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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솔리니 최후의 4일 (Mussolini, ultimo atto, 1974) 6.4

슐츠105 2013. 11. 27. 22:34

드라마, 전쟁 | 이탈리아

감독 카를로 리자니

출연 로드 스타이거 (베니토 무솔리니 역), 프랑코 네로 (왈터 오디시오 '발레리오' 역), 리사 가스토니 (클라레타 페타시 역), 리노 카폴리키오

 

 

 

 

 

 

 

 

 

 

 

 

 

 

 

 

 

 

 

 

<무솔리니의 최후>

 

1943년 7월 연합군이 시칠리아 상륙에 성공하자 무솔리니는 왕실근위대에 체포되어 포차 섬에 이어 사르데냐 해역의 외딴 도서로 그리고 종국에는 아브루치 산맥 그란사소디탈리아의 한 호텔로 유폐되었지만 산기슭에 글라이더를 띄워보낸 독일 특공대의 도움을 받아 뮌헨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무솔리니는 독일에게 이탈리아 전지역의 점령·통치를 용인하는 대신, 북부에 새로운 파시스트 정부를 수립하고, 치아노를 비롯한 대평의회 반역자들을 처단하자는 히틀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살로에 세워진 '이탈리아 사회공화국'(RSI)은 그러나 독일군 사령부의 배후조종을 받는 괴뢰정권에 불과했고 각료 한 사람이 회고했듯이 총리는 다가올 종말도 알지 못한 채 여전히 환상을 꿈꾸며 역사와 그 속에서의 자신의 역할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1945년 4월27일 지지기반을 다 잃은 무솔리니는 오스트리아로의 탈출을 꾀했었다.
아프리카 전선에서 망신스러운 대패를 거듭했던 그는 궁극적으로 연합군의 이태리 침공을 초래하였다. 정신이 든 국민들은 국가 위기를 자초한 그를 버렸다.
일단 히틀러의 도움으로 재집권은 했지만 (이태리 북부지역) 밀려오는 연합군의 진격에 그는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동고' 마을 인근에서 그의 트럭 부대는 파르티잔의 기습 공격을 당했다.
애첩 클라라 페타치, 그리고 파시스트 당의심복들과 함께 함께 독일군 상사로 위장하고 인스부르크로 퇴각하는 독일군을 따라 스위스로 도주하다가 '코모 호반'에서 이태리-공산당 빨치산(파르티잔)들에게 체포되었다.
총리겸 대원수인 무솔리니는  외투와 철모를 쓰고 독일군병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신은 고급 가죽 부츠로 인해 정체가 드러나고 말았다.

이튿 날, 파르티잔은 한 농가로 그를 끌고 갔다.
나중에 정부인 클라레타 페타치가 합류했다.
클라레타는 무솔리니와 재회를 간청했기 때문이었다.

그 둘에게 차에서 내려라고 명령하고선 기관총을 부착했다. 그 둘을 향해 기관총을 발사했다.
그러나 그 기관총이 고장이 나있었기 때문에 다른 총으로 공산주의자 아우디시오는 무솔리니에게 총을 겨누었다.
무솔리는 외투를 벗어젖히며 말했다. " 가슴을 쏘시오."
그러자 클라라가 총신을 잡자 아우디시오가 방아쇠를 당겼다. 그녀는 가슴에 총을 맞았다.
그리고 나서 머신 피스톨로 아우디시오는 무솔리니를 아홉 차례 쏘아 죽였다.


클라라가 처형 당했을 때 여자 관계가 문란했었던 무솔리니 보다 29세나 젊은 33살이었다.

 

 클라라 페타치 생전의 모습

 

 

두 시신은 밀라노로 옮겨졌다. 사람들은 무솔리니의 얼굴에 오줌을 누었다.
무솔리니와 그의 정부가 살해당한 아침, 파르티잔은 그들의 시체를 밀라노의 퍼즐 라우레아테 차고 앞에 내버렸다. 군중이 주변에 모여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험한 말들을 외쳐댔다, 다른 사람들은 거기 서서 조소했다.
한 여자는 자신의 살해당한 다섯 자녀를 위해 죽어있는 무솔리니의 시신에 피스톨을 다섯 차례나 당겼다.  

마침내, 두 구의 훼손된 시체는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거꾸로 매달렸다.
군중은 수시간에 걸쳐 비웃음을 던지고 무솔리니의 시체에 침을 뱉었다.
그 다음 날 그는 프레다포에 있는 가족 묘에 매장됐다.
 

 

 

 

 

                            처형된 후 거리에 널려 있는 채 공개된 무솔리니(왼쪽에서 두번째).
 ,

 

 

공산당 빨치산들은 28일 이들을 처형하고 29일 그 시체들을 밀라노로 운반해 와서 어느 주유소에 정육점의 갈쿠리에매달아 전시했었다.
이 끔찍한 장면들은 세기적으로 유명한 뉴스 보도의 초점을 받았다.

무솔리니와 같이 전시된 다른 시체들은 그와 같이 도주하다가 체포 되어서 같이 총살당했던 무솔리니의 추종자들이다.무솔리니나 페타치등의 시체가 심하게 훼손 된 것은 빨치산들이  시체들을 군중들에게 내주고 돌 팔매질과 발길질을 하게 허용했었기 때문이다.

페타치는 교황 주치의였던 의사 아버지를 둔 상류 가정의 딸이었는데 바람직하지 않은 길을 걷다가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이태리군의 대원수였던 무솔리니는 독일군 하사관 복장을 한채 처형당했다.

 

 


왼쪽에서 두번째가 페타치, 세번째가 무솔리니다

다른 사람들은 같이 국외 탈출을 하다가 체포되었던 파시스트 추종자들 .
이날 아침에 체포되어 현장에 끌려와 무솔리니 시신 앞에서 사살된 그의 최고 심복 Achille Starace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