이 갈고리에 매달려 교수형을 당했다. 당시 히틀러는 그 모습이 '푸줏간의 돼지' 같다고 묘사했다.

먼저 재판에 선 비츨레벤, 펠기벨, 회프너, 하세, 히틀러에게 폭탄을 가지고 간 슈타우펜베르크의 사촌 동생들인 호파커, 헬도르프, 베르톨트 폰 슈타우펜베르크 등에게 사형이 언도되었다. 이 중 베르톨트는 벨트 없는 누더기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떳떳하게 행동했고, 그들을 비난하는 재판장을 반대로 비난하며 그의 엉터리 심문을 반박한다. 네베는 사건 당일 도망치나 결국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배신자 헤르푸르트와 프롬도 처형당한다. 사전에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다만 갈고리 형이 아닌 총살형을 당했다. 프롬은 자신이 처형당한다는 소식을 듣자, "그럴리 없다."며 배신을 후회했다.

맹목적인 복종으로 배신을 한 레머는 대령으로 승진하나 종전 후, 이집트로 도망쳤다가 체포되어 독일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파리에서의 반란에 동조하지 않았던 클루게는 사령관 직에서 해임되고, 총통 본영으로 소환되던 중 청산가리를 마시고 자살한다. 블루멘트리는 혐의점을 발견하지 못해 아르덴느 공세에 참가하기도 한다. 슈파이델은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지만 연합군이 수용소를 점령하면서 간신히 살아난다. 그는 종전 후 재건된 독일군에서 복무하면서 반나치 이야기를 펴낸 후 사망했다. 파리에서의 반란에 핵심 임무를 맡던 스퇼프나겔은 게슈타포들과 함께 베를린으로 자진 출두하던 중 그가 제1차 세계 대전 때 싸웠던 베르됭에서 자살을 시도했지만 두 눈만 잃고 치료 받은 후에 처형되었다.

이때 직, 간접적으로 암살 시도에 참여한 이들도 있었고, 암살 기도와 무관하면서도 한꺼번에 엮인 사람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에르빈 롬멜이 있는데 롬멜은 클루게와 마찬가지로 히틀러에 의해 청산가리를 마시고 자살한다. 반나치 인사 중에서 민간인으로 가장 유명했던 목사 디트리히 본회퍼도 이 때 체포되었다. 반란자들에게 시한폭탄을 제공했던 정보국 국장 카나리스 제독과 부국장인 오스터 장군도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쿠테타 성공 후 수상 자리에 올라 연합군과 협상할 때 민간인 대표로 나서려 했던 라이프치히 시장이었던 괴르델러는 반란이 실패하자 도망치나 술집에서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슈타우펜베르크의 추천으로 부수상에 오르려 했던 율리우스 레버는 사회주의자로 반란 전에 게슈타포에 체포되었다가 혐의가 드러나 처형당했다.

나치에 반대했던 정치 세력 중의 하나였던 크라이자우 서클의 회장인 몰트게 백작은 반란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체포, 처형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슈타우펜베르크 가문은 히틀러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슈타우펜베르크'라는 성씨를 쓰는 사람은 모두 체포하라."고 하는 명령을 내렸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슈타우펜베르크의 자녀 및 부인은 모두 전쟁이 끝날 때까지 생존하였으며 특히 장남 베어톨트(Berthold Maria Schenk Graf von Stauffenberg)는 이후 독일 연방군 장군을 지냈다.

 

연루자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 1944년 7월 21일 처형
권터 폰 클루게 - 1944년 8월 19일 자살
디트리히 본회퍼 - 1945년 4월 9일 처형
루트비히 베크 - 1944년 7월 21일 자살
프리드리히 올브리히트 - 1944년 7월 21일 처형
에리히 펠기벨 - 1944년 9월 4일 처형
에르빈 폰 비츨레벤 - 1944년 8월 8일 처형
알브레히트 메르츠 폰 크비른하임 - 1944년 7월 21일 처형
에르빈 롬멜 - 1944년 10월 14일 자살
볼프하인리히 그라프 폰 헬도르프 - 1944년 8월 15일 처형
에리히 회프너 - 1944년 8월 8일 자살

 

참고자료

영화 '슈타우펜베르크'(2004)
영화 '작전명 발키리'(2008)
ZDF다큐멘터리 'Widerstand in Uniform: Das Attentat vom 20. Juli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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