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전쟁 | 폴란드 | 96 분
감독 안제이 바이다
출연 테레사 이제브스카, 타데우스 얀츠자르, 블라덱 쉬이발
줄거리
<세대 A Generation>, <재와 다이아몬드 Ashes and Diamonds>과 함께 ‘전쟁 3부작’을 이루는 이 영화는 2차 대전 바르샤바 봉기 당시 독일군을 피해 지하수로 속으로 숨어 들어간 폴란드 저항군들의 마지막 날들을 그렸다. 전쟁의 포화로 초토화된 지상의 상황과, 국가적 이념과 인간적 가치 사이에서 갈등하는 지하의 고립된 인물들을 교차 편집하며 역사와 인간성이라는 두가지 화두를 심도 있게 탐구한 걸작이다.
1957년 칸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하면서 안제이 바이다를 전세계에 알린 작품이기도 하다. - 제1회 충무로국제영화제
바르샤바 봉기 <엔하위키 미러 발췌>
1 개요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4년 8월 1일부터 같은 해 10월 2일까지 독일 점령지 폴란드의 수도인 바르샤바에서 일어난 무장 봉기.
실제로는 1943년에도 바르샤바에서 봉기가 있었지만 묻혔다. 안습인것 같지만 1943년 봉기는 외부의 지원이나 외부지원에 대한 희망이 전혀 없이 벌였다는데 더 의의가 있다. 그래서 1943년 봉기가 실패로 돌아갔고 연합국에 의해서도 듣보잡화하자 망명정부 관료 하나가 자살할 정도로 충격이 컸다.
2 배경
6월 22일에 시작된 바그라티온 작전의 성과는 매우 눈부셨다. 소련군의 진격에 독일군은 궤멸당했고 엄청난 크기의 지역이 다시 소련의 통제하로 들어갔다. 소련군의 진격은 거칠 것이 없어서 폴란드의 수도인 바르샤바를 목전에 두고 있었고 실제로 바르샤바의 동쪽에서는 소련군의 포격 소리가 매우 잘 들릴 정도였다. 소련군의 바르샤바 입성은 시간 문제로 보였다.
그러나 폴란드는 독일의 지배도 싫어했던 것처럼 소련의 위성국이 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도 러시아는 제국 시절부터 잔인한 지배자[1]였고 대전 초반 독일과 함께 폴란드를 나눠먹은 점령자들인데다 카틴 학살을 저지른 인간 백정들이었다. 그래서 영국의 폴란드 망명정부는 본토에 남아있던 폴란드 국내군(Armia Krajowa)에게 무장 봉기를 일으켜 독일군을 몰아내라고 지시했다. 이미 빌노(Wilno, 빌뉴스)와 르부프(Lwów, 리비우) 등을 자력으로 해방시키고 폴란드 국내의 빨치산 투쟁의 선봉에 서 있던 국내군은 이번에도 봉기의 주력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국내군의 병력은 20-60만에 달하였다.
3 봉기군의 구성
폴란드 국내군과 극우 민족주의 똘끼 충만 성향의 민족방위군(Narodowe Siły Zbrojne), 공산주의 성향의 폴란드 인민군(Armia Ludowa)이 힘을 합쳐서 20,000-45,000여 명의 대규모 봉기군을 편성하였다. 그들 중 2,000-3,500여 명은 민족방위군 소속이었고 수십여 명은 인민군에 소속되어 있었다. 8월 중반부터는 바르샤바 게토에서 해방된 유대인들도 봉기에 참여했다. 이미 가톨릭 폴란드계로 구성된 유대인 구출조직 제고타(Zegota)가 전쟁 기간 동안 약 6만여 명의 유대계 시민들을 구출한 전력이 있었다.
봉기군이 소련으로부터 지원받으리라는 상당히 낙관적인 희망을 가진 것은 그 동안 소련의 반응을 보고 판단한 것이었다. 실제로 모스크바에 위치한 폴란드 방송국에서는 폴란드 국내군에게 계속 봉기를 선동하는 방송을 하였으며, 외곽에서는 소련군이 거의 바르샤바 시내로 곧 진입할 것처럼 빠르게 진격해 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7월 31일, 봉기 지도자들이 바르샤바에 모여 회합을 가졌고, 그들은 다음 날 8월 1일 오후 5시에 봉기를 개시하기로 하였다. 이는 실책이었음이 드러났는데, 봉기군은 그 때까지 충분한 규모의 무기들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봉기 직전 바르샤바 곳곳에서 파열음이 튀어나와서 독일군과 이따금씩 소규모 교전들을 벌였다. 봉기의 최고 지도자는 타데우시 부르-코모로프스키(Tadeusz Bór-Komorowski)였는데, 그는 국내군 최고 지도자이기도 했다. 그의 성 앞에 붙은 '부르'(Bór)는 폴란드 어로 '숲'이라는 단어이다.
(부르-코모로프스키의 사진)
4 봉기 발발
4.1 봉기의 시작
8월 1일 오후 4시 30분에는 최고 수위의 경계령이 독일군 진영에 하달되었고, 30분 후인 5시, 바르샤바에서는 폴란드 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운 봉기가 일어나 독일군과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각 건물에서 독일군을 향해 봉기군의 총알이 빗발치듯이 쏟아졌다. 독일군은 봉기가 일어날 것을 예상했었지만 이 정도로 대규모로 일어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탓에 매우 당황하였다. 폴란드 군은 독일 군의 기관총 세례를 감내하면서 계속 공격해 나갔다. 그 날 바르샤바의 상당 부분이 폴란드 군에 의해 해방, 8월 2일부터 봉기군의 신문배부가 시작되었고, 8일부터는 자체 라디오 방송인 '섬광'을 수신하기 시작했다.
(8월 4일 당시 봉기군의 점령지)
4.2 진행
하지만 바르샤바 봉기는 시작부터 잘 풀려나가지 않았다. 바르샤바 내의 독일군은 7월 말의 병력 증원을 통해 15,000여 명에서 30,000여 명으로 불어난 상황이었고, 외곽에도 90,000여 명이 버티고 있었다. 게다가 30,000여의 병력은 봉기가 시작되자마자 증원되었다.
봉기군 사령관 중 한 명인 안토니 흐루시치엘(Antoni Chruściel)은 국내군이 장악한 영역을 8개 구역으로 구분하였다. 8개 구역은 다음과 같이 나누어졌다.
구역 지역명
제1구역 바르샤바 교외 거리(Warszawa-Śródmiescie), 바르샤바 구시가지(Warszawa Old Town)
제2구역 졸리보르쉬(Zoliborz), 마리몬트(Marymont), 비엘라니(Bielany)
제3구역 볼라(Wola)
제4구역 오호타(Ochota)
제5구역 모코투프(Mokotów)
제6구역 프라가(Praga)
제7구역 바르샤바 자치구역(Warsaw County
제8구역 오켕치에(Okecie)
Kedyw(Kierownictwo Dywersji, 봉기 지도부[2]) 봉기 지도부
하지만, 기습적으로 독일군을 공격해서 바르샤바 대부분의 지역을 장악한 것처럼 보였으나 바르샤바의 독일군 대부분은 전력을 보존한 채로 방어태세를 갖추는데 성공했고, 무엇보다 무기고 탈취에 거의 실패했기 때문에 봉기군의 무장상태는 극히 열악했다. 충분한 탄약과 무기를 갖춘 봉기군은 20,000-45,000여의 봉기군 중 2,500여 명에 불과했다.
당시 봉기군의 무장 상태를 보면, 소총은 1,000여 정, 권총은 1,750여 정, 중기관총은 7정, 대전차포는 20문에 불과했다. 기관단총은 300여 정이었고, 25,000여 발의 수류탄을 보유하고 있었다. 돌격포는 60문을 보유하고 있었다. 폴란드 군은 브위스카비차(Błyskawica) 기관단총이라는 스텐 기관단총의 폴란드 자체 카피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중화기는 커녕 소화기와 탄약의 자체 생산능력은 처음에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무기 보유 상태는 이후 시민들이 수류탄, 화염병, 각종 총과 시보레 밴에 철판을 붙인 간이 장갑차량인 장갑차 쿠부시, 박격포 등을 제작한 덕분에 계속 보강되었다. 봉기 기간 동안 하늘에서 연합군이 투하한 보급품도 도움이 되었다. 이외에도 여러 대의 전투차량이 폴란드군에 노획되서 전투에 쓰였다. 심지어 판터 2대도 노획하였다.外# 이외에도 폴란드군은 나치 친위대의 군복 저장고를 점령하여 쓰기도 했다. 그러나 봉기 당시 봉기군의 무장 상태는 매우 열악했다. 게다가 무기고 탈취가 실패하였고, 따라서 외부의 도움 없이는 오래 지속하기 힘든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친위대 군복을 착용한 조시카 대대원의 모습. 어깨에 동여매어 착용한 폴란드 국기가 인상적이다.)
반대로 독일군은 본토에서 재편성한 쌩쌩한 부대들이 반격에 나섰고, 소련의 포위를 탈출한 중앙집단군이 바르샤바 근교에서 다시 재정비에 들어갔다. 또한 소련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교량은 철저하게 파괴되거나 장애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14일 비스와 강을 가로지르는 4개의 대교가 모두 파괴되었다.
게다가 폴란드 국내군이 애당초 봉기를 일으켜 폴란드를 장악할 능력 자체가 부족했다. 당시 폴란드 국내군은 무기가 부족했던 탓에 독일군이 보유하고 있던 각종 군사적 요충지에 별로 큰 피해를 주지 못했다. 연합군이나 연합군의 요청에 마지못해 출격한 소련군이 투하한 공중 보급품 중 30%만이 봉기군 점령지로 투하되었으며 나머지는 독일군의 손에 들어갔다. 따라서 스탈린이 바르샤바 봉기군에 대한 공수 지원이나 공수 지원에 대한 협력을 거부한 것도 어쨌든 명분은 있었다. 바르샤바 교외 라지민(Radzymin)에서 소련군이 입은 피해가 장난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소련도 독일군의 파쇄공격에 당한 후에는 당분간 공세를 펴기에는 여력이 부족했고, 굳이 바르샤바 봉기군을 구하기 위해 무리를 할 생각도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봉기가 계속되었고, 수많은 시민들이 죽어나갔다.
4.3 독일군의 진압 ¶
독일군은 첫 날부터 강력한 진압에 나섰다. 얼마 후 파견된 디를레방어 사단, 카민스키 여단, 아제르바이잔 보병 대대 등이 무차별적인 공격을 퍼부으면서 진격을 개시했는데, 이들 병력 모두 인간 쓰레기로 구성된 막장 병력이었다. 디들레방어 사단의 경우 그 사단장인 오스카어 디를레방어(Oskar Dirlewanger) 박사부터 미성년자 성폭행 전과가 있었다.[3]
(디를레방어의 사진)
봉기 초기에만 65,000여 명의 바르샤바 시민들이 죽어나갔다. 뒤이어 한스 랄너(Hans Lallner) 휘하 제 19기갑사단이 봉기 진압을 위해 바르샤바로 차출되었다. 독일군은 2개 그룹으로 나뉘어 봉기를 잔인하게 진압해 나갔다. 독일군은 보급로 개방을 위해 오호타(Ochota) 지구를 공격했다. 집집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등 바르샤바는 스탈린그라드의 재현판이 되었다.
봉기 개시 2주 후, 독일군은 도심에서 기갑병력을 동원, 봉기군을 공격했으나 큰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폴란드군은 뒤이어 반격했으나 독일군이 장갑열차를 동원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9일부터 18일까지, 독일군은 구시가지와 은행 광장에 대규모의 공격을 가했다. 폴란드군이 곳곳에서 반격을 가해왔다. 폴란드 군의 저항에 독일군은 공중 폭격과 대포의 포격으로 응답했다. 이윽고 구시가지와 은행 광장은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폴란드 군은 독일군의 미친 폭격에 제대로 대응할 능력이 없었다. 대공 방어력이 거의 고갈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독일군은 폴란드 부상자들이 모인 병원에까지 슈투카 급강하 폭격기로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일부 병원에서는 심지어 화형까지 일삼았다.
8월 14일에는 계속되는 치열한 전투 끝에 구시가지가 독일군에 함락당했다. 이곳에서 봉기군은 7,500여 명이 사상했고, 독일군도 4,000여 명이 사상했으며, 시민도 30,000여 명이 사망하고 7,000여 명이 부상하고 37,000여 명(부상자 포함)만이 살아남아 바르샤바 시내로 도피했다. 독일군은 구시가지를 점령하면서 그 안에 남아있던 폴란드 민간인들을 싸그리 죽여버렸다. 구시가지에서의 폴란드 군의 영웅적인 항전은 후에 폴란드 인들의 뇌리 속에 깊이 뿌리박혔다. 9월 2일 경에 폴란드 봉기군은 구시가지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구시가지가 독일에 점령된 후 뒤이어 바르샤바 수력발전소가 독일 군에 함락되었고, 8월 17일 무렵 독일은 600mm 자주박격포 칼과 원격 조종 대전차폭탄 골리아테 등을 투입시켰다. 18일까지 봉기군과 구시가지의 시민들은 도심으로 쫓겨 들어갔다. 바르샤바 곳곳에서 매우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는데, 하인리히 히믈러는 이 전투를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비견했을 정도로 치열했다. 폴란드 봉기군은 곳곳에서 공격해 오는 독일군들을 막아내는가 하면, 폴란드군에 포위된 소규모 독일군들을 힘들여 분쇄해 나갔다.
폴란드 봉기군은 볼라 지구 함락 이후 좀 더 증강되었다. 폴란드 봉기군 소속 조시카(Zośka) 대대와 바체크(Wacek) 대대가 필사적인 전투 끝에 1943년에 이미 폐허가 되었던 바르샤바 게토를 점령했고, 겡시우프카(Gęsiówka)에 살고 있던 350명의 유대인들을 구출하였다. 이후 이 유대인들도 전투에 참여하게 된다.
식량 사정은 상당히 심각했는데, 이는 봉기 사령부가 "소련군이 도와주겠지?" 하고 대책을 세워놓지 않은 탓이었다. 하지만 봉기 발발 후 소련군은 강건너 불구경 자세를 취했다. 결과적으로 바르샤바는 심각한 식량 부족을 겪게 되었다. 소빈스키(Sowinski) 대대는 바르샤바 내의 맥주 양조장을 점령하였다. 그 맥주 양조장에 저장된 보리는 도시 중앙으로 배달되었고, 시민들은 그 보리를 물과 함께 죽으로 끓여 먹었다. 소빈스키 대대는 결사적으로 맥주 양조장을 쥐고 있었고, 봉기 종료 시까지 양조장은 소빈스키 대대가 점령했다.
국내군은 봉기를 선전하기 위하여 뉴스 영화도 제작했다. 안토니 보흐지에비츠(Antoni Bohdziewicz)가 이끌던 선전팀은 각종 뉴스영화를 제작하여 시민들에게 공개했다. 8월 13일, 첫 뉴스영화가 제작되어 황금의 거리(Złota Street)의 팔라디움 극장에서 상영되었다. 각종 신문과 잡지들도 제작되어 시민들에게 봉기에 관한 소식과 정보를 제공하였다.
4.4 9월의 상황
9월 10일에 이르면 봉기는 암울한 운명에 빠져들게 된다. 폴란드 봉기군은 봉기 내내 보급품과 무기가 부족했는데, 무기 상황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심히 암울하다. 많은 역사가들이 봉기 실패 이유로 가장 큰 것을 '보급품 부족'과 '무기 고갈'로 꼽는다. 만일 폴란드 봉기군이 좀 더 시간을 기다려서, 좀 더 많은 무기와 대공화기를 손에 쥐고 있었다면, 폴란드 봉기군이 그렇게까지 심하게 두들겨 맞지는 않았을 것이다.[4]
9일부터 10일간 진압군 사령관 에리히 폰 뎀 바흐(Erich von dem Bach)는 바르샤바 시민들에게 도시를 떠나라는 권유문을 살포하였고, 폴란드 적십자가 독일군과 협상을 하여 2시간 동안 포격을 중단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독일군은 도시 북부에 대한 공세를 개시했다. 시민들은 도시 남쪽으로 도망쳤다. 11일에는 소련군이 다시 공세를 개시, 독일군을 비스와 강 서안으로 몰아붙였다.
당시 연합군 공군 소속으로 공수 지원에 참여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의 윌리엄 페얼리(William Fairly)는 1982년 이렇게 증언한다.
"바르샤바를 찾는 데에는 아무런 어려움도 없었다. 그것은 100km 밖에서도 보였다. 그 도시에는 화염 속에 잠겨고 있었고 엄청나게 많은 대화재가 발생하였다. 그곳에서는 (곳곳에서 피어나오는 연기로 인해)타격할 물체을 찾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였다."
9월 중순, 소련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폴란드 인민군은 국내군과의 이념이 차이를 넘어선 동포애 때문에 어떻게든 바르샤바와의 교통을 연결하기 위해 처절하게 싸웠지만, 이들의 포위망 돌파 공세조차 실패로 돌아가자 소련은 바르샤바를 버렸다. 14일 공산 폴란드 군은 비스와 강 동안 지구를 점령하였고, 15일부터 17일까지 1,200여 공산 폴란드 군이 체르니아쿠프(Czerniaków)와 포비실레(Powisle) 등에 상륙, 투입되었지만 결국 패배, 23일까지 살아남은 병사들은 강을 도하하여 소련군 진영으로 도망쳐 들어왔다.
영국과 미국도 더 이상 소련에게 압박을 넣지 못했다. 9월 18일에 미국이 대규모의 공수지원을 실시하였으나 봉기군 수중에 떨어진 보급품은 20%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독일이 죄다 먹어치워 버렸다. 봉기 기간 동안 영국과 미국은 총 합계 200회에 걸쳐 공수지원을 실시했다. 영국군은 이 공수 지원으로 34기의 항공기를 손실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폴란드 군이 보유한 영역은 조금씩 줄어들어, 20일에 이르면 원래 8개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던 폴란드 군의 전투구역은 다시 3개 지역으로 개편되어야 했다.
外노먼 데이비스(Norman Davies)의 『Rising '44』의 내용에 따르면
1944년 9월 18일 미군의 공수 보급을 바라본 두 시선
폴란드 국내군 사령관 부르-코모로프스키의 회고:
그날은 날씨도 좋고 햇살 가득한 날이였다. 청명한 하늘.
물론 바르샤바 주민들은 구원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미군 비행기들이 도시 상공 머리 위로 날아가는 예상치 않았던 모습은 형언하기 어려운 기쁨을 자아냈다. 폭격기들은 매우 높은 고도를 비행했고, 그들 뒤에는 하얀 반점들의 자국이 남았다. 낙하산들이었다.
독일군은 대공포화를 날려 대었으나, 비행기에는 이르지 못했다.
바르샤바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열정의 순간들을 헤쳐왔다. 병자와 부상자들을 제외한 모두가 지하실에서 뛰쳐나왔다. 은신처에서 나온 사람들이 거리와 뜰을 메웠다. 그들은 이게 폴란드 공수여단의 도착이라고 믿었다.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한 병사는 쌍안경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그는 고함쳤다:
'이럴 수가, 독일군이 저들을 쏴대고 있어!'
한 장교가 그를 진정시키며, 그들은 공수부대원이 아니라 무기와 보급품을 담은 컨테이너에 불과하다고 설명해줬다.
'하지만 쌍안경으로 하늘에 흔들리고 있는 그들의 다리를 볼 수 있다니까요!'
병사는 계속 주장했다.
그래도 독일군들도 자기 부대들에게 비상을 거는 것을 보니 똑같이 판단 착오를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독일군 수송부대 병사 H. 슈트렉바르트의 일기:
우리는 오늘 지휘소에서 대부분이 뉴스필름에서나 보아오던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13시 55분 경 미군과 영국군 비행기들이 약 1,000미터 상공에 처음 2~3대씩 짝지어 나타났다. 대략 50~60대는 되어 보였다(나는 54대까지 세다 포기했다.). 거대한 새 무리가 날아오르듯 많은 수의 비행기가 있었다. 그러다 우리는 뭔가 비행기에서 떨어지는 것을 알아챘고, 그것들은 우리들 바로 상공에 있어 보였다. 낙하산이 펴진다! 경보가 내려지고 포화가 울려대었다. 몇몇은 사람과, 관절과, 손을 목격했다고 얘기했다. 그렇다면 서부에서처럼 여기도 마침내 공수부대가 투입되는 것인가? 여기에 그럴리는 없는데. 낙하산이 내려오면서 나는 까만색, 초록색, 노란색, 흰색 등 갖가지 색깔의 낙하산을 목격했다. 오, 저것들은 보급품 용기들이다!
……다른 용기들 안에는 독일 탄약이 있었다. 오, 이렇게 예의바를 수가. 미군들은 우리가 황급히 서부에 버려두고 온 보급품들을 갖다주고 있었다. 그것도 비행기로 바르샤바에 있는 우리한테까지 배달해주다니![5]
사실상 당시 폴란드의 외적, 내적 상황으로는 이 봉기는 성공하지 못할 운명이였던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무려 2달에 걸쳐 우세한 독일군에 맞서 싸운 폴란드 봉기군과 시민들의 투지는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봉기군 작전처장이었던 레오폴트 오쿨리츠키(Leopold Okulicki) 대령의 경우는 총탄이 빗발치듯 쏟아지는 독일군 기관총 진지에 몸을 꼿꼿이 세우고 수류탄과 함께 돌진하는 등의 솔선수범을 보이기도 했다. 전후에 오쿨리츠키 대령은 소련에 의해 체포되어 후에 살해당했다.
4.5 종지부
결국 바르샤바의 봉기는 우세한 화력과 기갑 전력을 보유한 독일군에 의해 진압당하기 시작했다. 9월 24일 모코투프를 공격한 독일군은 27일 모코투프를 점령했고, 29일에는 졸리보르쉬가 공격을 받아 30일 함락되었다. 진압군 사령관 바흐는 항복하면 제네바 협약을 준수하여 포로 대우를 해 줄 것이라는 선전방송을 하였다. 봉기는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봉기군은 각 지역으로 분해되어 와해되었다.
10월 4일, 바르샤바 공과대학 뒤의 광장에서 국내군에 소속된 대대들이 도열해 있었다. 이윽고 광장에서는 폴란드 국가인 '돔브로프스키의 마주르카'가 울려퍼졌다. 그리고 봉기는 끝났다. 10월 2일 오후 8시를 기하여 바르샤바 모든 지역에서 전투가 중지되었다. 10월 4일에는 봉기군 신문과 라디오 방송이 중단했다. 폴란드 봉기군은 세심하게도 살아남아 있던 유대인들에게 위조신분증을 배부하여 살게 해 주었다. 독일군은 특수공병대대를 바르샤바 시내에 투입, 바르샤바 전역을 완전히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그 결과 동유럽의 파리라는 명성을 듣던 바르샤바는 무참히 파괴당했다. 아직 살아남은 봉기군 중 일부는 항복을 거부하고 도시 곳곳에서 계속 절망적인 항전을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바르샤바는 1939년 바르샤바 수도방위전, 1943년 바르샤바 유대인 게토봉기, 1944년 바르샤바 대봉기, 라지민에서 있었던 소련과 독일의 대규모 전투로 인해 전체의 88%가 파괴되었다. 시민도 250,000여 명이나 죽었다. 유럽 지역에서 있었던 단일 학살 사건으로는 최대최악의 수치였다.(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수많은 소련 시민들이 죽어나가긴 했지만 그쪽은 소련군에 복무하다 죽은 경우도 있고 또 소련이 승리한 전투이니 그쪽은 패스)
살아남은 시민들은 외부의 캠프에 수용되었다. 이들은 이후 독일의 강제노동수용소에 강제수용되었다. 이후 1945년 1월 7일, 소련군은 바르샤바를 "해방"했다. 이 실패는 영국의 폴란드 망명 정부에게 치명타가 되었다. 폴란드는 결국 소련의 위성국가가 되었고 망명 정부는 사실상 생명이 끝나 버렸다. 다만, 망명정부 자체는 영국에서 계속 존속했다. 공식적으로 해체한 것은 1990년 폴란드 공산 정권이 무너지고 레흐 바웬사가 대통령에 취임한 뒤로 이때 바웬사에게 헌법 전문과 폴란드 정부의 상징물 등을 증여했다.
1944년 8월 1일부터 10월 2일까지 있었던 2달간의 대혈전은 결국 비극적인 종말을 맞았다. 나치 독일에 저항하여 봉기를 일으킨 봉기군과 바르샤바 시민들은 세계 반 나치 봉기의 전설이 되었다. 봉기 기간 동안 바르샤바의 25%가 날아갔고, 독일군이 이집 저집을 돌아다니며 파괴 행위를 벌인 덕분에 35%가 더 날아갔다. 최종적으로 1943년 게토 봉기와 1939년 바르샤바 수도방위전의 피해가 겹쳐서 85%가 날아갔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볼라 지구는 완전히 전멸했고, 바르샤바 중심부의 신세계 거리(Nowy Swiat)의 경우 71채의 건물 중 65채가 파괴되었다.
4.6 소련군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소련군은 봉기 기간 동안 바르샤바 봉기군을 도와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폴란드를 소련의 위성국가로 만들 생각을 하고 있었고 이미 폴란드의 공산 정권을 만들 인사들을 모아놓은 상태였다. 나중에 소련군 군용열차를 타고 들어온 이 폴란드 공산당을 두고 서방에서는 "화물 열차 정권"이라 비웃었다. 스탈린은 바르샤바 봉기군에 대한 지원을 거부했고 연합군의 수송기가 봉기군을 지원하도록 소련 영토에 이착륙하는 것도 거부했다. 스탈린에게 있어 바르샤바 봉기를 지원한다는 것은 자신의 정당한 전리품을 빼앗는 일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러시아와 소련의 역사를 보더라도 그들의 지배하에 있지 않은 폴란드는 위험한 존재이기도 했다. 따라서 소련과 직접 맞닿아있지도 않은 유고슬라비아의 경우와는 비교하기 어렵다.
한편 냉전이 끝나고 공개된 문서들에 의해서 실제로는 당시 소련군이 바르샤바에 진격하는 것이 군사적으로도 무리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소련군이 언제든지 바르샤바를 들이칠 수 있을 것처럼 압도적으로 보였던 것은 사실은 상당부분 스탈린의 허세였고, 실제로는 스탈린은 바르샤바 봉기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소련군에 바르샤바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하달했지만 재편성된 독일군의 파쇄공격[6]에 오히려 격파당했음이 드러난 것. 콘스탄틴 로코소프스키가 이끄는 소련군은 바그라티온 작전 이후 예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거리를 매우 빠른 속도로 지나쳤고 그러다보니 전력 재정비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보급도 매우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그라티온 작전에 연이은 공세의 마지막에 바르샤바라는 무리한 목표가 하달되어 공세종말점을 지나치게 되었고, 그 결과 독일군의 반격으로 오히려 수십km를 밀려나 방어에 급급한 상태에 몰리게 되었다. 이 때문에 소련은 지원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즉 결론을 내리면 소련군에게 바르샤바 봉기군을 도와줄 여력이 부족한 상황이 공교롭게도 마침 개입할 의지가 약했던 스탈린의 의도와 맞아떨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5 피해
폴란드 국내군
병력: 20,000-45,000여 명
피해: 15,000-18,000여 명 전사 또는 실종, 부상 5,000-12,000여 명, 포로 15,000여명
바르샤바 시민 150,000-250,000여 명 사망, 바르샤바의 85% 이상 파괴
나치 독일
병력: 30,000-39,000여 명, 시 외곽 병력 90,000여 명
피해: 10,000-17,000여 명 전사 또는 실종, 부상 9,000여 명, 포로 2,000-5,000여 명
6 영향
전쟁 이후 폴란드 인들은 자신들이 일으킨 이 봉기를 참으로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하긴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발생한 봉기 중 역사가들에게 가장 임팩트가 큰 것이 1943년 바르샤바 게토 봉기와 1944년 바르샤바 봉기다. 물론 이 봉기가 가장 대규모이기도 했던 것이 큰 이유이다.
그러나 봉기는 결국 바르샤바 전역을 폐허로 만들어 놓았고, 국내군 조직은 폴란드에서 거의 괴멸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위에 소련의 붉은 군대가 행진했다. 붉은 군대는 아직 남아있던 국내군 소속 병사들을 처형하거나 시베리아로 보내버렸다. 이러한 점을 보았을때 만약 일본이 항복하기 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한반도에서 봉기를 일으켰다고 해도 분단을 막을 가능성은 없었을지도 모른다.(제2차 세계대전 항목 참조.)
오늘날 바르샤바에는 바르샤바 봉기 기념비(Pomnik Powstania Warszawskiego 1944r)가 세워져 있다. 이 봉기 기념비에는 바르샤바 봉기를 일으키는 바르샤바 봉기군이 조각되어 있다. 이 기념비는 바르샤바 봉기 45주년을 기념하여 1989년 8월에 세워졌다. 또한 매년 8월 1일에는 이날을 되새기기 위해 1분간 사이렌이 울린다. 이때는 시민들, 자동차 할것 없이 모두 잠시 정지해서 1분동안 침묵을 지키며 희생자들을 추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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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지만 폴란드가 당하고만 산 것은 아니다. 오히려 폴란드가 강성했을때인 16-17세기에는 폴란드는 동유럽의 깡패로서 러시아를 자주 털어먹었다. 러시아의 혼란기였던 16세기엔 모스크바까지 점령했고 러시아의 차르 옹립에도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을 정도. 후에 신생 소비에트 정권이 생겼을 때도 소련-폴란드 전쟁을 일으켜 소련을 괴롭히기도 했고. 역사적으로 피해자-가해자를 나누기 힘든게 바로 이 폴란드-러시아 관계이다. 우크라이나 출신 러시아 작가 니콜라이 고골의 소설 타라스 불바를 보면 이 당시 폴란드가 얼마나 러시아인들에게 악당이었는지 잘 나타난다.
[2] 직역하면 체제전복 지도부이나 정황상 봉기 지도부라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3] 디들레방어는 후에 프랑스에서 체포된 이후 1945년 6월 7일 죽었다.
[4] 그런데 봉기를 연기했다면 국내군은 어떻게 힘도 써 보지 못하고 그대로 소련군에 손에 넘어갔을 가능성이 크다.
[5] 연합군이 독일제 탄약을 공수한 것을 이상하게 여길 필요는 없다. 당시 폴란드 국내군의 주요 무장은 독일군으로부터 노획한 독일제 화기였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선 당연히 독일제 탄약이 필요했다. 문제는, 국내군 점령지역이 매우 좁은 상태이다 보니 이 독일제 탄약이 대부분 독일군 측에게 넘어 간것.
[6] 기동방어의 일종으로, 적군이 공격준비를 마치기 전에 선제공격으로 격파함으로써 적군의 공세역량을 분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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