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개/2차대전 동부전선

브레스트 요새 (The Brest Fortress, 2010)

슐츠105 2013. 1. 20. 16:37

액션, 드라마, 전쟁 | 벨로루시, 러시아 | 138 분 | 

감독 알렉산더 코트

출연 알렉세이 코파쇼프 (사쉬카 아키모프 역), 베로니카 니코노바 (아냐 키제바토바 역), 알렉산드르 코르슈노프 (페트르 가브릴로프 역), 예브게니 치가노프 (포체르니코프 대위 역)

 

줄거리

브레스트 요새는 1941년 6월 독일군의 갑작스런 침략 시 소비에트 연방군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한 채로 약 1개월 동안을 목숨을 걸고 사수하였던 요새다. 평화스러움으로 충만한 1941년 6월의 어느 날 갑작스런 독일군의 야습이 감행된다. 독소 불가침 조약을 믿고 아무런 대비도 없었던 소비에트 연방의 시민들은 삶의 터전이 하루 아침에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변하는 과정을 너무도 무기력하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어디로든 이 위급 사실을 알리고 싶어도 모든 통신망이 다 두절된 상태. 그러나 나름대로 독일군의 침공을 예상했었던 가브릴로프 소령은 전열을 정비하여 이에 결사적으로 대항을 하기 시작한다. 투항과 후퇴만이 정설이 되어 버린 현실 앞에서 오로지 군인 정신과 애국심 하나로 무장된 이 군대는 예상 밖의 힘을 발휘하며 독일군의 침공을 버텨 나가지만 우수한 무기와 병력으로 밀고 들어오는 독일군 앞에 수 많은 희생자를 내고 마는데…

 


 

 

 

 

 

 

 

 

 

 

 

 

 

 

브레스트 요새 벙어전

 

브레스트 요새 방어전은 1941년 6월 22일부터 29일까지 계속된 전투다. 이 전투는 바르바로사 작전의 첫 번째 전투였다. 브레스트 요새의 붉은 군대는 독일 국방군과 저항하고, 독일군 예상보다 오래 지속되어 제2차 세계 대전 중 소련군의 상징적인 전투이다. 이 요새는 1941년 전투 이후 1965년에 영웅 요새 칭호를 받았다.

 

 

                                                       브레스트 전투 당시 동부 전선

 

배경
브레스트 요새 지역은 원래 폴란드의 영토였으나, 1939년 소련-폴란드 전쟁과 폴란드 침공 중 브르제시치 리테브스키 전투 이후 독일군이 점령하게 되었다. 그러나,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 이후 브레스트 지역의 52%는 소련이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1941년 여름 동안 독일군은 소련의 요새를 다시 점령하게 되었다.

독일군은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중앙 집단군은 브레스트와 브레스트 요새를 점령할 계획이었다. 브레스트 도시와 요새의 부크 강을 도하할 뿐 아니라, 바르샤바-모스크바 철도와 고속도로를 통제할 계획이었다.

 

방어 병력

요새의 수비군은 내무인민위원회 직원을 포함해 9천명이 방어 병력으로 있었다. 소련군은 미하일 팝소니-사프코 대령 휘하의 제6 소총 사단과 이반 시도로브치 라자렌코 장군 휘하의 제42 차량화 소총 사단, 소련 국경군의 17 국경 방어군, 요새의 소규모 부대 (병원 수비대와 의료병)이 있었다. 그 뿐 아니라, 요새 내의 3백명의 군인 가족도 있었다.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초기 12시간이 허용되는 동안 방어 계획으로 정면에 독일 제45 보병 사단 (오스트리아 인) (17,000명) 뿐 아니라, 제31 사단, 제34 사단, 하인츠 구데리안 하의 제2 기갑군 등 총합 2만명의 군대가 있었다.

 

포위전

 

1941년 6월, 브레스트 요새의 모습. 1. 코브린 요새, 2. 볼란스코예 요새, 3.테레스폴 요새

 

요새는 1941년 6월 22일 독일 국방군이 침공하며 추축군과 소련군 사이의 최초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침공 몇 분 후, 브레스트와 브레스트 겉부분을 독일 국방군이 침공했다. 초기 포병의 포격으로 인해, 요새는 방어 준비가 되지 않은 채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브레스트 마을과 요새의 국경에서 치열한 전투가 치루어졌다. 포격 시작 30분 후, 독일군의 공격이 시작되었으며 소련 수비군은 방어를 하지 못하고 대신 요새의 거점을 지켰다. 일부는 요새를 탈출하나, 대부분은 포위된 독일군에 의해 갇혀 있었다. 이 큰 장점에도 불구하고, 독일 보병이 요새를 점령하려는 시도는 매우 높은 손실로 인해 지연되었고 첫날의 전투에서 281명의 독일군이 사망했다. 치열한 전투가 이틀간 계속되었다. 1941년 6월 24일 저녁, 368명의 독일군과 3-4천명의 소련군이 사망했다.

1941년 6월 25일 - 26일에는 주요 전투가 요새에서 지속되었다. 1941년 6월 26일 저녁까지, 북부 코브린 요새의 대부분과 동부 요새는 제외하고 나머지 요새는 점령되었다.

동부 요새의 전투가 지속되며, 제45 보병 사단의 지휘관인 장군 프리츠 스치리퍼의 보고서에 자세한 상황이 쓰여 있다.

"우리는 보병을 이용한 진격이 높은 조직의 소총대와 "포상"에서의 기관총 사격, 신발 모양의 뜰에서의 사격으로 불가능하다. 소련군이 항복하는 방법은 기아와 갈증으로 인한 굶주림밖에 없다. 우리는 그들을 소모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준비해야 한다... 스스로 항복하게 하는 시도는 실패했다...”

동부 요새의 보병의 점령이 실패하여, 독일 공군은 6월 29일 폭격하며 360명의 수비군에게 항복하라고 요구했다.

전투 시에 기습 공격은 실패했지만, 보급 부족, 수적 열세, 포위 등으로 인해 예상보다 많은 소련군이 사망했다. 독일은 150mm 네벨베르퍼 41 박격포, 화염 방사기 등 다양한 무기를 준비했다. 요새 내부의 민간인은 부상을 입으며, 탄피와 기관총의 디스크와 벨트를 재활용하고, 심지어는 요새 방어를 위해 라이플 총도 이용했다. 아이들은 반파된 보급 창고에서 탄약 및 식품을 가져가며 적에 움직임에 의해 많은 무기가 벼려졌다.

스치리퍼는 이에 대해 자세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81 전투 공병대는 섬 중앙의 건물을 폭파하는 작업을 내렸다 ... 섬 북부의 소련군의 측면을 공격하기 위해 군사를 재정비했다. 폭발물은 창문을 향해 지붕에서 폭파되었고, 그 다음 퓨즈가 켜졌다. 그것들이 폭발할 때, 소련군의 비명이 들렸지만 우리들은 전투를 계속했다.”

 

채플린 루돌프 구스타프의 노트:

"우리는 계속된 전투 결과 점차적으로 방어 위치가 옮겨지고 있다. 섬 중앙의 소위 "공무원의 집"의 수비군은 건물 내에만 방어중이다. 건물의 벽이 폭파되고 철거될 때 까지도 저항하고 있었다.”


6월 24일, 독일군은 요새의 일부분을 점령하고, 일부 소련군이 이반 주바치보프의 명령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알수 있었고, 이는 정치지도원 예핌 포민의 두 번째 명령이었다. 6월 26일 소련군 일부가 포위의 탈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그리고, 같은 날에 주바치보프와 포민이 포로가 되었다. 주바치보프는 헴멜부르크의 포로수용소에 옮겨지고 그 곳에서 사망하고 본국으로 옮겨지고, 포민은 코미사르 명령에 의해 즉결처형되었다.


R.구스타프의 노트:

“6월 30일에 브레스트를 포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7월 1일 아침에 우리는 전날 배치된 사단의 묘소에서 사망자를 기렸다... 1941년 7월 2일에는 사단의 주요 병력이 독립하며 브레스트에서 도망쳤다.”

 

제45사단의 요새 전투와 1941년 6월 30일의 브레스트 도시에 관한 보고서: "사단은 백명의 임원을 포함해 7천 명이었다. 독일은 32명의 임원을 포함하여 482명이 사망하고, 천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러한 사망자의 규모는 1941년 6월 30일까지 독일의 사망자가 8,886명이란 것으로 알 수 있다. 브레스트의 전투에만 독일군의 손실이 5%가 넘었다. 치열한 전투 9일 후 독일군은 요새를 완전 점령했다. 그러나, 전략적 목표인 판저제로바헨 I, 즉 모스크바로 직행하는 중요 철도 및 버그 강을 건너는 다리는 전쟁 첫 번째 날에 폭파되었다. 그 때문에, 1941년 22일부터 29일까지 높은 손실에 대해서 프리츠 스치리퍼가 독일 최고 사령부에게 자세한 보고서를 보낼 수 있었다. 그것은 7월 8일에 만들어졌다. 이 45사단의 사본은 1942년 3월 러시아 리브니에서 소련군이 발견했다.

일부 개별 병사와 소련군의 작은 그룹은 동부 요새 점령 후에도 숨어 있었다. 말일 동안, 나머지 수비군 중 일부가 비문을 남겼다. 그들 중 한명이 말했다:

"우리는 죽을 것이지만 요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난 죽을 것이만,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조국이여, 잘 가게. 20.VII.41(1941년 7월 20일)”


비문의 날짜는 신뢰성은 입증되지 않았다.

프요토르 가브리오프 장군에 의하면, 브레스트의 수비군 중 하나(나중에 소비에트 연방 영웅이 됨)는 7월 23일 포로가 되었다고 증언했다.

일부 주장에 따르면 고립된 수비군들은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8월 말에 중무장된 요새를 방문하여 남아있는 수비군에게서 보호하기 위해 왔다고 주장했다. 1941년 6월 29일 이후의 저항은 유일한 다큐멘터리가 증명하며, 1941년 7월 23일 소련군의 포로에 대한 보고서로 끝난다.

 

영웅 요새

 

 

                                                            브레스트 영웅 요새 기념비

 

요새의 수비군은 탄력적인 방어를 하며 독일 국방군을 방어했으나 빠른 속도로 소련 영토로 진군하며 초기 독일의 성공에 지장을 주지 않고, 요새를 포위하며 먼저 진격했다.

요새 방어전은 1957년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소련의 요새 방어전에 대해서는 1957년 세르게이 스미르노프가 발간한 "브레스트스카이아 크레포스트"로 처음 알려지고, 스미르노프는 소련 수비군의 후를 전투에서 사망한 사람들과 나치 수용소에서 사망한 사람들, 전쟁에서 남은 사람들로 조사했다.

스탈린 이후 시대에는 브레스트 방어군에 대해 재활하며 소련 신화의 선전으로 이용되었으며, 사전에 독일에 대한 협조가 포함되었다.

브레스트 요새 박물관은 1956년 개장하고, 브레스트 요새 국방 박물관은 1971년에 개장했다. 1965년 5월 8일에는 영웅 요새 칭호를 받았다 (독일 항복 20주년).

 

브레스트 전투에 대한 영화로 2010년 "The Brest Fortress"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