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개/스페인 내전

헤밍웨이 & 겔혼 (Hemingway and Gellhorn, 2012) 6.1

슐츠105 2013. 4. 27. 21:43

드라마, 로맨스/멜로 | 미국 | 154 분

감독 필립 카우프먼

출연 니콜 키드먼 (겔혼 역), 클라이브 오웬 (헤밍웨이 역), 로버트 듀발 (러시아 장군 역), 로드리고 산토로 (자라 역)

 

종군기자였던 헤밍웨이의 세번째 부인인 겔혼과의 만남에서부터 이별까지를 그린 전기 영화

 

리뷰 : http://blog.naver.com/josoni/100160429292

 

 

 

 

 

 

 

 

 

 

 

 

 

 

 

 


 

어니스트 밀러 헤밍웨이 (Ernest Miller Hemingway, 1899년 7월 21일 - 1961년 7월 2일)

 

 

 

미국 소설가이자 시인이다.


생애
1899년 7월 21일 일리노이 주 오크 파크(현재의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의사, 어머니는 원래 성악가로 여섯 형제 중 장남이었다. 아버지는 활동적인 인물로 낚시 및 사냥, 권투 등을 즐겼다. 고등학교 졸업 후 1917년 지방 신문에 "캔자스 시티 스타"지의 인턴 기자가 되었다가 그만두었고, 1918년 적십자의 일원으로 이탈리아 북부의 호사루타 전선에 엠뷸란스 기사로 자원하여 중상을 입게 된다. 전후 캐나다 토론토에서 "토론토 스타"지의 프리랜스 기자를 지냈고, 특파원으로 파리로 건너가 거트루드 스타인 등과 사귀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행동파 작가로 스페인 내전에 파시스트이자 후에 군사 독재자가 된 프랑코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참여하였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행동적인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을 썼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무기여 잘 있거라》 등은 그러한 경험이 잘 녹아 있는 작품이다. 당시 그의 소설은 헐리우드 영화의 소재를 제공하여 영화화되기 하였다.

단편은 짧은 문체의 작품이 많으며, 이들은 대실 해미트, 레이먼드 챈들러와 이후 계속되는 하드보일드 문학의 원조가 되었다.

1954년 《노인과 바다》가 크게 평가되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노벨 문학상은 별도의 작품이 아닌 작가의 업적과 작품 전체에 주어진다.). 그러나 이 해에 두번 항공기 사고를 당한다. 두 번의 항공기 사고에서 기적적으로 생환했지만, 중상을 입고 시상식에는 나가지 못했다. 이후 그의 특징이었던 강인한 신체와 활동적인 생활을 돌려받을 수 없었다.

만년에 사고의 후유증에 인해 우울증에 시달리고, 집필 활동도 점차 막히기 시작한다. 결국 1961년 아이다호 주에서 엽총으로 자살했다.

남동생인 레스터 헤밍웨이는 작가로, 손녀 마고 헤밍웨이와 마리엘 헤밍웨이는 여배우가 되었다.

《해류 속의 섬들》(Islands in the Stream)의 무대나 된 바하마의 비미니 섬에는 그가 머물렀던 호텔의 방을 개조하여 개장한 〈어니스트 헤밍웨이 박물관〉이 있어서, 유품 등이 전시되었었지만, 2006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생애 동안, 그는 다음과 같은 상을 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의 무공으로 은공훈장 수여
1953년 노인과 바다로 퓰리처상 수상
1954년 역시 노인과 바다로 노벨 문학상 수상


사후
헤밍웨이 박물관(Museo Momerial 'Ernest Hemingway')은 쿠바 아바나에서 멀지 않은 곳에 헤밍웨이가 살았던 집에 있다. 1928년 헤밍웨이가 쿠바를 방문한 후 줄곧 머물며 '노인과 바다' 등의 작품을 쓴 곳으로 내부는 당시의 상태를 보존하고 있으며 '노인과 바다'책이 있는 방, 타이프라이터, 동물박제, 9,000권의 장서가 보관되어 있다.

 

 

마르타 엘리스 겔혼 Martha (Ellis) Gellhorn

(http://en.wikipedia.org/wiki/Martha_Gellhorn)

 

1908. 11. 8 미국 미시시피 세인트루이스∼1998. 2. 15 영국 런던.

 

미국의 언론가·소설가.

여성 최초의 종군기자 중 한 사람으로,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삶과 아픔을 숨김 없이 묘사했다. 미국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짧은 결혼 생활을 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마르타 겔혼은 헤밍웨이의 '각주'(脚註)에 불과한 존재가 되기를 거부했다. 약 60년 동안 활동하면서 그녀는 여러 전쟁을 취재했으며, 소설로도 많은 각광을 받았다.

겔혼은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브린모 대학에 다녔으나 1927년 작가가 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었다. 잡지〈뉴 리퍼블릭 New Republic〉을 비롯한 여러 출판물에 글을 기고한 뒤 연방긴급구제국(Federal Emergency Relief Administration)에 일자리를 얻어 미국을 순회하며 대공황에 관해 보도했다. 〈내가 목격한 재난 Trouble I've seen〉(1936)은 당시의 경험을 기록한 책이다.

1937년 그녀는 주간지 〈콜리어스 위클리 Collier's Weekly〉의 제안을 받아들여 처음으로 종군기자가 되어 스페인 내란을 취재했다. 헤밍웨이와 사귀기 시작한 때가 이 시기였다. 헤밍웨이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For Whom the Bell Tolls〉(1940)를 그녀에게 헌정했으며, 두 사람은 1940년 결혼하여 1946년 이혼했다. 겔혼은 세계 각지를 누비며 뉘른베르크 재판, 제3차 중동전쟁(1967), 베트남 전쟁 등을 취재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4년에는 들것 운반병으로 변장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몰래 취재했다. 그녀는 81세 때인 1989년에도 미국의 파나마 침공을 취재하기 위해 전선으로 달려갔다. 정치가를 믿지 않았던 겔혼은 억압받는 사람들을 열성적으로 옹호했다. 군살 없는 산문으로 유명한 그녀는 장편 〈전쟁터 Stricken Field〉(1939), 〈키 작은 나무들에도 꼭대기가 있다 Lowest Trees Have Tops〉(1967)와 중편소설집 〈아프리카의 기후 Weather in Africa〉(1978) 등 소설 작품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