슐츠의 자막공방/인투 더 화이트 (2012)

독일의 노르웨이 침공

슐츠105 2013. 1. 2. 02:16

출처 : 위키 백과사전

 

 

 

 

노르웨이 전역나치 독일제2차 세계 대전에서 가짜 전쟁 중의 노르웨이의 전역이다. 1940년 4월에 영국프랑스가 노르웨이에게 군사 원조를 보내게 된 후, 노르웨이의 북부 지역의 방어 성공에서도 불구하고 프랑스 공방전이 일어나자 연합군은 철수를 강요당하고, 노르웨이 정부는 런던으로부터의 이민을 신청했다. 노르웨이 전역은, 독일이 승리하고 노르웨이 정부가 해외로 추방됨에 따라 성공적으로 끝나게 되었다. 독일의 침공과는 별도로, 1940년 4월 9일부터 6월 10일까지 62일동안 소련도 따로 참가하여 독일의 침공을 막는 전투를 진행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

영국과 프랑스는 모두 폴란드와 군사 원조 조약을 맺고, 이틀 후인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 침공을 하자, 서구 국가가 독일에게 선전포고 한다. 그러나, 두 나라는 서부 전선을 시작해도 몇 개월 동안 전쟁을 하지 않는 가짜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윈스턴 처칠은 전 수상인 네빌 체임벌린보다 더 적극적인 단계로 전쟁을 하고자 했다.[1]

이 기간 동안, 두 나라는 보조 전선을 찾고 있었다. 연합국, 특히 프랑스는 독일-프랑스 국경에서 제1차 세계 대전과 같은 참호전의 양상으로 진행되지 않기 위해 고심했다.[1] 노르웨이는 양 쪽이 서로를 공격할 수 있는 중요한 위치로 보고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노르웨이 육군노르웨이 왕립 해군은 동원령을 내렸다. 노르웨이 육군항공대노르웨이 해군항공대도 노르웨이의 중립을 지키기 위해 침략를 막기 위한 최대한의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하였다. 최초의 침투는 독일의 U-보트가 영국 운반선을 노르웨이의 영해에서 나포한 것이었다. 다음 몇 달 동안, 전국 전당 대회에서 항공기로 인해 노르웨이의 중립을 침해했다고 했다.[2]

전쟁 발발 후 거의 즉시 영국은 노르웨이 정부에게 자체 이송이 원활한, 노르웨이 상업해군대를 영국에게 제공하라고 압력을 시작했다. 1939년 9월 20일부터 11월 20일까지 오랜 협상을 한 후, 노르웨이는 총 450,000 톤의 선박와 150대의 전세 유조선과 그 외 다른 함선의 제공을 동의했다. 국가의 공급 라인에 대한 노르웨이 정부의 관심은 노르웨이가 계약에 동의하도록 하는 설득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3]

[편집] 노르웨이의 가치

노르웨이는 중립이었지만, 양국은 중요한 두 가지 이유로 인해 전략적으로 중요하게 고려되었다. 먼저, 독일이 의존하는 스웨덴의 철광석의 다량이 수출되는 노르웨이의 나르비크 항구가 중요했다.(특히 노르웨이의 경로는 겨울 동안 발트 해가 얼 때 더욱 중요했다.) 영국은 발트 해를 통제하는 카트린 계획(Project Catherine)이 실용적이지 않음이 명백해졌을 때, 영국에는 나르비크가 더욱 중요해졌다.[4] 둘째는, 노르웨이에 있는 항구들은 대서양의 진입에 용이하여 독일의 영국 봉쇄의 구멍이 될 수도 있었다.[5]

[편집] 철광석

독일의 노르웨이 침공의 주요 이유는, 2차 세계 대전 동안 의존도가 가장 높은 스웨덴에서 공급받는 철광석을 겨울 기간에는 노르웨이의 나르비크 항구에서 공급받았다.[6] 노르웨이의 항구의 접근을 확보하여, 독일은 더 쉽게 전쟁에 필요한 철광석의 공급이 쉬워지게 된다.[7]

[편집] 해상 세력

노르웨이의 점령은 연합국, 특히 영국에 대해 효과적으로 해상 봉쇄를 하여 독일의 해군 전력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8] 노르웨이는 엄격한 중립이었기 때문에, 점령되지 않은 동안 아무런 군사적 위협이 없었다.[9] 그러나, 노르웨이 해안의 방어선을 통과하고, 강력한 능력으로 효과적으로 결정된 침공에 저항하는 군대의 무능력의 약점은 분명했다. 영국에서는 독일의 대제독 에리히 레더가 스칸디나비아 침공을 준비한다고 1939년에 여러 차례 지적했다. 독일의 강력한 해군이 기지에 있어 베르겐, 나르비크 및 트론헤임의 기지로 북해를 독일이 실제로 폐쇄했다.

[편집] 먼 거리의 프랑스 전장

양쪽의 노르웨이 침공은 프랑스 전장이 참호전 양상이 되지 않으면서 많은 군사가 다른 상대에게 큰 위협을 줄 수 있는 잠재력을 가졌다. 대서양 전쟁에서 노르웨이 지역은 대서양에 접근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항구가 되었다. 그리고, 노르웨이의 항구와 항공 기지를 이용하여 북대서양을 봉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실제로 영국이 파산 직전까지 몰리기도 하였다.[1][7]

[편집] 겨울 전쟁

이 부분의 본문은 겨울 전쟁, 겨울 전쟁 당시 프랑스-영국의 침공 계획입니다.

1939년 11월 30일 소련이 핀란드를 침공하자, 연합군은 노르웨이와 스웨덴을 통해 지원하여 핀란드는 더 큰 적인 소련을 막을 수 있었다.

핀란드와 소련과의 전쟁 발발 후, 노르웨이는 핀란드에게 지원을 보내게 되었다. 1940년에는 노르웨이가 1개 사단을 핀마르크 주트롬스 주에 소련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파견하였다. 6사단의 일부는 소련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고, 심지어는 독일이 침공한 이후에 핀마르크에서 독일의 공격을 저지하기까지 했다.[2][10] 겨울 전쟁 당시, 연합국은 노르웨이 당국에게 비밀리에 핀급 요트 12척을 보내 노르웨이의 중립을 유지하고 침입을 막는 대신에 핀란드에게 지원할 포병 12,000명과 영국 항공기가 이용할 노르웨이의 항공 기지를 지원하라고 했다.[2]

이 것은 핀란드에게 공감을 받으면서, 또한 추가로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철광석 이동 통로를 점유하기 위해 병력을 보내는 것의 기회로 보고, 연합국은 이 기회를 사용했다.[11] 영국은, 에드먼드 아이론에 의해 두 부대는 나르비크에 상륙하고, 다섯 부대는 중부 노르웨이와 트론헤임에 가게 된다. 이 작업은 독일의 병력을 노르웨이로 빼기 위해 프랑스가 지원했다.[12]

이 운동은 독일의 우려로 나타났다.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에 의하면 소련은 핀란드를 관심 영역으로 두어서 독일은 이 곳의 중립성을 주장했다.[13] 일반적으로, 이 조약이 독일과 소련의 동맹이라고 믿고 시작한 이후 스칸타나비아 전역에 반독일 감정의 상승으로 나타났다. 이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두려움은 연합군의 병력의 움직임이 핀란드를 지원하는 것이 최고라는 것이라는 독일 최고 사령부에 의해 시작되었다.

제한된 연합군의 배치는 노르웨이가 자신의 영토에 군대를 수송하는 것의 문제를 제기했고, 스웨덴은 양 쪽에서 항의가 일어난 이후 군대 수송을 거부하였다. 결국, 1940년 3월 12일 모스크바 평화 조약에 의해 핀란드는 약 10% 정도의 영토가 감소하였다. 계획된 작전의 실패는 네빌 체임벌린 영국 정부에 엄청난 프랑스의 압력을 넣어 결국 4월 8일에 노르웨이는 연합국의 광산 채굴을 허락했다.[12][13]

[편집] 비드쿤 크비슬링과 독일의 조사

비드쿤 크비슬링의 1942년 모습. 그의 이름은 반역자라는 이름과 동의어이다.[14]

 

원래 노르웨이는 중립을 유지하는 것이 독일 최고 사령부에겐 더욱 좋다고 생각하였다. 그 동안 연합국은 노르웨이 해상에 접근하지 않았으므로, 독일로 수입되는 광석의 배는 노르웨이 해안을 따라 내려가는 안전한 통로가 있었다.

그러나, 대제독 에리히 레더는 침략하는 것을 주장했다. 그는 노르웨이 통로가 영국과의 전쟁을 위해 독일에게 중요한 것이라고 믿었다.[8]

1939년 12월 14일,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는 국방장관이었던 비드쿤 크비슬링을 만났다. 크비슬링은 독일과 노르웨이 사이에 협력관계를 제시했다. 두 번째 회의에서는, 4일 후 1939년 12월 18일에 크비슬링과 히틀러가 노르웨이의 연합국 위협에 대해 논의했다.[8][15]

크비슬링하고의 만남 후, 히틀러는 독일 국방군 최고 사령부(OKW)에게 노르웨이 침략 계획을 세우라고 했다.[15] 크비슬링하고의 회담 후, 히틀러의 관심은 노르웨이가 중심부에 있었다.[16] 노르웨이 침공에 대한 최초의 계획은, 1939년 12월 14일 히틀러의 지시에 의해 만들어진 베저위붕 작전으로 1940년 1월 10일에 만들어졌다. 히틀러는 1월 27일, 새로운 계획인 베저위붕을 실행하라고 지시했다. 베저위붕 작전은 2월 7일 실행되었다.[17]

[편집] 알트마르크 사건

이 부분의 본문은 알트마르크 사건입니다.
알트마르크 사건 이후 죽은 독일인을 매장하기 위해 해변으로 이동하고 있다.

 

알트마르크 사건은, 1940년 2월 16일 새벽에 영국 해군 구축함 HMS 코사크가 독일 보조함정 알트마르크이외싱피오르에서 나포한 사건이다.[18] 알트마르크는 독일 순양함 그라프 슈페를 위한 보급선으로 그라프 슈페는 남대서양에서 몇 달 동안 통상파괴작전을 수행하는 중이었다. 알트마르크가 독일로 돌아올 당시에는 그라스 슈페가 침몰시킨 연합군 함선의 포로 299명을 태우고 있던 상태였다.[18] 알트마르크가 1940년 1월 10일 트론헤임피오르를 지날 당시에는 독일 국기를 계양하고 있었다. 노르웨이 해군의 호위와 함께 알트마르크는 남쪽으로 내려갔다. 알트마르크가 2월 14일 베르겐 항구 근처로 접근할 때, 노르웨이 해안 당국은 요구대로 독일의 선박을 검사하기로 하였다. 국제법에 의한 중립 해역과 포로 이송의 문제때문이라도, 독일은 이 요구를 거절했다. 이것은 베르겐의 해군 사령관인 카스튼 탱크-닐슨은 알트마르크를 제한된 전쟁으로 간주하고 접근을 거부한다. 그러나, 탱크-닐슨은 상관인 헨리 딜슨 제독에 의해 거부되어 알트마르크는 항구를 통해 갔다. 노르웨이의 중립법에 따르면, 전국에서 운영하는 국영 함선은 중요 노르웨이 항구를 거치지 않도록 하고 있었다. 헨리 딜슨 제독은 영국이 가로챌 우려 때문에 노르웨이 근해를 항해하도록 강요하지 않고 중립법을 어겼다.[18]

다음 날인 2월 15일에 알트마르크로 영국이 세 기의 항공기를 발진했다. 선박을 발견한 후 그 해역에 6척의 구축함을 보냈다. 접근한 군함으로부터 따돌리기 위해 알트마르크는 이외싱피오르로 도망쳤다. 당시 알트마르크는 노르웨이 전함 3척과 어뢰선 HNoMS 셸HNoMS 스카브, 순찰 보트 파이어른에 포위되었다. 코사크는 지역 시간 기준 22시에, 노르웨이 선박이 개입하지 않을 때 알트마르크를 나포했다. 나포의 결과로, 함선 내에 탑승 중이었던 영국인 포로 299명은 전원 해방되었다. 탑승 파티의 과정으로 인해 7명의 독일인이 사망했다.[18]

이 사건 이후, 독일은 노르웨이에게 강력한 항의를 보냈다. 그 반면에 노르웨이 정부는 영국에게 강력한 항의를 보냈다. 스웨덴과 미국의 국제법 전문가들은 영국의 행동은 노르웨이의 중립법 위반으로 설명하고, 영국은 그 사건은 도덕적이었으나 기술적인 위반이 있었다고 설명했다.[18]

알트마르크 사건은 독일군의 노르웨이 침공을 위한 준비의 속도를 붇었다. 2월 21일, 니콜라우스 폰 팔켄호르스트는 침공 계획 담당과 점령 기반의 명령을 내렸다. 덴마크와 노르웨이 침공의 정식적인 승인은 3월 1일 히틀러가 서명함으로써 이루어졌다.[5][17][18]

[편집] 침공 계획

[편집] 연합군의 계획

이 부분의 본문은 윌프레드 작전입니다.

겨울 전쟁이 끝난 후, 연합국은 스웨덴과 노르웨이를 침략하는 것 보다 중립국으로 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지만, 노르웨이와 스웨덴이 독일과 동맹으로 기울자 연합국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수상인 폴 레노는 전임자보다 더욱 적극적인 자세로 독일에 대한 공격을 원했다.[12] 처칠은 지난 전쟁에서 전쟁의 참화를 피하기 위해 멀리 이동했기 때문에, 처칠은 북으로 올라오는 독일을 미리 막기 위해 노르웨이를 공격할려고 했다.

처칠은 해군 채광 계획인 윌프레드 작전을 활용하고자 했다. 이 작전은 공해로 운송 선박을 유도하기 위한 작전으로 영국 해군이 참여하고 독일은 그들을 파괴할 수 없었다. 이 R4 계획을 수반하는 것은 연합군이 트론헤임과 베르겐을 점령하고, 독일이 전투를 하면 솔라 항공 기지스타방게르를 점령하는 계획이었다.

연합군은 또한 추가로 영국 해병대 작전으로 라인 강 곳곳에 기뢰를 설치할려고 하기도 했다. 영국이 이 작업을 지원하는 동안, 이 선에 의지한 프랑스는 독일의 보복이 두려워 반대했다. 영국은 대륙과는 별도로 노르웨이 작전을 수행할 때 동의하지 않아, 4월 5일에 시작할 윌프레드 작전은 4월 8일까지 지연되었다.[12]

[편집] 독일의 계획

베저위붕 작전에서 공수부대 낙하 도시. 노르웨이는 6곳이다.
이 부분의 본문은 베저위붕 작전입니다.

이미 낮은 우선 순위의 계획인 베저위붕 작전은 상당히 많은 시간을 들였다.[주해 1] 그리고, 알트마르크 사건 이후 이 작전은 긴급해졌다.[5] 침공의 주요 목표는 철광석이 들어오는 나르비크 항구와 광산을 안전하게 만들고, 연합국의 협력을 방지하기 위해 전국적인 기업 통제를 만들었다. 침공 당시에는 노르웨이의 무장 중립 보호로 명분을 만들었다.

독일의 군사 계획에 일부 내부 논쟁 중의 하나로써 이 계획을 위해서는 덴마크를 점령해야 했었다. 덴마크의 위치는 보다 항공과 해군의 통제를 용이하기 하게 때문에 덴마크는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일부는 단순히 압력을 가하는 것에 동의를 하고 싶었지만, 결국에는 덴마크는 강제 점령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되었다.

계획의 추가 재작업의 또 다른 원인은 프랑스 공방전을 할 때, 독일이 많은 군사가 필요하기 때문에 북부 프랑스와 베네룩스를 침략하는 것을 제안했다. 일부 병력도 모두 전투에 참가해야 했기 때문에, 베저위붕 작전과 황색 작전은 둘 다 동시에 시작할 수 없었다. 그리고 봄에는 해군을 위한 엄호된 접근로가 단축되기 때문에 작전은 빨리 실행되어야 했다. 결국, 4월 2일에는 4월 9일에 베저위붕 작전을 실행하고, 4시 15분 (노르웨이 시간)에 노르웨이를 침략하기로 했다.[17]

 

노르웨이의 기본적인 6개 계획은 다음과 같다. 수륙 양용 착륙은 오슬로, 크리스티안산, 에게르순, 베르겐, 트롬헤임, 나르비크이다. 또한, 팔시름예거 부대는 포르네부 공항과 오슬로와 솔라, 스타방게르에 침공한다. 계획은 신속하게 노르웨이 군을 압도하고 조직된 레지스탕스의 저항이 시작되기 전에 이러한 중요한 지역을 차지하도록 되었다. 다음과 같은 병력에 따라 구성되었다:

또한, 샤른호르스트그나이제나우는 그룹 1과 그룹 2를 호위와 보급의 역할을 맡겼다.

덴마크에서는, 두 여단이 교량을 접수하고 군대를 물리치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독일 공군은 코펜하겐으로 공수부대를 투하하여 북부의 공항을 접수하기로 했다. 이 침략을 위한 조직적인 여러 그룹도 있었지만, 그들 중 아무도 대형 함선을 포함하지 않았다.

그것은 독일이 두 나라의 군대가 저항할 때, 독일 군단으로 무장 대치시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편집] 각국 병력

노르웨이 전역 전투 서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독일군은 팔시름예거와 기갑사단에게 10만명이 배치되었다. 또한, 독일 해군도 전투에 참가했다[20][21]. 연합군은 노르웨이 육군이 55,000명, 연합군이 38,000명이 배치되었다.[20][22]

[편집] 독일의 침공

노르웨이 전역의 연대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편집] 함대의 이동

4월 7일-9일까지의 연합군과 독일군의 이동. 검은색이 독일이고, 파란색이 연합군이다.

 

독일의 침공은 1940년 4월 3일에 보급 선박이 주력보다 먼저 출발해 시작하게 되었다.[17] 연합군은 16척의 잠수함이 스카게라크 해협카테가트 해협으로 가서 윌프레드 작전을 실행하라고 명령했다. 다음 날에는, 윌리엄 휘트어스에게 HMS 리나운스캐퍼 플로에서 베스트피오르로 12척의 구축함과 함께 이동하라고 지시했다.

4월 7일에는, 나쁜 날씨와 안개와 함께 그 지역으로의 항해가 어려울 정도의 높은 파도가 쳤다. 리나운은 곧 심한 눈보라에 휩슬리고, 그리우먼 호위함 중 하나가 바다에 휩슬렸다. 그리고, 날씨는 독일을 도와 주었고 독일은 곧 그룹 1과 그룹 2를 보냈다.

날씨가 정찰에 어렵게 했지만, 두 독일 그룹이 연합군에 의해 노르웨이 린데스네스(노르웨이의 남쪽) 170km(105마일) 남쪽에서 영국 공군에 의해 한 척의 순양함과 여섯 척의 구축함을 발견하고 보고하였다. 후행 폭격기는 그들이 발견한 곳 보다 북쪽으로 125km(78마일) 멀리 배를 공격하였다. 공격 중에 아무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독일 그룹의 세력은 순양전함 하나와,[주해 2] 두 척의 순양함과 열 척의 구축함으로 재평가되었다. 때문에 국제 라디오 침묵 시간을 엄격하게 시행했고, 폭격기는 17시 30분까지 어떤 보고도 할 수 없었다.

독일 움직임을 학습한 해군은 독일이 봉쇄를 풀고 대서양 무역로를 확보하기 위해 선단을 사용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찰스 포브스 해군 제독은 최고 사령관의 함대에게 그 함대를 잡는 것을 20시 15분에 내렸다.

상황의 중대함을 모르고 양쪽은 계속 작전을 시행했다. 리나운은 밤 늦게 부설함 파괴 작전을 마무리하기 위해 베스트피오르에 늦게 도착했다. 한편, 독일은 그들의 나머지 그룹을 모두 참전시켰다. 양 측 사이의 최초의 직접적인 접촉은 양측의 의도없이 다음날 아침에 발생했다.

그리우먼은 리나운이 복귀하러 가는 도중 번드 폰 아르힘호와 뒤따라 오던 뤼데만 호와 함께 4월 8일 8시에 짙은 안개와 함께 만났다. 사소한 접전 후, 독일 구축함은 도움 신호를 내보내고 도망쳤다. 요청은 곧 신속하게 아드미랄 히퍼에게 전달됐고, 그리우먼은 신속하게 무력화됐다. 작업하는 동안, 그리우먼은 아드미랄 히퍼을 받았다.[5] 아드미랄 히퍼의 우현에 큰 피해가 생기고, 그리우먼은 즉시 가까운 거리의 일제 사격에 의해 격침됐다. 그 전투를 하는 동안 그리우먼은 라디오 침묵을 깨고 해군 상황을 보고했다. 함대는 통신을 완료할 수 없다고 보고, 알려진 모든 해군 선박을 그리우먼에 의해 알리게 했다. 그 후, 그리우먼은 총격과 함께 폭파되었다. 이에 대응해, 해군 본부는 그리우먼이 알린 마지막 위치인 베스트피오르에 리나운과 한 대의 구축함을 파견(두 척의 연료는 호의적인 항구에 얻었다.)했다. 10시 45분에, 나머지 8척의 구축함도 파견했다.

4월 8일 아침, 폴란드 잠수함 ORP 오르제우릴렌산에서 MS 리우데자네이루를 만나고 침몰시켰다.[23] 침몰한 잔해에서 군복을 입은 독일군과 각종 군사 용품이 나왔다. 오르제우가 해군에게 사건을 보고하고, 그들은 그리우먼과 독일의 통신이 치고 나갈 때 상황에 대해 너무 염려했다. 난파선에서의 독일 군사의 대부분은 노르웨이 어선인 노르웨이의 오딘에 의해 구조 및 사망하였다. 연합군의 질문에 독일 군사들은 연합군으로부터 베르겐을 보호하기 위해 왔다고 답했다. 이 문답은 오슬로의 노르웨이 국회에 전달되었지만, 국회는 노르웨이 연안의 영국 광산 운영으로 혼란스러워 수송선의 침몰을 무시했다.[23]

14시에는, 해군이 공중 정찰로 서쪽 방향에서 트롬헤임에서 북서서 방향으로 독일의 그룹이 있다는 송신을 했다. 이것은 독일이 실제로 휴식을 취하고 있다고 믿고, 본대는 다시 북동에서 북서로 방향을 바꿨다. 또한, 처칠이 취소한 R4 계획의 군인과 보급품이 실린 네 척의 순양함을 본대에 포함시켰다. 실제로, 독일 그룹2는 오직 지정된 시간에 목적지인 트롬헤임에 접근하기 위해 지연하며 돌면서 연습하고 있었다.

그날 밤, 독일 그룹은 수 많은 연습 후에, 노르웨이의 남쪽의 찰스 포보스가 생각 밖으로의 독일 군의 휴식을 의심하며 스카게라크 해협 남쪽으로 본대를 돌렸다. 그는 또한, HMS 리펄스를 구축함과 몇 순양함과 함께 북쪽으로 리나운 함대와 포함했다.

23시에는, 오르제우와 그룹 5가 노르웨이의 순찰 선박인 폴 III에 의해 오슬로피오르에서 발견되었다. 폴 III는 레우웨이(레우웨이 섬)에 있는 해안 포대에 경보를 전송하고 어뢰정 알버트로스와 전투를 했다. 알버트로스와 두 동료함은 대공전을 하고, 폴 III은 화재가 발생했다. 그룹 5는 오슬로피오르를 사고 없이 통과했다. 독일의 몇몇 소형 선박은 호르텐으로 우회하여 요새를 점령했다.

이 움직임은 들키지 않았고, 곧 리포트가 오슬로의 노르웨이의 내각에 전달되었다. 이 회의에서, 내각은 노르웨이의 6 육군 여단에 대해 네 동원을 명령했다. 내각의 구성원들은, 명령한 부분 동원이 장소의 규정에 따라 비밀과 공개 선언 없이 진행될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부대는 우편으로 동원 명령을 발행했다. 동원 시스템에 심층적인 이해를 가진 내각의 유일한 구성원인 국방 장관 비르게르 르으브는, 그의 동료원에게 동원 시스템을 설명하지 못했다. 그는 나중에 크게 노르웨이의 동원령에 불필요한 감시에 대해 비판했다. 라스무스 하트레드는, 내각에서 몰고 간 장군들의 총과 함께, 반박되는 동원 지원을 기각했다. 하트레드는 동원 명령을 하달하는 내각으로 가기 위해 4월 5일, 6일, 8일에 국방장관과 함께 갔다. 문제는 4월 8일에 사령관과 장군이 함께 의논했다. 크리스틴 라크는, 동원 명령의 호출에 대해 합류했다. 그 당시, 동원령은 외스트폴 주에서 두 부대로 제한됐으나, 추가로 큰 규모의 부대의 동원을 지연했다. 동원을 위한 라크의 전화가 드디어 4월 9일 3시 반에서 4시 사이의 시간에 접수되었을 때, 사령관의 일반 내각은 부분과 침묵 동원이 발령된 것을 알고 있고, 국방 장관을 몰고 있었다. 노르웨이의 군대와 내각 사이의 나쁜 의사 소통은 독일 침략의 초기에 큰 혼란이 있었다.[24][25][26]

이 시간에, 더 북쪽에서 리나운이 그리우먼의 알려진 마지막 위치에 도달하고,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보고하고 베스트피오르로 돌아가고 있었다. 거센 파도가 휘트워스 북쪽으로 평소보다 세게 발생했고,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라우가 두 구축함을 분리했다. 로포텐 제도에서 리나운이 두 구축함과 교전하고, 그리고 도중에 짧은 전투가 일어나고 리나운은 독일 함선에게 공격을 하고 북쪽으로 도망갔다. 독일 군함은 추적을 시작했으나 리나운은 군함에서 탈출하기 위해 최대의 속도를 냈다.[5]

[편집] 베저위붕

독일의 구축함이 항구를 점령한 후 나르비크에 정박하고 있다.

 

오프트피오르와 나르비크로 이어지는 곳에서, 그룹 1의 10척의 독일 군함이 접근했다. 리나운은 그리우먼 사건을 조사 후 호위함으로 돌아가고, 다른 영국 군함은 항구에 없어서 누구의 압력도 받지 않고 점령했다. 그들은 나르비크의 내부 항인 오프트피오르에서 나르비크 항구에 보초를 서던 HNoMS 에즈볼트HNoMS 노르게의 두 해안 방위선과 교전했다. 오래되었지만, 두 해안 방위선은 훨씬 가벼운 무장을 하고 장갑 구축함에 피해를 줄 수 있었다. 교전 후, 에즈볼트의 오드 이소크센 빌로크 함장은 독일 함선의 세 어뢰와 함께 함선을 공격 후에 함선을 침몰시켰고, 해안 방위선에 빠른 선제 사격을 했다. 노르게는 진입한 직후 구축함에 화재가 나기 시작하지만, 함선의 저격수들이 경험이 있어 함선이 독일 구축함의 어뢰에 의해 침몰하기 전에 독일 함선에 일제 사격을 했다.

에즈볼트와 노르게는 침몰했고, 나르비크의 사령관이였던 콘라드 순들로는 전투를 하지 않고 도시에서 항복하였다.[19]

독일 순양함 독일 순양함 아드미랄 히퍼의 부대가 트론헤임에서 상륙하고 있다.

 

트론헤임에서는, 그룹 2가 상륙 후 약간의 저항에 직면했다. 트론헤임피오르에서, 아드미랄 히퍼은 25km/h의 속도로 전진하면서 방어선과 교전했다. 아드미랄 히퍼에 잘 맞은 총은 전원 케이블을 절단하였다. 단 하나의 구축함은 상륙 기간 동안 타격을 받았다.

독일의 수양함인 블뤼허오슬로피오르에서 격침되고 있다.

 

베르겐에서는, 방어선이 더 강경하게 대응하여 그룹 3과 순양함 쾨니히스베르크, 포병 훈련 선박 브렘즈가 손상되어 심각해졌다. 야포들은 부족하지만 방어선의 효과를 약화시켜, 상륙함은 많은 저항을 받지 않고 항구로 갈 수 있었다. 독일 공군 부대가 도착했을 때, 요새는 항복하였다.

크리스티안산에 있는 요새는, 두 번에 걸쳐서 요새를 순양함 카를스루로 공격했으나, 공격을 격퇴하고 손상을 주었다. 노르웨이는 영국과 프랑스 전함과 독일에서 노르웨이 해고 명령을 받았을 때 혼란스러웠지만, 호르텐에서 독일 병력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독일은 11시까지 마을을 점령하고, 신속하게 항구로 도달해 군사들을 상륙할 기회가 왔다.

그룹 5는 오슬로피오르의 내부 요새인 드뢰바크에서 심각한 저항을 받았다. 블뤼허는, 그룹을 이끌고 밖의 피오르에서 기습을 받았을 때, 사건이 해결된 것처럼 재 때 응답하지 않을 것이라 가정하고 요새에 접근했다.[27] 순양함이 빈 지점에서, 오스카보리 요새가 모든 포를 발사, 화재가 일어났다. 몇 분 내에, 블뤼허는 무력화되고 불에 많이 탔다. 손상된 순양함은 40년 된 수뢰 발사관에서 발사된 어뢰에 의해 격침됐다. 그 순양함은 많은 노르웨이 점령과 오슬로 점령에 차출된 병력의 두 본부의 행정 직원들을 실었다. 순양함 뤼츠토프, 또 공격에 손상을 받은 블뤼허는 기뢰를 부설한 후 그룹 5를 철수하고 선 마을 12마일(19km) 남쪽으로 병력을 하역시켰다. 이 거리는 오슬로와 24시간 이상의 거리가 떨어져 있어 주요 독일 침공 부대의 도착이 지연되었고, 비록 오슬로를 12시간 내에 점령해도 블뤼허는 포르네부 비행장의 비행 병력에 의해 손실이 클 것이였다.[27]

노르웨이 병력에 의해 유도된 지연에 의해 왕실 가족이 피난할 시간을 주었고, 국회 의사당, 그들의 국고는 수도를 피하여 침공 세력에 대한 전투를 계속한다.[5][27]

포르네부 비행장은 원래 첫 번째 부대가 이륙하기 전에 낙하산 부대에 의해 시간이 확보되어야 했는데, 초기 병력이 안개 속에서 손실되었고 도착하지 않았다. 그에 관계없이, 비행장은 크게 방어하지 않아 도착한 독일 병사들은 즉시 비행장을 점령했다. 노르웨이 육군 항공 서비스의 제게비겐의 탄약이 떨어져서 보조 비행장까지 갈 때 까지 포르네부 비행장의 전투기들은 글레디에이터 복엽 비행 전투기로 저항했다. 전투기의 지상 직원들은 곧 아무도 소형 무기나 탄약을 지원받는 시간이 없어 전투기를 이륙하는 준비를 하기 위해 혼란과 스트레스 뿐 아니라, 대공 기관총의 탄약이 없어 지상 직원의 개인 무기를 사용했다. 포르네부 공항의 저항은 끝이 났다. 저항 공격을 할려던 노르웨이는 끝내 실패했으며 효과적이지 못했다. 이 학습에, 오슬로는 자체적으로 무방비 도시를 선언했으며 항복했다.

그룹 6은 에게르순에서 스타방게르로 낙하산 부대를 보내고, 그 곳엔 큰 저항이 없어 신속히 목표를 점령했다.

[편집] 덴마크의 정복

이 부분의 본문은 독일군의 덴마크 침공 (1940년)입니다.
독일의 이동 장갑 차량이 덴마크 마을에서 이동하고 있다.

 

노르웨이 침공과 점령을 위한 독일의 작전은 항공에 많이 의존했다. 노르웨이와 덴마크 사이의 스카게라크 해협을 확보하기 위해, 덴마크의 공군 기지를 점령해야 했다. 이 해협의 점령은 침공 세력의 주요 보급선의 해군 간섭을 방지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덴마크의 점령은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알보그 공항을 점령은 이러한 측면에서 더욱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였다.[28]

독일 국방군은 4월 9일 4시 15분에 덴마크 국경을 넘기 시작했다. 공습 작업에서, 독일 군대는 부두에서 내려서 랑엘리니,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 등 도시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독일 낙하산 부대도 알보그 공항을 점령했다. 동시에, 크리스티안 10세에게 독일 대사에 의해 최후 통첩이 발표되었다. 독일의 계획을 설명하는 보고서는 몇 일 전 정부에게 전달되었지만 무시되었다. 덴마크 군대는 작은 육군에, 준비 및 사용 장비가 부족했지만 나라의 여러 곳에서 저항했다. 가장 중요한, 왕실 경비를 담당한 코펜하겐의 아말리엔보르 성남 유틀란드하데르슬레우 군사가 있었다. 6시에는, 작은 덴마크 공군이 격추되었고 30기 이상의 독일 폭격기는 코펜하겐을 통해 폭탄을 투하한다고 위협했다. 크리스티안 10세는, 국무총리인 토르발 스타우닝, 외무장관 피터 리치군 몽크와 육군과 해군의 지휘관은 더 이상의 저항은 덴마크에 쓸모없는 손실을 초래할 것이라고 믿고,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덴마크 영토는 놀랍도록 완벽하게 이동해 점령하였으며, 독일 정부와 협력하라는 정부의 지시를 받았다. 독일의 덴마크 점령은 4월 10일에 시작하였고 1945년 5월 5일까지 계속되었다.

덴마크 상업 해군대의 중요한 아놀드 피터 몰러는 탈출했고, 몰러 운송 회사는 4월 8일 연합하거나 가능하면 중립 항구로 이동하여 높은 바다에서 무역을 지시했다.[29]

독일 침략을 막기 위해 미리 이동하여, 1940년 4월 12일 영국 세력은 페로 제도점령하고, 덴마크의 행정구역이 되었다. 덴마크 자치주의 총재와 페로 의회 뢰그팅은 전쟁 기간 동안 섬을 지배했다.[30]

[편집] 연합군의 대응

4월 9일-13일의 독일과 영국의 해군 이동.

 

곧, 독일군은 트론헤임, 베르겐, 스타방게르에 상륙하고, 오슬로피오르에서 치열한 전투를 했다. 두 독일 전함의 알 수 없는 위치로 인해 너무 얇게 분산하지 않고, 본 함대 근처의 베르겐에 집중하고 공격 부대를 파견했다. 영국 항공 정찰대가 곧 예상보다 강한 저항을 받고, 이것은 독일이 해안 방어를 제어하는 것일수도 있기 때문에, 그들이 회수하는 대신 항공모함 HMS 포러스의 어뢰 폭격기에 적의 함대에 보내기 시작했다. 독일 공군 폭격기는 처음 본 함대에 대한 자신의 급습으로 시작하지만 시작하지 않았다. 이 공격으로 인해 구축함 HMS 구르카와 대공 공격의 효과가 판명되면 북 쪽으로 철회할 본 함대를 강제로 했다. 독일의 항공 우위는, 모든 남부 지역의 잠수함과 RAF 왼쪽에서 표면 세력이 북쪽으로 집중하게 되었다.[5]

남부와 중부 노르웨이의 독일군의 상륙 외에, 해군은 또한 한 독일 구축함이 나르비크에 있다는 언론의 보도를 통해 알게 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그들은 대부분 윌프레드 작전에 있었던 교전 이전에 호위 구축함의 역할을 맡은 선박 중 2척의 구축함을 소함대로 파견했다. 장군 버나드 워버스턴-리의 지휘하에 HMS 리나운 및 소함대를 샤른호르스트그나이제나우가 있는 베스트피오르로 경비를 지시했다. 4월 9일 16시에는, 소함대는 토소니의 위치에서 나르비크 서부 50마일 위치에 구축함 4척 - 6척과 잠수함의 독일 함대에 있다는 정보를 주민에게서 받았다. 워버스턴-리는 그에게 모든 광산의 보호를 요청하며 "새벽, 높은 물"이라는 다음 날의 공격과 의견을 해군으로 보냈다. 이 결정은 밤에 해군 전보로 수락되었다.

다음날 이른 아침, 워버스턴-리는 HMS 하디와 4척의 다른 구축함들을 이끌고 오슬로피오르로 진행했다. 4시 30분에, HMS 헌터HMS 하보콕이 나르비크에 도착하고, HMS 하스퍼HMS 호스틸이 해안 경비를 하기 위해 떠났다. 짙은 안개와 눈이 워버스턴-리의 세력이 들키지 않고 접근하기에 매우 쉬워 보였다. 그들은 항구에 도착했을 때 독일의 5척의 구축함을 발견하고 사격을 시작, 1차 나르비크 해상 전투가 발생했다. 워버스턴-리는 세 척의 적선과 전투하고, 그 후 하스퍼와 호스틸이 합류하고, 구축함 두 척을 침몰시키고 여섯 척의 유조선 및 보급 선박을 침몰시켰다. 독일 지휘관인 프리드리히 본테빌헬름 헤드켑의 침몰과 함께 사망했다. 워버스턴-리의 소함대는 거의 손상받지 않은 채 항구를 떠났다.

6시에, 두 번째 구축함 소함대는 베스트피오르를 지나고 하잔스피오르의 뒤에서 에리히 베이 지휘의 3척의 독일 구축함이 등장하고, 몇 분 후 워버스턴-리를 둘러싸여 도착했다. 하디가 먼저 공격을 당하고 무력화되고, 신속하게 그 중 하나가 해변 밖으로 보내졌다. 헌터는 몇 번의 공격을 당한 후 가라앉았다. 하스퍼는 헌터와의 충돌로 인해 조향 시스템의 문제가 생겼다. 하스퍼는 몇몇 더 공격받은 후 난파선이 되었다. 호스틸과 하보콕은 앞서 전투했지만, 하스퍼가 퇴각을 돕기 위해 돌아왔다. 독일의 함선은 공격을 당한 후, 더 중요한 것은 연료가 비판적으로 짧고 따라갈 수 없었다. 그들은 오포트피오르를 빠져 나가고, 세 영국 구축함은 독일 보급선 라운필을 침몰시킬 수 있었다.

뤼츠토프가 에서 노르웨이에 영국 잠수함 HMS 서브피시를 박살낸 모스.

 

나르비크의 첫 번째 전투 후, 두 척의 독일 함선은 영국 군사에 의해 침몰되었다. 4월 9-10일 밤에, HMS 트런트가 도청과 빛으로 경순양함 카를스룰에를 크리스티안산을 떠난 직후에 침몰시켰다. 4월 10일에, 플랫 항공 육군대의 원거리 공격을 하스턴의 기지에서 오크니 제도의 베르겐 항구의 독일 전함을 공격했다. 공격은 망가진 독일 경순양함 퀘니히스베르크를 침몰시켰다. 푸리어스와 HMS 워스페이트는 홈 기지와 그외 항공기와 함께 트론헤임의 아드미랄 히퍼를 침몰시켰다. 그러나, 아드미랄 히퍼는 항구 이외의 설정된 시계를 벗어나기 위해 관리하는 중이였고 공격이 시작할 때는 독일에 가 있었다. 나머지 독일 구축함이나 지원함은 아무도 폭격의 피해가 없었다. 더 나은 행운은 HMS 서브피시가 중순양함 뤼츠토프를 4월 11일 자정에 손상을 낸 것이다.

독일 함대는 노르웨이 해 밖으로 갈려고 했다. 도중에 함대가 해안에서 서쪽 멀리 방향 전환을 강요하고, 독일 폭격기로부터 피해를 입었다. 4월 12일, 나르비크에서 푸리어스가 공습을 시도하지만, 결과는 실망이었다. 그 대신, 워스페이트 전함을 보내기로 하고, 강력한 호위 부대를 보내기로 했다.

4월 10일부터 13일까지 나르비크에서의 영국-독일간 전투.

 

4월 13일 아침, 위트워스는 워스페이트의 정찰 항공기를 이용하여 베스트피오르를 점령했다. 이 외에도, 두 독일 구축함 찾아서, 정찰 항공기 또한 최초의 전투로 적 잠수함을 침몰시켰다. 워스페이트 전함은 미리 3마일(5km)을 항해하고 처음 그들을 만나서 독일과 대응 교전을 하였다. 따라서 2차 나르비크 전투가 발생했다. 측면에 주목할만한 피해를 주었지만, 독일의 함선은 탄약이 부족했으며 점차 항구로의 이동을 강요당했다. 그날 오후, 롬베컨피오르로 최대한 도망을 시도하고, 유일한 예외는 Z19 헤르만 쿠네였다. 헤르잔피오르에 있던 같은 HMS 에스키모에 의해 파괴되었다. 네 영국 구축함은 롬베컨피오르에서 독일의 함대를 쫓아 계속 가다 에스키모는 적의 저항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러나, 독일의 상황은 희망이 있었다. 영국의 함선들은 연료와 탄약이 부족했고, 그리고 시간이 남아 있는 영국 함선은 다른 함선들을 일부로 가라앉였다. 18시 30분에 영국 함선들은 피오르 밖으로 나가서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편집] 노르웨이의 상황

대부분의 독일 침략은 동시 공격으로 그들의 목표를 점령하고 경호를 해제해, 일부 노르웨이 군사만이 노르웨이 정부의 주어진 명령을 실천할 수 있었다. 연합국이 손실을 입은 동안 독일의 그룹 5에게 모든 저항을 하고, 오슬로피오르에서 노르웨이 하마르에서 왕가와 정부가 탈출할 수 있는 몇 시간을 벌었다. 정부가 도망간 후, 비드쿤 크비슬링은 라디오 방송국을 장악하고 쿠데타를 발표하였다. 그로 자신이 노르웨이의 새 국무총리가 되었다. 크비슬링의 쿠데타와 새 장관의 목록은 19시 32분 자신이 발표했다. 4월 15일에 행정위원회노르웨이 대법원에 의해 노르웨이의 점령 지역의 민간 정부가 행정부를 담당하고, 크비슬링은 사임한다.[17][31]

 

독일 군대는 67세의 늙은 왕인 하콘 7세를 죽이거나 생포하려 시도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독일의 항복 조건을 수락을 거부하고 만약 노르웨이 정부에게 항복을 명령하면, 그가 왕위를 양위했을 것이다.

 

4월 9일 저녁에는 노르웨이 정부를 엘베룸으로 옮기고, 하마르는 안전하지 않은 것으로 믿었다. 모든 독일군의 요구가 거절되었으며 엘베룸 승인은 국회가 일반 상황에서 모일 수 있는 시간까지 내각에게 광범위한 능력을 주는 것이 국회의원에 의해 통과되었다. 그러나, 상황은 악화되고 그들은 다음날에 독일과의 지속적인 협상에 성공하라고 하였다. 예방 차원에서 노르웨이 육군 대령 오토 루게는, 오슬로의 100km 북쪽에 검문소를 설치, 미츠코겐 전투가 일어났다. 노르웨이의 위치가 독일군이 이끄는 작은 부대에 의해 공격당한 후, 에버허드 스필러는 독일 대사관에 대한 항공 테러 시도를 하고, 노르웨이 국왕 하콘 7세는 북쪽으로 도주했다. 논쟁이 발발하고, 스필러가 사망할 정도의 상처를 입은 후 독일군은 회항했다. 4월 10일, 노르웨이와 독일 간의 최후 협상이 실패한 후, 하콘 7세가 이끄는 노르웨이 대표단은 크비슬링 정부의 인정을 거부하였다.[17][32][33][34] 같은 날, 영국 폭격기의 노르웨이 유입과 독일의 오슬로 점령 소식이 전달되었다. 이후 "공황의 날"로 알려진 도시에서는, 늦은 저녁부터 다음날까지 시골로 달아났다. 비슷한 소문이 에게르순과 기타 해안 도시로 퍼저 공황으로 이끌었다. 소문의 기원은 밝혀내지 못했다.[35]

4월 11일, 독일-노르웨이 협상이 무산된 후, 19대의 독일 폭격기가 엘베룸을 폭격했다. 2시간 동안의 폭격으로 41명이 사망하였다. 같은 날 독일 공군은, 11기의 폭격기로 네버그선드에 폭격하고, 황태자와 내각, 노르웨이 국왕을 죽이기 위한 마을 공격을 시도했다.[28][36][37][38]

점령 전 노르웨이 당국의 최종 행위 중 하나는 오토 루게가 4월 10일 독일 침공을 저지하고 군대를 감독하는 노르웨이 육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17] 루게는 85세의 고령이라 곧 크리스틴 라크로 교체되었으며, 후자는 침공 초기 기간 동안 수동적인 행위만 반복했다고 비판했다. 라크 장군은 노르웨이 내각은 패배한 것으로 간주했다.[39] 루게의 임명에 이어서, 노르웨이의 태도는 독일의 전진 중단 명령과 함께 확실시되었다.[25] 가장 큰 도시, 항구와 비행장 뿐 아니라 무기고 및 통신 네트워크의 대부분을 파손시켜, 독일군이 이용하지 못하게 했다. 루게는 유일한 기회는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군이 올 때까지, 독일과의 시간을 끄는 것이라고 생각했다.[40]

4월 11일에는, 오슬로에서 지원군을 받은 후 팔켄호르스트는 공격을 재개했다. 이 작전의 목표는 연합군이 효과적으로 노르웨이를 이용하기 전에, 독일의 흩어진 병력을 모으는 것이였다. 그의 부대의 첫 번째 명령은, 오슬로피오르를 확보하는 것으로 제196 보병 사단제163 보병 사단을 트론헤임과의 병력과 합류하는 것이였다.

[편집] 지상의 전투

독일 침략의 성격이 영국 군대에 의해 명백해졌을 때, 역습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불화가 있었지만, 영국 육군은 처칠이 나르비크를 가자는 주장을 했지만, 오토 루게는 중앙 노르웨이의 트론헤임으로 상륙한다. 타협으로 모든 위치에 군대를 보내기로 했다. 오토 코크 선장은 연합군 운영의 전반을 맡았다.[41]

[편집] 동부 노르웨이 전역

독일 보병이 불타는 노르웨이 마을을 공격하고 있다.

 

4월 10일 노르웨이 사령관에 루게가 임명된 후, 노르웨이의 전략은 트론헤임에서 침공 세력과 연결하여 오슬로 북쪽에서 독일과의 지연전을 하는 것이였다. 노르웨이의 주 목적은 동부 노르웨이에서 트론헤임으로 연합군이 충분히 탈환할 기회를 주고, 오슬로 주변 지역에서 독일과의 저항 공격을 하는 것이다. 오슬로피오르를 둘러싼 지역은 칼 요한 에리슨보병 제1사단이 있었다. 나머지 지역은 제이콥 헤빈던 호그보병 제2사단이 있었다. 독일의 침공에 의해 동원이 방해된 후, 그 자리에서 노르웨이 병력들은 독일의 조치가 치뤄졌다. 독일에 직면하기 전 몇몇 부대들은 특히 전투 초기에 실패한 지휘관들을 오토 루게에 의해 교체되었다. 오슬로와 트론헤임을 잇기 위한 독일의 공세는 구브란드스달외스터달렌에 일어났다. 회네포스는 독일 병력이 전진하는 최초의 도시였다. 회네포스 북쪽은 독일이 먼저 방어 조치를 하기 위한 전투를 한 후, 나중에 군대를 지연시켜 노르웨이의 저항을 만나기 시작했다. 양쪽에 사상자가 생기고 치열한 전투를 하는 중, 노르웨이 보병 16사단은 4월 15일에 독일이 오기 전 헤우그스뷔드에서 둔화되게 하였다. 독일은 노르웨이에서 처음으로 기갑부대를 투입한 후, 다음날 헤우그스뷔드에서 노르웨이를 따라 침입하였다. 대전차 무기가 부족하여, 노르웨이는 독일의 공격을 막을 수 없었다.[22][42][43][44][45]

1940년 4월에 독일의 전차가 네우베우파르저그의 거리를 지나고 있다.

 

노르웨이의 전략 기반이 무너졌을 때, 4월 13-14일에 3천 명의 병력은 외스트폴드에서 스웨덴의 국경을 넘어 피한 후, 스웨덴에 의해 구금되었다. 같은 날 제1사단은 보병 두 연대가 스웨덴으로 건너고, 콩스베르크에서 항복하였다. 제3사단이너 릴레다흐가 이끌고 있었고, 남부 노르웨이를 방어하는 중 4월 15일 세테스달에서 독일군에게 항복했다. 일부 2천 명의 군인들은 세테스달에서 항복할 때 포로로 행진했다. 4월 20일에 영국-프랑스 계획은 노르웨이의 트론헤임을 방치함으로 해체되고, 루게의 전략은 사실상 무용지물이었다.[22][43][46]

연합군의 계획인 트론헤임 탈환은 취소하고, 영국군은 동부 노르웨이의 온달스네스로 옮겼다. 4월 20일에는 영국의 연대는 릴레함메르 마을 근처의 페버그 남쪽 멀리로 옮겼다.[47] 1940년 4월에 동부 노르웨이의 영구군은 영국 국민 방위군제148 보병 여단졔15 보병 여단이 있었다.[48] 다음 주에는, 노르웨이와 영국 군대는 연속된 전투에서 독일에게 오슬로 북쪽으로 밀리고, 그들의 목표인 구드브란드달의 계곡까지 전진했다. 특히 트레튼, 포방, 빈스트라, 크밤, 시와나오타에서 대형 전투가 일어났다. 기타 독일 부대는 발드레스외스테르달렌 계곡에서 빈 틈이 생겼으나, 대형 전투와 초기 노르웨이 반격에 성공한 초기 케이스는 아니였다.[49]

사전에 오슬로 북쪽에서 독일군은 정기적으로 폭격하여 노르웨이의 저항을 막아냈다. Ju-87 급강하폭격기는 노르웨이 군대의 사기를 꺾는 데 효과적임을 발견했다. 대공 무기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노르웨이는 독일이 거의 피해없이 폭격하도록 했다.[28] 마찬가지로, 독일 기갑부대에게 노르웨이의 대책은 거의 없었다.[45] 영국 제263 원정군 소대 전투기 편대는 완전히 얼어붙은 레이스코그스반트네트 호수에 거점을 설치하여 독일의 항공권을 뺏으러 하였으나, 이 편대는 4월 25일 독일 폭격에 의해 파괴되었다. 온달스네스에서의 세터몬으로 피난하여 살아남은 부대는, 4월 26일까지 근처의 육군 기지에 있었다. 세터몬은 4월 29일 독일 공군에 의해 파괴되었다.[50][51]

[편집] 남부 노르웨이의 붕괴

4월 9일에 크리스티안산을 점령한 후, 독일 침공 부대는 남부 노르웨이에 민간인의 피난을 허용했다. 동시에 독일은 크리스티안산 주변 지역으로 안전하게 옮겼다. 전투의 완전한 부재에도 불구하고 노르웨이 군대 사이에서 혼란과 공황의 몇 일 후, 세테스달의 노르웨이 3사단의 2천명은 4월 15일에 무조건 항복한다.[46][52]

[편집] 서부 노르웨이 전역

독일이 보스 자치주를 폭격하고 있다.

 

서부 노르웨이의 중요한 도시들인 베르겐과 스타방게르는 4월 9일 독일에게 점령당했다. 일부 2천명의 독일군은 베르겐을 점령하고 그 곳의 노르웨이 무기고를 점령했다. 베르겐의 적은 노르웨이 부대들은 두 철도 및 도로 교량을 폭파하고 동쪽으로 퇴각했다. 도시를 잃음에도 불구하고, 그 곳의 사령관인 윌리엄 스테판스는 총동원을 지시했다. 4월 중순동안 6천명의 제4 사단은 서부 노르웨이 방위 책임을 맡았고, 호르달란 주보스 마을 주위에서 동원되었다. 4사단은 북부 노르웨이에서 유일하게 완전하고 질서있게 동원된 사단이었다.[46][53][54] 4사단의 군인들을 따라 초기의 독일 공세를 격퇴하기 위해 서부와 동부 노르웨이를 연결하는 베르겐 선에 주둔하였다.[55]

영국의 부대는 4월 12일 온달스네스에 도착했다. 제 148 보병 여단을 중심으로 한 4월 17일에 주요 지점에 상륙하고, 영국 장교 버나드 파게가 지휘하였다.[56][57]

영국군이 상륙한 후, 스테판은 베르겐을 겨냥한 공세를 계획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제4 사단은 6361명의 군인들과 554마리의 말을 강제 동원하였다. 스테판 장교의 계획은 4월 6일에 오토 루게가 발드레스할링달에 동부 노르웨이 전선을 강화하기 위해 군력을 대부분을 보내 대부분의 계획이 중복되었다. 서부 노르웨이의 나머지 세력의 초점은 베르겐 주변의 독일군으로 집중되어, 독일군을 막아야 하였다. 노르웨이 해군은, 제독 탱크-닐슨의 명령으로 하드당레드피오르송네피오르에서 독일군을 침입을 막기 위해 병력을 모냈다. 전체적인 노르웨이 왕립 해군은 서부 노르웨이의 베르겐의 독일군 점령에 따라 일부 17척-18척의 전함과 5기-6기의 전투기를 잃었다. 루프트바페가 4월 23일에 보스를 폭격하여 심각한 민간인 사상자가 나온 후, 독일군은 4월 25일에 보스를 점령했다. 4월 28일과 29일에 루프트바페는 역시 방어가 없는 항구도시인 크리스티안순도 폭격하고, 인근 항구의 노르웨이 정부와 왕실의 본부는 몰데가 되었다.[37][46][47][54][58][59][60][61]

[편집] 중앙 노르웨이 전역

1940년 4월과 5월의 남부 및 중부 노르웨이의 군사 이동.

 

중앙 노르웨이의 원 작전은 남부 노르웨이를 독일이 점령하는 동안, 연합군을 트론헤임에서 세 갈레로 공격하는 것이였다.[40] 헤머 작전이라 불린 이것은, 북쪽에서 남소스 전선, 남쪽에서 온달스네스, 중앙의 트론헤임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 계획은 신속하게 변경되고, 트론헤임의 직접적인 공격은 위험한 것으로 판단하여 북부와 남부의 공격만 허용했다.[5]

예상된 연합군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독일 국방군 최고 사령부팔시름예거돔바스 북쪽의 구드브란드스발 계곡의 철도 분기점으로 이동했다. 군대는 4월 14일 도착하고 돔바스 전투 후 4월 19일에는 노르웨이 군대가 항복하였다.[62]

4월 14일 늦은 시간, 남모스 방향에서 애드리언 카톤 드 위르트제146 보병 여단은 노르웨이의 남모스에 처음으로 상륙했다.[56][63][64] 이동하는 동안, 병력은 남모스로 이어지는 피오르에서 좁은 바다로 인해 부피가 큰 구축함 대신 수송함으로 옮겼다. 이러한 혼란속에, 심지어 여단 지휘관은 상당한 잘못을 저질렸다.

1940년 4월, 남소스에 상륙한 영국군.

 

북부 군대를 위한 또 하나의 큰 문제인 보급은, 공중 지원이 독일 공군의 효과적인 대공 방어로 인해 해결되었다. 4월 17일 병력은 남모스 주변에서 폴라포스스탱커로 이동했다.[63][64] 프랑스 군대는 4월 19일 늦게 남모스에 도착했다. 4월 20일에는 독일이 남모스에 폭격하여 시내 대부분의 건물이 파괴되고, 연합군 지원 기지를 파괴시켰다.[64][65] 그에 상관없이, 노르웨이 제5 사단스타인샤르로 80마일(130km)를 이동했다. 지속적인 폭격을 받으며 이동하는 중, 트론헤임에서 북부 군에 의해 제181 보병 사단의 공격을 받았다. 드 위르트군은 스타인샤르를 떠나, 후퇴하도록 강요했다. 4월 21일 - 22일에는, 스타인샤르가 독일 공군에 의해 폭격되어 45명이 사망하고 2천명 이상의 난민이 생겼다. 4월 24일에는 스타인샤르와 주변 지역이 독엘이게 점령되었다.[66][67]

폭격을 당한 스타인샤르.

[편집] 중앙과 남부 노르웨이 전투의 끝

4월 28일, 독일은 두 그룹으로 나누고, 연합군 지도자들은 남부 노르웨이 및 중부 노르웨이의 모든 연합군을 철수시키기로 결정했다.[17] 연합군이 제자리를 맴도는 동안, 노르웨이군이 독일군에게 잡혀 강제 제대를 하기도 하였다.[34][50] 4월 30일 독일군은 오슬로와 트론헤임을 연결하여 최대로 진격하였다.[40] 4월 29일, 국왕 하콘 7세는 독일 폭격 중인 몰데에서 후퇴하여 그의 정부는 5월 1일까지 트롬스로 이동했다.[17][50][61] 노르웨이 전역의 나머지 기간의 사실상의 노르웨이 수도는 트롬스로, 국왕과 내각 정부가 있었다.[68] 남부군은 온달스네스를 간신히 5월 2일 오전 2시에 탈출하여, 그 직후 독일군이 항구를 점령했다.[17] 서부 노르웨이의 항구는 4월 23일부터 26일까지 거대한 폭격을 받아 27일까지 화재가 발생했다. 베블룬스네스와 온달스네스 기차역 주변은 큰 피해를 입었다.[57] 북부군의 해군인 짙은 안개에 싸여 있던 영국 구축함 HMS 아프리디와 프랑스 구축함 비전융커 Ju.352 A-1의 폭격으로 침몰하였다.[5][64]

노르웨이 남부, 중부 지방의 군사 저항은 5월 5일에 그쳤으며, 쇠르트뢰넬라그 주헤그라 요새 전투텔레마르크 주비니에스빙엔 전투가 있었다.[17]

중앙 노르웨이 전역의 패배 원인으로 손꼽히는 것 중의 노르웨이 논란은, 영국 총리인 체임벌린의 사임과 윈스턴 처칠의 임명을 불러왔다.[5]

[편집] 북부 노르웨이 전역

초기 독일과 연합군이 남부, 중부, 북부에 상륙한 후 1940년 4월 노르웨이 작전도.

 

북부 노르웨이는 칼 구스타프 플레시처의 노르웨이 제6사단이 있었고, 나르비크에서의 독일 상륙에 직면하였다. 독일의 침공 후 플레시처 장군은 북부 노르웨이군의 총사령관으로서의 지휘를 생각했다. 나르비크에서의 노르웨이의 반격 전 노르웨이는 북쪽의 소련의 침공을 방지하기 위한 동부 핀마르크에서의 상당한 세력이 플레시처의 결정에 방해로 작용했다.[10]

트론헤임에서의 반격을 위해 온달스네스 및 남소스에서의 연합군 상륙과 함께 추가 병력이 노르웨이 북부에 배치되었다. 이들 군사의 목표는 나르비크의 재탈환이었다. 남쪽에서의 전투와 마찬가지로, 나르비크 원정대는 여러 장애물을 만났다.

연합군이 직면한 첫 번째 문제점 중 하나는 명령 통합으로, 통일된 조직이 이뤄지지 못했다. 지역에서 해군 세력이 주도한 함대 제독 윌리엄 보일은 빠른 시일 내에 독일 영역을 축소하기 위해 명령하였다. 반면, 지상군의 지휘관인 파이레즈 요셉 마시츠키 장군은 강력하게 독일 점령 지역에서 자신의 병력을 상륙하고 인구 밀집 지역을 피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두 사람은 최선을 조치를 취하기 위해 4월 15일에 만났다. 보일은 나르비크의 즉각적인 공격을 주장하고, 마시츠키는 보일의 공격은 다수의 인명을 앗을 것이라 반박하였다. 보일은 결국 마시츠키의 관점을 인정했다.

마시츠키의 병력의 코드명은 본래 아돈군이였으나, 후에 루피트군으로 바뀌었다.[69][70] 이 군은 제24 보병 여단의 육군 준장 앙투안 베뙤아르, 프랑스군, 폴란드군과 합세하였다.[56] 주요군은 히뇌야섬의 하르스타에 4월 14일 상륙했다. 하르스타에서 4월 16일에 첫 번째 독일군의 공중 공격이 시작되었지만, 대공포로 인해 심각한 피해는 막을 수 있었다. 오직 5월 말에 독일군이 하르스타를 탈취하는 데 성공하고, 20일과 23일에 연합군에게 기습공격 함으로써 연로 탱크와 민간 주택을 파괴하는 데 성공했다.[71]

한편, 왕립 해군은 상당히 더 좋아지기 시작했다. 4월 15일, 연합군은 독일 U-보트(잠수한 U-49)를 노르웨이 해에서 포획하여, 모든 U-보트을 자세하게 문서로 작성하여 효과적으로 해상 위협을 없앴다.

중앙 노르웨이에서 연합군의 패배 후, 더 많은 병력이 북부에 배치되었다. 항공 방어는 바드포스 비행장의 2개 항공대로 구성되어 제 263 RAF 비행대제 46 RAF 비행대호커 허리케인 전투기롤 구성되었다.[72]

북부 노르웨이에서 연합군의 반격의 일환으로, 프랑스군은 5월 13일 비에르비크에 상륙했다. 함포 사격 지원으로, 대부분의 마을을 파괴하고 연합군은 비에르비크에서 독일군을 몰아낼 때 까지 14명의 민간인을 죽였다.[17][19]

5월 28일에, 두 프랑스와 한 노르웨이 대대가 나르비크에서 독일군을 공격했다. 도시 남쪽의 폴란드군은 베이스피오르 동쪽으로 공급받았다. 다른 노르웨이 군대는 스웨덴 국경 인근의 뵈른피엘에 다시 독일군을 몰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의 프랑스와 저지대 국가의 침공은 전쟁의 막대한 상황 변화를 초래했고 노르웨이의 중요성이 상당히 감소하였다. 5월 25일, 나르비크를 탈환하기 3일 전 연합군 지휘관은 노르웨이에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연합군의 독일군 도시 공격은 연합군의 의도를 위해 시도하였다.[5][19][40][73] 노르웨이 철수 주장자 중의 하나인 윈스턴 처칠은, 나중에 그 결정은 실수였다고 말했다.[34] 이후 5월 28일 연합군은 나르비크를 탈환하나, 독일 공군의 폭격으로 크게 손상되었다.[19]

 

노르웨이 도시 보되. 독일 공군이 폭격하고 2년 이후 모습이다.

 

노르웨이와 연합군은 나르비크에서 성과를 거두었지만, 독일군은 신속히 노틀란드의 다이텔의 고립된 병력을 구출하고 북쪽으로 진격했다. 점령된 베이러렌스 비행장은 트론헤임에서 독일 공군이 나르비크로 지원하기 위한 기지로 사용되었다.[73] 5월 27일 저녁, 항구 도시인 보되에 독일 공군이 맹폭하여 5천명 이상이 피난민이 되었다.[74] 곧 보되는 독일군에게 점령당했고, 영국이 운영하던 활주로는 독일군이 점령하였다. 보되에서 활주로는 나르비크 전투의 공군기지와 함께 독일에게 넘겨졌고, 그들이 지속적으로 북쪽으로 진격할 수 있게 하였다.[73][75]

노르웨이에서 연합군의 철수 작전인 알파벳 작전이 5월 24일에 승인되었다. 노르웨이 당국은 6월 1일 결정을 내렸다. 6월 7일 회의에서 해외에서 전쟁을 지속하자는 의견이 모였고, 하콘 7세 국왕은 올라브 5세 황태자와 함께 영국 순양함 HMS 데본샤워에 탑승하여 노르웨이 내각과 함께 영국으로 망명하였다.[17][76] 연합군의 지원없이 노르웨이 육군은 전투를 계속할 수 없었다.[34] 국왕과 황태자는 모두 노르웨이에 남는 가능성을 고려했지만, 세실 도머 대신 영국 외교관이 망명정부를 따라 가기를 설득했다.[33] 황태자가 남아서 점령의 영향을 완화시키기 위해 행정위원회를 지원해야 한다고도 했지만, 국왕의 나이로 인해 죽은 후 복잡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해외 망명을 결정하였다.[77] 6월 8일, 철도 노선과 항구를 파괴하며 연합군은 모두 철수하였다. 독일군은 주노 작전을 시작하여, 나르비크의 압력을 완화하고 철수를 하는 것을 발견한 후, 추격하여 두 영국 구축함과 항공모함 HMS 글로우스를 격침시켰다. 그러나, 영국 전함은 침몰되기 전에 구축함 HMS 아카스타가 샤른호르스트에게 피해를 주었다. 곧, 영국 잠수함 HMS 클라이드가 그나이제나우를 만나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5]

노르웨이 본토에서 육군은 1940년 6월 10일에 항복하였다. 정면에서 전투하는 부대는 6월 8일에 전투 중단을 명령내렸다. 전투는 6월 9일 24시에 멈추었다. 1940년 6월 10일 17시, 트론헤임에서 노르웨이의 공식적인 항복식이 브리스틀 호텔에서 이루어졌다. 레긴벨드 로스처 닐슨 중령이 노르웨이 측으로 서명하고, 에리히 버스체하겐 대령이 독일 측에 서명하였다.[17][78] 나르비크에서 전투하는 노르웨이군에 대한 항복 협졍은 같은 날 뵈렌필에서 체결되었다. 본 협정 서명인 노르웨이 지역의 마지막 군대의 항복은, 독일 측은 에드워드 디에틸 장군이고, 노르웨이 측은 헤럴드 워드 홀듬 장군이었다.[79] 62일 동안의 전역과는 별도로, 소련에서 독일의 침공을 막을수 있도록 지원하였다.[80]

[편집] 점령

이 부분의 본문은 나치 독일의 노르웨이 점령입니다.
노르웨이 국회 의사당이 1941년에 나치 독일의 깃발이 걸려 있고 나치의 슬로건이 적혀 있다.

 

노르웨이 본토 군대의 항복으로, 노르웨이는 독일이 점령하기 시작했다.[40] 노르웨이 본토의 노르웨이군은 1940년 해체되었고, 점령의 남은 년도 동안 노르웨이의 저항 운동은 거세졌다. 독일 점령에 대한 저항은 꾸준히 힘을 얻어 더욱 조직화되어 1940년 가을에 시작되었다. 게슈타포의 초기 조직의 침투 및 파괴에도 불구하고, 많은 저항 운동은 살아남았다. 전쟁 중의 남은 해에는, 노르웨이 저항 단체들 중 하나인 밀롱파괴 공작을 하지만, 여전히 주요 목표는 연합군이 노르웨이 상륙을 돕도록 하는 것이였다. 밀롱 이외에도, 많은 독자적이고 대부분 공산주의인 저항 단체들은 추방된 노르웨이 당국의 협조없이 독일을 공격하고 노르웨이를 점령했다.[81][82]

노르웨이의 독일 점령 중, 조셉 테보벤노르웨이 제국위원회가 점령을 담당하고 있었다.[17] 독일은 특히 국왕을 대상으로, 추방된 노르웨이와 무관하게 할려고 하였다. 노르웨이 전역이 끝난 후, 독일은 하콘 7세의 폐위를 노르웨이 의회 대통령에게 압박하였다. 7월 3일 하콘 7세가 요구를 거절하고, 7월 8일 BBC 방송에서 자신이 연설을 하였다. "왕은 더 이상 없다"라는 것이 알려져, 노르웨이 협력자와 점령자에 대한 저항이 커졌다.[17][83] 제국위원회는, 점령 지역에서의 노르웨이 정부에 의해 4월 15일 노르웨이 대법원이 임명하고, 9월 25일까지 지속되었다. 이 날 이후 친독의 노르웨이 협력 정부는 비드쿤 크비슬링이 맡게 되었다.[31]

노르웨이 왕립 해군노르웨이 왕립 공군망명 노르웨이 육군을 세워 노르웨이 전역에서 구원된 부대에 기초되었다.[84] 이 군사들은 곧 북대서양의 호위와 유럽 항공전에서 광범위한 전투를 치루었다. 해군과 공군의 계급은 점령된 노르웨이에서 탈출한 피란민들에 부여했고, 그들의 장비들은 영국과 미국의 항공기와 함선의 지원으로 이루어졌다. 1940년 6월 15일에 15척의 함선은, 2차 세계 대전이 유럽에서 치뤄지는 동안 노르웨이 왕립 해군은 58척으로 증강했다. 함선에는 7천 명의 승무원들이 있었다. 전쟁이 이루어진 기간 동안, 모두 118척의 전함이 한번 또는 계속 노르웨이의 지휘 하에 있었다.[22][84]

노르웨이 왕립 공군 편대는, RAF 전투사령부RAF 해안사령부의 명령으로 출격하였다. 노르웨이는 제 331 편대제 332 편대스핏파이어 전투기로 구성되어 있었다. 해군은, 제 330 소함대제 333 소함대노스롭 N-3PB 정찰수상기와, 컨솔러데이티드 PBY 카탈리나쇼트 선더렌드 정찰비행정, 모스키토 경폭격기로 구성되었다. 노르웨이인의 개별적인 영국 항공대로 날아갔다. 1944년 11월, 노르웨이 왕립 해군 항공대와 노르웨이 왕립 육군 항공대는 1941년 3월 이후 노르웨이 왕립 공군에 의해 통합된 지휘를 받았다. 전쟁의 끝에, 일부 2,700명의 직원이 노르웨이 왕립 공군에 있었다.[22][85]

4천명의 노르웨이 육군도 스코틀랜드에 다시 설립되었다. 그러나, 소수의 특수 부대를 제외하고 거의 움직임이 없었다. 스코틀랜드 기반의 노르웨이 육군은 1944년부터 1945년까지 핀마르크(노르웨이 북쪽 카운티)의 해방 작전에 참가했다. 핀마르크 및 트롬쇠를 포함한 노르웨이 북부는, 독일군의 점령 아래에서 붉은 군대페첸가-시르셰네스 공세에 의해 핀마르크가 1944년 8월 해방되었다. 공세는 시르셰네스에서 독일군의 북동쪽으로 이루어졌다. 스코틀랜드에서 3백명의 군대가 도착한 후, 추가 부대는 스웨덴에서 옮겨 본토로 동원되었다. 전쟁 후, 핀마르크에서 노르웨이군은 3천 명이 있었다. 이 점령 과정에서, 독일 후방 경비 순찰대 및 사소한 치열한 고지 전투가 있었다.[22][86]

중립 스웨덴은 스웨덴 당국의 지원으로 설립된 소위 "경찰 병력"으로 전쟁의 마지막 2년 동안 노르웨이의 미군이 증가하였다. "경찰"은 군대를 훈련하고 13,000명의 군사 훈련을 유럽에서의 승리의 날까지 하였다. 1945년에 1,300명의 경찰 병력이 핀마르크 전투에 참가했다.[87]

이외에도, 정규 노르웨이군으로부터 노르웨이의 주요 무장 운동은, 밀롱의 망명 정부의 통제로 전쟁의 끝까지 4만 명의 전투원이 있었다. 1941년 11월에 밀롱은 노르웨이 국군의 네 번째 지부로 망명 노르웨이 정부가 선포했다.[22][81]

[편집] 사상자

[편집] 독일

부상당한 독일 병사가 나르비크에서 병원선 MV 빌헬름 구스타프에서 보도되고 있다.

노르웨이 전역의 공식적인 독일 사망자는 5,296명이다. 2,375명은 바다에서 실종되고, 1,317명은 육지에서 사망했다. 1,604명은 부상을 입었다.[88][89]

독일 해군이 두척의 둥순양함, 2척 - 6척의 경순양함, 10척 - 20척의 구축함, 6척의 U-보트가 손상되었다고 집계되었다.[5][90]

[편집] 노르웨이와 연합군

영국의 부상자가 영국과 프랑스의 의료원에 의해 노르웨이의 남소스의 병원에서 입원하고 있다.

 

노르웨이인과 영국인의 사상자는 총 6,602명에 달했다. 영국은 1,869명이 사망하고, 육지와 해상에서 부상 및 실종은 2,500명이였다. 프랑스인과 폴란드인은 533명이 사상 또는 실종되었다. 한편, 노르웨이인은 860명이 사망하고 1,700명이 사상자가 나왔다. 약 400명의 노르웨이 민간인이 독일군의 폭격으로 인해 사망했다.[88]

노르웨이 해상에서의 사상자는, 영국 해군이 주로 121척의 오래된 함선이 수비하여, 사실상 대부분이 전멸하였다. 탈취한 독일 트롤어선을 포함한 15척의 전함은, 일부 600명의 사람들이 전투 말까지 영국으로 대피하였다. 나머지 노르웨이 해군 함정은, 자신의 승무원들에 의해 자침되거나, 침몰하거나 독일에게 탈취당했다. 전투 중에 침몰한 함선은 연안 방어선과 구축함 두 척이다. 7척의 어뢰선은 자침하고, 나머지 10척은 독일에 의해 점령당했다. 오직 9척의 노르웨이 잠수함 중 1척만 영국으로 탈출할 수 있었고, 나머지 8척은 자침 또는 점령당했다.[84][91]

영국은 한 척의 항공모함, 두 척의 순양함, 7척의 구축함과 잠수함을 잃었지만 그들은 독일보다 더 큰 함대로 손실을 감당할 수 있었다.[5]

프랑스 해군은, 전투 기간 동안 대형 구축함을 잃고, 순양함이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망명 폴란드 해군도 구축함 ORP 괌을 잃었다.[5]

[편집] 분석

계획된 작전은 독일에 대해 성공적으로 끝났다.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모두 점령했다. 특히 덴마크에서는 놀랄 정도로 완벽하였다.

해상에서의 공격은 상당한 차질이 있었다. 전투 중 독일 해군의 중순양함 한 척, 경순양함 두 척과 네 척의 구축함이 손실을 입었다. 히틀러가 바다사자 작전의 계획을 추구했을 때, 해군의 피해가 컸다.[5][90]

육지에 대한 가장 큰 전투비용은 노르웨이 점령 중 침공 부대를 유지하기 위해 썼다. 전반적으로 이 전역은 승자에 대한 제한된 이익과 비용이 드는 것이였다.[5][92]

노르웨이 정부의 노르웨이 해운 및 무역 공관을 통해 연합군은 또한 노르웨이 상업 해군대를 통해 세계에서 4번째로 큰 서비스를 얻었다. 1028척의 배들로 이루어진 해운/무역 공관은 4월 22일 설립되었다. 해군대의 함선들은 전쟁 전 노르웨이의 85%를 차지하고, 나머지 15%는 탈출하지 못하고 독일군에게 포획되었다. 공관의 27,000명은 독일군에게 포로가 되었다. 총 43대의 자유 노르웨이 함선이 전쟁 중 침몰하고, 또 다른 29척은 스웨덴에 의해 포획되었다.[17][93][94][95]공관은 노르웨이 망명 정부의 경제적 독립과 지속적인 저항의 기반이 되었다.[95]

연합군은 나르비크에서 부분적인 성공을 이뤄냈다. 독일이 5월 28일에 점령하기 전에 많은 항구 시설들을 파괴했다.[5] 항구에서의 함대는 연합군이 밑었지만 그것은 1년 동안 가동하고, 6개월은 정지되어 있었다.

독일의 노르웨이 점령은 앞으로 몇 년 동안 연합군에게 가시가 되는 존재였다. 솔라를 기반으로 한 폭격은 레틀리 헤드에서 약 왕복 600마일의 북부 스코틀렌드에 하고, 기존에 독일 영토에 가장 가까운 왕복 1000마일의 실트 섬 대신 이용하였다. 스코틀렌드 동부의 폭격은 1943년까지 지속되었다. 노르웨이 점령 후, 스코틀랜드(특히 로시흐와 스카파 해군 기지)는 공중과 해상에서 군대에 의한 속임수 공격에 가장 취약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독일의 해적들은 혐의 없이 북대서양을 지나기 위해 준비 거점으로 노르웨이를 이용했다. 이후 독일의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 노르웨이 기지는 연합군의 북극 호송대를 막기 위해 사용되었다.[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