슐츠의 자막공방/존 라베 (2009)

나치독일과 장개석 정부의 관계

슐츠105 2011. 9. 20. 17:32

 

나치 독일과 중국 국민당의 관계는 1차 세계대전 후에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독일 정부는 서구 정부로서는 처음으로 장제스를 인정하였고 베이징에 있던 대사관도 새로운 수도인 난징으로 옮겼다. 경제 관계는 한창 꽃피었고, 대 중국 무역에 있어 영국을 추월했다. 하프로라 불리는 독일의 위장 회사가 중국군에 꽤 많은 양의 무기를 공급하고 있었고 중국군의 핵심 부대는 독일 군사고문들이 교육시키고 있었다.

 

장제스는 자신의 양자 웨이구오를 독일 국방군에 보내 교육을 받게 했다. 그는 독일이 "이상하거나 비현실적이지 않고 탄탄하다."고 평했다.

 

 

그는 당시까지 독일군에 살아 있던 프로이센적 가치체계가 유교적인 가치와 유사하다고 보았다. 그는 오합지졸 같은 중국군에 프로이센적인 절도와 질서, 능률을 도입하고자 했다. 예컨대 청소년들을 정당 조직 안에서 민족주의적이며 자기방어적인 사상으로 무장시키는 일 등 많은 파시즘적 형태들이 그에게는 모방할 만한 것으로 비쳐졌다.

 

중국과 독일제국의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는 어디서도 충돌하지 않았다. 베를린의 외무부도 국방군의 사령부도 중국과의 관계를 확충하기를 바랐다.

 

1976년부터 1980년까지 중국 주재 독일 대사로 일했고, 나치 당원이자 난징대학살 당시 중국에서 중국인들을 보호한 존 라베라는 인물의 일기를 엮은 인물이자 존 라베와 만났었던 에르빈 비커르트는 1936년 11월에 라베를 방문한 후 상하이로에 있는 독일 총영사 헤르만 크리벨의 집에서 손님으로 초대 받았었다. 그가 초대받았을 무렵에 독일과 일본 사이에 반소비에트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저녁식사 자리에서 그는 독일이 세계 공산주의에 맞서는 이 조약을 마오쩌둥의 공산주의와 싸워야 하는 장제스와 맺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크리벨에게 말했다. 그러자 크리벨 역시 독일이 일본에 접근하는 것을 걱정스럽게 생각했다고 증언한다.

 

이렇듯 독일에서는 중국과 일본중 양자택일을 했어야만 했다. 물론, 히틀러는 중국과 일본 둘다를 택하려고 했지만, 결국에는 일본을 택했다. 외무부는 중국에 대한 우호 관계를 그대로 유지하고 싶어 했다. 1937년 7월 7일에 있었던 중일전쟁의 시발점이 된 루거우차오 전투 이후 일본인들이 이 '사건'을 본격적인 전쟁으로 확대했을 때, 외무차관보 에른스트 폰 바이츠제커는 7월 28일 일본 주재 독일 대사에게 매우 확고한 어조로 이렇게 전보를 보냈다.

 

 

"일본인들은 우리한테서 그들의 행위에 대한 하등의 지지도 기대할 이유가 없을 뿐더러 오히려 우리가 그들에게 중국에서 소란을 일으키지 말 것을 기대할 수 있다."

 

 

히틀러 스스로는 일본에게 아무런 비난도 하지 않았으나 외무장관 폰 노이라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일본과 함께 간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확고한 입장이지만 현재 일어나고 있는 중국과 일본 간의 싸움에서는 독일이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장제스는 1937년 7월 27일 독일 대사 트라우트만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독일인들은 일본인들과 그렇게 가까운 사이니 만큼 일본인들과 평화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유일한 세력"이라고 말이다. 이렇게 그는 독일이 일본 정부에 다가가 중재자 역할을 해주기를 바라는 속내를 내비쳤다. 도쿄 주재 독일 대사 디륵센과 대사관 무관 오트 대령도 독일의 중재를 제안했다.

 

1937년 8월 진격하던 일본군은 상하이 전선에서 중국군 부대들의 예상치 못한 강한 저항에 맞닥뜨렸다. 이 부대들은 중화기 보유 면에서 일본군에 훨씬 뒤쳐졌던 것은 물론이고 효과적인 공중지원도 전무하다시피 했다. 이들은 독일 군사고문들에게 군사 교육을 받은 부대들이었다. (일본군 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일본군 9사단 7연대 하나만 해도 사상률이 53% 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는 엄청난 사상률이었다)

 

히틀러가 파견한 독일 고문관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은 중국 국민당군대를 독일식으로 훈련시키고 독일 장갑차 대포 소총들을 전달하였다. 그는 상하이에서부터 남경까지의 길목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도록 중국군을 지도하였다. 당시의 장개석 군대의 필름에 나오는 중국 국민당군들은 독일군 철모와 군복, 장화 까지 신고 있어서 영락없는 나치 독일군이었다. 히틀러는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일본과의 협력관계는 유지한다. 그러나 중국에의 무기 수출은 위장한 체로 계속하라"

 

 

다음은 상하이 전선에 있었던 일본군의 일기이다.

 

 

"중국군의 경기관총이 특히 무서웠다. 일본군의 경기관총은 들들들 거리는 가벼운 소리였는데 중국군의 경기관총은 펑펑펑 거렸다. 그 소리는 너무나 강력하여 지옥의 사자가 부르는 것 같았다."

 


당시 참전하여 살아남은 국민당군의 병사가 회고하였다,

 


"우리는 체코제의 경기관총을 사용하였다."

 


그 체코제 경기관총 ZB-26이 지금도 대만의 전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경기관총은 그 당시 명중률이나 관통력에서 일본제를 능가하고 있었다.

 

상하이에서의 일본군은 크게 놀랐다. 결국, 이는 일본군들을 화나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 화풀이로 난징대학살이 일어나는 원인이 된다. 일본 외무상도 디륵센 대사에게 독일이나 이탈리아가 난징 정부에게 타협책을 찾도록 권고해준다면 반갑겠다고 말했었다. 그러니까 중국 국민당과 일본 양측이 모두 독일제국 정부에게 중재를 요청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무리한 제안으로 결국 장제스는 주저하였고, 결국 전쟁은 계속되었다.

 

히틀러는 일본과 동맹인데 왜 중국을 도와주었을까? 히틀러는 일본의 중국 침략이 달갑지 않았다. 그는 일본과 중국이 서로 협력하여 소련에 대항하기를 원했다. 중일전쟁은 결국 공산당(중국 공산당과 소련)만 키워줄뿐이라는 것이었다. 장제스 역시 일본과는 우호적으로 지내고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과의 전쟁을 원했다. 그는 "일본군이 피부병이라면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은 피부암이다."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는데, 그는 1933년 5월 31일, 만주를 그냥 일본에게 내준채 탕구정전협정을 맺어 일본과의 전쟁을 끝낸 뒤 다시 바로 공산당과의 싸움에 돌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히틀러는 만주국을 인정해주면서 일본과 손을 잡게 되었다.

 

 

존 라베 난징의 굿맨, 난징대학살 당시 일본인으로부터 중국인들을 보호했던 나치 당원 존 라베의 일기를 수록한 책이다

 

 

중국에서의 난징대학살 당시 나치 당원으로 중국인들을 보호한 존 라베의 일기에는 독일과 중국과 관련된 일기 내용 일부가 있었다. 아래에서는 그 내용들을 적어보겠다.

 

 

 

1937년 10월 3일자 일기 『존 라베 난징의 굿맨』, p55

 

'····· 최고위층, 특히 대원수 장제스의 부인이 독일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지 않다고들 한다. 독일이 일본과 반소비에트 조약을 맺었고, 브뤼셀의 '9강' 협의회에도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한다. ····· '우리를 위하지 않는 자는 우리에게 적대하는 자'라고 대원수 부인은 말했다. 그렇다면 독일 고문관들은 무엇이죠? 지금 중국인들이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는 대공방어 고사포 부대들을 도입한 것은 누구인가? 독일 군사고문들 아닌가! 지금 북쪽의 수준 미달의 병사들은 달아나기 바쁜데 상하이 부근에서 저렇게 잘 싸우고 있는 부대는 누가 훈련시켰는가? 독일 군사고문들과 독일기업 지원들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 독일인들이 수도에 남아 버티고 있는 것은 아주 특별한 희생이다. 제 나라에 있는 중국인들은 그걸 평생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겠지만!' 

 

 

 

1937년 10월 27일자 일기 『존 라베 난징의 굿맨』, p66

 

'중국인들도 이제는 일본군이 따창에서 전선을 뚫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중국군은 소위 '힌덴부르크 선(여기서는 독일 장군이 작전을 짰던 중국군의 대 일본군 방어선을 말한다'으로 물러났다.'

 

 

 

1937년 11월 6일자 일기 『존 라베 난징의 굿맨』 p68~p69

 

'····· 상하이에서 중국군이 잘 훈련된 일본군을 어떻게 격퇴하고 있는지를 신문에서 읽으면 정말 놀랍다. ····· 독일인 군사고문들에게 훈련받은 난징의 정예부대를 상하이로 보낸 것은 사실이다. 그 부대의 3분의 2가 전사했다고 한다. 하지만 최고의 군인들이라 할지라도 무기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거대한 중화기와 셀 수 없이 많은 탱크와 폭격기를 갖춘 일본의 현대적 군 장비는 중국군의 장비보다 월등히 뛰어나지 않은가!'

 

 

 

1937년 11월 10일자 일기 『존 라베 난징의 굿맨』 p71

 

'····· 상하이 전선에서 돌아온 독일 군사고문이 전하는 말로는 전선 후방에 경상을 입은 수많은 중국군이 군기가 풀어져 돌아다니고 있다고 한다. 밤이 되면 '마우저' 권총을 차야 여행할 수 있다!'

 

 

 

1937년 11월 17일자 일기 『존 라베 난징의 굿맨』p75

 

'····· 소위 '힌덴부르크 선'은 일본군이 우회하는 바람에 무너졌고 이로 인해 팔켄하우젠 장군이 면밀히 짜 놓은 방위계획도 공중에 날아간 셈이다.'

 

 

 

1938년 2월 22일자 일기 『존 라베 난징의 굿맨』, p317

 

'····· 독일이 만주국을 승인했다. 라디오에서 보도하듯이 한커우에 있는 우리 트라우트만 대사가 이로 인해 중국 정부를 대할 때 어려운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참고자료>

 

『존 라베 난징의 굿맨』, 존 라베 지음, 에르빈 비커르트 엮음, 장수미 옮김

 

NHK hivision TV '중일전쟁- 병사는 무엇을 보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