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개/분쟁&독립 전쟁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The Wind That Shakes the Barley, 2006) 7.5

슐츠105 2013. 9. 15. 22:06

전쟁, 드라마 | 독일, 스페인, 프랑스, 영국, 아일랜드, 이탈리아 | 126 분 |

감독 로치

출연 리언 머피 (데이미언(동생) 역), 패드레익 딜레이니 (테디(형) 역), 리암 커닝엄 (댄 역), 올라 피츠제랄드 (시네이드 역)


줄거리

 

운명의 바람 앞에 흔들리는
두 형제의 사랑과 선택!

 

1920년 아일랜드, 젊은 의사 데이미언은 런던의 병원에 일자리를 얻지만, 영국군의 횡포에 친구 미하일이 목숨을 잃는 사건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는다.

결국 데이미언은 자신의 꿈인 의사를 포기하고, 형 테디가 이끄는 IRA (Irish Republican Army 아일랜드공화군)에 가담,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운다. 영국군의 무기를 빼앗는데 성공한 그들은 어느날 내부의 밀고로 잡히게 되고, 형 테디는 호된 고문을 받는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아일랜드계의 보초병이 이들을 풀어주면서 그들은 한번의 위험을 넘긴다. 그리고 자신들을 밀고한 자가 오랫동안 알고 지낸 막내 동생 같은 크리스임을 알게 된 데이미언은 밀고자를 처형하라는 명령에 따라 크리스에게 총부리를 겨눈다.

“이제 돌이킬 수 없어…”
이제 돌아올 수 없는 선을 넘었다고 생각한 데이미언은 연인 시네이드와 함께 더욱 투쟁에 몰입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염원하던 영국과의 평화조약이 체결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러나 그 조약이 아일랜드의 반쪽만 자치를 허용한다는 것임을 알게 되면서 아일랜드의 독립운동단체들은 혼란에 휩싸인다. 우선 조약을 받아들이고, 점진적으로 개선해나가자고 주장하는 형 테디와 완전한 자유를 얻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며 다시 투쟁을 시작하자고 하는 데이미언은 서로 다른 선택을 하기에 이르는데…

 

 

 

 

 

 

 

 

 

 

 

 

 

 

 

 

 

 

 

 

 

 

 

 

 

 

 

더블린에 있는 아일랜드 독립 전쟁 기념물

 

 

아일랜드 독립전쟁 혹은 영국-아일랜드 전쟁(Irish War of Independence 혹은 The Anglo-Irish War)는 아일랜드를 지배하고있던 영국 정부에 대항해 1918년에 만들어진 아일랜드 공화국군이 일으킨 게릴라전입니다. 이 전쟁은 1919년 1월부터 1921년 7월 휴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영국에서는 "영국-아일랜드 전쟁"으로 불립니다. 이 전쟁으로 아일랜드는 아일랜드 자유국과 북아일랜드로 분단되었습니다.


이 전쟁에 참가한 아일랜드 공화국군은 옛 IRA로 불림으로써 후에 같은 이름으로 구성된 IRA와 구별하고 있습니다.

발단
영국-아일랜드 전쟁의 발단이자 원인은 일방적 독립선언을 한 독립 아일랜드 의회에 있습니다. 아일랜드 제헌의회 내각은 아일랜드의 독립을 선언하고 IRA에 전쟁을 개시할 것을 명했습니다.


1919년 1월 21일 덴 브린이 지휘하는 아일랜드 공화국군은 왕립 아일랜드 보안대(RIC) 소속의 경찰 두명을 살해했습니다. 이 사건은 아일랜드 독립전쟁의 시작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3일 뒤 남 티퍼레리에서 전쟁 선포가 있었습니다. 같은 날 처음으로 1916년 부활절 선언이 비준되었던 곳에서 발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로써 아일랜드 독립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폭력이 퍼지다


의용병들은 영국 정부의 소유물들을 공격했습니다. 그들은 무기와 군자금을 약탈했습니다. 그리고 영국 행정기관 소속의 사람들을 살해했습니다. 첫 희생자는 아일랜드 주재 사무행정 치안판사인 존 밀링이었습니다. 그는 웨스트포트에서 교도소로 몰려든 의용병들에게 총살당했습니다. 그들은 보어인들의 성공적인 전투 기술을 흉내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불규칙한 빠른 급습과 약탈이었습니다. 이몬 데 발레라같은 전통적 세계관을 가지고 재래적인 교전방식을 고수하던 몇몇 공화주의자 지도자들과 마이클 콜린스와 IRA 수뇌부는 이 전술을 반대했습니다. 폭력은 처음에는 아일랜드인 대다수가 거부반응을 보였으나 영국 정부가 보여준 광범위하고 잔악한 테러행위를 마주했을 때 그들은 곧 폭력행위에 동참했습니다. 영국 정부는 아일랜드 민간인들을 향해 이유없는 총격을 가해 사람들을 숨지게 했고 닥치는대로 아일랜드인들을 잡아들였습니다. 또한 영국군은 아일랜드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집과 농장들을 불태웠습니다. 폭력은 서서히 퍼져나갔으나 1920년이 되었을 때 폭력은 당연한 것이 되었습니다.


1920년 초에 더블린 부두 노동자들은 수백번의 약탈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전쟁 도구도 다루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아일랜드인 운전수들이 영국군을 수송하는 것을 거부한 직후 기차 운전수들이 잉글랜드에서 강제 동원되었습니다.


1920년 3월, 서 리머릭에서 IRA는 밀정을 하던 남자를 처음으로 살해하였습니다. 4월 초, 400여 개의 버려진 왕립 아일랜드 보안대 병영이 다시 사용되어지는 것을 막기위해 불태워졌습니다. 며칠후, 마운트조이 교도소의 죄수들은 정치적 지위(자신들의 석방)를 위해 단식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투쟁은 더블린에서의 대규모의 시위를 이끌어냈습니다. 이 혼란상황으로 인해 죄수들이 모두 석방되었습니다. 합동 경비대는 죄수들의 석방을 축하하던 밀타운 멀베이에 모여있던 비무장 상태의 군중들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해 수 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주 검시관은 9명의 군인과 경찰을 살인죄로 선고했으나 징계는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이몬 데 발레라아서 그리피스는 통계 자료를 통해 영국군이 처음 18개월간 무고한 민간인 주택들을 상대로 38,720건의 약탈행위를 벌였으며 4,982명에게 폭력 혐의를 씌워 연행했고, 1,604명에게 폭력 행위를 가했다고 했습니다. 또한 영국군은 102곳의 마을을 습격하여 약탈하고 불태웠으며 77명의 무고한 비무장 민간인과 공화주의자들을 학살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리피스는 의회 법정에 문제를 제기했으며 이 일은 IRA의 영국군에 대한 폭력행위를 증가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IRA의 주요 공격 목표는 아일랜드에서 영국 정부의 눈과 귀를 담당하고 있던 왕립 아일랜드 보안대였습니다. 9,700여명의 인원과 1,500여개의 병영이 아일랜드 전역에 산재해 있었는데 그들은 매우 부실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1916년 아일랜드 의회는 RIC 대원들의 강제추방을 선포했습니다. 이로써 아일랜드인들은 더 큰 규모의 폭력행위를 전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RIC대원들은 추방당하지 않기 위해 시간이 흐를수록 기하급수 적으로 항복했으며 무장을 해제했습니다. 또한 신병 또한 거의 보충되지 않았습니다. RIC대원들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상점을 습격하여 상점주인을 총으로 협박해 물건을 약탈하곤 했는데 이러한 행위 또한 대부분 사라지게 되었다. 몇몇 RIC대원들은 IRA에 협조하기도 했습니다. 1919년, 11명의 RIC 대원과 4명의 더블린 시립 경찰대원들이 살해당했고 다른 20명의 RIC 대원들이 부상당했습니다. 1920년에는 143명의 RIC 대원들이 살해당했고 197명이 부상당했습니다. 1921년에는 205명의 RIC 대원들이 살해당했고 291명이 부상당했습니다. 총 363명의 RIC 대원들이 전쟁 중 살해당했으며 510명이 부상당했습니다.


1921년 5월, IRA는 더블린 중심에 있는 커스텀 하우스를 점령한 후 불태웠습니다. 이것은 영국이 아일랜드를 식민통치하는 것이 더 이상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상직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군사적 시점에서 보면 이것은 큰 실수였습니다. 5명의 IRA 대원이 사망하고 80명 이상의 대원들이 붙잡혔습니다. 이는 IRA가 영국군을 상대하기에는 너무 빈약한 장비와 훈련을 받았음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1921년 7월까지 대부분의 IRA 대원들은 고질적인 총기와 탄약 부족에 시달렸습니다.


여전히 많은 수의 군사 역사학자들은 IRA가 영국에 대항해 게릴라전을 통해 성공적으로 싸웠으며 절대 군사적으로 패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휴전이 이뤄지기까지 마이클 콜린스를 포함한 많은 수의 공화주의자 지도자들은 만약 전쟁이 더 길어진다면 그것은 곧 IRA 투쟁의 종말을 고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투쟁 계획은 "잉글랜드로의 전선 확대"로 변경되었습니다. 리버풀 부두와 같은 경제적으로 중요한 곳이 공격 대상이었습니다. IRA는 19곳의 중요한 저장소를 파괴하고 불태웠습니다. 잉글랜드에서의 IRA 대원들은 영국의 여론이 군법에 대해 반대하는 쪽이었기 때문에 쉽게 체포되지 않았습니다. 이 새로운 투쟁방법은 휴전과 동시에 끝났습니다.


1919년부터 1921까지 있었던 공화주의자들과 영국군간 사이에 발생한 이 게릴라전으로 인해 죽은 사람의 수는 1,400여명 이상입니다. 이들의 구성을 살펴보면 363명의 보안관, 262명의 영국군, 공식적 사형당한 14명을 포함한 550명의 IRA 대원들 그리고 약 200명은 민간인이 차지하고 있습니다.(Hopkinson, Irish War of Independence p 201-202) 다른 문헌들에서는 600여명 이상의 민간인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벨파스트에서만 453명이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 사이의 싸움으로 사망했다고 적혀있습니다. IRA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북아일랜드에서 활동을 계속 이어나갔습니다.


결국 긴 휴전 협정 끝에 1921년 12월 6일 영국 런던에서 휴전 협약이 맺어졌습니다. 이 조약으로 아일랜드는 대영 제국의 지배 하에서의 자치를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조약은 여러가지 문제를 안고 있어서 결국 아일랜드 내전을 야기시켰고 마이클 콜린스는 반대파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