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개/기타

집결호 (集結號 Assembly, 2007)

슐츠105 2013. 1. 21. 21:45

전쟁, 드라마 | 중국, 홍콩 | 125 분 |

감독 펑샤오강

출연 장한위 (구지디 역), 등초 (자오얼도우 역), 원문강 (왕진춘 역), 탕연 (쑨구이친 역)

 

줄거리
47명이 기다렸던 단 한번의 집결 소리!
1948년, 중국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중국 인민해방군과 국민당의 ‘문하전투’. 해방군 9중대 중대장 구지디(장한위)와 47명의 대원들은 퇴각을 명하는 ‘집결호’가 들리기 전까지 적의 진격을 막으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는다. 수 천 명의 적들이 물 밀듯이 밀려오지만 열세에도 불구하고 구지디 대위와 대원들은 목숨을 바쳐 진지를 지킨다. 그러나 정오에 울리기로 했던 집결나팔소리는 끝까지 들리지 않고……하나 둘씩 스러져가던 대원들은 결국, 구지디 대위만을 남기고 모두 전사하고 만다. 47명이 기다렸던 단 한번의 집결소리! 이들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집결호’는 왜 들리지 않았던 것일까?

 

단 한 명이 찾은 위대한 진실, 그 마지막 집결소리!
구지디는 한국전까지 참전해 전쟁영웅이 되지만, 과거 ‘집결호’를 듣지 못해 부하들을 살리지 못한 것은 아닌지, 홀로 살아남은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러던 중 47명 부대원들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아 실종자 처리가 되자, 구지디는 형제보다 진한 우애를 나눈 그들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시신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10년이란 세월이 흐른 후, 탄광 어딘가에 묻혀있을 47명 부하들의 모습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그들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일생을 건 집념을 불태우는 구지디 대위 앞에 모두가 희생될 수 밖에 없었던 ‘집결호’와 관련된 그날의 숨겨진 진실이 다가오는데……

 

리뷰 : http://blog.daum.net/dapapr/7674041

 

 

 

 

 

 

 

 

 

 

 

 

 

 

 

국공내전

국공 내전(중국어 정체: 國共内戰, 간체: 国共内战, 병음: guógòng neìzhàn, 영어: Chinese Civil War)은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혁명을 정당화하기 위해 해방전쟁으로도 불리는데, 1927년부터 1949년까지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 사이에 일어난 내전을 말한다. 1927년에서 1936년까지를 제1차 국공 내전, 1946년부터 1949년까지를 제2차 국공 내전으로 부르며, 결국 중국 공산당의 홍군(紅軍)의 승리로 끝났다. 전쟁의 결과로 본토에는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으며 장제스가 이끄는 중국 국민당의 중화민국은 타이완(臺灣, 대만)으로 패퇴하였다. 이러한 국민당의 패배는 국민당의 심각한 부정부패와 대부분이 농민 출신으로 민폐를 끼치는 것을 삼갔던 홍군의 노력 등에 기인한다. 레닌주의를 계승하여 농민을 혁명의 주체로 본 마오쩌둥의 공산주의 혁명 이론도 중국 공산당이 승리한 이유 중 하나이다.
 
1936년 12월 시안 사건을 계기로 1937년부터 1945년까지는 공동의 적인 일본 제국과의 중일 전쟁(1937.7.7 - 1945.9.2) 수행을 위해 공산당과 국민당 사이의 휴전과 공동 항일 전선이 이루어졌는데, 이 휴전 기간의 합작은 제2차 국공 합작이라고 부른다.

 

1937년 이후 일본 제국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공산당과 국민당은 제2차 국공 합작을 결성, 공동으로 일본군과 전쟁을 벌이게 된다. 홍군은 제8로군과 신사군으로 개편되어 국민혁명군에 소속되지만 사실상 장제스의 통제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항일전을 벌였다.
 
이 항일 전쟁 기간 동안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은 일본군에 패하여 세력이 점점 약해져 갔고 홍군(팔로군, 신사군)은 세력이 점차 커졌다.
 

제2차 국공 내전

일본이 패망한 직후 공동의 적이 사라지자 일본군의 무장 해제와 점령지 정리 등을 둘러싸고 공산당과 국민당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오랜 전쟁에 지쳐 있던 양측은 내전을 피하기 위해 협상을 개시했다. 1945년 8월부터 약 한 달 반 정도 충칭에서 장제스와 마오쩌둥이 직접 만나 회담을 가졌고 10월에 양측의 협정이 맺어져서 내전을 피하고 정치의 민주화에 대한 합의를 도출했다.
 
그러나 양측의 긴장은 계속 고조되었고 미국의 마샬 장군이 중재하여 내전을 피하기 위해 양측을 조율하고 공동 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협상이 1946년 1월부터 시작하였고 어느 정도 합의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를 인준하는 과정에서 국민당은 다시 합의안을 번복하고 공산당은 이에 항의하여 결국 합의안은 실패로 돌아갔다. 1946년 6월 국부군(國府軍, 중국 국민당 정부군)은 본격적으로 공산당 지구를 침공하여 전면적인 내전을 개시하였다. 초기에 국부군은 병력, 장비, 보급 등 모든 면에서 인민해방군(홍군)보다 우세했고, 특히 미국의 지원을 받아 무장하고 있어서 내전은 곧 종식될 듯이 보였다. 특히 1947년 3월에는 후쫑난이 지휘한 20만의 병력이 중국 공산당의 본부가 있던 옌안을 점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리하게 점령지를 늘린 국부군은 병력을 지나치게 분산시키는 전략적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
 
게다가 국민당 정부의 총체적 부패, 인플레로 인한 경제 붕괴, 그리고 이미 떠난 민심이 어우러져 1948년부터는 공산당 측에 유리하게 내전이 전개되었다. 1948년 가을 린뱌오가 지휘한 동북 인민해방군이 만주에서 국부군을 격파하는 것을 시작(요심전투)으로 전세가 역전되고 힘의 균형이 깨졌다.
 
인민해방군은 1949년 1월 31일 베이징에 입성하였고, 파죽지세로 창 강(양쯔강)을 건너 4월 23일에는 국민당 정부의 수도 난징을 함락시키고, 5월 27일 중국대륙 최대 도시 상하이까지 손에 넣었다.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국가주석에 취임하였다.
 
인민해방군은 1949년 10월 14일에는 광저우를 접수하고, 11월 30일에는 국민당 정부의 임시수도였던 충칭(重慶)마저 함락시켰다. 12월 10일 장제스는 국민당 정부의 대륙 최후 거점인 청두(成都)에서 타이완(臺灣, 대만)으로 탈출했고, 12월 27일 인민해방군이 청두에 입성함으로써 국민당은 대륙에서 완전히 쫓겨났다.
 


 

 

1949년 10월 인민해방군은 중국대륙과 타이완 섬 사이의 전략적 요충지인 진먼 섬(金門島)을 공격하여 고령두(古寧頭) 전투(1949.10.24 - 10.26)를 벌였으나 국부군에 대패하여 타이완 섬과 이 섬에 대한 국민당 정부의 지배가 굳어졌다. 이 후에도 1958년 8월 23일부터 10월 5일까지 중공군은 무려 47만발에 이르는 포탄을 이 섬에 쏟아부었으나 중화민국군에 패하였고(진먼 포격전), 중공군의 진먼 섬에 대한 포격은 1978년까지 20년간 계속되었다.
 
1950년 하이난 섬(海南島) 전투(1950.3.5 - 4.30) 및 홍콩 근해의 완샨군도(萬山群島) 전투(1950.5.25 - 6.27)에서 국부군이 인민해방군에 잇따라 패퇴하고, 상하이 근해의 저우산(舟山)군도(1950.5.16)와 다천(大陳) 섬(1955.2.11)에서 국부군이 철수함으로써 양안(兩岸) 사이에 현재와 같은 경계가 만들어졌다.
 
조선인의 활약
 
1945년 이후 국공내전 시기에 동북삼성에서 중공군(중국 인민해방군) 측으로 참전한 조선인의 수는 6만 3천여명으로 연변에서만 3만 5천여명이 참전하였다. 이는 연변 총참군의 85%에 달하는 숫자로 국공 내전시 조선족은 항일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동북삼성 지역을 중심으로 중국혁명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직접 병력을 파견하여 전투에 참여시키고 만포진, 청진, 정주 등에는 중공군의 후방기지를 세워 훈련기지와 병원 등을 제공하였다. 이 곳에 주둔했던 중공군의 숫자는 1947년 당시 5만 ~ 7만 5천에 달하였다. 이러한 도움이 없었다면 중공군은 국부군에 포위되어 큰 위기에 처했을 것이라고 추정될 정도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중국공산혁명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이후 한국 전쟁 직전, 중공군에 속했던 조선인들은 대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군대인 조선인민군에 편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