슐츠의 자막공방/인투 더 화이트 (2012)

제시 오언스에 관한 진실과 오해

슐츠105 2013. 1. 2. 13:22

#1

 

“황금의 순간이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한 제시 오언스가 자신의 놀라운 승리를 가리켜 이렇게 표현했다.

 

어렸을 때부터 호흡기가 약해 병약하고 비쩍 마른 아이였던 오언스는

학교나 놀이터 뿐만아니라 어디든지 뛰어 다녔다.

그것이 그에겐 유일한 개인 훈련이었다.

 

그는 뛰어난 재능을 가졌고 고등학교에선 트랙 선수로써 이미 스타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당시 오하이오에서는 백인우월주의 단체인 KKK단이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교는 그에게 체육 장학금을 줄 수가 없었다.

 

그는 수업료를 벌기 위해 음식점에서 흑인이라는 차별과 육체적인 고통을 감내하며

오로지 훌륭한 선수가 되겠다는 일념하나로 어떤 모욕도 참아냈다.

그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마침내 1936년, 그는 올림픽 대표선수로 발탁되었다.

 

독일 올림픽을 유치한 나치는 미국의 인종차별을 교활하게 조롱하고

히틀러가 소집한 무적함대의 대승을 예언하는 선전활동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또한 그는 수뇌부를 이끌고 직접 올림픽 스탠드에 나와 경기를 관람했다.

 

그는 순수 게르만인 혈통의 우수성이 올림픽에서도 증명될 거라며 유색인종들을 공개적으로 비웃었다.

그러나 경기 첫날 오언스가 100미터에서 금메달을 따내자 히틀러의 불운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낙담하지 않고 다음날을 기다렸다.

멀리뛰기의 강력한 우승후보가 독일인이었기 때문이다.

독일선수 루츠 롱은 자국민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결승에서 오언스와 맞붙게 되었다.

 

하지만 결과는 오언스의 압승이었다.

오언스의 기록은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기염을 토해냈다.

낙심한 히틀러는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하고 있었다.

 

게다가 패배한 루츠는 당시 유색인종을 경멸하던 다른 독일인들과는 달리 진정한 스포츠맨이었다.

그는 오언스의 승리를 축하하는 뜻에서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 함께 걸어가는 멋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것도 잔뜩 화가 난 히틀러의 내빈석 앞을 말이다. 이 때부터 두 사람은 막역한 친구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마지막으로 오언스는 다시는 루츠를 만나지 못했다.

루츠는 나중에 독일군으로 참전했다가 시실리 전투에서 전사했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 오언스는 전쟁이 끝난 뒤 직접 독일로 날아가 친구의 미망인과 아들을 위로했다.

 

오언스의 승리에 관중의 함성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괴벨스는 오언스를 가리켜

‘흑인 미국 지원군’이라며 기관지를 통해 그를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그 다음날 오언스는 200미터에서 또 신기록을 수립했다.

이제 미국이 극적인 결정을 할 순간이 찾아왔다. 마지막 순간 미국팀은 계주에서

백인 두명을 빼고 오언스와 함께 흑인 두 명을 기용했다. 결과는 대 성공이었다.

오언스는 여기서 또 한 번의 세계 신기록을 기록하며 네 번째 금메달을 미국에 안겼다.

 

경기내내 화가 나 있던 히틀러는 오언스가 이룬 놀라운 성과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결국에는 시상식이 거행되는도중에 경기장을 빠져 나가는 추태를 부렸다.

 

그러나 나중에 오언스는 경멸하는 사람과 악수를 해야 하는 끔찍한 상황을 모면하게 해준

히틀러에게 오히려 감사하다고 현지 기자들의 인터뷰를 빌어 말을 전했다.

 

오언스는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의 것을 이루었다.

그러나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루스벨트 대통령 역시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자신과 악수를 나눌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았다.

 

단지 돈을 벌기 위해 여러 해 동안 개와 말, 심지어는 자동차를 상대로

달리기 쇼를 벌였던 제시 오언스는 순회 흥행쇼에서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었다.

 

말 솜씨가 좋았던 그는 은퇴한 뒤로는 미국 전역을 돌면서

시민의 권리, 인종문제, 그리고 스포츠에 대해 달변을 토했다.

그는 자신의 달리기 비법은 달리는 동안 숨을 멈추는 것이었다고 털어 놓았다.

그러나 그는 67세에 폐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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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재까지 육상 종목에서 하나의 대회에서 가장 많은 우승을 차지한 경우는 4관왕입니다.

리고 역사적으로 이 4관왕을 달성한 선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칼 루이스와 제시 오언스가 유일합니다.

 

 

 

 

제임스 클리블랜드 오언스는 1913 12, 미국 알라바마 주의 오크빌에서

소작농을 하는 집안의 11남매 중 7번째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유년 시절에 이름의 약자를 따 주로 ‘J.C.’라고 불려지며 자랐죠.

 

20세기 초반의 미국, 그것도 남부 지역에서 흑인들의 생활의 궁핍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때문에 1910년에서 1930년까지 약 20년에 걸쳐 미국 남부지역에 거주하던 흑인들이

대규모로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대이동(Great Migration)이 일어납니다.

이 기간 동안 대략 200만 명에 가까운 흑인들이 미국의 중부와 북동부, 서부 지역으로 이주하게 됨으로써,

미국 남부 지역에 주로 몰려 있었던 흑인들의 거주지가 미국 전역으로 확대된 것도 바로 이 때입니다.

 

 

J.C.의 가족 역시 고향 알라바마를 떠나 북동부 지역인 오하이오주의 클리블랜드로 이사를 하게 됩니다.

클리블랜드에서 새로 다니게 된 학교 교사는 출석부에 이름을 적기 위해 그에게 이름을 물었고, 그는 당연히 ‘J.C.’라고 대답했죠.

하지만 그는 미국 남부 억양이 매우 강했고, 교사는 출석부에 ‘J.C.’가 아니라 제시(Jesse)’라고 적게 됩니다. 이 때 출석부에 적힌 이 이름이 그의 일생 동안의 이름이 되죠.

 

당시 대부분의 흑인 아이들이 그렇듯이 그 역시도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안을 돕기 위해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는 야채 배달에서 화물 적재, 신발 수리 등 여러 가지 일을 해야 했죠.

그런 그에게서 육상 선수로서의 자질을 발견한 건 학교 코치인 찰스 릴리였습니다.

코치는 그에게 육상 선수가 되어보지 않겠느냐고 권유했죠.

제시 오언스 역시 달리기에 자신이 있었고 재미있어한다는 걸 알고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학교를 마치고 나면 일을 해야 했으며, 운동을 한다는 건 자기 형편에 일종의 사치였죠.

그러자 찰스 코치는 그에게 학교를 마치고 나서가 아니라,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자기와 같이 훈련을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죠.

이것이 제시 오언스가 육상 선수로서의 인생이 시작되는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는 이후 평생에 걸쳐 찰스 릴리 코치가 자신의 인생에 가장 큰 도움을 준 사람이라고 여러 차례에 걸쳐 밝힙니다.



 

 

 

그가 육상 선수로서 전국적인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은 고등학교 시절부터입니다.

그는 1933년 시카고에서 벌어진 전미고등학생선수권대회에서 100야드(91미터) 9.4초로 세계신기록과 타이의 기록을 세웠고, 멀리뛰기에서는 7.56미터를 뛰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죠.

 

그는 오하이오 주립대학에 진학한 뒤에도 육상선수로서의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의 학비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직업들을 겸해야 했죠.

하지만 그는 1935년과 1936년의 전미대학선수권대회(NCAA)에서

2차례 연속으로 4관왕에 오르는 등 전혀 떨어지지 않는 기량을 과시했습니다.

 

또한 1935년 미시간주에서 열린 미국 중서부 지역의 육상대회인 Big Ten Conference에서 100야드 경기에서 9.4초를 기록하여 또 다시 세계신기록과 타이를 이뤘고, 멀리뛰기에서는 8.13미터, 220야드(201.2미터) 허들 경기에서는 22.6초로 두 종목 모두 세계신기록을 경신했습니다.

이날 제시 오언스가 보여준 기록들은 미국 NBC에 의해 1850년 이후 가장 인상적인 육상종목의 업적으로 선택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학업과 운동, 일을 병행해야 하는 것 외에도 다른 불편함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여전히 인종차별적인 제도가 만연해 있었고, 그는 오하이오 주립대 시절 여러 대회 참가를 위해 전국을 여행해야 했는데,

그는 꽤나 자주 흑인 전용식당과 흑인 전용호텔을 따로 이용해야만 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가 참가한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은 히틀러와 나치가 독일 민족,

그리고 아리안 인종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선전 도구로 이용된 올림픽이었습니다.

지난 번 손기정 선수에 대한 포스트에서도 언급했지만,

히틀러와 나치는 자신들의 의도와는 달리 오히려 소위 유색인종선수들에 의해 의도치 않은 망신을 당하게 되죠.



 

 

 

 

제시 오언스는 베를린 올림픽에서 100미터와 200미터, 멀리뛰기, 400미터 릴레이에서 모두 우승을 차지합니다.

특히 100미터에서 그가 기록한 10 02의 기록은 20년 후인 1956년이 되어서야 갱신이 될 정도로 뛰어난 기록이었습니다.

더구나 그가 달린 곳은 지금과 같은 합성재질의 트랙이 아닌 석탄 재질이 깔린 일종의 흙바닥이었고,

그가 신었던 신발 역시 징이 4cm나 되는 구닥다리였죠.

요즘도 종종 전성기의 제시 오언스와 우사인 볼트가 동등한 조건에서 대결을 펼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를 놓고 논쟁이 오가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가 현대의 합성재질의 트랙에 첨단 육상화를 신고 달린다면 우사인 볼트의 기록을 능가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상당수 있습니다.

 

 

4관왕의 위업을 달성한 뒤 그는 열렬한 환영을 받습니다. 독일 사람들까지 그의 사인을 받기 위해 몰려 들었고, 미국에 돌아온 뒤 그는 더 이상 흑인 전용호텔이나 식당에 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물론 여전히 다른 흑인 선수들은 그래야 했지만요.)

뉴욕 5번가에서는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어 꽃가루가 날리는 퍼레이드가 벌어졌고, 언론들의 인터뷰도 끊임없이 이뤄졌습니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그가 이뤄낸 업적과 동시에 베를린 올림픽의 특별한 의미로 인해 여러 가지 억측과 논쟁도 있었습니다.

히틀러가 그와의 악수를 거부했다거나, 시상식이 끝나자마자 스타디움에서 화가 난 채 나가버렸다거나 등의 이야기가 그것들이죠.

이런 이야기들은 논쟁거리가 되었고 어느 것이 맞고 틀렸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만,

제시 오언스 본인에 따르면 히틀러는 나를 모욕한 적이 없다. 오히려 나를 모욕한 건 루즈벨트다.”라고 말했죠.

 

사실, 그는 스포츠 부문에서 놀랄만한 업적을 남긴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루즈벨트와 그의 후임자인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한 번도 백악관에 초정받지 못했습니다.

당시에는 전미대학미식축구대회에서 우승을 해도 백악관 초청을 받았는데,

전무후무한 올림픽 4관왕이 백악관 초청을 받지 못했다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고 그로서는 일종의 모욕으로 받아 들여졌던 것 같습니다.



 

 

 

베를린 올림픽 이후 그는 대표팀과 더불어 스웨덴의 한 경기에 초청됩니다.

그는 이 때부터 자신의 능력과 경력을 상업화하려는 시도를 하게 되죠. 이는 육상 선수로서 전무후무한 업적을 남겼지만 별다른 경제적 수입을 보장받지 못하는 그로서는 당연한 시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아마추어의 개념은 지금과는 달랐고, 그는 파보 누르미와 마찬가지로 선수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합니다.

스폰서나 광고 등의 개념이 없었던 시절에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일종의 비극이었죠.

 

스포츠계를 떠난 후, 그는 여러 가지 일을 하게 됩니다. 경마 사업에서부터 세탁소, 주유소, 영화 사업 등 많은 일들을 하게 되죠.

그리고 이런 사업들 중 상당수는 그 결과가 그리 좋지는 못했습니다.

이런 그를 보면서 여러 사람들은 우려의 시선을 보내지만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4개의 금메달을 땄죠.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4개의 금메달을 먹을 순 없어요.”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들을 거친 뒤 그는 재기하게 됩니다.

선수로서의 자격은 비록 박탈당했지만, 그는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물이었고

이는 그가 각종 홍보대사나 연설자로서 활동하기에 충분한 조건이었죠.

그는 페어플레이, 깨끗한 생활, 애국심 등을 후원하는 많은 연설을 하였고, 자동차 회사의 홍보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제시 오언스는 1980 애리조나주 투산에서 폐암으로 사망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가 이루어 낸 업적에 대해 시대를 앞서 태어난 육상 선수라고 평가하고 있고,

앞서 얘기했다시피 그의 운동 능력을 감안할 때 현대라면 더욱 더 놀랄만한 기록을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되기도 합니다.

특히, 그는 개인적으로는 흑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에 대해 크게 목소리를 낸 인물은 아니지만,

인종차별에 대항하는 상징으로 흔히 인용되는 인물이며, 인종에 의해 인간의 능력이나 가치가 평가되는 것이 허무맹랑한 것임을 인생을 통해 입증한 육상의 영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