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개/2차대전 동부전선

스탈린그라드 (Stalingrad, 1993) 평점 7.5

슐츠105 2011. 10. 4. 15:36

 

전쟁, 드라마 | 독일 , 스웨덴 | 132분 |
 
감독 요셉 빌스마이어
출연 도미니크 호위츠, 토머스 크레취만, 조컨 니켈

 

줄거리

{1942년 늦은 여름, 2차 세계대전이 4년째에 접어들고 있었다. 히틀러의 군대가 전 유럽 뿐만 아니라, 북 아프리카까지 장악하고 있었고, 러시아에서는 2번째 대규모 공격이 진행 중이다. 목적은 카스피안 해안과 코카서스 산맥의 석유 광산이다. 형무소 부대는 파울루스 장군의 지휘 아래, 볼가강 유역의 도시로 진격 중이었다. 이제 세기의 가장 잔인한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바로 스탈린그라드에서...}

  1942년 늦은 가을, 러시아의 스탈린 그라드 전장으로 배치되 가는 화물 열차안에서 두 독일군이 내기를 한다. 한 사람은 명예를 존중하는 귀족 출신 장교 한스(Hans: 토마스 크레취만 분)이고 다른 한 사람은 일급 철십자 훈장을 위해서는 어떠한 위험도 감수하겠다는 거칠고 무모한 성격의 롤로이다. 이들은 '누가 살아 돌아올 것인가'의 내기를 하고 있었다.

  전선에 도달하자마자 한스와 롤로 그리고 제게(GeGe: 세바스찬 루돌프 분), 프릿츠(Fritz: 도미니끄 호로비츠 분) 등의 특공부대원들은 격렬한 포화로 인해 시야조차 보이지않는 전투라는 살육장으로 투입된다. 엄청난 희생을 강요하는 전투 중 한스 일행은 부상병을 치료했다는 이유로 헌병대에 체포돼 항명이라는 죄목으로 러시아 포로와 함께 지뢰제거반으로 끌려 가게 된다. 그곳에서는 성탄절 임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이 온통 굶주려 있었으며 살을 여미는 듯한 러시아의 혹한으로 인해 죽은 병사들의 시체는 뻣뻣한 목재처럼 길가에 쌀여있는 지옥과 같았는데.

 

 

 

 

 

 

 

 

 

 

 

 

 

 


 

 

 

 

<스탈린그라드 전투>

2차 세계대전 동부전선에서 발생한 199일간의 전투

 

스탈린그라드전투는 2차세계대전에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전투로 이 전투를 기점으로 독일군은 공세적인 팽창이 저지되면서 패전의 징후를 보이게된다.

 

흔히 사람들은 2차대전에서의 중요한 전투로 진주만기습, 미드웨이해전, 노르망디상륙작전을 든다.

하지만 막강하던 독일 국방군의 전력 대부분을 소진시킨것은 동부전선이었으며 특히 스탈린그라드전투에서의 소모는 당시 독일의 생산능력을 월등히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기원

스탈린그라드전투는 본래 청색작전의 일환으로 카프카스지역(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위치한 지역)을 점령하기위해 진격한 A방면군의 후방을 보호하기 위해 당시 상급대장이었던 파울루스 휘하 6군 27만의 병력을 볼가강변의 도시 스탈린그라드에 투입하였다. 이에 소련역시 츄이코프 중장이 62군 사령관으로 임명되면서 제2차세계대전 최악의 시가전이 발생하게 된다.

 

양군의 전술

 

*독일군

본래 독일군의 전술은 양익포위전술로 기갑부대의 빠른 기동성을 활용한 작전이었다. 하지만 스탈린그라드라는 도시는 후방은 볼가강에 인접해있는 도시로 포위가 힘든 도시였다. 더욱이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은 결사적인 사수를 스탈린으로부터 명받아서 목숨을 걸고 지키고 있었다. 이에 독일군이 행한 전술은 단순히 공군의 폭격 후 병력을 투입하는 것이었다.

 

*소련군

소련군은 독일의 군사적인 힘이 전차, 보병, 공병의 합동작전과 공군의 지상지원이라는 점에 착안해서 독일군과 간격을 최대한으로 좁힌 시가전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근접시가전을 껴안기 전술이라고 불렀다. 더욱이 각각의 건물을 요새화 했으며 볼가강변의 강둑에 카츄사로켓발사대를 배치하여 화력지원을 했다.

 

전투의 진행 (이부분은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양군은 엄청난 손실을 감수하면서 끊임없이 스탈린그라드에 병력을 밀어넣었다.

특히 소련의 병력투입은 경악을 넘어설 정도였다. 소련은 극동전선(일본과 대치하는 전선)에서도 병력을 차출했으며 스탈린그라드에 투입된 대대나 연대는 전투시 손실을 후방에서 보총하는 것이 아닌 그냥 사라지는 수준이기도 했다.

 

독일군은 도시내에서 소련군을 완전히 소탕하기위해선 소련군이 도시내로 진입할수있는 선착장을 파괴하는것이 효율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악착같이 선착장을 지키는 소련군에 의해 소련군의 지속적인 도강은 차단이 불가능했다.

 

한편 소련군 최고사령부의 주코프장군의 경우는 독일군이 천천히 도시를 점령하는 순간에도 치밀하게 반격작전을 위한 예비병력을 돈강너머서 스탈린그라드 양측면에 배치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시에대한 병력의 증원은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제한적이라도 투입되는 병력의 숫자는 엄청난 숫자였다.

 

이러한 소련군의 병력투입에 서서히 독일군도 한계에 도달했으나 시가지의 90%를 장악하기에 이르른다.

하지만 소련군은 주코프와 바실레프스키의 지휘하에 대규모 반격작전을 입안해서 스탈린그라드 북부와 남부지역에 대규모의 병력을 배치하기에 이르른다.

 

천왕성 작전

소련의 반격은 남서전선군과 돈전선군휘하 총5개 야전군의 진격으로 시작되었다.

두 전선군은 11월 22일 독일 6군을 포위했으며 사주방어선을 구성, 내부에서의 공격과 외부에서의 지원을 차단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게 된다.

 

독일의 구원작전

순식간에 포위된 6군의 구출을위해 독일은 만슈타인장군 지휘하의 돈집단군을 편성, 구출작전을 시도하였다.

사실상 2선급 부대들로 구성된 돈집단군의 전투력은 포위된 6군에 비해선 한참 떨어지는 수준이었다. 이에 만슈타인은 포위되어있는 6군과 합동으로 포위망을 돌파하기위해 히틀러에게 6군이 서쪽방면으로 돌파를 하게 해달라고 진언했으나 히틀러의 현지사수라는 명령에 6군의 호응은 기대할수 없게 되었다. 결국 돈 집단군은 단독으로 구출작전을 실시하였으며 엄청난 전투력을 발휘하면서 소련군의 포위망을 돌파했다. 12월 12일에 시작된 구출작전은 단7일만에 스탈린그라드 포위망 35마일(약 56km)까지 육박하였으나 히틀러의 현지사수라는 명령으로 요지부동인 6군에 의해 구원작전은 실패하고 돈집단군은 소련군의 압박에 서쪽으로 후퇴할수밖에 없었다.

 

토성 작전과 독일의 공중보급

소련의 반격작전으로 독일 제6군은 완전히 고립되었으며 보급역시 완전히 차단되었다.

졸지에 당대 세계 최대규모의 단일무력집단이 재대로된 전투한번 못하고 전멸할 위기에 처한 상황이 되었다.

독일 공군총사령관인 괴링은 히틀러에게 공중보급을 통해 포위된 22개 사단에 해당하는 병력에게 충분히 보급을 할수있다고 했으나 독일공군의 하루최대보급량은 100여톤가량으로 최소보급량인 750톤에도 미치지 못했다.

 

한편 소련군은 카프카스로 진출한 독일군을 완전히 포위하기위해 토성작전을 입안한다.

이작전이 성공할시 독일군은 엄청난 손실을 볼것이 자명하며 나치정권의 붕괴는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6군의 구출에 실패한 돈집단군은 카프카즈로 진출한 A집단군의 무사한 후퇴를 위해 로스토프를 수비하기로 한다. 다만 중요한 히틀러의 후퇴명령은 소련의 토성작전실시 13일 후인 12월 29일에 떨어졌으며 당시 소련군은 로스토프로부터 50여마일(80km) 정도 떨어져 있었으나 중요한 A집단군은 무려 350마일(560km)나 떨어져 있었다.

 

독일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만슈타인의 돈집단군은 필사적으로 2개월간 로스토프를 수비하였으며 A집단군은 아슬아슬하게 후퇴에 성공하게된다.

 

한편소련군이 점차적으로 전선을 확대하면서 독일점령하의 비행장마저도 점령되고 공중보급은1월24일을 기점으로 완전히 차단되었다. 결국 스탈린그라드에 포위된 독일군은 기아와 추위에 서서히 붕괴되기시작했였다.

 

독일 6군의 항복

 

1월 30일 파울루스는 히틀러에게 최후통첩을 바라는 전문을 보냈으나 히틀러는 파울루스를 독일육군원수로 임명했으며 '독일군사에는 원수가 포로가된 전례가 없었음'을 상기시켜 전장에서의 죽음을 요구하였다.

 

파울루스는 다음날인 1월 31 최후의 전문을 보낸후 소련군에게 항복한다. 그리고 최후의 부대가 항복한것은 2월 2일이었다.

 

28만의 병력으로 단일군사집단으로는 당대최강이라고 할수있던 6군의 최후 생존자는 약 9만 천여명이었다.

이들중 훗날 조국의 땅을 밟았던 숫자는 불과 6천여명...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은 6만여대의 차량, 1500여대의 탱크, 6000문의 대포, 28만의 병력을 상실하였고 이것은 독소전의 분수령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