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개/2차대전 홀로코스트

피아니스트 (The Pianist, 2002) 8.5

슐츠105 2013. 1. 20. 01:44

전쟁, 드라마 | 독일, 프랑스, 영국, 폴란드 | 148 분 |

감독 로만 폴란스키

출연 애드리언 브로디 (블라디슬로 스필만 역), 토마스 크레슈만 (윌름 호센펠드 장교 역), 프랭크 핀레이 (아버지 역), 모린 립맨 (어머니 역)


75회 아카데미시상식(2003) 수상남우주연상(애드리언 브로디), 감독상(로만 폴란스키), 각색상(로날드 하우드)
후보작품상, 촬영상(파웰 에델만)


60회 골든글로브시상식(2003) 후보작품상 - 드라마, 남우주연상 - 드라마(애드리언 브로디)

55회 칸영화제(2002) 수상황금종려상(로만 폴란스키)

 

줄거리

전쟁의 포화도 그의 선율은 앗아가지 못했다

2차 세계대전, 그것은 인류 존엄에 대한 싸움의 시작이었다!

 

1939년 폴란드 바르샤바. 유명한 유대계 피아니스트 블라디슬로프 스필만은 한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쇼팽의 야상곡을 연주한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의 불길이 한창 타올랐던 바로 그때, 스필만이 연주하던 라디오 방송국이 폭격을 당한다. 유대인 강제 거주지역인 게토에서 생활하던 스필만과 가족들은 얼마 가지 않아 나치 세력이 확장되자 죽음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싣게된다.

기차에 오르려는 찰라, 유명한 피아니스트 스필만을 알아본 군인들은 그를 제지한다. 가족을 죽음으로 내보내고 간신히 목숨만을 구한 스필만. 몇몇 사람들의 도움으로 나치들의 눈을 피해 숨어 다니며, 폭격으로 폐허가 된 어느 건물에 자신의 은신처를 만들게 된다.

전쟁과 평화, 동지와 적군의 경계를 순식간에 무너뜨릴 선율이 울려퍼지다!

허기와 추위, 고독과 공포 속에서 마지막까지 생존을 지켜나가던 스필만. 나치의 세력이 확장될수록 자신을 도와주던 몇몇의 사람마저 떠나자 완전히 혼자가 되어 자신만의 은신처에서 끈질기게 생존을 유지한다.

어둠과 추위로 가득한 폐건물 속에서 먹을 거라곤 오래된 통조림 몇 개뿐인 은신생활 중, 스필만은 우연찮게 순찰을 돌던 독일 장교에게 발각되고 만다. 한눈에 유태인 도망자임을 눈치챈 독일 장교. 스필만에게 신분을 대라고 요구하자 스필만은 자신이 피아니스트였다고 말한다. 한동안의 침묵속에 스필만에게 연주를 명령하는 독일 장교. 어쩌면 지상에서의 마지막 연주가 될 지도 모르는 그 순간, 스필만은 온 영혼을 손끝에 실어 연주를 시작하는데...


제작노트
<피아니스트>는 거대한 스케일과 완벽한 역사현장의 재현을 자랑하는, 근래 보기 드문 작품이다. 2차 세계대전이라는 인류역사상 거대했던 전쟁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독일, 폴란드, 영국 등 전 유럽대륙의 노련한 노하우와 장인정신이 완성시킨 대서사시이다. 총 제작비 3천5백만달러(약 420억원), 1천명이 넘는 스텝과 연기자, 그리고 엄청난 크기의 촬영세트가 이 영화를 위해 준비되었다. <쉰들러 리스트>로 오스카를 수상한 세계적 프로덕션 디자이너 알란 스타스키는 수개월의 사전조사와 준비를 통해 1930~40년대의 유럽을 21세기에 다시 세웠다. 그러나 <피아니스트>가 단지 대작 영화의 장점만을 지녔다면 유사한 다른 영화가 주는 오락적 재미만을 선사했을지 모른다. 이 영화는 CG나 얄팍한 영상스타일을 배제하였다. 감독 폴란스키는 거짓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영화가 아닌, 제작부터 진솔한 인간의 땀을 사용함으로써 강요된 감동이 아닌,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격정적인 눈물을 이끌어내고자 했고 그것은 성공했다.

완벽주의자로 유명한 폴란스키 감독은 주연 배우를 찾기 위해 유럽에서 미국까지 샅샅이 다녔다. 그는 스필만과 외모적인 흡사함이 아닌 이미지의 일체를 가져다주는 배우를 원했다. 영국에서의 대규모 오디션도 폴란스키에게 만족스런 배우를 가져다주지 못했으나 미국까지 배우영역을 확장시킨 폴란스키는 마침내 애드리언 브로디를 발견하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빵과 장미><씬 레드 라인>에서 연기력을 펼친 브로디는 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전시의 공포에서 살아남는 폴란드 예술가 스필만의 감정을 세심하게 연기해내었다. 한편, 폴란스키는 주연뿐만 아니라 잠깐 스치는 보조연기자에도 완벽함을 원했다. 그는 반세기 전 폴란드, 유대인, 독일인들의 느낌을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보조연기자들을 수 천명의 인터뷰와 사진촬영 등을 통해 캐스팅하였다. 특히 독일나치군을 연기한 배우들은 감독조차 다시 한번 유년시절의 공포를 경험하게 할만큼 섬뜩한 분위기를 던져내었다.

 

 

 

 

 

 

 

 

 

 

 

 

 

 

 

 

게토 - 홀로코스트 백과사전 발췌

 

1516년, 베니스 시당국은 시내에 유태인이 거주하도록 마을을 건설하였는데, “게토”라는 이름은 이 유태인 마을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16세기와 17세기 지방정부로부터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 찰스 5세(Charles V)에 이르기까지 많은 정부가 프랑크푸르트, 로마, 프라하에 이르는 많은 도시들에 이러한 유태인 마을의 설립을 명하였다.

 

 

독일어와 라트비아어로 된 표지판. 담장을 넘거나 리가 게토 지역 주민과 접촉하는 자는 총살될 것이라고 적혀있다. 라트비아, 리가, 1941-1943.

 

제2차 세계 대전 동안의 게토란 도시 내 (제한된) 구역으로서 독일인들은 유태인들을 이 곳의 비참한 환경에서 살게 하였다. 게토는 유태인을 전체 사회의 비 유태인 주민뿐만 아니라 다른 유태인 지역 사회로부터도 분리하였다. 독일은 폴란드 내의 독일 부속 지역과 소련 내에만 적어도 1,000여 곳의 게토를 설립하였다. 독일 점령총독부는 1939년 10월에 피요트루크 트리부날스키에 폴란드내 첫게토를 설립하였다.

독일은 게토의 설립을 통하여 유태인들을 일시적으로 분리, 통치하고 궁극적으로는 베를린의 나치 정권이 유태인을 말살하고자 하는 계획을 실현하고자 했다. 그러므로 많은 게토들은 단지 일시적으로만 존재했을 뿐이었다. 어떤 게토는 실제로 단지 며칠 동안만 존재하였고 다른 게토들도 수개월에서 수년 동안만 존재하였다. 1941년 말, “최종 해결(유럽 내의 모든 유태인을 살해하고자 하는 계획)”이 실행에 옮겨지자 독일은 게토를 체계적으로 폐쇄하기 시작했다. 독일과 그 부속국들은 게토의 주민들을 인근 공동묘지로 끌고 가서 총살하거나 주로 기차를 이용하여 대량 학살 수용소로 이송하여 살해하였다. 독일 SS와 경찰 당국은 소수의 게토 유태인들을 강제 노동 수용소나 집단 수용소로 끌고 갔다.

게토에는 출입 제한 게토, 출입 허가 게토 그리고 파괴적 게토의 세 가지 종류가 있었다.

 

폴란드에서 가장 대규모의 게토는 바르샤바 게토였는데 여기에는 약 40만명 이상의 유태인들이 약 1.3 평방 마일의 넓이에 모여 살고 있었다. 다른 주요 게토들은 로츠, 크라쿠프, 비알리스토크, 르보브, 루블린, 빌나, 코프노, 체스토코바 및 민스크 등의 도시에 설립되어 있었다. 수만 명의 서유럽 유태인들 역시 동부의 게토로 강제 이송되었다.

독일은 게토 내의 유태인들에게 신분을 나타내는 배지와 완장을 차도록 규정하였고 많은 유태인들은 독일 제국을 위한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다. 게토에서의 일상 생활은 나치가 선임한 유태인 의회(Judenraete)에 의하여 통제되었다. 게토의 경찰력은 유태인들을 집단 학살 수용소로 이동시키는 것을 비롯한 독일 당국과 유태인 의회의 명령을 수행하였다. 유태인 의회 위원과 같은 유태인 경찰은 수시로 변하는 독일 당국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왜냐하면 독일은 이러한 독일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지 않는 유태인 경찰 죽이기를 서슴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태인들은 여러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게토의 제한 규칙에 저항하였다. 게토의 주민들은 소위 말하는 불법 활동에 자주 연루되었다. 이때 불법 활동이란 음식물이나 약품, 무기나 정보 등을 유태인 의회의 승인 없이 또는 의회 몰래 밀반입하는 것들을 의미하였다. 게토의 주민이 생존하려면 이와 같은 생필품의 밀반입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일부 유태인 의회와 의회 의원들은 이를 눈감아 주거나 은밀히 격려하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독일은 유태인들의 종교적 행사에 대하여 큰 우려를 나타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게토 내에서 이루어 지는 문화 행사나 청년단 활동 조차도 종종 “보안을 위협”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 어떤 사회적 회합이나 그러한 시도 자체도 감금으로 연결되거나 회합 지도자와 참여자들의 살해로 이어졌다. 독일은 일반적으로 어떤 형태의 학교나 지속적 교육도 허가하지 않았다.

일부 게토에서는 유태인 레지스탕스 단원들이 무장 봉기를 계획하기도 하였다. 이중 가장 대규모의 봉기는 1943년 봄에 이루어진 바르샤바 게토의 봉기였다. 이는 빌나, 비알리스토크 그리고 체트토코바와 다른 소규모 게토들의 유혈 봉기로 연결되었다. 1944년 8월, 독일 SS와 경찰은 로츠에 있었던 마지막 대규모 게토를 완전히 파괴하였다.

 

헝가리에서는 1944년, 독일이 헝가리를 침공하고 점령하기 전까지는 게토 수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3개월 이내에 헝가리 헌병대는 독일의 제국 치안 본부(Reichssicherheitshauptamt-RSHA)에서 파견된 추방 전문가들과 연합하여 약 44만명에 가까운 유태인들을 부다페스트를 제외한 헝가리 전역에서 단기간의 “파괴적 게토”로 이동시킨 후, 헝거리 국경의 독일 검문소로 수송하였다. 독일군은 이러한 대부분의 헝가리 유태인들을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집단 학살 수용소로 보냈다. 부다페스트에서 헝가리 당국은 유태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신분을 나타내는 집(소위 말하는 다윗 왕의 별이 붙은 집)에 살도록 하였다. 1944년 10월 15일, 독일이 지원하는 파시스트 지도자 애로우 크로스(Arrow Cross) 운동이 집권한 수주 후, 애로우 크로스 정부는 부다페스트에 정식 게토를 설립하여 6만3천여명의 유태인들을 0.1 평방 마일의 지역에 모여 살도록 명령하였다. 당시 중립국 권력의 보호 아래 있다는 증명서를 지닌 약 2만5천명의 유태인들은 도시의 다른 지역에 있는 “국제 게토”에 모여 살게 되었다. 1945년 1월, 소련이 부다페스트로 진입하면서 이 두 게토를 해방하여 거기에 살고 있던 9만명에 가까운 유태인도 동시에 해방되었다.

 

홀로코스트 기간 중에 게토는 나치가 유태인을 통치하고 그 존엄성을 짓밟고 대량 학살을 자행하는 과정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다.

 

점령된 폴란드 내의 게토, 1939년-1941년

 

 

1939년 가을, 독일은 폴란드 서부를 점령하였다. 이 지역의 대부분은 독일 제3제국에 합병되었다. 동부 폴란드는 1941년 6월까지 독일에 점령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었다. 독일은 폴란드 중남부 지역에 중앙 정부(Generalgouvernement)를 세웠는데 대부분의 게토도 역시 이 지역에 세워졌다. 게토란 도시의 제한된 구역으로서 독일인들은 유태인들을 여기의 비참한 환경에서 살게 하였다. 게토는 유태인을 전체 사회뿐 아니라 주변 유태인 지역 사회로부터도 고립시켰다. 1940년 10월 12일에 설립된 바르샤바 게토는 영역 및 인구 면에서 모두 최대 규모의 게토였다. 거기에는 350,000명 이상의 유태인들이 있었는데, 이는 도시 전체 인구의 약 30퍼센트에 해당되는 인구로서 도시 전체 면적의 2.4퍼센트에 해당하는 지역에 밀집해 사는 셈이었다.

— US Holocaust Memorial Museum

 

 

빌름 호젠펠트 ---> http://fun.jjang0u.com/chalkadak/view?db=280&no=45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