슐츠의 자막공방/친밀한 적 (2007)

알제리 해방운동

슐츠105 2011. 9. 21. 17:28

 

 

 

 

 

17세기에 오스만투르크제국이 쇠퇴하기 시작하자 이 지역은 투르크의 형식적인 종주권을 인정하면서도 실제로는 독립국에 가까운 정치형태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서유럽 여러 나라가 서아프리카기니만() 연안에 무역기지를 만들어 해상교역이 활발해짐에 따라 사하라사막을 횡단하는 육상교역이 쇠퇴하였다.

중계무역지였던 이 지역은 타격을 받았고, 해적이 지중해 서부의 선박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해적을 토벌하려는 열강과의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으며, 1830년에는 프랑스가 해적기지 제압을 이유로 이 지역에 원정군을 상륙시키고 데이를 격파, 알제를 점령하였다. 이것이 프랑스에 의한 알제리의 식민지 지배의 시초였다. 그러나 그후에도 에미르 아브델 카데르(Emir Abdel-Kader)를 지도자로 하는 저항이 있었으며, 1837년에는 오랑 지방에 대한 카데르의 세력을 인정하는 등 프랑스의 알제리 식민지화는 곤란을 겪었다.

1871년에는 카비리아 지방의 반()프랑스 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여 아틀라스산맥의 북쪽은 거의 프랑스 지배하에 들어갔으나, 사하라에서의 반프랑스 항쟁은 계속되었다.

1920년대 중엽부터 메살리 하디(Messali Hadi) 등을 중심으로 알제리의 근대적 민족주의 운동이 시작되었는데, 이는 프랑스 노동자계급의 사회주의적 계급투쟁과 결부되어 탄생한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이슬람교도의 민족주의 운동으로서 이집트와 터키의 지원을 구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민족주의 운동은 1945년 알제리에서 개최된 대()독일 승전 축하행사 때 프랑스 국기 대신 민족운동기를 게양하여 프랑스군()으로부터 가혹한 무력진압을 당하였다.

1954년 11월 4일 민족해방전선(FLN)으로 뭉친 민족주의운동은 알제리 각지에서 일제히 무력해방 행동을 개시하였다. 이때부터 피비린내 나는 8년간의 투쟁 끝에 1962년 독립을 쟁취하였고, 그해 9월 민주인민공화국이 성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150여 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1963년 아흐메드 벤벨라(Ahmed Ben Bella)가 초대대통령으로 선출되어 범()아프리카 운동,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의 반식민지주의 운동의 지도자로서 화려한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1965년 후아리 부메디엔(Houari Boumedienne)의 쿠데타로 실각하였다. 부메디엔은 국회를 해산하고 알제리민족해방전선(FLN)의 간부를 중심으로 '혁명평의회'를 설치, 그 의장이라는 형식으로 1967년 대통령에 취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