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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 이탈리아, 프랑스 | 118 분 |
감독 마르코 벨로치오
출연 지오바나 메조기오르노 (이다 달세르 역), 필리포 티미 (베니토 무솔리니/ 베니토 알비노 역), 코라도 인베르니지 (도터 카펠레티 역), 파우스토 루소 알레시 (리카르도 파이케르 역)
줄거리
무솔리니에게 첫눈에 반한 이다는 그가 발간하는 사회주의 일간지 ‘라반티’를 적극 지원한다. 우파로 돌변한 그가 파시스트당의 전신 ‘포폴로 디탈리아’를 창설하는데 전 재산을 쏟아 붓지만 자신이 낳은 아들이 인정받지 못하게 되면서 투쟁이 시작된다. 무솔리니의 내연관계를 처음 스크린에 담아 칸에서 화제가 됐던 거장 마르코 벨로키오의 신작.
출처 : 엔하위키 미러 (http://mirror.enha.kr/wiki/%EB%B2%A0%EB%8B%88%ED%86%A0%20%EB%AC%B4%EC%86%94%EB%A6%AC%EB%8B%88)
베니토 무솔리니
1. 개요
이탈리아의 정치가. 파시즘의 창시자. 1883.07.29~1945년 4월 28일
본명은 베니토 안드레아 아밀카레 무솔리니 Benito Andrea Amilcare Mussolini
1922년~1943년 이탈리아 총리이자, 초기 7년간(22~29), 중기 4년간(32~36) 외무부장관이었다.
일명 Il Duce(두체, 지도자...) 동의어로 독일어 퓌러(Führer)도 지도자라는 뜻.[1]
2 생애
2.1 파시스트가 되기 전
사회주의자였던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그 영향을 받아 무솔리니도 제1차 세계대전까지만 해도 열렬한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자였다(이렇게 방황하던 시절 노숙을 해서 경찰서에 잡혀 들어간 적도 있다.). 뛰어난 연설 실력과 카리스마로 사회주의자 시절부터 유명했다. 대학졸업장은 없었으나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초등 교사 자격을 얻었다. 그리고 이후 교사생활을 했다.
무솔리니는 1902년 입대영장이 나왔으나, 징병제였던 병역을 기피하여 탈영병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1905년 탈영병 사면령이 내려지자 자원입대, 2년간 병역의무를 마친다. 그리고 다시 교사직으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이탈리아가 중립을 지키던 1차대전당시 갑자기 이탈리아가 연합국 측으로 참전해야한다고 주장하여 제국주의 전쟁을 반대하던 공산당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이런 경향은 다른나라의 온건 사회주의자들도 적용되는 케이스가 많았다. 특히 프랑스와 독일(특히 독일 사민당), 러시아 등지에서 이런 일이 많았다. 게다가 이것은 프랑스 측에 매수되어 갑자기 주장을 바꿨다는 설도 있다. 후에 차린 신문사도 프랑스의 거액의 자금으로 세웠다는 말이 있다.
그는 자기의 신문사(Il popolo d'italia:이탈리아 인민)를 세우고, 언론인으로 변신한다. 처음에 자신의 신문은 사회주의자의 신문이라고 내세웠으나 극우로 전향, 파시스트가 된다. 그런데 한가지 변하지 않는 점이 있었는데, 공산주의자일때나 파시스트일때나 의회를 증오하고 민주주의를 반대하며 폭력을 옹호하는 것은 일관되게 한결같았다.
2.2 로마 진군
이탈리아는 독일과 동맹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차대전에 중립을 지키며 형세를 관망하다가 아무래도 대국인 영국-프랑스에 붙는 것이 유리해질 것 같으니까, 독일-오스트리아를 배신하고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한다. 이렇게 국물이라도 좀 얻어먹을까 해서 거액을 들여 참전하긴 했지만, 이탈리아군은 알프스에 가로막혀 있었고 당시 지휘관의 졸렬한 지휘 때문에 대군을 동원하고도 사상자만 엄청나게 났지 승패에 별로 영향을 끼치지 못한데다가 막상 독일군이 해당 지역에 오스트리아를 구원하기 위해 들어오자마자 대패배하여 베네치아의 코 앞까지 밀리기도 했다. 그래서 연합국의 승리에 별로 기여도 못했다. 이랬기 때문에 연합국의 논공행상에서 이탈리아는 찬밥신세였다. 하지만 이탈리아인들은 나름대로는(...) 이를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단 이건 이탈리아쪽에서도 할 말이 있는 것이 본디 이탈리아에서도 알토란에 해당하는 북부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향력이 강했다. 그랬다가 19C 이 지역을 오스트리아로부터 되찾고 또 가리발디의 붉은 셔츠단이 남부를 점령하는 등의 활약으로 겨우 통일이 이뤄진 것이다. 1차대전 당시 이탈리아의 주적은 오스트리아였는데 오스트리아가 전통적으로 이탈리아 지역 상당수를 지배했던 나라인 걸 감안하면 이건 상전벽해라 할만하다. 우리로 따지면 한국이 (한 때 조선을 식민지배한) 일본을 상대로 복수전을 치르는 격이라고 하겠다. 실제 독립하고서 50~60년 지나고서도 종주국과 맞서 싸울 정도로 국력을 키운 나라는 드물다. 심지어 그 미국도 독립하고 나서 영국의 국력을 따라잡는데 100년 이상은 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군은 오스트리아를 이길 정도로 강했으며(1차대전 당시로도 세계 5위 수준) 물론 오스트리아 해군이란 것이 좀 형편없긴 했지만 절대적인 수치에서 봐도 듣보잡 해군은 아니었다. 육군 역시 오스트리아와 싸우면서 공세를 유지했다. 비록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와도 싸워야 했지만...카포레토에서 독일군에게 대패한 것은 기본적인 국력의 차이도 있겠지만 당시 독일군이 후티어 전술이라는 훗날 전격전의 조상격 되는 신전술을 사용해서 그런 것도 있다. 거기다가 카포레토의 패배는 연합군의 지원과 국민들의 분기 등으로 금방 메웠다. 마지막으로 오스트리아가 항복 문서에 도장을 찍게 된 결정적 계기는 이탈리아 방면의 전선이 붕괴되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나름 대단하다고 볼만하다. 문제는 이런 것을 다 감안해도 어이없이 패배한 것이 많아서 평가가 별로 안좋다는 것인데...
1917년 군복무 시절의 무솔리니
무솔리니는 예비역이었지만, 1차대전 총동원령이 내려지자, 현역으로 재입영 대상이 되어 입대했다. 1916년~1917년 9개월간 참호전을 치뤘다. 이때 상병(corporal)으로 진급했으나, 박격포탄(혹은 수류탄)이 참호에서 터지는 바람에 온몸에 40군데나 파편이 박히는 중상을 입었다. 다만 무솔리니는 실전에 참전한 적이 없다는 설도 있다. 징집되어 9개월간 군대에 있었는데, 처음에는 열병에 걸렸고, 그 다음에는 훈련받던 중에 박격포탄이 터져 입은 부상으로 참전을 못했다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군역을 수행하던중에 부상을 입었으므로 무솔리니는 이것때문에 전상 제대했고, 부상경험으로 나름 상이용사라는 이름을 내걸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 공산주의자 시절의 경험을 살려 자신의 신문사를 이용하여 (이념상으로는 정 반대인) 파시스트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1922년 불공평한 전후 처리에 분노하는 베테랑들을 모아 '전투 파쇼'(파시스트당)을 창설하였다. 무솔리니는 당의 친위대라 할 수 있는 '검은 셔츠단'을 조직했는데, "검은 셔츠"는 이탈리아군의 돌격대의 복장이 검은 셔츠에서 유래한 것이다. 후에 이를 따라하여 나치는 갈색셔츠를 입는 SA, 중국에서는 국민당의 극우조직 남의사(청색셔츠), 한국에선 백의사(하얀셔츠)등의 셔츠 극우조직이 판친다. 이 검은 셔츠당은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테러를 가하며 세력을 키웠다. 당시 이탈리아 정치판은 강한 리더쉽이 없었고, 내각제 하에서 단명정부가 나와 정국은 혼란하였다. 당시 이탈리아 국민들은 강력한 통솔력을 원했고, 무솔리니는 이에 호응해 도박적인 로마 진군을 감행, 당시 사회주의에 반감을 가졌던 이탈리아 국왕 에마누엘레 3세의 눈에 들어 총리로 취임하여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여담으로 '이탈리아 최연소 총리 취임' 기록을 세웠다.).
로마로 진군하는 검은 셔츠단
2.3 에티오피아 침공
국가주의를 앞세운 무솔리니는 항상 로마의 영광을 되찾겠다고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큰소리 쳤고, 지중해를 로마시절의 명칭인 마레 노스트룸(Mare nostrum:라틴어로 우리들의 바다), 군대의 사단(divisione)을 로마시대 명칭인 군단(legione)[2]로 바꾸는 등의 짓거리를 했다. 그러나 당시 지중해 연안의 어떤 나라도 호락호락 이탈리아가 집어삼킬 수 있는 나라는 없었다. 기껏해야 이탈리아 근처의 약소국인 알바니아를 먹었지만, 선전에 비해선 초라한 결과였다.
자신의 독재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무솔리니의 파시즘은 대외적으로 침략주의를 표방했으며,[3] 결국 눈에 띤 손쉬운 먹이감은 아프리카에 있는 에티오피아였다. 에티오피아는 당시 아프리카에서 몇안되는 독립국이었지만, 군사적으로는 이탈리아군과는 상대가 안되었다. 게다가 아프리카 국가의 특징이기도 했던 부족간 암투가 극에 달해 통일된 국력을 모을 수도 없었다.
무솔리니는 이탈리아의 식민지였던 소말리아의 국경에서 에티오피아와 일부러 충돌하고 어거지로 구실을 만들어 내어 침략을 했다. 무기라야 외국에서 수입한 소총이 전부였고, 아예 창과 칼로만 무장한 부대까지 있었던 에티오피아 군은 전차와 전투기로 무장한 이탈리아군에게 상대가 안되었다. 1935년 50만의 병력으로 에티오피아를 침공한 이탈리아군은 1년간의 격전끝에 에티오피아를 점령하고 식민지로 삼았다. 이탈리아군은 약 만명이 전사했으나, 무솔리니가 한말이 걸작이다. "파시즘을 강화하기 위한 희생으로서 전사자 만명은 너무 적다."
그래도 자기 아들들은 여기 참전시켜 최전선으로 보내긴 했다.
에티오피아 여성을 희롱하고 있는 이탈리아 군인
2.4 제2차 세계대전 참전
1936년 에티오피아 침공으로 국제 사회의 지탄을 받은 뒤 독일, 일본과 함께 추축국의 일원이 되고 동맹을 맺었다. 그 뒤에도 독일과 함께 스페인 내전에도 깊숙히 개입하는 등 침략전쟁에 앞장섰다.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독단적으로 남프랑스를 침공했다. 근데 국경을 지키던 프랑스군에게 발렸다고 한다. 만약 프랑스의 항복이 더 늦어졌다면 이탈리아군을 격퇴한 프랑스군이 국경을 넘어 이탈리아를 공격했을 것이라고...
1940년 이탈리아 영토
이 때문에 히틀러가 프랑스를 굴복시켜서 죽다 살아났지만, 덕분에 프랑스에게 얻은 영토는 진짜 조금이었고, 이걸 만회하기 위해 1941년 그리스를 침공했다. 이탈리아군은 호기롭게 전진했으나, 그리스 군에게 격퇴당하다 못해 역으로 그리스군이 이탈리아령 알바니아로까지 진격했다. 이러자 무솔리니는 히틀러에게 구조를 요청했고, 히틀러는 바르바로사 작전을 2달간 늦추면서 다시 전광석화같은 공세를 펴서 유고슬라비아를 정복하고 이어 발칸반도까지 내려와 그리스군을 격파하고 이탈리아군을 구원했다. 그러나 이렇게 연기한 두달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모스크바를 칠 수 있는 시간을 날려버렸고, 결국 이는 독소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중요한 이유중의 하나가 되었다.
보통 이런 경험을 하면 다음 수는 생각을 좀 하고 두기 마련인데, 무솔리니는 그리스 침공이 제대로 안 되자 다음엔 북아프리카를 침공했다. 문제는 북아프리카의 이집트는 영국군이 주둔한 곳이었으며 덕분에 북아프리카 전역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작전상 후퇴했던 영국군이 전력을 증원받아 반격에 나서자...신나게 발렸다.
북아프리카 전선의 이탈리아군
뭐 그 후는...
이런 개삽질의 연속은 외형적인 '뽀대'에 치중해 이탈리아의 국력도 제대로 가늠하지 않은 채 맨땅에 헤딩하듯 저지르고 본 댓가다. 21세기인 현재도 그렇지만 이탈리아는 공업기반이 빈약했고, 어떤 사단은 1800년대 말에 제작된 화포를 장비하고 있을 정도였다. 물론 기술력은 어느 정도 따라잡을 수준이지만, 그런 기술력을 바탕으로 대량생산할 설비가 태부족인 상태라는 것이다. 덤으로 앞서 언급했듯이 부족한 전력으로 남들보다 앞서서 침략전쟁을 수행한 결과 있던 장비와 물자도 신나게 말아먹은 후에 세계대전에 뛰어든 격이라 평상시보다 상태도 안좋았다.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이탈리아도 소련에 선전포고를 하고 원병을 보냈는데, 동서부전선 어디서나 이탈리아군은 연합국의 동네북 신세였다.
이렇게 되자 무솔리니는 완전히 전쟁에 환멸을 느끼고 침략에 흥미를 잃었다. 집무도 대충대충 하는 경우가 많아졌고, 모르핀 중독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면서 히틀러에게는 스탈린과 강화를 하고 지중해 방면에만 공세를 집중하라고도 부탁하기도 했다. 히틀러는 이렇게 자신의 동지가 의욕을 잃어버리자 크게 화를 냈고, 무솔리니를 독일로 초청하여 설득, 계속 이탈리아를 동맹국으로 붙들어 놓으려고 했으나, 무솔리니는 권력 자체에도 흥미를 잃어버린 듯 했다. 괴벨스의 일기에 따르면 당시 독일을 방문한 무솔리니는 얼빠진 늙은이 같았다고.
2.5 몰락과 최후
결국 히틀러에게 빌붙어 겨우겨우 정권을 유지했지만 지리멸렬한 전과 등으로 이탈리아 국민들이 현 체제에 대한 염증을 느껴갔고, 그러다 1943년 미국과 영국 연합군이 시칠리아를 점령하고 이탈리아 본토 상륙이 임박하자 이탈리아 국왕뿐만 아니라 파시스트당 내부에서도 "더 이상 무솔리니로는 안되겠어..." 하는 분위기가 임박했다. 파시스트 당대회에서 무솔리니는 매도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들 뿐만 아니라 사위 갈레아초 치아노 외무장관 마저 등을 돌리고 이 무솔리니 해임 음모에 가담했다.
1943년 국왕은 무솔리니를 불러 "두체군, 이탈리아는 박살이 났다. 자네는 전국민의 미움을 받고 있어..." 이러자 무솔리니는 힘빠진 목소리로 "폐하, 중요한 결정이라도 내리셨습니까?" 그러자 국왕은 "그래. 자네는 이미 지도자로서 실격이야. 그만 두는게 어떤가". 무솔리니는 여기에 대해 반항 한마디 못하고 "후임자의 행운을 빕니다"고 조용히 말한후 궁정을 나왔다고 한다. 이런걸 보면 무솔리니는 거듭되는 패전에 절망하여 완전히 권력의지를 잃어버렸던 듯 하다. 무솔리니는 사임 후 국왕의 명령으로 체포되어 애인과 함께 알프스의 한 산장에 연금되었다.
하지만 오토 슈코르체니가 이끈 친위대 특공대가 그를 구출해 독일로 호송했고, 독일에서 히틀러의 지시를 받고 이탈리아 주둔 독일군을 동원하여 연합군이 아직 진격하지 못한 나머지 이탈리아 본토를 다시 장악하게 했다. 독일군이 이탈리아로 진군한 뒤, 히틀러는 무솔리니에게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에 괴뢰 정부 살로 공화국을 세우게 했다. 이후 무솔리니는 자신을 쫓아낸 이들에게 자신의 손이 닿는 한 피의 복수를 했고, 사위 치아노 역시 총살형에 처했다.[4]
그러다 이탈리아 전선의 전황이 악화되자 결국 국외 탈출을 꾀했으나 그의 변장을 알아챈 이탈리아 좌익 빨치산들에게 체포되었다. 이 때 무솔리니 일행은 독일군으로 위장하고 있었지만, 공교롭게도 빨치산 그룹 중에 예전에 무솔리니에게 훈장을 받은 병사가 있어서 들통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다만 빨치산이 그의 정부 클라라 페타치를 알아보고 무솔리니임을 확인했다거나 무솔리니가 신고 있던 값비싼 장화 때문에 위장이 들통났다는 다른 이야기도 있다.
결국 무솔리니는 사로잡힌 다른 측근들, 정부와 함께 총살로 즉결처분 당했다. 유언은 "그래도...잘된거야. 적어도 이탈리아 땅에서 이탈리아 인들에게 죽으니까 그나마 위안이군." 혹은 "나의 가슴팍을 쏘아라!"였다고 한다.
처형 후 무솔리니의 시체는 애인이였던 클라라 페타치와 측근들의 시체와 함께 썩어서 문드러질 때까지 밀라노 광장의 주유소 기둥에 거꾸로 매달렸다. 당장 이들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시민들의 침과 욕설 세례가 이어졌고, 심지어 몽둥이로 두들겨 패거나 권총으로 쏘기도 했다. 이후 유가족들에 의해 시체가 회수되었고, 프레다피오에 있는 무솔리니 가문의 묘지에 매장되었다. 덕분에 저 묘지는 지금도 이탈리아 극우파들의 성지 비슷하게 되어 있다.
3 파시즘과 무솔리니
사실 무솔리니 본인은 체계적 사상에 관심이 없었으며, 파시즘 사상의 뼈대를 체계적으로 만든 사람은 이탈리아의 철학자인 조반니 젠틸레이다. 물론 이것도 무솔리니 집권 후에 정권에 대한 사후적 정당화 용도로 이루어진 것이다.
본인은 파시즘을 정치사상으로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가 볼때 파시즘이란 그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방법"이지 권력이 가야할 길을 보여주는 이념은 아니었다. 무솔리니를 악동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있다. 히틀러의 나치즘 역시 정치사상이라기에는 너무도 빈약했지만, 권력이 가야할 최소한의 목적과 방향은 제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솔리니는 그조차 없었다.
4 히틀러와의 관계
1930년대까지만 해도 독일의 히틀러와 애증이 섞인 사이였다. 히틀러는 원래 무솔리니의 열렬한 추종자였고 무솔리니의 정치기법을 배우고 본받았다고 한다. 사실 무솔리니가 이탈리아 총리 자리를 차지했을 무렵에는, 나치스는 그저 세계 각국에 있는 파시즘 정당의 하나에 불과했으며, 히틀러도 무솔리니 워너비에 불과했고, 무솔리니의 초상화를 얻기 위해 이탈리아에 신청을 했다가 거절당하기까지 했으며, 로마 진군을 흉내내서 벌인 맥주홀 쿠데타는 실패하여 감옥에 갇혀버린 신세였다.
하지만 전쟁 중에는 입장이 바뀌어서 그의 돌출행동에 짜증을 내게 되었다. 그의 무솔리니에 대한 애증은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4.1 홀로코스트 참여 여부 떡밥
무솔리니가 인종차별주의자였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의견이 분분하다. 무솔리니가 파시스트당을 창설할 때 그의 지지자들 중엔 유대인의 수도 제법 있었으며, 딱히 그후로도 유대인을 탄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1938년엔 유대인을 이등 시민으로 규정하는 법이 제정되었고 파시스트당 가입도 금지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무솔리니가 자의로 법을 만든 것인지 히틀러한테 이쁨 받으려고 알아서 긴 것인지 확실치 않다.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나치의 영향권에 있다해도 나치가 직접 관리하는 곳이나 나치의 괴뢰국이 아닌 곳은 딱히 유대인들이 많이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다. 이탈리아의 유대인 수 40,000명 중에 희생당한 사람은 8,000명 정도다.
어쨌든 알게 모르게 홀로코스트에 협조했던 것은 사실이다. 가끔 가끔 친선을 위해 국내 유대인을 독일에 보내기도 했으며, 유대인 학살을 다룬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를 보면 이탈리아에 살던 유대인인 주인공이 수용소에 가게된다. 1943년 히틀러의 도움으로 살로 공화국을 건립한 후는 당연히... 그래도 히틀러의 똘끼가 장난이 아니었기에 무솔리니가 홀로코스트에 협조했다는 사실은 잘 언급되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무솔리니는 적어도 나치식의 인종주의자는 아니었다. 무솔리니는 사석에서 히틀러의 게르만주의를 비웃었으며, 이를 "마부(몸만 튼튼하고 머리가 빈 사람을 뜻한다.)를 위한것"이라고 비꼬았다.
5 이모 저모
5.1 개인사
무솔리니에겐 애인이 많았는데, 이 중 무솔리니를 전폭적으로 지원했던 첫 애인 이다 달세가 꽤 유명하다. 그녀는 무솔리니의 아이까지 낳지만 버려졌고, 그에 맞서 싸우다가 결국 정신병자로 몰려 죽는다. 2009년에 이탈리아에서 개봉한 마르코 벨로키오 감독의 '승리'는 바로 이 사람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다 달세르
베니토 알비노
연설의 귀재. 히틀러의 연설에서는 강한 제스처로 카리스마를 발휘하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연설 자체는 사실 차근차근 들어보면 논리가 형편 없어서 정신병자의 히스테리정도로 보이는데 반해, 무솔리니는 묵직한 바리톤 목소리로 "문장이 되는" 연설을 했다. 그럼에도 이탈리아어의 속도가 기관총처럼 빠르고 음악성이 있기 때문에 무솔리니의 연설 또한 청중에게 강한 인상을 주고 카리스마를 발휘했다.
외국어 실력도 히틀러에 비하면 훨씬 좋아서, 독일 방문 때 나치 집회에서 독일어로 유창한 연설을 하기도 했다. 이탈리아 억양이 상당히 심하긴 하지만 영어도 꽤 잘한 편이었다.
내용은 미국인과 이탈리아계 미국 이민자들을 찬양하고 우호를 증진하자는 내용. 참 아이러니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목욕이나 옷 갈아입는 것을 싫어하는 더러운 사내였지만, 누가 이탈리아 사람 아니랄까봐 패션감각은 제법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같이 찍은 사진을 보면 정말 옷 잘 입는다. 1934년 이탈리아를 처음으로 방문한 히틀러는 노란색 비옷에 줄무늬 바지를 입고 에나멜 가죽구두(...)를 신고 있었는데 반면 무솔리니는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근엄해 보이는 옷에 허리에는 제례용 단검을 차고 음빛 박차가 달린 검은 부츠를 신고 나타났다. 이를 보고 창피함을 느낀 히틀러는 다시는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았다.外사진을 보면 히틀러가 상대적으로 초라하다.
세계무대를 활보하기 전부터 무솔리니의 화려한 모습은 그의 전형이 되었는데 초등학교 교사가 되기 위한 임용고시를 치르면서 무정부주의를 상징하는 검은 옷을 입고 입에 담배를 문 채 등장했으며, Il popolo d'italia의 기자로 활동할 당시에는 수류탄을 서진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이렇게 혼란스런 모습을 한 이유는 사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무정부주의도 상당히 세력이 있는 사상이었고, 혁명적 사상으로 공산주의 못지 않은 파급력이 있던 사상이었다. 게다가 당시에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보다 더 잘 조직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당대의 트렌디한 코드는 다 갖다 쓴 트렌드세터 하지만 무정부주의의 "개인의 단체에 대한 일사불란한 자발적 단결"이라는 부분이 파시즘의 협동주의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아직 혁명적 인민주의가 분화되지 않은 시절에 공산주의자가 얼마든지 무정부주의적 코드를 차용하는게 가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컨대, 무솔리니는 딱 잘라서 무정부주의자나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로 분류할 수 없는 "혁명주의자"였다는 것. 사실 무솔리니의 운동 자체가 혁명적 보수주의이기도 하다.
사실 나치의 군복놀이는 이탈리아 파시스트를 따라한 것이다. 무솔리니는 나타나는 행사의 종류에 맞게 여러종류의 군복과 모자를 공들여서 코디했다. 두세 종류 정도의 제복(군복형 제복+양복형 제복)에다가 약모 하나로만 나타나던 히틀러에 비해서 훨씬 패셔너블.
그리고 의외로 공처가였으며(그런데 수많은 애인을 거느리고 있었다.) 미신을 잘 믿어 누군가를 사형하면 그 사람이 유령이 되어 자신을 보복한다고 굳게 믿는 겁쟁이였다.(그렇다고 안 죽이고 다닌 건 아니지만...) 유명한 공산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도 감방에 가둬놓기만 했을뿐 처형을 하지는 않았다. 물론 혹독한 감옥살이로 그람시는 거의 옥사할때쯤 석방되었고 석방되자마자 사망한다.
말을 무서워해서 탄 일이 거의 없었다고.(…) 그러나 선전용 사진을 보면 말탄 사진이 있는 것으로 봐서는 멋을 위해서라면 두려움도 이긴듯.
그리고 적국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이 존경하는 사람이었다. 자기 사위도 총살시킬 수 있는 사람이라서(...)
마오쩌둥은 에드가 스노우와의 인터뷰에서, 히틀러에 대해서는 경멸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무솔리니에 대해서는 꽤 높게 평가했다.[5]
5.2 무솔리니 사후
비록 전황의 악화로 인해 버림받았지만 이탈리아는 애초에 무솔리니만 빼고 전쟁을 할 의욕도 사정도 아니었으며, 전황이 악화되어 발등의 불이 떨어진 탓에 연합군 측으로 돌아섰을 뿐 파시즘 자체에 대한 시각이 수정된 건 아니라서 지금도 이탈리아는 극우파들이 제법 설치고 다니는 동네다. 하지만 공산당 같은 좌파가 전체적으로 더 우세한 편. 물론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같은 양반도 있다. 그 탓에 그의 가족들은 전혀 연좌제를 적용받지 않아서 매우 잘살다가 천수를 누리고 사망했다.
히틀러와는 달리 이탈리아인들 중 일부는 아직도 그를 호의적으로 본다. 나치전범들의 자식들이 대체로 성을 바꾸거나 아니면 이민을 가서 숨어지내는데 반해서, 무솔리니의 아들들은 아버지 사후에도 그다지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장남은 예술 평론가로 이름을 날렸고, 막내 아들은 재즈 연주자로 활동하면서 내한 공연을 하기도 했다. 아버지에 대해 어떻게 기억하냐는 한국 기자들에 질문에 "멋있었던 분"이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손녀는 현재 이탈리아 정치인이다. 그 막내아들이 바로 정치인 하는 손녀의 아버지.
나치 자체가 금기어가 되었고, 한손을 드는 파시스트식 경례를 하면 처벌하는 독일에 비해서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스트에 대한 저항감은 별로 없는 것으로 보인다. 아직도 이탈리아 정계에는 파시스트 정당들이 존재하며 당행사에서는 공공연히 파시스트식 경례를 한다.
히틀러에 비하면 자국내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기차가 제시간에 출발하는 나라"로 만들었다는 평가. 물론 무솔리니가 이끄는 이탈리아답게 기차가 정말로 제시간에 출발한 것이 아니라 기차가 제시간에 출발하는 것처럼 문서를 조작했다는 얘기도 있다.(...) 즉 무솔리니에 의해 이탈리아의 혼란이 해결되고 경제도 발전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전쟁 전까지만 해도 이 이미지가 먹혀서 상당히 대내외적으로 칭송받는 지도자였다. 바티칸 시국(교황청)과의 오랜 문제를 해결한 것도 그였다. 그리고 그의 집권기 동안 마피아 세력이 약화되기도 했다.
특히 마피아의 본고장인 시칠리아에서는 북부의 정권에 반항적인 남부인들의 기질을 제압하기 위해서 더욱 공들여 탄압을 가했다. 전쟁 후에도 한동안 시칠리아에 파견되는 사법 공무원들은 무솔리니 시절의 후광을 입으려고 당시 시칠리아에서 근무한 공무원들의 자손들 위주로 뽑았다고 한다. 게다가 사람을 그렇게 많이 죽인 것도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독재자 치고는. 그래봐야 독재자는 독재자지만 말이다.
이탈리아가 축구강국이 된것도 무솔리니의 공헌이라고 볼 수 있다. 1898년에 시작한 세리에 A를 현재 처럼 현대적 리그로 전환시킨 것은 무솔리니의 공로이다. 그 이후로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정상권의 축구 강국이 된다.
무솔리니 치하의 이탈리아가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 비해 그나마 사람 살만한 곳이라는 평가를 받는 데에는 무솔리니가 히틀러만큼의 똘끼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점도 있지만, 권력의 불안정성이 결정적 작용을 했다. 당장 집권 11년차인 1933년에 실행된 기동훈련에서는 상의는 흰색 셔츠와 흰색 나비넥타이를 받쳐 입은 연미복이고 하의는 기병바지와 기병장화, 손에는 선원들이 즐겨 쓰는 모자가 들려 있었다. 그야말로 언밸런스한 코디인데, 이는 무솔리니가 당시 상류층과 중산층 이하 계층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서 취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해를 기점으로 무솔리니의 공식복장은 군복으로 통일되어 간다. 히틀러가 나치당에 대한 통제권과 국내 자본가들에 대한 통제권을 하나씩 절차를 거쳐가며 확실히 가지고 있던 반면, 무솔리니는 불안정한 권력기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사불란한 전체주의적 통치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평가에 따르면, 이탈리아 파시즘 체제가 히틀러의 파시즘 체제에 비해 온건했던 것은 그들의 선의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더 멍청했기 때문에 예술과 같은 고급 문화 영역에 체계적으로 손을 댈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조금 더 교활했다면 독일이랑 엮이고도 곱게 죽은(?) 옆에 있는 반도나라의 독재자처럼 될 수 있었을지도?
또한 도시계획에도 관심이 있었는지 현대 로마에서 EUR 이라는 신도시 구역을 계획적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6 미디어
굽시니스트는 본격 2차세계대전 만화에서 이름(?)처럼 그를 무대리로 그려서 마순신 부장(용하다 용해에서 무용해 대리를 괴롭히던 직속 부장)에게 알밤을 맞는 걸로 그리기도 했다. 결국 회사를 그만둔 그는 파시스트 피자를 창업해 정신없이 먹다 혀가 골절되는(...) 맛인 뛰어난 맛으로 이탈리아를 장악한다.(…) 로마 진군은 5천명의 피자배달부들이 로마로 진군하는 것으로 패러디되었다.
리비아 독립운동을 그린 사막의 라이온이란 영화에서는 로드 슈타이거가 열연했다.
1970년대 미니시리즈에서는 에너미 앳 더 게이트에서 흐루쇼프, 이너 서클에서 베리야, 닉슨에서 후버로 나온 밥 호스킨스가 열연했다. 치아노 백작이 안소니 홉킨스, 치아노 부인이 수잔 서렌든인데, 처음부터 끝까지 찌질이로 나오고 대사로만 총살당했다는 언급이 나온다.
1980년대 조지 C. 스콧이 주연한 전기 영화에서는 화끈하게 총살되서 거꾸로 매달리는 장면이 그대로 묘사되었다. 한국에서는 무솔리니의 여인들이라는 엄한 제목으로 출시되었는데 19금 영화는 아니고 꽤 꼼꼼하게 당시 사건을 다루었다는 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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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직접적으로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doge:수장)에서 유래했다. 원래 뜻은 "가르치다"의 뜻인 라틴어 ducir에서 파생된 것이다. 같은 어원으로 파생된 언어로 영어의 duke(공작)와 불어의 duc(공작), 라틴어 dux(지휘관)로 모두 duce와 어원이 같다.
[2] 한국에서는 군단이 corps를 가리키지만.
[3] 한국의 파시즘은 이와는 약간 달리 외부의 침략을 강조하여 무조건 단결을 주장한다. 유신체제나 5공체제가 그 예.
[4] 치아노를 죽인 후 무솔리니가 후회하며 슬퍼했다는 설이 있으나, 근거가 명확하지 않다.
[5] 출처는 중국의 붉은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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