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스페인, 독일, 이탈리아 109분
감독 켄 로치
주연 로사나 파스토르, 마르크 마르티네즈, 아이사 볼라인, 이안 하트, 탐 길로이
랜드 앤 프리덤》(Land and Freedom)은 짐 알렌이 쓴 각본을 바탕으로 영국의 영화 감독 켄 로치가 감독한 에스파냐 내전 당시 좌익계 민병대원들을 그린 영화다. 이 영화는 영국 공산당 당원인 실업자 데이비드 카(이안 하트)가 에스파냐 내전에서 공화파로 참전한 이야기다.
이 영화는 칸느 영화제 심사위원상과 국제 영화 비평가 협회의 국제비평가상을 수상했다.
1994년 영국 리버풀의 한 시영 공립 주택. 한 노인이 심장마비로 병원 후송 중 앰브런스 안에서 사망한다. 그날밤 그의 유품을 정리하던 손녀는
낡은 가방 하나를 발견한다. 오래된 편지뭉치, 스페인 내란에 관한 신문 스크랩, 청춘의 할아버지와 그분의 동지들이 무장을 한 채 찍은
'1936년 바르셀로나'라는 문구가 쓰인 옛 사진들과 붉은 리본으로 말라붙은 흙을 싸둔 손수건, 그리고 스페인 공화파를 옹호하며 모임을 선전하는
전단이 들어있다.
1936년 리버풀의 모임에서 한 스페인 시민군이 노동자들의 참전을 독려하는 열정적인 연설을 한다. 그는 프랑코의
스페인 공화정부에 대한 반란상황을 설명하면서, 유럽의 민주정부들의 도움을 거부하고 국제 노동자들의 참여를 호소한다. 그의 호소에 감동된 데이빗은
약혼녀 키티에게 프랑코와 싸우기 위해 스페인에 가겠다고 한다. 그는 실업수당을 받고 배고픈 시위를 하는 영국에서의 생활에 염증이 난 것이다.
변화를 원하는 그를 키티는 마지못해 보낸다. 스페인을 가로지르는 기차안에서 데이빗은 '품(POUM)'혁명당을 찾아가는 프랑스인 베르나르와 여러
시민군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군사훈련을 받기 위해 한 훈련캠프에 소속되고. 거기서 그들은 메이트라는 불같은 젊은 여인이 캠프의
규율에 반항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는데...
스페인 내전 - 위키 백과 발췌
스페인 내전(스페인어: Guerra Civil Española)은 스페인 내란 또는 에스파냐 내란이라고도 한다. 마누엘 아사냐가 이끄는 좌파 인민전선 정부와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중심으로 한 우파 반란군 사이에 있었던 내전이다.
1936년 7월 17일 모로코에서 프랑코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내전이 시작되었고, 1939년 4월 1일에 공화파 정부가 마드리드에서 항복하여 프랑코측의 승리로 끝났다. 내전으로 인해 스페인 전지역이 황폐화되었다.
반파시즘 진영인 인민 전선을 소비에트 연방과 각국에서 모여든 의용군인 국제 여단이 지원하고, 프랑코파를 파시스트 진영인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정권, 그리고 살라자르가 집권하고 있던 포르투갈이 지원하여 제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 양상을 띠었다. 아울러 스페인의 가톨릭교회와 왕당파는 프랑코파를 지원하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공화국 정부에 군수 물자를 지원하였으나 국제 연맹의 불간섭 조약을 이유로 스페인 정부에 대한 지원에 미온적이었다. 미국은 공식적으로 중립을 표방했지만, 공화군 측에는 비행기를, 프랑코 측에는 가솔린을 팔았다.
1936년 2월 총선 결과 스페인 사회주의노동자당, 좌파 공화파, 스페인 공산당 등으로 구성된 인민전선이 승리하여 473석 중 289석을 확보하였다. 의회를 장악한 인민 전선은 토지개혁을 포함한 개혁 정책들을 시행하였다. 이에 대해 스페인의 지주·자본가·로마 가톨릭 교회의 불만은 고조되었고, 마침내 1936년 7월 17일 스페인령 모로코에 머물고 있던 프랑코와 스페인 군부가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의 발생
반란군의 형식상 지휘자는 왕당파 장군인 호세 산후르호였으며 에밀리오 몰라는 부사령관의 자리에 있었다. 몰라는 봄부터 반란의 중대한 계획들을 수립하고 있었지만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7월이 될 때까지도 주저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다른 공모자들이 프랑코를 "1936년 미스 카나리아"라 비아냥대기에 이를 지경이었다. 그러나 반란군의 핵심 가운데 핵심은 프랑코일 수밖에 없었다. 프랑코는 사관학교의 총장이자 1934년 사회주의자 진압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프란시스코 프랑코
1936년 7월 17일 당시 프란시스코 프랑코와 마누엘 고데스 요피스는 스페인 변방의 섬에 있었다. 이는 제2공화국의 총리 카사레스 키로가가 군부의 군사행동을 우려하여 내린 조치였다. 요피스는 발레아레스 제도에 프랑코는 카나리아 제도에 있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는 처지가 된 반란의 공모자들은 두 장군에게 반란의 시작을 알리는 암호를 타전하였다. 암호는 "스페인 전지역 쾌청함"이었다.
암호를 받은 프랑코는 예인선을 타고 주둔지를 탈영하여 공항으로 이동하였다. 영국의 MI-6 소속 정보원이었던 허그 포랄드 소령은 스페인령 모로코에서 프랑코와 후안 마르크 오르디나가 스페인의 아프리카 주둔군 진영에서 접선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이들은 곧바로 군대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공화파 정부의 대응
공화파 정부는 쿠데타의 징후를 포착하고 있었으나 이를 사전에 차단하지는 못했다. 뿐만 아니라 초동 진압에 실패함으로써 반란군이 군사적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공화파 수병들의 모습
반란 초기 반란군에 맞서 싸운 것은 공화파 정부를 지지하는 시민들이었다. 마드리드는 많은 시민의 희생 끝에 반란군에게 몬타나 요새를 점령당하였으나 마드리드를 지킬 수 있었다. 바르셀로나에서는 아나키스트 시민군이 조직되어 반란군과 결전을 치러 승리하였다. 이 과정에서 시민군은 발레아레스 제도에서 진군한 요피스를 체포하여 처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프랑코군이 아라곤과 카탈리나 전역을 점령하게 되자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는 고립되었고 이로 인해 내부마저 혼란을 겪게 되었다.
내전 초 공화파는 발렌시아와 스페인 동부 대부분을 지켜내고 있었다. 스페인 동부 중에서 프랑코파의 수중으로 넘어간 곳은 아스투리아스 지방, 칸타브리아 지방과 바스크 지방의 일부 정도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프랑코파의 점령지역은 확대되어 갔으며 결국 안달루시아 지방과 수도 세비야까지 함락되었다. 공화파 정부의 대응에 대해 노엄 촘스키는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스페인 공화국의 정부는 마비상태였다.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서 노동자들은 스스로 무장하여 시민군으로서 반란군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공화국 정부는 군사 반란만큼이나 무장한 노동자 군대를 두렵게 느꼈기 때문에 반란군의 손에 희생당하는 그들을 방관하였다. 항구에는 정부의 군함이 있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그 결과 반란군은 스페인 전역을 점령하였고 결과적으로 정부 역시 무너지고 말았다. — 노엄촘스키, 2005”
내전이 일어나자 사람들은 어느 쪽이든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분명히 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코파측에 가담한 세력으로는 카를리즘, 정통주의와 같은 왕당파, 그리고 로마 카톨릭 및 보수주의자와 왕정을 지지하는 자유주의자 같은 세력들이 있었다. 한편, 공화파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 바스크와 카탈루냐 민족주의자, 자유주의와 같은 세력들이 결집하였다.
당시 스페인의 정치는 좌파가 주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좌파는 다양한 성향의 세력들로 나뉘어 있었다. 스페인 사회주의노동자당은 코민테른에 대표자를 파견하고 있었고 소련은 이를 이용하여 스페인의 정치에 개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스페인 사회주의노동자당은 코민테른 5차 대회 및 7차 대회의 참석을 거부하는 등 소련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였다. 이후 소련의 코민테른 강령에 따른 스페인 공산당이 결성되었다. 한편 우파의 대표적인 정치 세력은 16개 우익 정당의 연합체인 팔랑헤가 1931년 결성되었다. 이들은 모든 분야에서 격렬히 대립하였다. 제2공화국 정부의 개혁 법률들은 우익을 결집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프랑코파측을 지지한 사람들은 가톨릭 성직자, 지주, 기업가, 그리고 파시스트 군대에 병력을 제공한 바스크 지방 외곽 지역의 가톨릭 신자들 등이었다. 반면, 제2공화국 정부의 지지자들은 대도시 노동자, 소작농, 고학력 중산층들이었다. 특히 공화국 정부는 자산이 없는 서민층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공화파
공화파는 소련, 멕시코, 그리고 국제 사회주의 운동가들로 구성된 국제 여단으로부터 무기와 병력을 지원받았다. 공화파의 중심 세력은 노동자, 소작농, 도시 서민 등이었으나, 공산주의나 아나키즘 혁명에 맞서 자유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아스투리아스 지방와 카탈루냐 지방의 일부 자본가들 역시 공화파를 지원하였다. 정부군 측은 스스로를 "충성파", "인민 전선", "공화파", "정부파" 등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적인 프랑코 반란군은 이들 모두를 "빨갱이"라 지칭하였다.
한편, 로마 가톨릭이 강세인 바스크 지방과 카탈루냐 지방과 보다 급진적인 좌파가 우세하였던 갈리시아 지방은 마드리드의 중앙 정부에서 분리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어왔다. 그러나 이들의 분리 독립 청원은 중앙 정부에 의해 기각되었다. 이러한 모든 세력들이 연합하여 "인민 공화군"(스페인어: Ejército Popular Republicano)을 구성하고 있었다.
프랑코파
제2공화국 정부에 의해 "반란군", "역적", "파시스트" 등으로 불린 프랑코파 세력은 권력의 중앙집중과 반공주의를 공통 분모로 하는 여러 세력의 연합이었다. 이들은 왕당파, 지주, 유산가, 보수주의자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여러 운동 세력에 의해 스페인이 분열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일부 사람들은 정부의 반 교권주의로부터 교회를 지키기 위해 프랑코파 측을 지지하였다. 당시 스페인 내에서는 급진적인 공화파에 의해 교회 파괴와 반 기독교 운동이 극심하였다. 이러한 교회 공격에서 종종 성직자가 살해되는 일도 벌어졌다. 프랑코파 측은 이들의 만행이 극에 달해 전쟁 전에 이미 7,000여 명 이상의 성직자가 학살당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반란군은 당초부터 프랑코가 전권을 쥐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프랑코와 대등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몰라의 사고사 (1937년 6월) 등이 겹쳐 권력의 집중이 진행되어, 팔랑헤 당 (창시자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 후작은 인민전선 측에 붙잡혀 사형당함)과 다른 정당을 통합, 개편하고 그 당수로 프랑코가 취임, 다른 정당 활동을 엄금하고 군사독재 체제를 굳혔다.
국제사회의 개입
제1차 세계대전을 겪은 유럽의 각국은 스페인 내전이 또다른 세계대전으로 확대되는 것을 우려하였고 국제 연맹을 통하여 각 국의 군사개입을 금지하는 불간섭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공화파와 프랑코파 양측 모두 세계 각 국의 지원을 받았다. 영국과 프랑스는 공식적으로 중립을 표방했으나 공화파에게 각종 물자를 조달하였다. 프랑코파 측은 히틀러의 나치 독일과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왕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아일랜드 정부는 스페인 내전에 대해 중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아일랜드인들은 각자의 정치 신념에 따라 양측 모두에 참전하였다. 아일랜드의 청년 250명이 공화파를 위해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는 동안 아일랜드 공화국군의 에오인 오더피가 이끄는 "푸른셔츠 단" 700명은 프랑코파 측을 위하여 참전하였다. 이미 에스타두 노부 체제의 독재가 이루어지고 있던 포르투갈에서는 비리아토스라 불린 8,000명의 자원병이 프랑코의 휘하로 들어갔다. 포르투갈은 많은 군수품을 프랑코 측에 지원하였다. 루마니아의 극우주의 세력이었던 철위대 역시 자원병을 프랑코 측에 제공하였다.
프랑코파 반란군에게 가장 큰 지원을 한 곳은 히틀러 치하의 나치 독일과 무솔리니 파쇼 치하의 이탈리아였다.
반란을 일으킨 프랑코는 히틀러와 무솔리니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히틀러는 스페인 내전 기간 동안 세 차례의 주요 작전을 수행하였다. 첫 작전 "불의 마법"은 1936년 1월 말에 진행되었으며 프랑코에게 군수물자를 지원하기 위하여 52척의 군함과 20여기의 수송기 및 6대의 전투기를 동원하였다. 같은 해 9월 두 번째 작전 "오토"를 통해 히틀러는 프랑코에게 24대 이상의 1호 전차를 제공하였다. 10월에는 세 번째 작전을 통해 600-800명의 독일군이 직접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였다. 히틀러의 가장 큰 지원은 콘도르 사단을 스페인 내전에 투입한 것이었다. 나치 자원병으로 구성된 콘도르 사단은 1936년 3,500여명이 참전한 이래 내전 기간동안 19,000여명이 투입되었다.
무솔리니는 스페인 내전의 공을 히틀러가 독차지하는 것을 바라만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히틀러 보다 많은 군사를 스페인 내전에 투입하기로 결정하였다. 무솔리니는 내전 기간 동안 50,000명 이상의 군대를 스페인 내전에 참전시켰다.
공화파에 대한 지원
<국제여단>
유럽 전역을 포함한 세계 각국에서 스페인의 '민주공화국'을 지원하기 위해 의용병이 모여들었다. 아나키즘, 사회민주주의, 공산주의, 극좌파, 자유주의를 아우르는 다양한 이념을 가진 이들은 국제 여단이라 불렸으며 스페인 내전을 파시즘을 저지하기 위한 최전방으로 여겼다. 53개 국가에서 모인 약 30,000명의 국제 여단은 스페인 내전 기간 동안 헌신적으로 전투에 참가하였으며 마드리드 공방전에서 파시스트 군대를 저지하는 업적을 달성하기도 하였다. 미국인 의용병으로 구성된 부대는 에이브러햄 링컨 여단으로 캐나다 의용군은 메켄지-파피뉴 여단으로 불렸다. 국제 여단의 상당수는 코민테른에 의해 모집되어 루마니아 공산당에서는 5백명의 공산당원이 참전하였다. 그러나 윈스턴 처칠의 조카 에스먼드 로밀리와 같은 자유주의자들 역시 파시즘에 대항하기 위해 국제 여단에 합류하였다. 당시 국제 여단의 자원병으로 참여한 사람 중에는 헤밍웨이와 같은 지식인도 상당수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불간섭 조약을 체결하여 어정쩡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제 여단의 참전은 공화파에게 사실상 유일한 병력 지원이었다.
소련
소련은 스페인 공화국 정부에게 군사 물자를 지원하였다. 내전 기간 동안 지원된 군수 물자는 비행기 806기, 탱크 362대, 야포 1,555문 등이었다. 또한 소련은 국제 연맹의 불간섭 조약을 무시하고 소수의 군사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소련은 약 700명의 군인을 파견하였다. 독일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의용군"이라 불린 이들은 전차와 전투기를 운용하였다. 이들의 참전은 "X 작전"이라 불렸다.
멕시코
당시 멕시코 내부의 여론은 다수가 프랑코파의 승리를 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메리카의 다른 나라와 달리 멕시코는 공식적으로 스페인 공화국 정부를 지원하였다. 그러나 실제 지원 규모는 2백만 달러 규모에 불과하였다. 멕시코는 멕시코 공군이 보유하고 있던 벨랑카 CH-300 등의 전투기를 지원하였다.
경과
내란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는 프랑코파 반란군의 우세로 진행되었다. 1937년 바스크 북부지방과 아스투리아스 지방이 반란군에 점령되었고, 1938년 12월 카탈루냐 지방이 반란군의 공격을 받아 1939년 3월 5일 공화파 정부는 프랑스로 망명하였다. 3월 7일에는 마드리드에서 공화파 내의 비 공산당 세력이 공산당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또다른 내란이 발생하였고 3월 28일 반란군이 마드리드에 입성하였다.
1936년
내전 발발 직후인 7월 20일 반란군의 사령관이었던 산후르호가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한다. 이로 인해 반란군 측의 지휘 체계는 양분되어 북방에서는 에밀리오 몰라가 남방에서는 프랑코가 지휘권을 갖게 되었다.반란 5일째인 7월 21일 반란군은 스페인 해군의 기항 페롤을 점령한다. 몰라 휘하에 있던 베오르레기 카네 대령은 7월에서부터 9월까지 스페인 북부의 기푸스코아 주를 점령해 나갔다. 키푸스코아에는 파시스트에 맞선 공화국 군대가 고립되어 있었다. 9월 5일 격렬한 전투 끝에 프랑스인으로 구성된 공화파 군대가 지키던 이룬이 반란군측에 점령당하였다. 9월 13일에는 바스크 지방의 주도 빌바오의 관문인 산 세바스티안이 반란군에게 항복하였다. 공화국 정부군은 9월 말까지 비즈카야에서 저항하였다.
9월 21일 살라망카에서 회합을 갖은 반란군은 프랑코를 총사령관으로 추대하였다. 9월 27일 톨레도에서 벌어진 알사자르 공방전이 프랑코의 승리로 끝나자 반란군은 전황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10월이 되자 프랑코의 반란군은 마드리드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11월 6일 공화국 정부는 전투를 피해 발렌시아로 옮겨졌고 주요한 전투는 11월 8일에 시작되었다. 프랑코의 반란군은 11월 27일까지 3,000여 명의 국제 여단이 지키고 있는 마드리드를 향해 맹공을 퍼부었으나 함락에 실패하였다. 프랑코는 전략을 바꿔 마드리드를 포위하여 고립시키고 전폭기를 동원하여 폭격하였다. 마드리드는 그 후로도 2년 동안 고립된 채 반란군과 싸웠다.
1936년 전황
청색 프랑코파 반군
적색 공화파 통치령
1937년
1937년 1월과 2월에 걸쳐 프랑코는 마드리드를 함락하고자 공격하였으나 또 다시 실패하였다. 2월 8일 말라가가 프랑코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2월 21일 국제 연맹의 불간섭 조약이 발효됨에 따라 파시스트 측의 외국 병력 참전은 불법 교전으로 간주되게 되었다. 그러나 3월 7일 나치 독일은 의용군이라는 명목으로 콘도르 사단을 파병하면서 하인켈 He 51 전폭기를 스페인에 투입하였다. 4월 26일 독일의 전폭기는 게르니카를 폭격하여 수백명의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이틀 뒤 프랑코는 게르니카를 함락하였다.
게르니카 함락 후 공화군은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프랑코가 마드리드 함락을 위해 전력을 쏟아붇는 사이 공화군은 세고비아를 탈환할 수 있었다. 6월부터 벌어진 빌바오 전투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7월 3일 공화군은 반란군의 부사령관이었던 에밀리오 몰라를 사살하였다. 공화군은 전력을 다해 마드리드를 포위하고 있던 프랑코군에 대적하기로 결심하였다. 두 군대는 마드리드 근교에서 벌어진 브루네테 전투에서 정면으로 맞붙어 싸웠다. 이 전투의 결과 공화군은 마드리드 포위를 분쇄할 수 있었다.
8월이 되자 프랑코는 아라곤 지방을 공격하였으며 산탄데르를 점령하였다. 이후 두 달간 벌어진 아스투리아스 지방의 전투에서 바스크 지방의 공화군은 끝내 항복하였다. 이후 프랑코의 군대는 스페인 북부지역을 점령해 나갔으며 11월에는 발렌시아로 진격해 오기 시작하였다. 스페인 공화국의 정부는 바르셀로나로 옮겨졌다.
1938년
프랑코파 군대가 테루엘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내전의 상황은 프랑코파측에게 유리하게 되었다. 테루엘은 오랫동안 프랑코파가 강세를 보이던 곳이었다. 1938년 1월 공화군은 테루엘을 점령하였다. 프랑코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공군의 지원을 받아 테루엘을 공격하였다. 2월 22일 피아를 가리지 않는 무차별 폭격 끝에 테루엘은 다시 프랑코파의 수중으로 떨어졌다.
3월 7일 프랑코 측은 아라곤 공격을 감행하였다. 4월 17일 프랑코파의 군대가 지중해 연안까지 진격함으로써 정부 진영은 남북으로 양분되었다. 5월이 되자 정부는 강화 조약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프랑코가 정부에 대해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여 협상은 결렬되었고 프랑코군은 발렌시아를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7월까지 계속된 공방의 결과 공화군은 자신들의 XYZ 방어선을 사수할 수 있었다.
공화국 정부는 에브로 전투가 진행 중이던 7월 24일부터 11월 26일까지 대대적인 지원 호소에 나섰다. 그러나 정부의 지원 호소는 실패하였는데, 이미 영국은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히틀러의 야심을 포기하게 하는 댓가로 프랑코와 뮌헨 협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서방 세계의 연합에 의한 반파시스트 전선이라는 정부의 희망은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아프리카 군단이 주축이된 4만명의 프랑코파 군대를 상대로 공화군은 에브로 전투에서 분투하였으나 이미 병력과 무기에서 절대적으로 수세에 몰려있던 공화군은 결국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신년을 이틀 앞둔 세밑에 프랑코는 군대를 카탈루냐 지방으로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1936년 전황
청색 프랑코파 반군
적색 공화파 통치령
1939년
프랑코군은 신년이 시작된 두 달 동안 바람과 같이 카탈루냐 지방을 점령해 나갔다. 2월 27일 영국과 프랑스는 프랑코 체제를 인정하였다. 마드리드를 비롯한 몇몇 지역만이 공화군 최후의 보루가 되었다. 인민전선파 내부에서도 철저한 항전을 목표로 한 스페인 공산당과 전의(戰意)를 상실한 아나키스트 사이에 내분이 발생했다. 3월 28일 마드리드가 점령되었고 그 다음날에는 발렌시아 역시 점령되었다. 4월 1일 프랑코는 라디오 연설을 통해 스페인 공화국 정부가 항복하였음을 선언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프랑코가 집권하자 잔혹한 보복이 뒤따랐다. 수천명의 공화군이 투옥되었고 최소 30,000명이 처형되었다. 이 때의 희생자 수가 50,000에 달한다는 기록도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강제 노역을 해야만 하였다.
전쟁 후 공화파의 상당수가 망명하였다. 프랑스로 피신한 사람의 수는 50만 명에 달한다. 1944년 프랑코에 대항하는 게릴라인 스페인 마퀴스가 결성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레지스탕스와 연대하여 나치에 맞섰다. 스페인 마퀴스는 1950년대까지 활약하였다.
결과
내란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의 수는 5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또한 내전 후에도 승리한 반란군 측은 반대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 및 보복을 시작했다. 심지어는 영아를 조직적으로 유괴해 인신매매까지 자행하였다.
스페인의 총통이 된 프랑코는 1975년 사망할 때까지 일인독재정치를 계속하였다. 또한 프랑코의 사후(事後)에 부르봉 왕조가 복고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관련문학
스페인 내전은 많은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었는데,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조지 오웰의 《카탈루냐 찬가》 등은 문학적 가치뿐만 아니라 내전에 직접 참전한 사람들의 기록으로서 의미가 있다.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랜드 앤 프리덤》도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영화 《판의 미로》는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한 판타지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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