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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 포로수용소 (Stalag 17, 1953)

슐츠105 2015. 10. 4. 20:50

전쟁, 드라마 | 미국 | 120 분 |

감독 리 와일더

출연 리엄 홀든 (세프톤 역), 돈 테일러 (던바 대위 역), 오토 프레밍거 (폰 쉐르바흐 역), 로버트 스트라우스 (카사바 역)

 

줄거리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다뉴브강 근처의 제 17 포로수용소.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앞둔 밤에 4막사의 미군포로들이 침대에서 일어난다. 두 명의 동료를 탈출시키기 위해서이다. 막사장과 감시인 사이에 이야기가 오고간 후, 두 사람은 난로 밑으로 난 통로를 이용해 막사 밖으로 빠져나간다.

탈출을 지켜보던 세프톤은 탈출에 실패할 것이라며 수용소에서 돈 대용으로 쓰이는 담배로 내기를 건다. 이에 다른 포로들은 반대편에 걸지만 결국 탈출 실패로 세프톤이 이긴다. 담배, 술 등의 물건으로 편안한 수용생활을 즐기는 세프톤은 다른 포로들에게 기회주의자로만 보일 뿐이다. 게다가 탈출 실패 후 스파이가 막사 내에 있을 거라는 말에 동료들의 시선도 곱지 않다.

그러던 어느 날 프랑크푸르트 기차역을 폭파한 던바 대위가 수용소에 들어오는데 누군가의 제보로 폭파범인 게 알려져 수용소장에게 끌려간다. 이 사건으로 오해를 받게 된 세프톤은 다른 포로들에게 억울한 뭇매를 맞게 되는데...

 

 

 

 

 

 

 

 

 

 

 

 

 

 

 

 


 

 

포로수용소 관련 기사

 

 

 

독일군에 붙잡힌 연합군 전쟁 포로들의 일상이 70년 만에 영상으로 공개됐다.

1940년 5월 10일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할 당시 붙잡힌 약 5000명의 프랑스 장교 포로들은 체코슬로바키아 국경과 가까운 오스트리아의 17A 수용소에 수감됐다.

수용소에는 중앙 통로 양 옆으로 20개씩 모두 40개의 막사가 들어섰고, 수용소는 두 겹의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밤마다 투광조명등이 수용소 일대를 비췄다. 탈출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수용소의 일상을 담은 영상은 그렇지 않았다. 일부 포로들은 기지와 창의성을 발휘해 카메라를 만든 뒤 수용소의 일상을 촬영했다. 그들이 만든 것은 30분짜리 다큐멘터리였다. 목숨을 건 행위였다.

그들은 소시지 안에 몰래 부품을 들여와 카메라를 만들었다. 수감자들은 독일 군인들이 수용소 안으로 들어오는 식품을 검사할 때 오직 가운데만 절단한다는 것을 알고 부품을 소시지 양 끝에 숨겨 들여왔다.

포로들은 수용소 도서관에 있던 사전의 속을 비운 뒤에 카메라를 만들어 넣었다. 책등을 열고 닫아 카메라의 셔터 기능을 하도록 했다. 구두 굽은 8㎜ 카메라 필름을 감는 데 사용했다.

그들이 촬영한 영상은 수용소의 생활상을 생생히 전달한다. 포로들이 제공받는 부실한 음식과 예고없이 들이닥치는 독일군의 수색 등 모든 것을 담았다. 촬영자는 무척 대담해 몸을 수색하는 독일군의 코 바로 아래까지 찍기도 했다.

필름은 수감 중에 포로들이 팠던 32개의 터널 중 하나를 작업하고 있는 모습도 보여준다. 포로로 이곳에 갇혀있었던 장 퀸느 그랑디디에 중위는 지난달 그의 100번째 생일을 맞았다. 그는 “초기에는 우리의 막사가 있는 곳에 많은 수의 터널을 파려고 시도했다. 그것은 저항의 한 형태로 여겨졌고 우리는 처벌받지 않았다. 절대 기능한 적은 없지만 독일군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고 BBC에 전했다. 철조망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었고 경비병들은 늘 파낸 흙을 발견해냈다.

어쩌면 전쟁 포로가 되는 것이 이들에게는 다행이었는지도 모른다. 포로 수용소에서 강제 노동은 없었고 포로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공부하면서 보냈다. 수업은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뛰어난 지식인들이라 할 상급 장교들이 이끌었다. 이들 교사들의 수업 수준은 워낙 뛰어나 전쟁 이후에 민간 기구에 의해서 학위로 인정받기도 했다.

자신의 아버지가 이곳의 포로였던 피에르 외당드리는 포로들을 탈출시키는 데 성공한 터널 계획도를 공개했다. 독일은 장교들에게 ‘신록의 극장’으로 불리는 극장을 세울 수 있도록 허용했는데 극장에 장식된 나뭇가지들이 부분적으로 경비병의 시야를 가렸다. 극장은 막사와 철조망 사이에 있었고 이는 파야할 터널의 길이가 훨씬 짧아졌음을 의미했다.

국제적십자위원회는 수용소가 공중 폭격으로부터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고 지적했고 독일군은 포로들이 삽을 들고 그들 자신의 참호를 파도록 명령했다. 포로들은 극장 옆에서 철조망 밑으로 지나가는 터널을 뚫기 시작했다.

단순히 땅만 파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수학과 지질학, 건축학적 지식이 동원되었다. 피에르는 “(포로들은) 필요한 전문지식을 갖고 있었다. 영양이 부실한 상태에서도 포로들은 90m 길이의 땅굴을 파 두번째 철조망에서 약간 떨어진 곳으로 출구를 낼 수 있었다”고 전했다.

수용소 안에서도 꼼꼼한 탈출 계획이 세워졌다. 수용소를 탈출한 뒤 입을 민간인 복장을 디자인하는 팀이 꾸려졌다. 또 다른 이들은 붙잡혔을 때 쓸 신분증을 위조했다. 터널의 입구는 극장 좌석 아래에 숨겨져 있었다.

1943년 9월 17일이 되자 탈출 준비가 완료됐다. 때맞춰 독일군은 주말 점호를 취소했다. 토요일 밤, 많은 수의 포로가 수용소를 빠져나왔고, 일요일 밤에는 남은 포로들이 빠져나올 수 있었다.

장은 “터널의 길이가 짧았고 안에 있는 사람들이 많아 태아처럼 쪼그린 자세로 가야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또 “공기가 너무 적어서 일부는 기절했다. 우리는 거의 10시간을 기다리면서 터널의 끝에서 독일 총살 집행 부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상상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다행히 빠져나온 포로들은 짧은 거리만 달려서 나무에 숨을 수 있었다. 또 이들은 같이 움직이지 말고 모두 다른 방향으로 이동하도록 지시를 받았다.

초반에 탈출했던 포로들 중 일부는 붙잡혀 수용소가 폐쇄될 때까지 그곳에 갇혀지냈다. 126명이 탈출 뒤 일주일만에 잡혔다. 장을 포함해 오직 2명만이 가까스로 프랑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오늘날 유일한 생존자인 장은 프랑스 최고의 훈장인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그는 1943년 오스트리아 빈에 도착해 성병에 걸린 독일 병사들을 치료했다. 마침내 파리까지 돌아갈 수 있는 기차표를 얻은 그는 독일 장교들과 함께 열차로 파리에 도착했다. 집에 돌아온 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장은 수주 뒤에 레지스탕스에 합류했다.

 

장교 포로수용소 17A의 탈출 사건은 2차대전 중 가장 큰 탈옥 사건이었다. 1944년 폴란드의 사병용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한 76명의 연합군 공군병사들 중 50명은 다시 붙잡혀 히틀러의 명령으로 처형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