슐츠의 자막공방/우리 어머니, 아버지 (2013)

쿠르스크 전투

슐츠105 2013. 6. 17. 02:49

출처 : 엔하위키 미러

(http://mirror.enha.kr/wiki/%EC%BF%A0%EB%A5%B4%EC%8A%A4%ED%81%AC%20%EC%A0%84%ED%88%AC#toc)

 

 


 

 

 

 

 

1 소개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동부전선의 전세를 완전히 역전시킨 전투로서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차전이 벌어졌다. 또한 1달도 되지않는 기간 동안 단일 전선에서 양 군 합계 병력 약 200만, 전차 약 6,000대, 항공기 약 4,500대라는 가공할 전력이 충돌한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전투였다.

 

2 1943년 동부전선
1942년 겨울 러시아 남부전선에서 독일군은 소련군의 대대적인 공세를 이겨내지 못하고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참담한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여세를 몰아 진격을 계속하던 소련군은 남부 러시아의 중심지 하르코프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지만, 독일군은 과감한 반격을 개시하여 하르코프를 재탈환(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했고, 쿠르스크 일대에 거대한 돌출부가 형성되게 되었다.


르제프 일대에서 참담한 패배를 맛본 데 이어 하르코프 공방전에서도 상당한 타격을 입은 소련군은 더 이상 공세를 추진할 여력은 남아있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독일군도 스탈린그라드에서 입은 엄청난 피해를 아직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동부전선은 잠시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3 성채 작전

 

 

한편 이 무렵 독일군은 이 거대한 전쟁을 수행하기엔 자신들의 역량이 충분치 않음을 서서히 느끼고 있었다. 동부전선의 소련군은 이제 거대한 괴물로 성장하고 있었고, 북아프리카에선 에르빈 롬멜 원수의 아프리카 기갑집단군은 연합군의 공격에 섬멸당할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럽 어딘가에 연합군이 대규모의 상륙작전을 감행한다면 독일군은 제1차 세계대전의 악몽을 고스란히 재현한 듯한 본격적인 유럽 내 양면 전선의 유지를 강요당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독일군이 도저히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런 최악의 사태를 피하기 위해 독일군은 쿠르스크 돌출부에 협격을 가해 전선을 축소시킴과 동시에 가능한 많은 소련군의 전략 예비를 섬멸해 동부전선을 안정시키며 독소전의 주도권을 되찾는 골자의 성채 작전을 입안하게 된다.

 

 

 

하지만 이 무렵 많은 독일군 장성들은 더 이상 소련군이 쉽게 볼 상대가 아니란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에리히 폰 만슈타인을 비롯한 몇몇 장군들이 선공에 나서는 것보다 소련군의 공격을 일단 방어한 뒤 공세를 추진하는 쪽이 바람직하다 주장했고, 격렬한 논쟁이 이어졌다. 하지만 아프리카 기갑군이 패배한 지금 연합군이 유럽 어딘가에 제2전선을 형성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고 따라서 동부전선을 안정시키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점이었다.


결국 히틀러는 공세를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만슈타인은 공세를 취한다면 하르코프에서 적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힌 지금이 적절한 시점이며, 5월 초에는 공격을 시작해야 한다 주장했으나 히틀러는 기갑부대의 보충이 끝나는 6월 12일로 공격을 연기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완벽한 전력 우위를 확보해야 한다며 다시 작전을 연기시켰고, 독일군은 쿠르스크 일대에 50개 사단으로 편성된 병력 90만, 전차 및 자주포 2,700대, 비행기 2,000대, 대포 10,000문 이상 이라는 엄청난 전력을 집결시켰다. 히틀러는 드디어 전력 우위를 갖췄다고 판단했고 작전 개시일은 7월 5일로 결정됐다.

 

 

4 소련군의 대응
4.1 사상 최대의 방어 작전
한편 소련군은 독일군의 공세가 쿠르스크를 향할 것이라는 걸 정확히 추측하고 있었다. 따라서 독일군의 공세를 완벽하게 막아낼 가공할 규모의 방어 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사실 쿠르스크 지역이 돌출부로 남았다는 것은 적의 선제 공격 목표가 될 수 있다는 말로 통했다.

 

스탈린은 모스크바 공방전의 승리와 스탈린그라드 승리 이후에 그랬던 것처럼 독일군에게 대규모 선제 공격을 할 생각을 또 품지만, 총군부사령 게오르기 주코프와 총참모장 알렉산드르 바실레프스키 등이 겨우겨우 설득하여 앞의 두 경우같은 쓸데없는 재앙을 피할 수 있게 됐다.


방어전의 주력인 콘스탄틴 로코소프스키의 중앙 전선군과 니콜라이 바투틴의 보로네즈 전선군에는 엄청난 전력이 보강되기 시작했다. 또한 쿠르스크 일대에는 만간인 30만명을 동원하여 총 3,000마일이 넘는 참호가 구축됐고, 종심이 175km에 달하는 6중 종심의 방어선이 구축되었으며 여기에는 무려 40만 개가 넘는 지뢰가 매설됐다. 가짜 공군기지 50개와 비행장 150여 곳, 그리고 말뚝 탱크 덫도 구축이 되었다. 포병 우위를 중시하는 소련군답게 약 13,000문에 이르는 야포를 배치하고 920대의 카츄사 로켓발사기를 배치하여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방어 진지의 구축을 완료했다.


또한 독일군에 공세를 저지한 후 역습을 가할 주력으로 선정된 스텝 전선군에도 40만명의 병력과 1개 기갑군을 배치하는 등 막강한 전력이 집결되었다. 이렇게 집결된 소련군의 총 전력은 병력 약 170만, 화포 19,000문, 전차 및 자주포 3,600대, 항공기 3,100대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였고 이는 당시 소련군 전체 병력의 40%, 기갑부대의 75%를 이곳에 배치한 것이었다.

 

4.2 정보전의 승리
독일군이 일대 공세에 나선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지만 문제는 그 시기가 언제냐는 거였다. 소련군은 5월 초에 독일군이 공세에 나설 것이라고 파악했지만 독일군의 성채 작전이 연기되면서 소련군은 큰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소련군은 당시 첩보전에 있어 상당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잠시의 혼란함이 지나가고 5월 중순이 되자 독일군의 공격이 6월 12일로 연기됐다는 정확한 첩보를 입수했다. 성채 작전이 다시 연기되자 소련군의 첩보망은 그 사실을 즉각 전달했고 7월 4일에는 투항한 독일 병사가 7월 5일 새벽 3시에 공세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자백했다. 이어 7월 5일 오전 2시에 소련군 진지에 침투해 지뢰밭을 개척하던 독일군 공병대원을 생포하여 한 시간 후에 공세가 시작된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소련군은 애초에 공세가 시작되기 직전 선제 포격을 가해 독일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겠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고, 이제 더 이상 망설일 것이 없었다. 주코프 원수는 항공 폭격과 일제 포격을 명령했고 독일군은 소련군의 기습적인 포격에 당황하여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생각보다 피해는 크지 않았고 독일 중부집단군 사령관 귄터 폰 클루게 원수는 발터 모델이 지휘하는 독일 9군에 공격을 명령했다. 드디어 두 달의 대치 기간은 끝나고 쿠르스크의 격전이 시작된 것이다.

 

 

5 독일군의 공세
5.1 쿠르스크 북부 전선 - 독일군의 초기 공세

 


 

7월 5일 오전 5시30분 포병의 사격을 등에 업고 독일 9군이 소련 13군의 정면을 향해 공세를 시작했다. 9군 사령관 발터 모델 대장은 르제프 방어전에서 뛰어난 방어전술로 소련군의 야심찬 화성 작전을 좌초시킨 인물로서 '총통의 소방수'라 불릴 정도로 히틀러와 독일군 장병들에게 높은 신임을 받는 사령관이었다. 그는 두터운 소련군의 방어진지를 돌파하기 위해 6항공군에 폭격을 요청했고, 독일 공군이 제공권을 완벽하게 장악하면 기갑부대를 선두로 손쉽게 방어선을 돌파할 수 있으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43년의 소련 공군은 독소전 초기의 나약하기 짝이 없던 공군이 아니었다. JU-87 슈투카 급강하 폭격기의 맹폭이 채 끝나기도 전에 400여 대의 소련군 전투기가 독일군을 향해 접근했고 곧바로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항공전이 시작됐다. 독일 공군은 파일럿의 월등한 기량에도 불구하고 압도적 숫적 우세를 보인 소련 공군의 격렬한 저항에 제공권을 장악하는 데 실패했고, 방어선 정면을 향해 돌격하던 독일군 23군단과 47기갑군단은 엄청난 숫자의 대전차 호와 강철 피아노 선, 지뢰와 기관총 진지가 끝없이 배치된 방어선을 돌파하는 동안 눈에 띄게 전투력이 감소하고 있었다.

 

 

한편 독일 23군단과 47기갑군단이 소련군의 저항에 막혀 고전하는 사이 41기갑군단과 46기갑군단이 각각 소련군 방어선의 우익과 좌익을 압박하며 진격을 시작했다. 41기갑군단은 성공적인 진격을 계속해 우익을 방어하던 소련 81보병사단을 격파했으나 신속한 소련군의 증원에 저지당하며 진격이 멈췄지만, 46기갑군단은 소련 15보병사단과 132보병사단을 격파하며 포니리를 향해 맹렬하게 진격하기 시작했다. 46기갑군단의 맹공에 방어선이 뚫리기 시작한 소련군은 2개 보병사단을 추가로 투입하며 필사적인 방어를 시작했으나 엄청난 사상자를 낳고 결국 방어선이 돌파당하고 말았다. 독일군은 힘겨운 사투 끝에 소련군 제1방어선을 돌파하고 포니리 북쪽에 교두보를 마련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것은 도저히 승리라 부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중부집단군 대부분의 기갑 전력을 일거에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루 내내 겨우 6.5km를 전진했을 뿐이었고, 투입된 전력의 거의 20%를 상실하고 있었다.

 

5.2 쿠르스크 북부 전선 - 포니리 공방전
7월 6일 새벽에 독일군을 향해 가해진 소련군의 반격을 완벽하게 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소련군의 2차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한 채 진격이 저지당하고 말았고, 소련군은 거의 300여 대의 전차를 상실하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방어선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다급해진 모델 원수는 7월7일 가용 가능한 모든 기갑 전력을 끌어모아 400여 대의 전차와 10개 보병사단을 동원해 포니리와 올호바트카를 잇는 철도선에 공세를 개시했다. 포니리와 올호바트카는 오렐과 쿠르스크를 잇는 철도선의 중심으로, 이곳을 점령하지 못한다면 쿠르스크 북부 전선의 공세는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는 것과 다름없는 요충지였기에 독일군과 소련군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지역이었다.

 

불과 10km 정도에 불과한 전선에서 양군 합계 40만에 가까운 대 병력이 충돌하는, 역사상 유례가 없던 전투가 벌어졌다. 독일군은 폭격기와 전차를 동원해 맹공을 펼쳤지만 소련군의 격렬한 방어에 저지당하기 시작했다. 독일군의 공세는 날이 바뀐 7월 8일에도 계속돼 필사적으로 돌파를 시도했지만 강철 같은 소련군의 방어 진지는 도저히 무너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소련군의 병력은 도저히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계속 증강되고 있었고, 독일군은 압도적인 교환비를 보여주며 선전하고 있었지만 전력 차이는 오히려 점점 더 벌어지고 있었다. 불과 3일 만에 쿠르스크 북부 전선 독일군의 공세는 한계에 이르고 만 것이다.

 

7월8일 저녁, 모델 대장은 야전 작전 회의에서 소련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결론내리고 있었다. 소련군의 방어선은 그야말로 강철 같았고, 믿었던 공군마저 제공권 장악에 실패하고 있는 상황에서 소련군의 방어선을 돌파한다는 것은 극히 힘든 일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중부집단군 사령관 클루게 원수는 모델 대장에게 공격을 계속할 것을 명령했고, 모델 대장은 지쳐가는 병력을 다닥다닥 긁어 모아 다음날 공세를 재개했지만 결국 소련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7월 10일 모델 대장은 중부집단군에 강력한 소련군의 방어선을 향해 공격하는 것은 무의미한 소모전만을 강요당할 뿐이며, 획기적인 전술적 보완이 있거나 공세를 유지할 만한 전력이 보충되지 않는 이상 소련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보고했다. 히틀러는 공세를 계속할 것을 명령했지만 모델은 더 이상의 공세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판단, 휘하 부대에게 휴식을 명령하고 공세를 중단했다.


하지만 폰 클루게 원수는 아직 소련군의 방어선을 돌파할 수 있다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2개 사단을 보충하여 7월 11일 밤에 올호바트카를 점령하기 위해 야습을 가하기로 결정하고, 소련 70군을 향해 11일 밤 공세를 시작했지만 이 역시도 저지당하고 말았다. 이제 공세를 가할 힘을 완전히 상실한 독일 9군은 완벽히 한계에 이르고 말았다. 성채 작전이 시작된 지 불과 5일 만에 쿠르스크 북부 전선의 공세는 실패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5.3 쿠르스크 남부 전선 - 독일군의 초기 공세

 

쿠르스크 남부 전선에서도 만슈타인이 지휘하는 남부집단군의 7월 5일 일제 공세가 시작됐다. 독일군은 남부 전선의 초기 공세는 북부 전선에 비해 성공적으로 진행될 것이라 예상했는데, 이는 소련군이 독일 중부집단군을 공세의 주공으로 판단, 남부 전선에 비해 더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한 탓도 있긴 하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독일 남부집단군은 1600여 대의 전차 및 자주포를 장비해 북부 전선의 중부집단군에 비해 월등한 타격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독일 남부 집단군의 주공은 4기갑군 예하 48장갑군단으로, 독일 국방군 최정예 부대인 그로스도이칠란트(GD)사단과 제3, 제11기갑사단 및 최신예 전차인 판터를 무려 200대나 장비한 10기갑여단을 예하에 두고 막강한 기갑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독일 남부집단군은 48기갑군단이 무장SS 2기갑군단과 함께 보로네즈 전선군의 정면을 강타함과 동시에, 베르너 켐프 중장의 켐프 분견군이 도네츠 강 동쪽에서 공격을 가하며 일제 공세를 시작했다.

 

 


하지만 48기갑군단의 공세는 당초 기대와는 다르게 난관에 봉착하고 있었다. 4기갑군 사령관 헤르만 호트 대장은 10기갑여단의 판터 200대를 GD사단에 배속시켜 선봉에 설 것을 명령했는데, 이러한 조치로 GD사단은 350대의 전차 및 돌격포를 장비한 막강한 타격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GD사단의 이러한 기갑 전력은 무장SS 2기갑군단의 전체 기갑 전력과 맞먹는 것으로, 독일군은 소련군이 GD사단을 저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 판단했다. GD사단은 3기갑사단과 11기갑사단이 측면을 엄호하며 보로네즈 전선군의 정면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GD사단은 소련 67근위소총사단과 3기계화군단의 강력한 저지선에 가로막혔고, 소련 공군 전폭기의 폭격에 피해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해 판터 전차의 기계적 결함으로 인해 고장이 속출하면서 전체 판터의 거의 1/3이 기동 불가능 상태가 되는 불운까지 겹쳤다.


하지만 다행히 측면의 3기갑사단이 소련군의 저지선을 돌파하며 성공적인 진격을 했고, 이에 힘입어 48기갑군단은 적의 제1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각 부대들이 입은 피해는 예상치를 훨씬 뛰어넘은 것들이었고, 독일 남부 집단군의 주공이었던 48기갑군단의 예봉이 이렇게 꺾여감에 따라 쿠르스크 남부 전선의 공세 또한 초반부터 사실상 실패나 다름없는 상태로 빠져들고 있었다.

 

5.4 쿠르스크 남부 전선 - 무장SS 제2기갑군단의 약진

 

 


한편 무장SS 2기갑군단은 48기갑군단에 비해 한결 성공적인 진격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48기갑군단의 우익을 엄호하며 공격을 시작한 무장SS 2기갑군단은 소련 6근위군의 방어선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며 오보얀-쿠르스크를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다. 만약 6근위군의 방어선이 완전히 무너지고, 켐프 분견군이 도네츠 강을 따라 계속 진격하여 독일 4기갑군과 합류하게 된다면 쿠르스크 남부 전선은 전면적으로 붕괴될 위험에 직면할 수도 있었기에, 보로네즈 전선군 사령관 바투틴 대장은 곧바로 증원을 시작했지만 이미 방어선의 곳곳에 구멍이 뚫리기 시작했고,7월 7일에는 이틀만에 쿠르스크 방어지대의 핵심지역인 "쿠르스크-오보얀 도로"를 향해 20마일(30km)이나 전진하였다. 그러나 이날을 기점으로 SS 2기갑군단은 점점 힘에 부쳤고, 결국 소련 제1전차군에 의해 저지되었다. 7월 9일, 호트의 4기갑군은 기갑사단을 한데 모아 전선에 뚫고 나아가, 해골 사단이 선두로 하는 독일군과 쿠르스크 사이에 있는 마지막 장애물인 프숄 강을 뚫고 3 SS기갑사단 토텐코프는 참호를 파 들어갔다. 하지만 이후로 북서쪽인 쿠르스크쪽으로 진격은 더이상 불가능해졌다.

 

5.5 쿠르스크 남부 전선 - 프로호로프카 대전차전

마침내 두 군대가 격돌했을 때, 좁은 차창을 통해 적군의 규모를 확인한 양 측의 병사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사방이 평원이라 도망칠 곳도 없었다. 거대한 두 군대가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고, 이로써 희대의 대전차전이 시작되었다. 이전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수백대의 전차가 뒤엉킨 전차전은 없었다. 양측의 전차는 서로의 위에 올라타기도 하고, 파괴하고 파괴당하는 악전고투를 겪었다. 한 목격자는 전장이 너무 비좁아보였다고 증언했다.
- 영국 크롬웰 프로덕션, '2차대전사' - <독일 육군의 선봉, 기갑부대> 편


이 때의 대전차전은 대(對)전차전이 아닌 대(大)전차전이다.

 

 


결국 호트는 주력 공세를 북동쪽의 작은 철도 교차점인 프로호로프카로 돌렸다. 7월 9일부터 14일까지가 쿠르스크 공세에 결정적인 운명을 지었다. 무장친위대 기갑사단들-1 SS기갑사단 LSSAH, 2 SS기갑사단 다스 라이히, 3 SS기갑사단 토텐코프-들을 앞세운 독일기갑부대는 소련군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히고 500[1]대가 넘는 중전차를 굴리며 진격하였다. 이에 7월 6일에 스탈린은 제5근위전차군 사령관 파벨 로트미스트로프 장군에 생일축하 겸 하여 손수 전화를 하면서, 그에게 귀중한 예비 병력의 일부를 주고 프로호르프카를 지키라고 하였다. 7월 7일 오전 1시 30분, 소련 5 근위전차군은 사흘간 370km(230마일)이 넘는 거리를 독일의 Ju-87 급강하 폭격기와 맞닥뜨리며 밤낮으로 행군하여 7월 10일에 전선에 도착하였다.


주코프는 로트미스트로프에게 T-34가 판터와 티거에 화력에서 제압당하지만 기동성이 앞서니 "기계화 부대의 백병전"을 하라고 지시하였다. 7월 12일 아침, 150~300대 가량[2]의 독일군 전차와 630여대의 소련군 전차가 대치했다. 이는 독소전쟁 최대의 전차전이었으며 단일 전투로서는 역사상 최대의 항공전이었다. 이는 향후 성채작전의 결과, 그리고 더 나아가 독일의 동부전선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전투였다.


아침 7시, 대규모의 독일 폭격기 부대가 소련군 진영을 맹렬히 폭격하였고 이에 맞서 소련 전투기들이 출격하였다. 폭격기들이 돌아간 후, 소련군은 SS기갑군의 머리 위로 쉬지 않고 폭탄과 로켓을 투하하였다. 오전 8시 30분, 로트미스트로프는 강철이란 뜻의 "스탈"이라는 암호로 공격 명령을 내리고, 곧이어 독일 쪽에서도 LSSAH의 전차들이 몰려나왔다.

 


이 날, 겨우 3제곱 킬로미터에 불과한 지역에 수백대의 전차가 뒤엉켰다. 소련군 전차들은 독일군 기갑부대를 타격하기 위해 들이받으면서 포화를 퍼부었으며, 독일군 전차들은 기동불능이 되면 문을 걸어 잠그고 마지막까지 포화를 쏟아부었다. 양측은 전투불능이 되면 밖으로 나와 상대편의 전차에 유탄을 던지는 등 전투는 매우 치열하고 혼란스러웠다.

 

이 단일전투에서 약 700대 이상의 전차가 파괴되었다. 대부분은 소련군 전차였다. 독일군은 더이상 결정적인 진격이 불가능해졌고, 소련은 방어에는 성공했지만 전진이 전혀 불가능하였다. 다음날도 계속 전투가 진행되었지만 이는 소규모에 불과했으며, 독일군의 진격은 바투틴과 바실레프스키의 재빠른 방어에 번번이 좌절되었다. 그러나 7월 13일, 로트미스트로프에게는 5근위군 등에서 증원군이 계속 도착하긴 했지만 5근위 전차단의 기동 가능한 전차의 수는 50대밖에 없었고 병력은 반으로 줄어있었다[3]. 사실상 이 전투만으로 따져 봤을때는 독일기갑군의 승리로 봐도 좋을것이었지만 승리의 여신은 더 이상 독일군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아마 다시 이런 규모의 단일 전차전은 없을 것이다.

 

5.6 독일군 공세 종료
7월 10일, 서방 연합군이 시칠리아에 상륙하면서 히틀러는 귀중한 병력을 남부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7월 13일, 성채작전은 공식적으로 취소되었고, 2SS기갑군단은 이탈리아로 이동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호트 장군을 비롯한 휘하 장군에게는 성채작전 이전의 방어선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독일군의 만슈타인 원수는 작전을 계속할것을 주장했지만 이미 다른곳으로 돌려진 히틀러의 관심을 되돌릴수 없었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히틀러의 공세 중지 결정은 이탈리아의 연합국 상륙보다는 소련군의 쿠투조프 작전으로 인하여 돌출부가 남부 집단군 전력 만으로 돌출부를 끊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신장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이 설이 정설이 되어가고 있다.

 

결국 독일군의 쿠르스크 공세는 7월 15일에 끝났으며 이탈리아의 상황이 급박해지자 히틀러는 8월 1일 동부전선의 길이를 단축하여 유럽으로 돌릴 병력을 확보하기 위해 오룔돌출부로부터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6 소련군의 반격과 전투 종료
6.1 쿠르스크 북부 전선 - 쿠투조프 작전
한편 호트 지휘하의 독일 제4기갑군과 로트미스트로프 지휘하의 소련 제5근위전차군이 쿠르스크 남쪽에서 사상 최대의 기갑전을 벌이던 7월 12일, 쿠르스크 북쪽에서는 오룔(오렐이라고도 한다.)과 브랸스크를 탈환하여 독일 중부 집단군을 무너뜨릴 계획으로 쿠투조프 작전이 개시되어 독일 제 9군의 후방을 위협했다. 처음에 3개군으로 공격을 시작했던 서부 전선군과 브랸스크 전선군은 작전 초기엔 독일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전진이 힘들었지만, 추가로 3개군을 더 투입하여 독일군의 한쪽이 뚫리면서 소련군은 물밀듯이 쳐들어가 8월 5일에 오룔이 함락되고, 8월 18일에는 브랸스크 시가 소련의 손에 들어갔다.

 

6.2 쿠르스크 남부 전선 - 루미안체프 작전
쿠르스크 남쪽에서의 반격은 한참 후인 8월 3일에 주코프 장군의 직접적인 지휘 아래 개시되었다. 이 작전의 이름은 루미안체프 작전으로, 목표는 하르코프의 탈환이었다. 이 공격은 주로 쿠르스크 후방에 있던 이반 코네프의 초원(스텝) 예비 전선군에 의해 이루어졌다.


만슈타인의 독일군 기갑부대가 자리를 잠시 비운 직후인, 8월 3일 주코프가 보르네즈 전선군과 스텝 예비 전선군, 그리고 남서부전선군의 우익을 동원해 반격작전을 개시하자 독일군은 완전히 허를 찔리게 되어 소련군이 결국 8월 5일에 벨고로드 시를 점령하게 되었다, 이후 중부집단군으로 부터 차출된 증원부대와 루미안체프 작전 저지를 위해 파견된 기갑부대 일부가 서둘러 돌아오면서 독일군은 일시적으로 소련군을 저지하였다.

 

히틀러는 어떻게든 하르코프와 도네츠강 유역만은은 지키고 싶어 했지만 8월 7일에 서부전선군과 칼리닌 전선군의 좌익은 11개군과 기타 군소대를 동원해 스몰렌스크 방면으로 나가기 시작했고, 8월 13일 마침내 스텝전선군이 하르코프에 돌입하여 10일간 치열한 시가전 끝에 8월 23일에는 하르코프 시도 점령함으로써 독일군은 도네츠강 유역을 포기하고 드네프르강 서쪽으로 후퇴함으로써 쿠르스크 전투는 막을 내리게 된다.

 

 

7 결과
이 전투는 독일측 뿐만 아니라 소련측에게도 극심한 전력 손실을 입혔다. 예로, 쿠르스크를 방어했던 로트미스트로프의 제5근위전차군의 전차 수는 600여대에서 50대로 줄어 간신히 방어할 수 있을 정도였다. 소련군은 이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승리하긴 했으나[4], 손실은 독일군에 비해 훨씬 많았다. 병력 손실만 해도 독일의 4배가 되었고, 전차같은 경우는 독일군에 비해 거의 7배의 손실을 입었다.


하지만 소련은 독일 하나만 상대하면 되는데 비해 독일은 이탈리아에 서방연합국이 상륙했기 때문에 더이상 동부전선의 소련군만 상대할 수 없었고, 전력의 상당부분을 서부전선에 할애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인구나 자원으로나 소련에 비해 뒤쳐저 있는 독일에게 전략적으로 치명타였다.

 

여러모로 독소전에서 독일군의 운명을 결정지은 전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패배 이후에도 독일군은 소련군 상대로 대규모 공세를 펼칠 능력이 있었지만 독일군의 마지막 하계공세인 쿠르스크 전투 이후로는 어떤 독일군 부대도 다시는 제대로 된 공세를 펼칠 수가 없게 되었다.


이 전투 이후에 독소전쟁의 주도권은 완전히 소련군으로 넘어갔다. 역사적으로 미드웨이 해전이나 엘 알라메인 전투와 함께 대전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다.[5]

8 트리비아
독일 측에선 쿠르스크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실시한 대규모 기동훈련에 터키군 수뇌부를 초청, 참관케 하고 히틀러와 접견하게 하는 등 터키 쪽에 호의를 보이려 애썼다. 당시 친독 성향의 중립국이었던 터키를 끌어들이면 고착된 동부전선의 전세를 유리하게 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 독소전쟁 초반부터 독일은 터키를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했는데, 1차대전에서 터키와 독일은 같은 추축국이었고, 러시아는 연합국에 있었다.


그러나 터키는 전신인 오스만 제국이 1차대전에 참전했다가 제국이 공중분해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신중했다. 오스만 제국은 1차대전 패전의 댓가로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모든 영토를 잃어버렸으니까.


결국 쿠르스크 전투는 독일군의 전략적 패배로 귀결되었고 터키는 전쟁 막판까지 중립을 지키다가 1945년 2월 23일에서야 줄서기식으로 연합군에 참가하여 추축진영에 선전포고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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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련군 추정, 독일군 기록에는 300여대 정도가 남아있었다고 기록되었다.

 

[2] 이 날 프로호르프카 전투에 투입된 독일군 전차 전력에 대한 주장은 기존에는 600대가 일반적인 설이었지만, 7월 12일 당일 프로호르프카 전투에 투입된 독일군 기갑부대의 총 전차 전력은 200대 안팎이며 SS사단들의 5호 판터로 구성된 전차대대는 아직 독일에서 편성 훈련중이었다는 것이 새로운 정설이다. 기존 600대 설은 소련측의 일방적 주장이었으며, 독일군 전차 전력에 대해서는 당시 독일군 기갑부대 지휘관들이 소속 군단에 사단의 전투 가능한 전차 대수를 보고한 보고서 사료들이 발견된 덕분에 재평가된 것이다. 현재는 당시 독일군의 가용 전차 전력이 200대 내외이며 2SS기갑군단은 400대 이상의 전차를 보유한 적이 없다는 것이 정설이며 게다가 2SS기갑군단 전체가 프로호르프카로 진격한 것도 아니었다. 프로호르프카 방면으로 진격한 SS사단은 1 SS기갑사단 LSSAH뿐이었으며, 토텐코프 사단은 프숄 강을 건너 공격 중이었고, 다스 라이히 사단은 LSSAH의 우측방을 엄호하며 로트미스트로프 예하 5근위전차군이 아닌 자도프 장군의 5근위군과 전투를 벌였다.


 

[3] 훗날 바실레프스키는 그 당시를 회상하면서 "죽을 때까지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고 회고했으며, 한 종군 기자에 따르면 그 지역은 전투가 끝난지 수십주가 지날 동안 "끔찍하고 황량한 사막"으로 남아있었다고 한다.

 

[4] 이점에 대해서는 모든 전쟁사가의 견해가 일치한다. 만슈타인이 후에 자신의 회고록 《잃어버린 승리》에서 주장하듯이 독일군이 이기고 있었는데 서방연합국의 상륙때문에 히틀러가 지레 겁먹고 후퇴한 것은 아니고, 작전이 잘 안풀렸는데 설상가상으로 서방연합국의 상륙도 있었기 때문에 취소한 것이다. 이탈리아는 이후 무솔리니가 실각하고 추축동맹을 탈퇴했기 때문에 이탈리아 전선의 중요성에 관한 히틀러의 판단은 그른게 아니었다. 이렇듯이 만슈타인은 너무 재능이 출중한 나머지 가끔 자뻑증세를 보이는데, 이점에 있어서도 그렇다고 할 수 있다.


 

[5] 이점에 있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약간의 이견이 있다. 바로 소련측의 공세가 저지된 1943년 2-3월의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때문이다. 이 전투는 독일군의 동부전선 마지막 승리였으며, 자신의 공적을 매우 자뻑스럽게 서술한 만슈타인의 회고록등 독일측 사료로 동부전선을 연구하던 서방측 연구자들은 이 전투가 동부전선의 균형추를 다시 독일측으로 돌려 놓았다는 설을 내놓았다. 그러나 러시아측 연구자들은 이 전투가 러시아측에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못했으므로, 이 전투 바로 직전에 끝난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대전의 전환점이었다고 주장한다.

 

[6] 또다른 터키 전쟁학자의 의견도 있는데, 이미 독소전쟁이 시작되자마자 터키는 독일의 패배를 직감하고 독일에게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다는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