슐츠의 자막공방/국경 1918 (2007)

카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하임 장군

슐츠105 2016. 4. 24. 0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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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복의 모양이나 철십자때문에 독일군처럼 보일 수 있지만, 핀란드나 만네르하임이 나치는 아니었다. 겨울전쟁과 계속전쟁에서 소련군에 맞서 싸우던 핀란드에 보내진 독일의 군수 지원 때문에 저렇게 입고 있는 것이다. 위 두 전쟁에서 핀란드군이 독일군의 제복을 입었거나 독일 장비를 썼다는 기록이 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Baron Carl Gustaf Emil Mannerheim

카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하임 남작
1867.6.4 – 1951.1.28

핀란드의 최고 지휘관, 대통령


핀란드를 존망의 위기에서 세 번[1]이나 구해낸 구국의 영웅이자 스탈린과 맞짱을 뜨고 히틀러를 먹튀한 사나이.

핀란드를 사랑했기에 핀란드를 떠난 사나이.

핀란드가 부패인식지수, 언론자유지수 세계 1위를 먹은 데에는 이 사람이 나치와 소련으로부터 나라와 자유를 지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2차대전때의 활약상을 보자면, 독일의 만슈타인보다도 더 대단한 의미에서 만본좌라고 평가할 수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선 영어식으로 매너하임으로 잘못 읽는 사람들이 꽤 보인다. 2차 세계대전 학술서 중에도 그런게 있고 영화 겨울전쟁의 복돌 자막만 해도 그렇고... 어중간하게 매너헤임도 아니고 둘을 섞은 매너하임은 뭘까


1. 러시아 제국
1867년 당시는 러시아 제국 소속이었던 핀란드의 남작 가문[2]에서 태어났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니콜라이 기병학교를 졸업 후 러시아 근위대에 들어갔으며, 러일전쟁에 참전하기도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상대로 전과를 올렸다. 1917년 러시아 혁명 후 제정이 무너지고 임시정부가 들어서자 만네르하임은 제대하여 핀란드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2. 핀란드 내전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가 혼란한 상황을 틈타 핀란드는 독립을 쟁취한다. 그러나 핀란드도 러시아처럼 1918년 적백내전이 일어났고 이전부터 反 볼셰비키 성향이었던 만네르하임은 백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내전 초기 러시아 백군이 만네르하임에게 연합을 제의했으나 러시아 백군이 핀란드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한 만네르하임은 연합제의를 거절하였다. 대신 만네르하임은 독일제국의 지원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이 때부터 독일은 만네르하임에게 봉이었다 만네르하임은 판 테레 전투에서 적군을 완파하며 승기를 잡았고 4월 13일 수도 헬싱키에 입성한다. 5월 5일, 적군의 마지막 근거지마저 함락하며 만네르하임은 내전을 단 5개월만에 끝냈다.[3]

내전이 어느정도 마무리되자 만네르하임은 핀란드를 떠났다. 이유는 자신이 핀란드에 남아있으면 자신이 끌어들인 독일의 영향력이 너무 강해질 것을 우려해서. 만네르하임을 핀란드의 왕으로 추대하려는 사람까지 있었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대통령 정도는 우습게 될 수 있었을테지만 조국을 위해 조국을 등진 것이다. 다행히도 몇달 후 독일제국이 붕괴하면서 만네르하임은 핀란드로 귀국할 수 있었다. 귀국 직후 만네르하임은 핀란드 임시 국가지도자가 되었고 영국, 미국으로부터 핀란드의 독립을 인정받는데 성공하며 핀란드의 독립을 공고히 한다.

1919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카를로 유호 스톨베리에게 패하였고[4] 그 직후 정계에서 물러났다. 만네르하임은 2선에서 인도주의 활동과 핀란드군 발전에 힘썼다.


3. 제2차 세계대전


3.1. 겨울전쟁
1939년,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은 소련은 폴란드 반쪽과 발트 3국을 차례로 접수한 후 핀란드를 노리기 시작했다. 핀란드는 이미 독소 불가침조약 체결시 소련의 몫으로 밀약이 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핀란드를 방문한 소련의 외무장관 몰토로프는 핀란드의 카렐리야, 라플란드 지역 할양 + 항구 이용권을 요구하였다. 핀란드는 당연히 이 요구를 거절하였고 소련의 침략 의도가 명백하다고 판단한 핀란드 정부는 72세의 만네르하임을 핀란드군 총사령관으로 복귀시킨다.

만네르하임은 1천km가 넘는 국경을 모두 방어한다는 건 불가능하지만 소련도 한정된 돌격로만 이용할 거라고 판단했다.[5] 소련의 주요 진격로로 예상되는 카렐리야 회랑을 중심으로 만네르하임 방어선(Mannerheim Line)을 구축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는데 핀란드 국민들도 전폭적인 협력을 보냈다. 독립한 지 20년 밖에 안 된 핀란드 국민들에게 이 전쟁은 조국의 존속이 걸려있는 전쟁이었다. 자원 입대자가 줄을 이었고 진지 구축도 자발적으로 나섰다. 미국과 캐나다에 거주하던 핀란드계 이민자들도 핀란드에 돌아와 입대 신청서를 냈다. 심지어 만네르하임이 백군 총사령관일 때 때려잡던 공산주의자들까지 만네르하임과 핀란드군에 전폭적으로 협력했다.[6]

11월 29일, 전차 3,200여대, 항공기 3800여기를 앞세운 26개 사단 46만명의 소련군이 핀란드 국경을 넘어 침공을 개시했다. 당시 핀란드군의 전력은 33만명, 전차 33대, 항공기 110여기에 불과했다. 게다가 소련의 위협이 가시화되자 종류를 가리지 않고 총을 나누어준 탓에 정규군마저 개인화기가 통일되지 않은 상태였다. 누가 봐도 소련의 압도적 우세였고 12월 6일까지 소련군은 쾌속 진격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이건 핀란드군에게 유리한 지형으로 소련군을 끌어들인 만네르하임의 함정이었다.페이크다 이 병신들아 12월 8일, 톨바야르비 전투에서 핀란드군 1개 연대의 야간기습을 받은 소련군 2개 사단이 박살나며 전황은 급반전되었다.[7]

만네르하임이 이끈 핀란드군은 철저하게 방어에 유리한 자연지형을 기반으로 모티 전술[8]을 사용하였다. 말 그대로 통나무를 조각내듯 소련군 부대를 각개격파 하는 방식이었는데 스키부대를 중심으로 핀란드군은 게릴라 전을 펼쳤고 여기에 말려든 소련군은 부대별로 고립되고 말았다. 거기에 12월 중순이 되면서 기온이 영하 30도 이하로 급강하하며 폭설까지 쏟아졌는데 더욱이 1939년의 겨울은 50년만에 가장 혹독한 겨울이었다. 소련군은 혹한을 난생 처음 경험하는 남부 우크라이나 출신들이 중심이었고 너무 낙관한 나머지 월동준비조차 제대로 하지 않은 탓에 고립된 소련군은 집단 동사하기 시작했다. 고립되어 동사한 숫자가 전투 중에 전사한 수보다 더 많을 정도였다. 소련군은 진격은 고사하고 보급이나 제대로 되기를 빌어야 할 입장이 된 것이었다.

12월 9일부터 다음해 1월까지 계속된 수오무살미 전투에서 소련군은 25,000명을 넘는 사망자를 내며 대패했고 전쟁은 완전히 교착상태에 빠져버렸다. 이걸 본 세계는 소련군을 비웃었고, 핀란드에게 갈채를 보냈다. 제2차 세계대전 내내 중립을 지키던 스웨덴도 이 때만은 핀란드에게 군수품과 자금 지원을 해주었고 8,700명의 스웨덴 의용군도 핀란드를 위해 싸웠다. 외국의 여러 단체들도 핀란드에 식량과 의약품을 지원해주었다.

헬싱키 주재 외국 특파원들은 연일 핀란드의 전과에 찬사를 남기고 소련군을 조롱하는 기사를 쏟아내었다. 심지어 타임지는 손바닥만한 나라한테 얻어터지고 역관광 당한 스탈린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하며 비아냥과 조롱의 메세지를 보냈다.

그러나 핀란드와 소련은 애초에 국력의 규모가 달랐다. 스탈린은 총사령관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를 해임한 후 세묜 티모셴코를 새 지휘관으로 앉혔다. 티모셴코는 지난 패배에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소련군의 지휘와 전술을 바로잡았고 1940년 2월부터 날씨가 풀리기 시작하자 90만명의 병력을 더 투입해 총공격을 개시했다. 핀란드군은 결사적으로 저항했으나 2주만에 병력의 절반을 잃었고 결국 만네르하임 방어선이 무너졌다. 비축한 탄환마저 바닥을 드러내자 만네르하임은 핀란드 정부에 소련과 강화를 맺을 것을 요청했고 정부도 이를 받아들였다.

소련도 예상치 따위는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린 엄청난 피해 규모에 질려있었기에 핀란드의 강화 요청에 순순히 응했고[9] 3월 6일 모스크바 평화조약이 체결된다. 핀란드는 카렐리야를 비롯해서[10] 전쟁 전 소련이 요구한 대부분의 영토를 할양했지만 폴란드나 발트 3국처럼 국가가 사라지는 최악의 상황만은 면할 수 있었다. 만네르하임의 분전이 다시 한 번 핀란드를 구했다.


3.2. 계속전쟁
소련은 강화조약을 맺으면서 심각한 실수를 하나 했다. 핀란드의 군비를 제한하지 않은 것이었는데 이는 소련이 굳이 제한할 필요를 못 느꼈기 때문이었다. 평화조약의 내용이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한 핀란드 국민들은 소련에 이를 갈고 있었지만 겨울전쟁에서 핀란드 병력의 절반이 사라졌고 무엇보다 핀란드가 자신들에게 시비를 걸리라 생각하지 않았기에 굳이 군비를 제한하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엄청난 변수가 등장한다. 겨울전쟁에서 보여준 핀란드의 전투력을 보고 감명받은 히틀러가 핀란드에 동맹 의사를 타진해 온 것봉의 등장. 미국과 영국도 심정적으로는 핀란드를 응원했지만 소련의 관계 때문에 직접적인 지원은 못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핀란드가 의지할 상대는 사실상 독일 뿐이었다. 강화 후에도 지속된 소련의 위협에 위기감을 느낀 핀란드는 독일의 지원을 받으며 군비를 증강하기 시작했고 독일군 2개 산악사단도 핀란드에 들어왔다.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와 함께 독소전쟁이 시작되고 3일 후, 독일군에게 유류를 보급했다는 이유로 소련 공군이 핀란드의 18개 도시를 공습하며 계속전쟁이 발발하였다. 독일군에게 줄기차게 밀리고 있던 소련군은 핀란드 쪽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핀란드군은 만네르하임의 지휘 아래 빼앗긴 카렐리야 지방을 탈환하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만네르하임은 겨울전쟁 전 핀란드-소련 국경선을 넘어서는 진격은 하지 않았는데 독일이 요구한 무르만스크 공략이나 레닌그라드 공방전 참가는 핀란드군을 밍기적거리게 하는 방식으로 교묘하게 빠져나갔다.[11]

그러나 전황을 뒤집은 소련이 1944년 바그라티온 작전의 일환으로 카렐리야에 대공세를 가해오며 카렐리야를 다시 빼앗았고 핀란드 정부는 전쟁을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선 독일과의 관계를 끊고 핀란드 내에 주둔한 독일군을 내보내야 했다.

대통령 리스토 리티[12]는 독일과 동맹을 체결한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는데, 이는 리티를 비롯한 핀란드 정부의 꼼수였다. 후임으로 만네르하임이 취임한 뒤 이전 대통령이었던 리스토 리티와 히틀러가 체결한 동맹은 무효라고 선언한 것(그러면서 독일에서 구입한 3호 돌격포 대금을 먹튀한 건 덤). 이후 만네르하임과 핀란드 정부는 필사적인 외교전을 전개하였고 마침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제2전선이 형성되자 전후 주도권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소련도 핀란드와 전쟁을 그만두고 싶어했다. 만네르하임은 핀란드가 추축국에서 빠지는 조건으로 1944년 9월 소련과 휴전협정을 체결하였다.

단독 휴전에 반발한 핀란드 주둔 독일군과 핀란드군 사이에 라플란드 전쟁이 발발했지만 핀란드군은 독일군을 노르웨이 방면으로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4. 전후
만네르하임의 외교전이 핀란드를 또 다시 구했다. 1947년 파리조약이 체결되며[13] 소련에게 배상금 6억 달러를 지불하고 추가적으로 영토를 더 할양해야 했지만 핀란드는 소련을 정면으로 적대했던 국가들 중 유일하게 공산화되지 않았다.

1946년 3월 건강을 이유로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핀란드 국회는 만네르하임에게 핀란드의 원수 칭호를 수여했다. 이 칭호를 받은 사람은 지금까지 만네르하임 단 한명뿐이다. 핀란드를 떠나 스위스로 간 만네르하임은 그곳에서 회고록을 집필하며 살다가 1951년 1월 28일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