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개/분쟁&독립 전쟁

겨울전쟁 (Winter War Talvisota, 1989)

슐츠105 2013. 1. 21. 21:07

전쟁 | 핀란드 | 195 분 | 

감독 페카 파리카

출연 타네리 마케라 (마르티 하칼라 역), 사물리 에델만 (마우리 하파살로 역), 티모 토리카 (펜티 역), 베사 비에리코 (칸톨라 역)

 

줄거리
1939년. 소련은 흑해로 세력을 넓히기 위해 핀란드에 영토 일부를 요구한다. 핀란드가 이를 거절하자 두 나라 사이에는 105일간의 겨울 전쟁이 시작된다. 국경 부근의 조용한 농촌 마을에서 평화롭게 지내던 마르티와 파보 형제는 동네 친구들과 함께 징집되어 곧바로 전선으로 나간다. 핀란드군은 불과 1개 연대로 소련의 2대 사단과 맞붙어 끈질기게 전투를 치른다. 마르티는 피비린내 나는 전투 속에서 동생 파보를 비롯한 동네 친구들이 거의 다 전사하고 최후의 저지선도 뚫리려고 하는데..

 

 

 

 

 

 

 

 

 

 

 

 

 

 

 

 

 

 

<겨울전쟁 -위키발췌>

 

겨울 전쟁(핀란드어: Talvisota, 러시아어: Советско-финская война, 스웨덴어: Vinterkriget)은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39년 11월 30일 소련이 핀란드를 침공하여 발발한 전쟁으로 소련-핀란드 전쟁 이라고도 한다. 일명 '계속 전쟁' 인 제2차 소련-핀란드 전쟁과 대비하여 제1차 소련-핀란드 전쟁이라고도 한다. 스탈린은 1939년 말까지 핀란드 전체를 정복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핀란드는 1940년 3월까지 버텼으며 이때 양자는 휴전 협정을 맺고, 소비에트 연방에 카리알라 동부 지역(핀란드 영토의 10%, 산업능력의 20%에 해당)를 넘겨주었으며,[1] 소비에트 연방은 이 땅과 카리알라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 공화국을 합쳐 카리알라-핀란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세웠다. 결국 핀란드는 이웃한 발트 3국과는 달리 소련에 흡수되는 운명은 면했다.
 
겨울 전쟁 당시 프랑스와 영국이 스칸디나비아 북쪽을 통해 핀란드를 지원한다는 논의를 공공연히 하여 나치 독일이 개전 1개월도 안되어 덴마크와 노르웨이 침공을 준비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베저 작전). 또 소련군이 겨울 전쟁에서 보여준 부진이 아돌프 히틀러가 1941년 소련을 침공(바르바로사 작전)하기로 결정한 주요 요인이 되었다는 주장도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배경
 
핀란드는 1581년부터 스웨덴 왕국의 일부였고 1809년 나폴레옹 전쟁 이후에는 제정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말기 러시아에서 볼셰비키가 정권을 장악한 후 핀란드는 1917년 12월 6일 독립을 선언했다. 핀란드는 비록 당시 독일 정치를 거머쥔 나치당에 대한 호감은 거의 없었지만 독일과 경제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3] 반면, 19세기 말 - 20세기 초 핀란드에 대한 강압적인 러시아화 정책과 핀란드 내전으로 이어진 실패한 공산혁명 시도 때문에 소련과 핀란드의 관계는 긴장되고 냉각된 상태를 유지했다.
 
소련과 나치 독일[4]은 1939년 8월 23일 불가침 조약을 맺었는데[4][5], 이 조약에는 동유럽, 중앙유럽, 북유럽 여러 나라의 영토를 양국이 나눠 갖는다는 비밀 조항도 포함했다. 핀란드는 이때 소련의 '이해권'에 들어간다고 합의되었다.[5] 독일이 9월 1일 폴란드를 침공하자 소련은 동쪽으로부터 침공해 수 주 만에 폴란드는 양국이 합의한 대로 분할되었다. 이 같은 사태를 본 인접 국가들은 자신들도 같은 운명에 처한 것을 깨달았으며 실제로 스탈린은 1939년 9월 발트 3국인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에 '상호 방위 조약'을 강요해 군사 주둔권을 획책하여 실질적으로 발트 3국을 완전히 잠식했다. 이러한 '이해권' 문제의 일환으로 1939년 10월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핀란드를 방문해 다음과 같은 골자의 핀-소협정 체결을 요구했다.
 핀란드와 러시아 국경 부근의 카렐리아(Karelia), 라플란드(Lappland) 지방 등을 포함해 약 2,300㎢에 해당되는 영토의 할양.
 수리사르 섬(Surisar), 코틀린 섬(Kotllin) 섬 등 핀란드만의 4개 섬과 올란드 제도에 대한 할양.
 투르쿠(Turku), 코트카(Kotka), 항코(Hanko), 헬싱키, 비푸리(Vipuri) 등 발트 해에 속한 보트니아 만과 핀란드 만을 접하고 있는 주요 항구에 대한 소련군 주둔권과 조차 권리. 대부분 약 30년에서 40년 가량이었으며 준수할 것인가도 미지수였다.
 
당시 핀란드 대통령인 괴스티 칼리오가 이를 거부하자, 핀란드 침공에 적절한 구실이 필요했던 소련군은 1939년 11월 26일 국경지대인 만네르헤임 선 부근에서 핀란드군이 소련군을 공격했다며 이를 이유로 침공을 시작했는데, 이를 이른바 마이닐라 발포 사건(Mainilan laukaukset) 이라고 한다. 이를 근거로 소련은 11월 29일 핀란드와 외교 관계를 끊었으며 11월 30일 46만 명으로 이루어진 23개 사단으로 핀란드를 공격해 순식간에 만네르헤임 선까지 도달했는데, 이는 1939년 10월부터 이와 같은 침공을 위해 소련은 이미 국경지대에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이닐라 발포사건이 꾸며낸 주장이라는 것은 핀란드 측에서는 오랫동안 추측해온 사실이지만 최근에야 구 소련측의 옛 비밀문서들이 공개되면서 꾸며낸 주장이라는 것으로 분명히 판명되었다. 이 사건은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이었던 안드레이 즈다노프(러시아어: Andrei Zhdanov)가 비밀리에 그리고리 쿠릭(러시아어: Grigory Kulik) 장군에게 명령을 내려 소련군에게 고의적으로 포격을 한 후 핀란드군의 공격이라고 꾸민 일이었는데, 당시 핀란드군 포병의 장사정 포는 마이닐라까지 사정거리가 못 미치는 즉 핀란드-소련 국경에서 약 20km에서 25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해 있었고, 이러한 '핀란드군의 포격'에 의한 소련군의 '전사자'는 전혀 없었다.
 
이 때 소련군이 점령한 국경 지대의 마을인 테르요키(Terijoki)[6]에서는 1939년 12월 1일 핀란드 민주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오토 빌레 쿠시넨(Otto Ville Kuusinen)을 수장으로 한 이른바 '테르요키 정부'라는 괴뢰 정부가 수립되었다. 소련이 괴뢰 정부를 수립한 것에는 정치 목적[7]과 군사 목적[8]이 있었다. 하지만 그리 큰 성공은 거두지 못하였다. 이 공화국은 1940년 3월 12일까지 존속되다가 모스크바 평화 협정으로 겨울 전쟁이 끝나자 새로 수립된 카렐리야-핀란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합병되었다. 이 정부는 1956년 해체되었으며 그 후 카렐리야 공화국에 합병되었다.

 

전쟁
 
11월 30일 당시 소련군은 헬싱키, 비푸리, 투르쿠, 항코 등의 대도시를 포함해 21개 지역에 폭격을 하기 시작하였고, 특히 9시 15분부터 개시된 수도 헬싱키의 폭격에서는 90명 가량의 시민이 사망하고 300명의 시민이 부상을 당하였다. 소련군은 남카렐리아와 콜라 반도, 라플란드에서 침공을 시작했는데, 당시 11월 30일만을 기준으로 핀란드군과 소련군의 비교를 하자면 다음과 같다.
 핀란드군 : 보병군 약 337,000–346,500명 (총 3개군 9개 사단), 기동 가능전차 33대, 항공기 110여대.
 소련군 : 보병군 약 46만명(4개 집단군 26개 사단) 전차 3,200여대, 항공기 3,800여대.
 당시 핀란드군은 국경에 약 16만 2천명이 주둔하고 있었음.
 
핀란드가 동원한 병력은 33만 명에 불과하였지만 게릴라식 전투와 흰 보호색 군복을 입은 기동력이 좋은 스키부대, 현지 사정에 대한 지식에 힘입어 만만치 않은 전력을 보여주었으며, 스페인 내전에서 사용되었던 것에 기초해 만들어진 일종의 화염병이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핀란드인들은 화염병을 몰로토프 칵테일이라고 불렀는데, 전쟁 개전 초기 헬싱키 도심에 가해진 무차별 소이탄 공격으로 쏟아진 국제사회의 거센 비난에 “우리는 원조용 빵을 투하했다”고 주장했던 소련의 외무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에게 핀란드인들이 “그렇다면 이 술이나 받아라”[9]하고 화염병을 던졌던 것이다. 1939-40년의 겨울은 유난히 혹독해 -40°C 수준의 온도가 보통이었으며 이는 핀란드군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또 소련과 핀란드 양쪽의 당초 예상과 달리 핀란드의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의 침공을 지지하지 않았으며 자국민들과 나란히 소련군과 싸웠다. 다수의 핀란드의 공산주의자들이 1930년대에 소련에 가서 "공산주의 건설" 작업에 참여하다 스탈린의 대숙청에 희생된 바 있어 핀란드의 공산주의자들은 소련 정부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공개적으로 증오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겨울 전쟁은 1918년 핀란드 내전으로 표면화된 이념 갈등과 스웨덴어 사용자들과 핀란드어 사용자들 간의 언어 갈등 등 핀란드 내부의 분열을 상당 부분 치유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핀란드 국민들이 보인 단합 정신은 아직도 "겨울 전쟁 정신"이라 불린다. 다만 다수의 공산주의자들이 정치적 사상으로 인해 이때 핀란드의 징병군으로 싸우는 것이 금지되었다는 것은 언급되어야겠다.
 
겨울 전쟁에는 소련의 자만과 무능이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소련군은 그리 큰 저항을 예상하진 않았으며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인해 소련군의 지휘관들이 80%가 평화시에 희생당했었다. 이들은 보통 무능하지만 상부의 명령에 잘 복종하는 이들로 대체되었다. 그리하여 1차 세계 대전 때 이미 구식이 된 작전을 사용하기도 하는 등, 독창적인 작전을 구사하다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교과서적인 작전만을 고집했다. 또 겨울에 벌이는 전쟁, 특히 삼림 지대에서 벌이는 전쟁에 대한 준비가 핀란드군에 비해 크게 뒤져 있었다. 이들이 대량 사용한 군용 차량은 이같은 조건에 매우 취약했다. 소련군의 한 부대가 핀란드 복병들로 둘러싸인 곳에 제발로 진주해 전멸당한 라테 가 전투(Battle of Raate Road)는 지금도 군사학에서 절대 범하면 안될 중대한 실수의 예로 많이 쓰인다.
 
이 당시 소련군 편제는 2차대전 중에 확립된 편제와 크게 차이는 없었다. 그러나 그것을 제대로 운용하는 방법을 몰랐다는 점이 문제였다. 대숙청 이후 살아남아 고위 장성이 된 장군들은 숙청에 대한 두려움은 둘째치고, 대단위 야전군을 효율적으로 지휘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했다. 준장급 이상 장군의 70%가 숙청되었으니 그들의 빈 자리는 위관급 및 영관급 장교들이 대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대위로 중대를 지휘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사단을 지휘하게 되고 상관이나 동료들도 대부분 그런 판국이었으니, 이들에게 제대로 된 작전 지휘 능력을 기대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또한 이 당시만 해도 아직 항공기, 공병, 기갑병, 포병, 보병 간에 역할이 분명하면서도 잘 협조할 수 있는 전술교리를 갖지 못했다. 장교들의 지휘 능력 문제와 더불어 새로운 현대전에 어울리는 전술교리를 숙지못했다는 점도 소련군이 초전에 대패한 원인이 되었다. 사실 이 문제는 당시 대부분 군사 강국들이 공통으로 겪고 있는 문제로, 19세기적 전쟁 방식과 전술 교리에서 전차와 비행기로 대표되는 현대 전술 교리로 전환되는 과도기여서 어느 누구도 정답을 갖고 있진 않던 시기였던 것이다. 그나마 제대로 현대적인 기동전과 전술교리를 개발해서 적용한 군대가 독일군이었지만, 그들의 전술교리도 1940년 서유럽 전역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대부분 국가들이 아직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의 전술교리를 채택하고 있었고, 독일의 폴란드 및 서유럽 침공과 소련군의 겨울 전쟁 교훈이 있고 나서야 제대로 된 근대전 전술교리를 갖게 되었으니, 소련군을 무능하다고 할 일도 아니었다. 독일군이 서유럽에 침공했을 때, 프랑스군과 영국군도 이 당시 소련군 못지않은 실수를 연발했고, 독일군에 호되게 당한 이후에야 겨우 새로운 전술교리를 채택하게 된다.
 
핀란드의 장비 부족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전쟁 초기에는 기초 훈련을 받고 있던 군사들만이 군복과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나머지는 자신들의 옷에 적당히 표장을 하였으며 일부는 자신들의 총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들쭉날쭉이 된 "군복"에는 아이모 카얀데르 총리의 이름을 따 "카얀데르 모델"이라는 애칭이 붙여졌다. 핀란드군은 적군에게서 탈취한 장비·무기·탄약으로 부족한 장비를 충당하려 노력하였다. 다행히도 핀란드는 러시아에서 독립한 이후에도 소총을 바꾸지 않아 소련군의 소총탄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10] 뿐만 아니라 핀란드제 수오미 기관단총도 사용되었는데, 이에 자극받은 소련이 PPSH41 기관단총을 개발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외국의 지원
 
세계의 여론은 핀란드 편이였다. 세계대전이 아직 전면적으로 시작하지 않은 상황에서 겨울 전쟁은 당시 진행되던 유일한 전쟁이었다. 일반적으로 소련의 침공은 전적으로 부당하다고 인정되었다. 외국의 여러 단체들은 핀란드에 의약품과 같은 물자를 지원해 주었다. 미국과 캐나다의 핀란드계 이민 인구는 핀란드에 돌아갔으며 외국에서 많은 수가 핀란드에 가서 지원병으로 싸웠다.[11] 스웨덴도 이때만큼은 중립을 지키지 않고 군수품과 현금, 신용, 인도주의에 근거한 지원을 핀란드에 해주었다. 8700명의 스웨덴인 지원병이 핀란드를 위해 싸웠다. 헬싱키의 외국 특파원들은 전투에 있어서 핀란드군의 독창력과 성공에 대해 때로는 크게 과장되게 보도를 하였다.
 
전쟁 발발 1개월도 채 안되어 소련의 지도부는 작전 포기를 고려하기 시작했지만 1월말이 되어서야 핀란드 정부에게 스웨덴 정부를 통해 예비 평화 제의를 전달하였다. 그때까지 핀란드는 말 그대로 죽느냐 사느냐를 놓고 싸운 것이었다. 이 평화 제의 소식이 프랑스와 영국 정부에 알려지자 핀란드에 대한 군사 지원의 동기는 크게 변했다. 핀란드는 "레닌그라드 주변 자국 영토를 최대한 유지하기 위해 싸우는 것"뿐이었다. 물론 핀란드와 외국의 일반 국민들은 이에 대해서 전혀 몰랐으며 핀란드는 아직도 자신의 존속을 놓고 싸우고 있다고 생각했다. 1940년 2월 연합국들은 지원을 제의했다. 노르웨이의 항구 나르비크를 통해 10만의 병력이 투입되어 스웨덴을 통해 핀란드를 지원한다는 계획으로 내세워졌다. 그러나 실제 핀란드 지원에 들어가도록 계획된 병력은 그 일부뿐이었다. 이 계획은 나르비크와 스웨덴의 철광 산지를 점령하여 독일로 수출되는 것을 막기 위한 구실이며 그리하여 연합군과 독일군의 각축장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노르웨이와 스웨덴은 연합군의 통과를 거절했다. 실제로 전쟁 이후 연합군의 사령관은 소련군과 전투 상황을 피하라는 지시를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노르웨이와 스웨덴을 거치지 않고 핀란드의 부동항 펫사모를 통해 연합군을 투입하자는 제안은 무시되었는데 이는 프랑스와 영국이 당초부터 나르비크와 스웨덴의 철광 산지를 장악하는 데 목적이 있었음을 뒷받침한다.
 
페르 한손(Per Albin Hansson)총리의 스웨덴 정부는 무장군이 스웨덴 영토를 통과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을 거절했다. 스웨덴은 겨울 전쟁에 대해서 중립을 선언하지 않았지만 프랑스·영국과 독일·소련간의 전쟁에 대해서는 중립을 지켰다. 프랑스·영국군의 통과를 허용하는 것은 국제법상 중립국이 취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라는 판단에서였다.
 
스웨덴 내각은 또 핀란드가 여러 차례 요청한 스웨덴 정규군의 지원을 거절했다. 결국에는 장비와 탄환 지원도 더 이상 계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인했다. 핀란드는 전쟁이 지속되기를 희망한 연합국들과 전쟁이 자국까지 퍼지는 것과 핀란드 패전의 경우 난민 발생을 우려해 전쟁의 조속한 종결을 희망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사이에 외교적으로 입지가 좁았다. 독일 역시 협정에서 양보된 것은 나중에 충분히 다시 차지할 수 있다면서 평화 협정을 체결하라는 권고를 했다.
 
2월말 핀란드의 총사령관 칼 구스타프 만네르헤임(Carl Gustaf Mannerheim)은 군사 상황 전개가 불리해질 것으로 판단하여 정부가 2월 29일 평화 협상을 시작하는 원인이 되었다. 같은 날 소련군은 비푸리 공격을 시작하였다.
 
핀란드가 평화 협정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프랑스와 영국이 알게 되자 그들은 재차 지원을 제의했다. 이번에는 핀란드가 3월 12일 이전 지원을 요청한다는 조건하에 50만 병력을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이 병력 중 6천명만이 핀란드에 투입될 계획이었으며 나머지는 스칸디나비아 북부 나르비크와 스웨덴의 철광 산지를 점령하는 데 쓸 생각이었다.


정전 협정
 
겨울이 끝나면서 소련이 전쟁에서 손을 뗄 의향이 있는 것이 분명해졌다. 독일의 대표들은 핀란드에게 소련과 협정을 할 것을 권했다. 소련군은 엄청난 수의 사망자를 냈으며 소련 정부에게 이는 큰 국제적 망신거리였다. 봄이 오면서 해동으로 소련군이 삼림 지대에서 자칫 수렁에 빠질 상황에 놓였다. 그리하여 2월 12일 평화 조항 초본이 핀란드에 전달되었다. 독일뿐만이 아니라 스웨덴도 핀란드가 무너질 것을 걱정하여 겨울 전쟁이 빨리 종전되기를 희망했다. 핀란드에 극히 불리한 조항을 받고 핀란드 내각이 망설이는 동안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5세는 핀란드의 스웨덴 정규군 지원 요청을 거절한다고 공식 발표하였다.
 
2월말이 되자 핀란드군의 탄환은 바닥이 났다. 소련군은 그때까지 많은 사상자만 내면서 넘지 못하던 만네르헤임 선을 뚫는 데 성공하였다. 결국 2월 29일 핀란드 정부는 협상을 시작하기로 결정, 1940년 3월 6일 양국은 정전 협정에 서명했다.[12] 4개월간의 전쟁 후 소련군에서는 최소 12만 7000명이 사망하였다.[13] 핀란드군은 2만 7000명 정도의 사망자밖에 내지 않았지만,[14] 핀란드는 많은 것을 잃었다.


모스크바 평화조약
 
3월 12일 모스크바 평화조약을 통해 핀란드는 제2도시 비푸리(Viipuri)를 포함한 공업 중심지인 핀란드령 카렐리야(핀란드어로 카리알라) 영토를 소련에 넘겼다(협상 당시 많은 부분을 핀란드군이 점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 이는 핀란드 영토의 10% 가까이 되었다. 핀란드 인구의 약 12%인 42만 2000명의 카렐리야인들은 거주지를 잃었다. 이 조약으로 소련 영토가 된 지역에 있던 핀란드군과 민간인들은 속히 대부분 핀란드로 대피되었다.
 
핀란드는 이외에도 살라(Salla) 지방과 바렌츠 해의 칼라스타얀사렌토 반도(Kalastajansaarento peninsula), 핀란드 만의 섬 4개를 소련에 넘겨야 했다. 항코(Hanko) 반도도 소련에 군사 기지로 30년간 임대되었다.
 
핀란드 국민들은 가혹한 평화 조약 조항에 당혹했다. 전쟁에서 잃은 영토보다 평화로 잃은 영토가 더 많은 듯했다. 국제 여론, 특히 스웨덴의 동정은 무의미했다. 그리하여 핀란드인들은 나치 독일의 지원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소련에 대한 복수전이 정당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1년 후 제2차 소련-핀란드 전쟁이 발발, 전쟁은 재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