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개/2차대전 기타

카틴 (katyn, 2009) 7.0

슐츠105 2013. 1. 20. 01:26

전쟁, 드라마 | 폴란드 | 122 분 |  

감독 안제이 바이다

출연 안드셰이 히라 (Lt. 예르지 역), 마야 오스타셰브스카 (안나 역), 아르투르 즈미예브스키 (안드셰이 역), 다누타 스텐카 (로자 역)

 

줄거리
<카틴>은 2차 세계대전 중 카틴 숲에서 살해당한 폴란드 장교들과 그 사실을 모른 채 남편과 아버지, 아들과 형제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가족들에 관한 이야기다. <카틴>은 또한 기억과 진실에 대한 불굴의 사투에 관한 영화이며, 소련공산당이 자신들이 자행한 학살을 강제로 묻으려 했던 거짓말에 대한 단호한 평가이다.
2차 세계대전 초기 1939년 9월 17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 직후 소련 적군 또한 스탈린의 명령에 의해 폴란드 땅을 침입한다. 그 결과, 모든 폴란드 장교들은 소비에트 수용소에 억류되었다. 창기병 연대장의 아내 안나는 그의 남편 안제이을 기다린다. 그녀는 비록 부정하고 있지만 카틴 숲에서 폴란드 군인들의 시체 무더기들이 발견된 후 어쩔 수 없이 소련군들이 그의 남편을 죽였다는 사실과 대면하게 된다. 조종사의 여동생 아그네쉬카 역시 그와 같은 운명에 처하고 범죄에 대한 침묵과 거짓말에 의해 비탄에 잠긴다. 그리고 연대장의 친구 예르지만이 유일한 생존자로 남겨진다. <카틴>은 폴란드 대통령 레흐 카친스키와 부인 마리아 카친스키의 후원 아래 만들어졌다.


제작노트
역사적 트라우마는 어디에나 있는 모양이다. 한국에서 5.18 광주항쟁이 그랬듯이 폴란드에도 집단학살극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번 영화를 통해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1940년 카틴 숲에서 벌어진 볼셰비키에 의한 대학살은 아마 우리에게 그랬듯이 오랫동안 폴란드인들에게도 '역사적 트라우마'였던 모양이다. 아직도 이런 '역사물'이 그래도 EU회원국인 폴란드에서 만들어지는가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지만 1990년에야 비로소 본격적으로 '역사적 실체'가 밝혀졌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다지 이른 것도 늦은 것도 아닐 수 있다. 영화는 안제이 바이다가 직접 밝혔듯이 '사건' 보다는 이를 둘러싼 역사적 맥락과 주변사람들이 한없이 기다려야 하는 비극적 상황들에 우선 주목하고 있다. 감독의 가족사적 배경이 주요한 모티브 중 하나라고 고백하고 있듯이 '카틴' 숲에서의 그날의 비극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고 아직도 말하기 힘든 어떤 '사건'임을 느낄 수 있다. 다소 장황하게 진행되는 주변 정황들은 마지막의 충격적인 '종말적 파국'들에 비추어보자면 충분히 감내하면서 지켜보아야 할 필요가 있으며, 또한 그것이 쉬이 말해지지 못하는 원인을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들을 생각하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기술적 측면에서도 이 영화는 유럽최초로 4K로 제작된 첫 영화이며 아카데미 외국어상에 노미네이트될 만큼 폴란드 국내에서도 사람들의 응어리진 마음을 푸는 '살풀이' 구실을 했었다. <대리석의 사나이>(77), <카날>(57)등으로 이미 거장이 된 안제이 바이다의 반가운 신작이다. (박부식, 영화평론가)

 

 

 

 

 

 

 

 

 

 

 

 

 

카틴 숲 대학살

카틴 숲의 대학살(폴란드어: zbrodnia katyńska, 러시아어: Катынский расстрел)은 소비에트 연방 스몰렌스크 근처 그네즈도보(Gnezdovo) 마을 부근의 숲에서 소련 내무인민위원회가 폴란드군 장교, 지식인, 예술가, 노동자, 성직자 등 2만 2천명에서 2만 5천여 명을 재판 없이 살해하고 암매장한 사건이다. 카틴(Katyń) 숲은 이 사건이 있었던 장소에서 가까운 마을의 이름으로 당시 나치 독일이 대내외 선전용으로 붙인 이름이다.

 

 

 

카틴 전쟁기념관 정문

 

사건의 발단1939년 9월 나치 독일과 소비에트 연방의 양쪽에서 침공을 당한 폴란드는 패배하여 많은 폴란드인이 전쟁포로가 됐다. 1940년 4월 13일 독일 국방군은 러시아의 스몰렌스크 근교에 있는 카틴 근처의 숲에서 총살된 뒤 집단매장된 4,100여 구의 시신을 발견했다. 나치 독일은 조사를 시작해 총 22,000명 이상의 폴란드군 장교, 경찰관, 공무원, 지역유지 등의 매장된 유체를 발굴했다.

 

 

 

 

 

소련은 1941년 가을에 자행된 독일군의 만행이라고 우겼으나, 독일측의 조사로 소련측이 행한 대량 학살임이 입증됐다. 독일 측은 소련이 그들을 재판 없이 대량학살했다며 선전했다. 연합국 측에서는 암호 해독의 거점이었던 블레츨리 파크에서 추축국의 무선통신을 해독했기 때문에 나치 독일이 커다란 묘의 구멍과 그것을 발견한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1944년 구 소련은 카틴 숲을 재조사하여 시체를 다시 발굴했다. 같은 해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카틴 숲 사건의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조지 알 대위를 밀사로써 발칸반도로 보냈다. 알은 추축국 측의 불가리아, 루마니아와 접촉해 이 사건을 소비에트 연방이 진행했다고 결론지었으나, 루즈벨트 대통령은 나치 독일이 이 사건을 저질렀다고 굳게 확신하여 이 결론을 거부했다. 알은 자신의 조사를 공표할 수 있게 허가해달라고 공식적으로 요구했으나,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를 금지했으며 알의 보고를 기밀에 붙였다. 이후 알은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전될 때까지 사모아에서 보냈다.

 

냉전 시기의 논쟁

제2차 세계 대전 후 폴란드 공산당의 간부들은 이 사건에 대해 독일이 자행한 것이라면서 소련의 압력을 고려해 진상을 규명하지 않았다. 이는 1989년 폴란드의 공산주의 정권이 붕괴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1946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소련의 검찰관은 카틴 숲 대학살에 대해서 독일을 고발했다. 그는 "무엇보다 중요한 전쟁범죄 중 하나가 독일의 파시스트에 의해 폴란드인 포로가 대량 학살된 것이다." 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미국과 영국은 이 문제를 취급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결국 카틴 숲의 학살은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언급되지 않았다.

이 사건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에 대해서 첨예하게 대립했다. 1952년 미국 의회에서는 카틴 숲 사건이 1939년 내무인민위원회에 의해 계획되어 실행되었다고 인정하였다. 1970년대 후반 영국은 희생자을 위한 기념비를 건립할 것을 계획했으나, 당시 냉전 중 소련 정부를 자극한다고 하여 비난받았다.

 

진실 공개

1989년 소비에트 연방의 학자들은 이오시프 스탈린이 대학살을 명령하고, 당시 내무인민위원장이었던 라브렌티 베리야 등이 명령서에 서명한 것을 밝혀냈다. 1990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은 매장이 이루어진것으로 보이는 메드노에(Mednoe)와 퍄치하키(Pyatikhatki)를 합해, 내무인민위원회가 폴란드인을 살해한 것을 인정했다. 1992년 소비에트 연방 붕괴 후 러시아 정부는 최고기밀문서의 제 1호을 공개했다. 그 중에는 서쪽의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의 현지인 및 각 야영지에 있는 폴란드인 25,700명을 사살하라는 스탈린 및 베리야 등 소련 중요 권력자의 서명이 들어있는 계획서 및 소련 정치국이 제출한 1940년 3월 5일 사살 명령문과 21,857명의 폴란드인을 살해하라는 명령이 실행되었고 피해자의 개인 자료를 폐기하였다는 니키타 흐루쇼프의 문서도 포함되어 있다.

 

러시아-폴란드의 외교 마찰

러시아는 이 사건에 소련군이 개입한 사실은 인정하고 있으나, 국가적 책임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러시아 군법원은 2005년 1월 11일에 이 사건이 유엔이 규정한 집단 학살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결정했다.
폴란드 국가 기념연구소(IPN)의 레온 키에레스 소장은 러시아 군법원의 결정에 "놀랄 일도 아니며 러시아는 해당 범죄에 대해 깊이 생각한 적이 없다"고 비난한다.
러시아 당국은 카틴 사건 관련 문건 183건 가운데 67건만을 폴란드 정부에 제공하겠다고 밝혔을 뿐, 116건은 기밀을 이유로 밝히지 않았다.

 

 

영화화

2007년 폴란드의 영화감독 안제이 바이다(Andrzej Wajda)에 의하여, 이 사건을 제재로 한 영화 《카틴》이 제작됐다. 바이다의 부친도 이 사건의 희생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