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개/2차대전 홀로코스트

쉰들러 리스트 (Schindler's List.1993) 8.9

슐츠105 2013. 1. 20. 00:40

드라마, 전쟁  미국 192분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출연 리암 니슨(오스카 쉰들러), 벤 킹슬리(잇자크 스턴), 레이프 파인즈(아몬 괴트)
 

줄거리

{1939년 9월 독일은 침공 2주만에 폴란드 군을 대파했다. 유태인에게는 가족 번호(Family Members)를 등록하고 매일 만명 이상의 유태인이 지방에서 크라코프(Krakow)에 도착했다.}
  독일군 점령지인 폴란드의 크라코우. 기회주의자인 오스카 쉰들러(Oskar Schindler: 리암 니슨 분)는 폴란드계 유태인이 경영하는 그릇 공장을 인수하러 도착한다. 그 공장을 인수하기 위해 나찌 당원이 되어 SS요원들에게 여자, 술, 담배등을 뇌물로 바치며 갖은 수단을 동원하게 된다. 인건비 한푼 안들이고 유태인을 이용하면서 한편으로는 유태인 회계사인 스턴(Itzhak Stern: 벤 킹슬리 분)과 가까워지게 된다. 스턴은 쉰들러의 이기주의와 양심을 흔들어 놓게 된다. 그것은 나찌의 살인 행위로 쉰들러는 자신의 눈을 통해 현실을 직시하개 된다.
  그러한 쉰들러의 현실 직시는 마침내 그의 양심을 움직이고 유태인을 강제 노동 수용소로부터 구해내기로 결심하게 된다. 문제는 이들 일명 ‘쉰들러의 유태인들’을 어떻게 구해낼 것인가였는데 노동수용소 장교에게 뇌물을 주고 구해내기로 계획을 잡는다. 그리고는 그들을 독일군 점령지인 크라코우로부터 탈출시켜 쉰들러의 고향으로 옮길 계획을 하고, 스턴과 함께 유태인 명단을 만들게 된다. 그러한 모든 계획은 완벽하게 이루어지고 마침내 1,100명의 유태인을 폴란드로부터 구해내게 된다.
  1945년 전쟁이 종식되고 러시아 군대가 동유럽을 자유화시켰을때 연합군으로부터 잡히지않기 위하여 공장 주변의 나찌 당원들을 집으로 돌아가도록 종용하면서 자신도 연합군으로부터 멀어진다. 마지막으로 쉰들러가 연합군으로부터 도망을 가기전, 자신이 살아있다는 안도감보다는 죄책감과 후회에 시달리게 된다. “왜 나는 더 많은 유태인들을 구해내지 못하였는가?”

 

 

 

 

 

 

 

 

 

오스카 쉰들러

 

 

 

Oskar Schindler (1908년 4월 28일 - 1974년 10월 9일)


1 개요
나치 독일의 사업가. 영화 쉰들러 리스트로 유명하다. 외래어 표기법에 맞는 표기는 '오스카어 신들러'.


생전에 오스카 쉰들러는 술과 파티를 좋아하는 쾌락주의자로 방탕한 성향이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결혼을 여러 번 했고 정부와 애인을 여러 명 두었다.

2 생애
쉰들러는 1908년 4월 28일,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였으며 현재는 체코에 속하는 스비타비(Svitavy) 지방에서 태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 스비타비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가 되었으나, 쉰들러 일가는 16세기에 빈에서 모라비아로 이주한 독일/오스트리아 계였기 때문에 그는 자신을 독일인으로 여기고 있었다.


1935년 쉰들러는 주데텐 독일인 당(Sudetendeutsche Partei)에 들어갔다. 이는 체코슬로바키아 내의 독일계 민족주의 조직이었다. 이 당에서 활동하면서 쉰들러는 독일 국방분 첩보부와 접촉하여 스파이가 되었고, 체코슬로바키아의 철도 정보를 독일 측에 누설했다. 이 혐의로 체코 당국에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뮌헨 협정이 벌어져서 형벌은 중지되었다.


1939년 2월 10일, 나치당에 자원 입당 하였으며 나치가 폴란드를 침공하자 한 밑천 챙겨보려는 생각으로 독일의 점령 아래 놓여진 폴란드로 간다.


1939년 10월, 쉰들러는 나치로부터 법랑 용기를 만들고 있던 유태인 소유의 공장을 불하받았다. 이 공장은 점점 확대되어 45,000m²부지에 800명 이상의 노동자가 일하는 거대한 군수 공장이 되었다.

 

이 때부터 쉰들러는 나치당 친위대 슈츠슈타펠로부터 유태인 노동자를 공급받았다. 말하자면 강제노동의 일환으로 수용소에 간 유태인들을 공장으로 데려온 것이다.


하지만 부패한 기업가(?) 였던 쉰들러는 이 특권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어린이나 여성, 대학생들을 '숙련된 금속공'으로 속여서 자신의 공장에 노동자로 데려와 보호하는 조치를 은밀히 취했다.

 

쉰들러의 활동은 초기에는 인간애보다는 탐욕스러운 모습이 강하게 있었다. 부패 기업가답게 돈 벌려고 수용소에 갇힌 유태인들을 노동자로 끌어들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는 노동자로 일하게 된 유태인들을 인간적으로 대우해주었고, 점점 더 돈을 버는 것보다는 유태인들의 생명을 구하는 것에 더 중심을 두고 활동하게 되었다.

 

이 때, 암시장을 이용해서 물자를 조달하거나 유태인을 우대하여 뉘른베르크 법을 위반한 혐의 등으로 게슈타포에게 조사를 받았다. 하지만 이 때 쉰들러는 돈, 보석, 예술작품 등을 뇌물로 써서 조사에서 빠져나왔다. 쉰들러는 뇌물로 바친 것들을 장부에 꼼꼼히 정리해두었는데 악명높은 게슈타포를 매수해야 하는 만큼 어마어마한 액수의 뇌물과 선물로 게슈타포와 친위대를 구워삶았다.


1944년, 소련군의 침공으로 동쪽의 수용소가 해체되자 많은 유태인들이 아우슈비츠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 때 쉰들러는 약 1,200명의 유태인 노동자의 리스트를 작성하고, 자신의 고향인 스비타비 지방에 군수공장을 세우고 이들을 이곳으로 모두 빼돌린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재산을 탕진하면서까지 약 7개월간 그들을 보호했다.

3 전후
전후 쉰들러는 몇 가지 사업을 시작했지만 파산하였다.


1993년 이스라엘 야드바셈에서 오스카 쉰들러와 에밀리 쉰들러에게 '세계의 의인'이라는 칭호를 부여했고, 이에 앞선 1962년에 쉰들러의 이름을 딴 나무가 야드바셈 내 의인의 거리에 자리잡았다. 쉰들러는 1974년 숨을 거두었고, 시신은 예루살렘 기독교 묘지에 안장되었다. 박해 받는 1200명의 유대인들의 잊을 수 없는 생명의 은인이라는 비문은 쉰들러의 인생을 가장 간결하게 전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쉰들러를 추모하는 유대인들이 그의 묘지를 참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