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전쟁 | 미국
감독 피터 웨버
출연 매튜 폭스 (보너 펠러스 장군 역), 토미 리 존스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 역), 하츠네 에리코 (시마다 아야 역), 니시다 토시유키 (카지마 역)
일본의 항복 (출처 http://www.necrosant.net/zbxe/14501)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이고 항복했다.
항복에 대한 교섭은 미국 정부가 했으나 실행은 연합군 총사령관의 몫이었다. 맥아더는 일본 정부에 자신이 위치한 필리핀의 마닐라로 대표단을 보내어 항복식에 관한 지시를 받도록 명령하였다.
1945년 9월 2일, 도쿄만의 전함 미주리호(USS Missouri)에서 일본 정부를 대표한 시게미츠(重光葵) 외무대신과 대본영을 대표하는 우메즈 요시지로(梅津美治郎) 육군 참모총장이 정식으로 항복문서에 서명하였다. 문서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일본군과 일본의 지배하에 있는 모든 무장 세력은 즉각 무조건 항복할 것.
2. 연합군 최고 사령관의 명령에 따를 것.
3. 일왕과 일본 정부는 포츠담 선언의 조항을 성실하게 이행할 것.(포츠담 선언에는 카이로 선언을 이행한다라는 대목이 있으므로 카이로 선언도 포함)
4. 일왕과 일본 정부의 권한은 연합국 최고사령관의 통제 아래에 둘 것.
독일의 경우 과거의 정부가 해산되고 점령군이 군정을 실시하였으나, 일본은 정부 체제가 존속한 상태에서 연합군 최고사령관이 포츠담 선언의 이행을 통제하고 감독한다는 식이었다. 이경우 연합군 최고 사령관의 권한이 어디까지인지가 애매한 문제로 남았다.
항복 문서가 서명된지 나흘후인 9월 6일,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연합국 최고 사령관의 권한에 대한 맥아더 원수에의 통지'라는 명칭의 전보를 보냈다.
이 문서의 제 1항은 다음과 같다.
<항복의 순간부터 일왕과 일본 정부의 국가 통치권은 귀하에게 종속되고 귀하는 항복 조건의 실시에 있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조치를 취한다. 귀하는 일본에 있어서의 항복 조항 실시를 위하여 관계 연합국이 할당하는 모든 육해공군의 최고사령관이 된다.
우리와 일본과의 관계는 계약에 의한 것이 아니고 무조건 항복에 의한 것이다. 귀하의 권력은 무제한이며, 그 권력의 범위에 대해 일본측이 어떠한 이의도 제기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연합군 최고사령관인 맥아더는 사실상 일본의 정복자로서 무제한의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1945년 9월 8일, 맥아더는 처음으로 도쿄에 입성했다. 그는 미국 대사관 건물 앞의 의장병들에게 "성조기를 게양하여 도쿄의 태양 아래 억압된 자에게는 희망의 상징, 올바른 자에게는 승리의 상징으로서 마음껏 영광스럽게 휘날리게 하라!"고 명령하였다.
맥아더 쇼군의 일본 통치가 시작된 것이었다. 맥아더의 통치는 일본에게 있어서 엄청난 행운이었다.
스탈린은 맥아더의 일본 점령 정책이 너무 물러터졌다고 불만을 터뜨리고 몰로토프 외상을 통해 수시로 일본을 독일처럼 연합군이 분할 통치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홋카이도에 노골적으로 욕심을 내고 있었다.
물론 맥아더가 이런 시도에 크게 반발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소련군 대표 니콜라에비치 데레비앙코(Nikolaevich Derevyanko) 장군은 맥아더의 승인이 있건 없건 소련군이 일본에 진주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맥아더는 만일 소련군이 단 한명이라도 자신의 허가 없이 일본에 들어오면 데레비앙코를 포함한 소련 대표부 전원을 즉각 투옥하겠다는 협박으로 정면 대응했다. 물론 소련군이 일본에 진주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편 일왕과 일본 정부는 자신들의 잘못이 단죄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9월 12일, 일본 내각은 긴급 회의를 열어 자신들의 전쟁 범죄에 대해 논의하였다.
"그동안의 전쟁 범죄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처벌을 피할 수 없다면 우리들이 자체적으로 재판하여 선수를 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지만 일왕은 이런 의견에 반대하였다.
"적들이 말하는 이른바 전쟁 범죄인, 특히 소위 책임자들은 한결같이 전날 오로지 충성을 다한 사람들인데, 이를 나의 이름으로 처단하는 것은 차마 못할 일이므로 재고의 여지가 있지 않을까?"
이 문제를 놓고 일본 정부 내에서 한동안 설왕설래가 오갔으나, 이런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 자체를 맥아더는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였다.
1945년 9월 15일, 점령군 사령부는 후버 대령을 통해 아래와 같은 성명을 발표하였다.
<맥아더 원수는 어떠한 점에 있어서도 연합국과 일본을 동등하게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본이 명확하게 이해할 것을 희망한다. 일본은 문명 국가간의 공정한 지위를 차지할 권리를 인정받고 있지 않다. 일본은 패배한 적인 것이다.>
이 성명에 대경실색한 일본 정부는 9월 16일, 히가시구니노미야(東久彌宮) 수상의 이름으로 담화문을 발표했다.
"미국인들이여! 부디 진주만을 잊어줄 수는 없겠습니까? 우리들 일본인도 원자폭탄에 의한 참화를 잊겠습니다. 그리고 완전히 새로운 평화적 국가로서 출발하겠습니다.
미국은 이기고 일본은 졌습니다. 전쟁은 끝났습니다. 서로 미움을 버립시다."
이 담화문과 함께 전쟁 범죄자들을 일본 정부 자체적으로 재판하겠다는 발표가 있었다.
일본인들의 정신연령은 13세의 어린아이와 같다고 분통을 터뜨리던 맥아더는 며칠후 몇사람의 참모를 숙소로 불러 오찬을 나누며 은근히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우리들의 정책을 순조롭게 실행하는 데는 일본인들이 우리들에게 완전히 마음으로부터 복종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 일본인들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사단이 항복할 때는 사단장이 자기 무기를 가지고 와서 의사 표시를 하는 것이 관습이 아닌가? 일본도 마찬가지겠지...
이것은 일왕이 자신을 인사차 방문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의사 표시였던 것이다. 일왕은 일본인에게 신과 같은 존재다. 그가 스스로 남을 방문하는 일은 한번도 없었다.
맥아더의 참모들은 일본 정부에 정복자의 뜻을 통보하였다. 하지만 맥아더는 결코 자신이 일왕의 방문을 지시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일왕의 방문에 앞서 궁성에서부터 차가 지나갈 도로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점령군 사령부에 전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일왕에게도 교통난을 맛보여주라고 지시하였고, 만일 그것이 싫다면 회견은 연기한다고 선언했다.
1945년 9월 27일 오전 9시 55분, 궁성을 출발한 일왕은 미국 대사관을 방문하여 맥아더를 35분간 면담했다. 이 회담에서 오고간 대화의 구체적인 내용은 오늘날까지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맥아더가 권한 담배를 받는 일왕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대체적인 내용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날 신문에는 깍듯하게 차렷 자세로 서있는 연미복 차림의 일왕과, 간편한 복장으로 뒷짐을 진 맥아더의 모습이 나란히 찍힌 사진이 실렸다.
뜻밖에도 키가 작고 초라하며 비굴한 일왕에 모습에 일본 국민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이 사진은 매우 큰 효과가 있었다. 궁성 앞에는 그동안의 전쟁 노력이 부족했다고 일왕에게 무릎꿇고 사죄하는 남녀노소들이 적지 않았는데, 이 시점부터 그 수효는 급격히 줄어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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