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개/1차대전

파스샹달 (Passchendaele, 2008) 6.6

슐츠105 2013. 1. 20. 12:18

전쟁, 드라마 | 캐나다 | 114 분
감독 폴 그로스
출연 폴 그로스, 캐롤라인 다버나스, 조 디니콜, 길 벨로우스

 

 

 

 

 

 

 

 

 

 

 

 

 

 

 

 

 

파스샹달 전투

 

 

물에잠긴 참호에서 대기중인 독일 기관총팀

파스샹달(Passchendaele)전투는 제3차 이프르 전투의 다른 이름이다.


3차 이프르 전투가 파스샹달 전투라 불리게 된 이유는 1917년 11월 6일, 이 대규모 전투에서 영국군이 엄청난 피해를 입어가며 수차례의 시도끝에 점령한 고지가 파스샹달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엄청난 사상자를 낸 이 3차 이프르 전투는 이전의 1,2 차 이프르전투와는 다르게 영국군의 대규모 공세로 이루어진 전투였다.

 

연합국들은 1917년에 이르러서 무차별 잠수함전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게되고 영국군 총사령관 헤이그는 플랑드르 일대에서 공세를 감행하기고 하고 최종목표를 벨기에 해안의 독일군 잠수함 기지들로 정하게 된다. 그러나 헤이그가 결정적으로 이 작전을 계획하게 된 원인은 지난 6월 메시느(Messines)전투의 작은 승리로 독일군이 무너지고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속에서 헤이그장군은 로이드 조지 총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작전을 감행하기로 결정한다.

헤이그는 이 전투역시 이전과 같이 전통적인 대규모 공세로 수행키로 하고 고프(Gough)장군의 제5야전군을 주력으로 하며 플러머(Plumer)장군이 이끌던 제2야전군의 1개군단으로 하여금 주공의 우측을 담당하게 하고 안토인느(Anthoine)장군이 이끌던 프랑스 1군의 한개 군단은 좌측을 담당하게 한다음 최초 12개 사단으로 공격을 준비하게 된다.

전투에 앞서 영국군은 7월22일 부터 7월 31일 3시 50분까지 999여문의 중포를 포함한 3091문이 넘는 포로 이프르 동쪽의 18km에 425만이 넘는 포탄을 퍼붓게 된다. 그후 헤이그는 맹렬히 비가 오는 가운데 12개 사단으로 11마일에 걸친 전선에서 총공격을 감행한다.

당시 그일대는 아르님(Arnim)장군의 독일군 제4야전군과 프랑스 제1야전군과 대치하고 있던 골비츠(Gallwitz)장군의 독일군 제5야전군이 담당하고 있었는데 영국군은 공격방면 서쪽의 빅스쇼떼(Bixschotte), 쌩줄리안(St Julien)과 필크켐(Pilckem) 능선등을 탈취했으나 프랑스군은 독일군 제5군야전군에 의해 공격이 저지당하고 독일군 제4야전군은 영국군을 메닌도로에서 저지한다.

또한 당시 계속해서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영국군의 대규모 포격으로 인해 독일군 참호라인의 배수시설이 파괴 되었고 저지대에 위치한 지역의 특성에 따라 영국군이 점령한 일부 참호라인도 물에 잠기게 되는 상황에 빠지게 된다. 이로인해 참호속에서 익사자가 발생하고 곳곳에 생긴 수렁과 진흙지대로 인해 영국군의 탱크들은 더이상 기동할수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고프장군은 총사령부에 더이상의 작전이 불가능하다고 보고하나 영국군 총사령관인 헤이그장군은 이를 거부하고 공세를 계속 할 것을 명령한다.

결국 고프장군은 작전의 중단을 포기한후 헤이그의 명령에 따라 8월 16일 그의 제5야전군을 총 동원하여 메닌도로의 돌파를 시도하나 4일에 걸친 이 치열한 전투에서 제5야전군은 엄청난 피해만 입고 독일방어라인 돌파에 실패하게 된다 이에 따라 헤이그는 제2야전군을 투입하게 되고 새로운 공세를 준비한다.

 

 

전사한 독일군 시체를 바라보는 영국군 병사들

한편 새롭게 전투의 주력이 된 제2야전군 사령관 플러머 장군은 엄청난 규모의 포병을 지원받아 포병으로 하여금 보병의 진격로를 초토화 시키는 전술을 활용하기로 하고 9월 20일 아침 메닌도로 양쪽 방면에 대규모 공세를 시작한다. 당시 이 공세를 위해 영국 제2야전군은 575문의 중포를 포함한 1295문의 포를 4마일의 전선에 집결시켰는데 플럼버는 12야드당 한문의 포를 배치하였다.

이전 작전들에서 보여준 전형적인 수일간 계속되는 준비포격이 아닌 보병의 공세전 몇시간동안의 집중적인 포격을 퍼부은 다음 마침내 새벽5시 40분에 영국군은 6개의 보병사단을 전진시킨다. 이 기습작전은 성공적이어서 6시15분쯤 첫 목표지점을 함락하고 정오가 되었을때 미리 계획했던 목표지점을 함락하게 된다.

9월26일 그리고 10월4일에는 제2야전군의 4개 안작사단을 포함한 8개 사단과 좌측방면에 제5야전군의 4개 사단이 이프르 동쪽에 총공격을 감행하여 겔루벨(Gheluvelt), 폴리곤숲(Polygon Wood), 브루드셍(Broodseinde)등을 함락시킨다.

 

휴식중인 영국군들

일련의 성공적인 공세로 독일군이 크게 지친것을 알게된 헤이그는 이프르로 부터 10Km떨어진 파스샹달(Passchendale)고지에 대해 공격을 하도록 지시했다. 10월 9일과 10월 12일에 포엘카페(Poelcappe)와 파스샹달에 대해 공격을 했으나 저지대의 진흙탕들로 인해 고전하고 독일군이 영국군을 향해 겨자가스를 동원해 반격해 오는 바람에 공격을 시작했던 전선으로 도로 퇴각하고 말았다.

그러나 헤이그는 파스샹달 방면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10월22일 제5야전군과 프랑스군에게 공격을 하게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26일엔 캐나다사단을 동원하여 제2야전군과 함께 공격시켰으나 역시 실패하였고 30일에 다시 공격을 하게 하였으나 300야드를 남겨두고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독일군은 높은 지형을 이용해 완강히 저항했고 무엇보다도 겨자가스 공격이 영국군을 마비시키는 바람에 계속 실패한 것이다.

점령한 독일군 벙커를 조사중인 캐나다군

아무튼 11월4일 제5야전군의 제1사단과 캐나다 제2사단이 기습공격을 하여 마침내 파스샹달을 함락시킴으로시키는데 성공한다. 너무나도 많은 피해를 입은 영국군은 더이상의 작전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짓고 제3차 이프레 전투가 끝이 나게 되는데 영국군은 이 전투에서 31만명이 넘는 인명피해를 입었고 독일군도 이보다 약간 적은 피해를 입게 된다.

파스샹달전투에선 많은 연합국 병사들이 변덕스럽고 습한 날씨에 고생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때 입기 시작한 연합군의 트렌치 코트가 후에 바바리코트라 알려진 코트의 기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