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개/근대 전쟁

패트리어트 (The patriot, 2000) 6.9

슐츠105 2013. 1. 21. 21:53

전쟁, 액션 | 독일, 미국 | 167 분 |  
감독 롤랜드 에머리히
출연 멜 깁슨 (벤자민 마틴 역), 히스 레저 (가브리엘 마틴 역), 조엘리 리차드슨 (샤를롯 셀턴 역), 제이슨 아이삭스 (윌리엄 테빙턴 대령 역)

 

줄거리
1770년대 미국의 사우스캐롤라이나. 길고 긴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쟁탈전 속에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전쟁에 참여한 벤자민 마틴이란 젊은 용사가 있었다.

잔혹하기로 유명했던 프랑스군과 인디언들에게 까지도 '늪 속의 여우'라 불리며 공포의 대상이 되었던 그는 뛰어난 지략을 가진 영리한 전사였다. 굶주린 야수처럼 수 십 명을 혼자 상대하는 그의 잔혹한 용맹성은 당시 적들과 싸우던 식민지 개척자들 사이에 전설이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전쟁에 회의를 느낀 벤자민은 고향으로 돌아가 피로 얼룩진 자신의 과거를 뒤로하고 평화로운 자신의 미래를 꿈꾸며 평범한 가정을 꾸려 자신의 아이들과 함게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그것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전쟁의 총성이 대륙을 뒤덮는다.

조국을 위해 몸을 바쳤던 식민지 개척자들에게 영국 정부의 심한 억압이시작되고, 이에 분노한 식민지 개척자들은 자신들의 조국인 영국 정부에 대항해 독립을 위한 혁명을 시작한다. 찰스턴 집회에서 식민지 개척자들은 전쟁 영웅인 벤자민에게 전쟁에 참여 할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미 자신의 아이들에게 모든 열정을 바치기로 마음먹은 벤자민은 이를 거절하고 자신의 가정으로 돌아가 전쟁으로부터 자신의 가정을 돌본다.

 

리뷰 : http://villages.tistory.com/794

 

 

 

 

 

 

 

 

 

 

 

 

 

 

<위키 백과 발췌>

미국 독립 전쟁(American War of Independence, 1775년 ~ 1783년) 또는 미국 혁명 전쟁(American Revolutionary War)은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북아메리카 식민지 중에서 동부 해안 13개주가 영국의 조세정책 등에 반발하여 식민지 독립을 위해 일으킨 전쟁이다.

미국은 1776년에 13주가 있는 상태애서 건국했다고 보며, 이 전쟁은 프랑스 혁명에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원인과 배경

미국 독립 전쟁의 원인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영국의 미국 식민지에 대한 과도한 조세 정책이다. 1763년 7년 전쟁의 결과를 논의하는 파리 강화 회담에서 영국은 식민지에 대해 조세 정책을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후 설탕법, 당밀법 등으로 당밀, 설탕, 철, 소금 등의 수입품에 대해서 관세를 부과하였으나 간접세인 탓에 큰 반발이 따르지는 않았다. 문제가 된 것은 인지세법인데, 이는 신문, 일간지, 트럼프 카드 등 미국 식민지에서 출판되는 모든 출판물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다. 이는 간접세지만 관세가 아니라 내부세라는 점에서 식민지인들의 커다란 반발을 불러왔다. 이에 식민지인들은 "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대표 없이는 과세 없다)"는 구호를 내걸고 영국의 과도한 조세 정책에 반발하였다. 즉, 미국 식민지에서는 영국 의회에 대표를 보낸 적이 없으니 이러한 법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영국은 이를 인정하지는 않았으나, 인지세법이 간접세의 추구라는 조세 원칙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금방 인지세법을 철폐하였다.

미국 독립 전쟁의 또 다른 원인으로는 영국의 인디언 보호구역의 설정을 들 수 있다. 프렌치 인디언 전쟁에서 미국은 인디언과 연합한 프랑스와 전쟁하는 영국을 적극 지원하였다. 영국 승리 후, 식민지 미국인들은 비옥한 중서부지역으로의 진출을 기대하였지만 영국 정부는 이 지역을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설정하였다. 그런데 인디언 보호구역의 설정에도 불구하고 식민지인들은 자꾸 중서부지역으로 넘어가려하였고, 이 과정에서 식민지인과 인디언들의 분쟁이 자주 발생하였다. 이에 대해 영국은 식민지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어쩔 수 없이 군대를 파견해야 했고, 재정적 비용에 부담을 느껴 병참법을 제정한다. 병참법은 영국 군대 비용의 일부를 미국 식민지인이 부담하게 하는 것으로 많은 반발을 불러왔다.

또한 1770년 3월에는 보스턴 학살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는 미국 식민지인들이 보스턴에서 시가 행진을 하던 영국군과 충돌이 발생한 것으로, 보스턴 시민 5명이 사망하였다.

이러한 불만이 누적되어 마침내 1773년에는 미국 독립 전쟁에 결정적인 도화선이 된 보스턴 차 사건이 발생하였다.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가 아메리카 식민지를 지지하였고, 특히 프랑스는 해군과 육군을 파병하여 직접 군사 지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이 전쟁을 위해 너무 많은 돈을 써 심각한 재정위기를 겪게 되고, 결국 프랑스 혁명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미국은 영국군에서 복무한 경험이 있는 조지 워싱턴을 대통령으로 추대하였다.


1775년 제2차 대륙 회의에서 벤자민 프랭클린, 존 애덤스, 로저 셔먼, 로버트 리빙스턴, 토머스 제퍼슨의 다섯 사람이 미국 독립선언서의 기초 작업을 수행했다. 그리고 대륙군을 창설하고, 조지 워싱턴 장군을 대륙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면서, 각 주에 군사와 물자지원을 요청하였다. 제2차 대륙회의는 1775년 5월 부터 미국의 사실상 연방의회의 역할을 하였으며, 이 1775년 제2차 대륙회의 부터 미국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요크타운과 전쟁의 끝
요크타운의 항복 (1797년 존 트럼블 작).1778년에 사라토가 전투(Battle of Saratoga)에서 독립군의 첫 승리가 이루어졌고, 벤자민 프랭클린이 이것을 명분으로 프랑스의 참전을 설득하였다. 그리하여 프랑스가 참전하게 되고, 1781년 요크타운 전투에서 프랑스와 독립군 연합부대가 영국군의 주력부대를 격파하게 된다. 결국, 1783년 파리 조약에서 영국 정부는 미국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된다.

 

사상자

미국 독립 전쟁의 의한 사상자 수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시대의 전형적인 전쟁들처럼, 질병으로 죽는 사람이 전사자보다 많았다. 천연두가 만연한 가운데 독립전쟁이 발발했는데, 이 전염병은 대략 130,000 명 보다 많은 사람을 죽였다.

약 25,000 명의 미국 독립군이 군 복무 중에 죽었다. 그 중 약 8,000 명은 전사했다. 17,000여 명은 질병으로 죽었는데, 그 중 8,000 명은 포로가 된 채로 죽었다. 독립군의 사상자는 약 8,500명에서 25,000 명 사이로 추정된다. 따라서 미국인 총 사상자는 50,000 명 정도까지 추정된다.

171,000 명의 해군이 전쟁 중 영국군으로 참전했고, 그 중 25-50%는 강제 징집되었다. 1,240 명이 전사했고, 18,500명이 질병으로 죽었다. 가장 큰 원인은 비타민 결핍이 원인인 괴혈병이었다. 레몬주스로 충분히 예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독부가 절차를 밟지 않았기 때문에 병사들은 속절없이 죽어 나갔다. 전쟁 중 약 42,000명의 해군이 탈영했다.

대략 1,200명의 독일인이 전사했고 6,354명이 사고나 질병으로 죽었다. 16,000명의 남은 독일인들은 고향으로 돌려보내졌지만 5,500명 정도는 여러가지 이유로 미합중국에 잔류했다. 대부분 미 합중국 시민이 되기 위해서였다.

 

 

<다음백과 사전 발췌>

전쟁은 당초 식민지 문제에 관한 대영제국 내부의 내전으로 시작되었으나 1778년 프랑스가 식민지측에 가담한 데 이어 1779년 스페인이, 1780년에는 네덜란드까지 가세함으로써 국제전의 양상으로 변모했다. 육지에서는 각 식민지 민병대와 대륙군으로 이루어진 식민지군이 산발적으로 전투를 수행했는데 대부분이 농민으로서 그 수효가 약 2만 명에 이르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영국 육군은 잘 훈련된 4만 2,000명 규모의 정규군으로 이루어졌으며 3만 명 정도의 독일 용병으로 보강되어 있었다.

 

전쟁은 영국의 토머스 게이지 장군이 매사추세츠 콩코드에 있는 식민지군 탄약창고를 파괴하기 위해 보스턴에 있던 군대를 파견함으로써 시작되었다. 1775년 4월 19일 렉싱턴과 콩코드에서 전투가 일어난 뒤 식민지군은 보스턴에 포위공격을 개시했다(→ 보스턴 포위전). 이 포위는 식민지군의 헨리 녹스 장군이 타이칸더로가 요새에서 노획한 대포로 게이지 장군의 후임자인 윌리엄 하우 장군 휘하의 영국군을 공격해 영국군이 1776년 3월 17일 보스턴에서 철수하게 됨으로써 끝이 났다. 리처드 몽고메리 장군이 지휘하는 식민지군은 1775년 가을 캐나다를 침공해 몬트리올을 장악한 뒤 퀘벡을 공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했으며 이 과정에서 몽고메리 장군이 죽었다. 식민지군은 퀘벡에 포위공격을 계속했으나 이듬해 봄에 영국군 증원병력이 도착하자 포위를 풀고 타이칸더로가 요새로 퇴각했다.

 

영국 정부는 하우 장군의 동생인 리처드 하우 제독의 지휘하에 대규모 함대를 파견해, 뉴욕에서 하우 장군과 서로 합류하도록 했다. 영국 정부는 이들에게 식민지측과 담판을 짓는 권한을 부여했으며 식민지측이 항복할 경우 관용을 베풀 것이라는 점을 납득시키도록 했다. 1776년 7월 4일 독립을 선포한 식민지인들이 영국측의 평화제의를 거부하자 하우 장군은 롱아일랜드에 상륙해 8월 27일 식민지군 총사령관인 조지 워싱턴의 부대를 무찔렀다. 워싱턴의 부대가 맨해튼으로 후퇴하자 하우 장군은 북쪽으로 추격해 10월 28일 화이트플레인스 근처 채터튼에서 워싱턴에게 또 패배를 안겨주었으며, 워싱턴이 맨해튼에 남겨두었던 수비대를 공략해 군인들을 생포하고 보급품을 빼앗았다. 리 요새에 있던 워싱턴의 또다른 수비대를 공격한 콘월리스는 식민지군을 뉴저지를 지나 델라웨어 강 서쪽 연안까지 내몰았으며 겨울 동안 뉴저지의 전초기지에다 자신의 부대를 숙영시켰다. 그러나 그해 성탄절날 밤 워싱턴은 델라웨어를 가로질러 트렌턴에 주둔중인 콘월리스의 수비대를 공격해 1,000여 명의 포로를 사로잡았다(→ 트렌턴과 프린스턴 전투). 콘월리스가 곧 트렌턴을 다시 차지했으나 워싱턴의 부대는 트렌턴에서 빠져나와 프린스턴에서 영국군 증원부대를 무찔렀다. 워싱턴이 트랜턴과 프린스턴에서 거둔 전과는 식민지측의 사기와 독립투쟁 열의를 북돋웠다.

 

1777년 존 버고인 장군의 지휘를 받은 영국군이 캐나다로부터 남쪽으로 이동했다. 또 배리 세인트 레저 중령의 소규모 병력은 세인트로렌스 강을 따라 내려온 뒤 모호크 계곡을 지나 올버니에서 버고인 장군의 부대와 합류했다. 버고인 장군은 7월 5일 타이칸더로가 요새를 점령한 뒤 말을 더 구하기 위해 독일 용병부대를 버몬트의 베닝턴으로 보냈으나 독일 용병부대는 뉴잉글랜드의 식민지군에게 거의 전멸당했다. 이러한 가운데 세인트 레저 중령의 영국군은 8월 6일 오리스캐니에서 베네딕트 아널드 장군이 이끄는 식민지군에게 격퇴되었다. 버고인 장군은 올버니로 접근해가면서 호레이쇼 게이츠 장군이 이끄는 식민지군에게 2번씩이나 패배했으며 1777년 10월 17일 새러토가에서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러토가 전투). 그해 초가을 하우 제독의 함대는 뉴욕을 출발해 체서피크 만으로 항해하여 9월 11일 브랜디와인 강에서 워싱턴의 부대를 무찔렀으며, 9월 25일에는 식민지의 수도인 필라델피아를 점령했다. 워싱턴은 10월 4일 저먼타운 공격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뒤 자신이 지휘하는 1만 1,000명의 병력을 겨울 동안 포지 계곡에 숙영시켰다. 포지 계곡에서는 날씨가 추운데다 식량마저 부족한 지경이었지만 식민지군은 프로이센 출신의 장교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슈토이벤 남작으로부터 매우 가치있는 기동훈련과 함께 무기를 보다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익혔다. 폰 슈토이벤 남작의 도움으로 워싱턴은 1778년 6월 28일 뉴저지의 몬머스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 이후로 북부지역의 영국군은 주로 뉴욕 시와 그 주변 지역에만 머물렀다.

 

미국독립전쟁
프랑스는 1776년 이후로 은밀하게 식민지에 물자보급과 재정원조를 계속해오다 1778년 함대와 육군병력을 준비하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그해 6월 영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북부지역의 전세는 대체로 교착상태에 빠져 있었으므로 프랑스군은 주로 남부지역에서 공헌했다. 프랑스군은 영국군이 장악하고 있던 서배너에 대한 공략과 요크타운에 대한 결정적인 포위공격에 참가했다. 1780년 8월 16일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캠던에서 콘월리스가 지휘하는 영국군은 게이츠 장군의 식민지군을 격파했으나 1월 17일 킹스마운틴에서, 그리고 1781년 1월 17일 카우펜스에서 식민지군으로부터 뼈아픈 패배를 당했다. 콘월리스의 영국군은 1781년 3월 15일 노스캐롤라이나의 길퍼드코트하우스에서 많은 사상자를 내고 승리를 거둔 뒤 다른 영국군 병력과 합류하기 위해 버지니아로 진입했으며 요크타운에 기지를 설치했다. 워싱턴의 군대와 프랑스의 로샹보 백작 휘하의 병력이 요크타운을 포위 공격했으며 콘월리스가 이끄는 7,000명의 영국군 병력은 1781년 10월 19일 항복했다.

해전은 계속되고 있었지만 요크타운 함락으로 육상의 전투는 끝이 났다. 대륙해군은 1775년에 창설되었지만 전쟁이 계속 진행되면서 사략(私掠) 행위를 하는 수준으로 전락했으며, 1780년 이후 해전은 주로 식민지의 유럽 동맹과 영국 해군의 싸움이 되었다. 식민지의 사략선 선장이며 두드러진 전과를 올린 바 있는 존 폴 존스 해군 지휘관은 영국 본토 주변에 출몰했고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영국 상선 1,500척과 영국 선원 1만 2,000명을 사로잡았다. 1780년 이후 스페인과 네덜란드는 영국 본토 주변해상의 상당 부분을 장악할 수 있었으며 그에 따라 영국 해군은 유럽에 발이 묶였다.

미국 독립전쟁의 추이에 관해 설명하면서 학자들은 영국이 한 번도 승리를 위한 총괄적인 전략을 수립하지 못했으며 또 군대 내부에서 협력과 이해가 부족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한편 식민지군은 포지 계곡에서 폰 슈토이벤으로부터 훈련을 받을 때조차도 결코 타성적이 아니었으며 민병대는 대륙군과 함께 훌륭한 활약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776~78년 프랑스의 보급물자와 자금 제공에 이어 1778년 이후 프랑스 육해군의 직접적인 지원으로 식민지군은 영국군의 분열된 틈을 최대한 활용해 새러토가와 요크타운에서 영국군 전체를 패배시켰으며 마침내 1783년 11월 13개 주의 독립을 얻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