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개/근대 전쟁

워털루 (Waterloo, 1970) 7.0

슐츠105 2013. 7. 21. 22:45

한글자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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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 이탈리아, 소련 | 134 분 |

감독 세르게이 본다르추크

출연 로드 스타이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역), 크리스토퍼 플러머 (아서 웰즐리, 웰링턴 백작 역), 오손 웰스 (루이 18세 역), 잭 호킨스 (육군 중장 토마스 픽튼 경 역)

 

줄거리
전유럽을 제패하여 승승장구하던 나폴레옹의 군대는 1812년 러시아 원정에 실패하면서 운세도 기울어져, 1814년 3월 영국, 러시아, 프러시아, 오스트리아군이 합세한 연합군에 의해 파리를 점령당한다. 그는 군사들을 뒤로 하고 눈물을 흘리며 쓸쓸히 엘바 섬으로 유배된다. 그러나 이듬해인 1815년 3월, 다시 파리로 입성해 황제에 즉위한 그는 돌아오는 즉시 재정을 정비하고 공격 준비에 박차를 가한다. 그가 지닌 코르시카인 만의 당당함과 솔직함은 당시 농민 출신 사병들로부터 절대적인 신뢰를 받지만, 한편으로 독설적이고 도덕성이 결여된 그의 행동은 때로 수많은 적을 만들기도 하는데...

워터루 전쟁을 배경으로 한 전쟁물. 1971년 영국 아카데미 미술상과 의상상을 수상하고 촬영상 후보에 올랐다. 나폴레옹 역은 로드 스타이거, 웰링턴 장군 역에 크리스토퍼 플러머가 연기한다.

 

 

 

 

 

 

 

 

 

 

 

 

 

 

 

 

 

 

 

 

 

 

 

 

 

출처 : 엔하위키 미러 

http://mirror.enha.kr/wiki/%EC%9B%8C%ED%84%B8%EB%A3%A8%20%EC%A0%84%ED%88%AC

 

 

워털루 전투

 

1 개요
1815년 6월에 벨기에의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와 영국, 프로이센의 대불동맹군이 맞장뜬 전투. 이 전투로 나폴레옹은 완전히 개발살, 길었던 나폴레옹 전쟁이 끝났다.


흔히 이 전쟁이 '워털루'에 일어났다고 많이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워털루는 벨기에 브뤼셀에서 남쪽으로 9마일 떨어진 곳으로 영국군이 작전 본부를 설치한 곳이다. 실제적인 전투지는 플랑스누아 마을과 몽생장 마을 사이에서 남쪽으로 약 4마일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2 배경
엘바섬에서 탈출한 뒤 강력한 카리스마로 군과 정부, 그리고 민심을 장악한 나폴레옹은 일단 유럽 각국에 화평교섭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고, 당시 네덜란드에 주둔 중이던 영국군과, 나폴레옹에게 허구한 날 당해서 악이 받혀 있던 프로이센군이 가장 먼저 프랑스를 향해 진격해 왔고, 뒤이어 프랑스의 숙적인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군이 출격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나폴레옹은 대불동맹군이 합류하기 전에 각개 격파할 생각으로 기존의 정예부대에 급조한 부대를 추가하여 급히 벨기에로 전진했다.

 

3 시작
일단 나폴레옹이 이끄는 본대는 6월 16일 리니 전투에서 블뤼허 원수의 프로이센군을 개박살 내는데 성공하지만 프로이센군 역시 퇴각에 성공, 같은 날 미셸 네 원수가 이끄는 부대는 카르트 브라에서 영국군을 기습하고도 큰 타격을 입히는데 실패한다.


프로이센군이 격퇴당했다는 것을 안 영국군 사령관 웰링턴 공작은 일단 부대를 워털루 인근으로 후퇴시키고, 위고몽과 라 에 상트 두 곳의 대형 농장을 요새화 하여 프랑스군의 진격을 방해할 준비를 한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워털루 전투가 나폴레옹의 패배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프로이센군을 격퇴시키기는 했지만, 섬멸에는 실패한 나폴레옹은 이들이 다시 연합군에 합류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 나폴레옹은 엠마누엘 그루시 원수에게 일부 병력을 맡겨 프로이센군을 추격하게 하는데, 이 병력이 나폴레옹군의 거의 1/3 규모다. 그리고 결국 잡으라는 프로이센군은 못잡고 엉뚱한 곳에서 시간을 소모하는 바람에, 나폴레옹이 가용 가능한 전체 병력의 1/3이 엉뚱한 곳에서 시간낭비 한 셈.


하지만 이 시점에서는, 영국군과 프로이센군이 합류할 경우 각개격파에 실패하는 꼴이 되며, 연합군 전부가 힘을 합하면 승산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서 병력을 분할한 것은 당연한 조치였으며, 다만 지휘관 인선이 잘못되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분할한 병력이 프로이센군을 잡아두는 사이에 나머지 병력을 영국군에게 주력을 집중시켜 섬멸할 생각으로 6월 17일까지 영국군 진지 근처로 이동, 6월 18일 아침부터 공세를 개시하려 했다. 그러나 6월 17일 밤동안 많은 비가 내려 진창이 많이 발생했고, 이 때문에 나폴레옹은 포병대 방열과 포격 효율을 위해[1] 땅이 마를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고 작전 개시 시간을 네시간 미룬다.

 

4 전개
11시 25분, 프랑스군은 데를롱의 제1군단을 시작으로 영국군에 대한 파상공세를 시작하지만, 위고몽과 라에상트의 요새화된 농가[2]가 방해가 되었고, 급조한 부대의 전력이 예상이상으로 낮아 영국군에게 큰 타격을 입히지는 못한다. 다만 영국군에 속해있던 네덜란드 부대를 괴멸시키고, 라에상트와 위고몽을 포위하는 정도의 성과만 거둔다.
영국군은 예비 전력인 토마스 픽튼의 제5사단이 출격, 라에상트를 포위하던 프랑스군을 쫓아내는데 성공하지만, 사단장인 픽튼이 전사한다.[3]


사단장의 전사와 프랑스군의 반격으로 5사단이 괴멸위기에 빠지자, 억스브릿지 휘하의 영국 기병 2개 여단이 프랑스군을 급습, 제5사단을 구하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기세가 올라버린 영국기병대는 그대로 프랑스군 주력을 향해 돌진, 프랑스군에 5,000명의 사상자를 내게 하고 군기 2개를 탈취하고 일부 프랑스 포병대를 도륙했지만, 프랑스군이 폴란드 창기병(울란)을 중심으로 한 기병대를 출격시켜 반격하여, 연속된 돌진으로 지쳐있던 영국 기병대의 40%를 쓸어버린다. 이 손실로 영국기병은 이후 이날의 전투에서 더이상 눈에 띄는 활약을 보이지 못한다.

 

 

워털루 전투 전황 상세도

 

 

15:00가 되자, 몸이 좋지 않았던 나폴레옹은 약간의 휴식을 갖기로 하고 네 원수에게 라에상트를 점령할 것을 명하고 막사로 들아간다. 최상의 컨디션에서도 승패를 가늠하기 힘든 가장 중요한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건강이 좋지 않았던 이유는 그동안 토막잠을 자며 폭식을 하고 거친 야전생활을 한 결과로 인해 몸이 망가져서 여러가지 잔병이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 나폴레옹은 치질을 앓고 있었는데, 그 전날밤 고통이 심해지자 주치의는 아편을 처방했다고 전한다. 아편의 과다한 복용으로 그 날 나폴레옹은 반 혼수 상태가 되었고 그 결과.....역사를 바꾼 여러모로 무서운 치질!


네 원수는 라에상트에 공세를 가했지만,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는 라에상트에 주둔한 영국군은 습격한 프랑스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적었지만 머스켓보다 훨씬 명중률이 높은 강선총(라이플)으로 무장한 소수 정예부대였다는 점에서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이 당시에 영국군이 프랑스군과의 전투로 피해가 큰 부대를 비교적 피해가 적은 부대와 교대하는 것을 "영국군이 흔들리는 것으로" 오판한 네는 보병과 포병을 기다리지 않고, 기병 대부분을 이끌고 사각형의 대기병 방진을 완성하고 기다리던 대규모의 보병대 속으로 돌격해 들어간다. 그리고 결과로 프랑스 기병만 떡실신(...). 프랑스군은 단 몇시간 전 영국군이 그랬던 것처럼 기병대의 상당수를 잃는다.

 

 

 


사실 프랑스 기병들은 고지 점령 자체는 성공했다만, 후속 부대가 없으니 영국군 대포를 쓰지도 못하고, 못을 박아서 고장낼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금속덩어리인 대포를 완전히 파괴할 수단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 경우에는 프랑스군에게 운도 정말 없었던 사례. 왜 못이냐면, 심지를 박는 부분에 머리 없는 나무못을 박아넣어서 대포를 못쓰게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장에서 당장 이걸 수리할 수도 없으니까. 그래서 기병대의 일부 인원이 머리없는 나무못과 망치를 가지고 다녔는데... 이 사람들이 전부 전사했다! 결국 대포를 멀쩡하게 놔두고 돌아갔고 돌아온 영국포병은 열심히 파이어! [4] 결국 프랑스 기병은 영국군의 반격을 받아서 박살이 나버렸다. 물론 이걸 본 나폴레옹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고...


이무렵, 개박살났던 부대를 수습한 블뤼허는 와브르에 미끼부대를 놔두고 워털루 방면으로 진격, 17:00경에 전초부대가 프랑스군의 우익 후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프로이센군 전초부대는 프랑스의 급조부대인 청년근위대 등을 격파하며 기세를 올렸지만, 프랑스의 전략 예비대였던 나폴레옹 근위대 단 두개 대대에게 14개 대대가 개박살이 나면서 후퇴했다. 하지만 재차 이은 공격으로 블뤼허의 1군이 전장에 도착할 길을 여는데 성공했다.

 

 

5 절정
18:00 무렵, 기병대만으로 들이밀었다가 실패했던 네 원수는 뒤늦게 보병-기병-포병을 제대로 조합한 전력으로 영국군 본대를 압박하면서 드디어 라에상트를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영국군은 중앙에서 효과적으로 프랑스군을 막아주던 요새를 잃었을 뿐 아니라 프랑스군의 포격에 피해가 누적되어 위기상황이었다.


참고로 이 시점에서 그루시는 여전히 프로이센 본대를 찾아 해매고 있었다. 게다가 휘하 장교들이 멀리서 들려오는 포성을 듣고 한참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음을 알고 황제를 도우러 가자고 애청하고 있었으나, 그루시는 '처음 받은 명령이 프로이센군 추격이었으니 계속 가자'라고 하여 가망없는 추격을 지속한다. 게다가 나폴레옹은 그루시에게 당장 돌아오라는 전령을 이미 보냈다. 문제는 전령을 한명만 보냈고 이 사람이 중간에 실종돼서 연락이 안갔다. 원인은 전령을 보낸 참모총장 술트... 나중에 나폴레옹이 '베르티에였으면 전령을 여러명 보냈을텐데...'라고 한탄했다지만 '야전사령관으로서의 능력은 출중해도 참모총장으로서의 능력은 절대 기대할 수 없었던' 술트를 참모총장에 임명한 게 바로 나폴레옹 자신이다! 뭐 그루시도 마찬가지이지만...


만약 이 시점에서 그루시가 병력을 돌려 본대에 합류했으면 워털루 전투는 프랑스군이 승리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앞선 삽질로 단단히 화가 나있던 나폴레옹은 네의 지원요청에 "보병? 보병을 어디서 데려온다는 말이냐? 너는 내가 보병을 만들어내는 줄 아느냐?"며 거부했다고 한다.


한편, 프랑스군 역시 거의 전병력이 영국군과 싸우고 있었던 데다가, 프로이센군이 계속 증강되어 되돌아 오고 있었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아껴 두었던 최후의 예비대인 근위대로 영국군의 중앙을 돌파하기로 하고, 부대의 사기 유지를 위해 접근해 오는 프로이센군을 "프로이센군을 추격하러 갔던 그루시의 부대가 돌아오는 것"이라는 거짓 소문을 퍼트리게 했다.


그래도 뒤늦게 근위대 6개대대를 중심으로 삼은 돌파부대가 영국군의 중앙을 돌파하기 위해 전진했지만, 공격 준비까지 시간이 걸려 구멍투성이였던 영국군 중앙은 거의 매꾸어져 있는 상태였다. 결국 나폴레옹 친위대는 예상외로 강력한 영국군의 저항을 받으며 전진 했고, 결국 영국군 근위 보병대와 52경보병연대의 맹공에 전진이 막히고 말았다.

 

 

6 결과
이로써 나폴레옹이 가진 모든 카드가 동이 나고, 모든 전선에서 프랑스군의 공격은 막혀버렸다. 영국군도 거의 전면붕괴 직전까지 몰렸으나 당시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명중률을 자랑하는 영국군의 사격에 프랑스군의 피해가 누적되어 갔으며, 예비대가 없어서 반토막난 19보병연대까지 투입했으나 그대로 소모되어버릴 정도로 프랑스군도 타격을 입었다. 게다가 때맞춰서 프로이센군이 프랑스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자 나폴레옹의 거짓말이 들통나, 전 프랑스군은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특히 프로이센군을 그루시 부대로 속인 탓에 "그루시가 배신했다"는 소문이 퍼져 프랑스군의 혼란은 극에 달했다.


이 때 프로이센군도 블뤼허의 본군인 1군단이 전선에 도착하여, 프랑스군은 앞뒤로 포위당한 상태로 개박살이 났다. 피에르 캉브론느가 지휘하는 나폴레옹 근위대의 잔여 병력들은 나폴레옹과 주요지휘관/참모들의 퇴각로를 열기 위해 끝까지 싸웠지만 결국 괴멸되었다. 22:00에 웰링턴과 블뤼헤르가 만나, 이후 추격은 지친 영국군 대신 별로 안 싸워서 쌩쌩한 프로이센군이 맡기로 합의를 하는 것으로 워털루 전투는 막을 내렸다.


그동안 그루시는 와브르에서 프로이센의 미끼부대를 섬멸하는데 성공했지만, 이건 이미 아무 의미도 없는 뻘짓일 뿐이었다.

 

이후 나폴레옹은 파리로 달아나는데는 성공한다. 그러나, 워털루 전투의 패배로 프랑스 국민들의 사기는 곤두박질 쳤고, 정예부대는 거의 소멸되었으며, 측근의 배신과 왕당파의 재등장으로 나폴레옹은 사면초가에 빠져버렸다. 이 상황에 이르자 나폴레옹은 정적들을 피해 영국에 망명하는 길을 택했고, 자신은 영국이나 아메리카 대륙으로 가기를 희망했지만, 영국 정부는 그를 남대서양의 오지 세인트 헬레나로 유배보냈고, 나폴레옹은 거기서 사망했다.

 

7 평가
프로이센군은 이래저래 나폴레옹에게 계속 털려 왔기때문에 정예부대라고 할만한 부대도 별로 남아 있지 않았고, 리니에서 작전상의 우를 범해 괴멸 직전 까지 몰렸지만, 블뤼허의 결단과 뛰어난 상황판단으로 워털루 전투의 마지막을 장식할 수 있었다.

 

영국군은 애초에 웰링턴의 심각한 오판으로 카르트브라에서 기습을 당했지만, 프랑스군 역시 의도한 기습이 아니었기 때문에 전력의 손실이 비교적 적은 상태로 계획했던 전장인 워털루 지역에서 프랑스군을 맞아 싸울 수 있었으며, 이전의 전쟁에서 비교적 다른 유럽국가에 비해 패배가 적어 정예부대가 많이 유지되었고, 위고몽과 라에상트의 두 요세가 잘 버텨준 덕에, 그리고 프랑스군의 장군들, 특히 네와 그루시의 연달은 실책 덕에 프로이센군이 올 때까지 프랑스군을 막아낼 수 있었다.

 

프랑스군은 나폴레옹의 인사 기용에서부터 실패의 조짐이 보였다. 후방에서 일어난 배신과 반란으로 이전 전쟁에서 졌다고 생각한 나폴레옹은 뮈라 원수 등 배신경력이 있는 지휘관들은 부르지도 않았고, 다부나 루이 가브리엘 쉬셰 등의 유능한 장군들을 너무 많이 후방에 배치한데다가, 참모 경험이 없는 술트 원수를 참모장으로 기용하는 이상한 인선을 저질렀다.


전선 지휘관도 용맹하나 전략적인 안목이 부족하고 쉽게 흥분하는 성격의 네와, 나름 유능하기는 하지만 소심할 정도로 신중한데다가 고지식하기까지 한 그루시를 뽑는 우를 범했다. 정확히 말하면 인원 배치를 잘못했다. 전술적 능력이 탁월한 술트, 뛰어난 기병대지휘관 그루시, 저돌적이고 헌신적인 네... 이 셋 모두 유능한 인재였지만 이들의 장점은 전혀 살리지 못하고 약점만 드러나는 직위에 배치했으니 제대로 일할 리가 없던 거다!


결국 네는 영국군을 공략하는데 번번히 실수를 저질러 타이밍을 계속 놓쳤고, 그루시는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서도 최초의 명령인 프로이센 추격에만 매달렸다. 참모 경험이 거의 없었던 술트는 뭘 해야 하는지도 잘 몰랐고.....

 

여기에 나폴레옹은 웰링턴이 이끄는 영국군과 싸워본 적이 없었음에도 예전 웰링턴이 지휘하기 전의 영국군을 격파 했었던 기억만으로 얕보고 작전을 세웠던 것이 또다른 화근이었다. 영국군에게 패한 적이 있었던 장군들의 말에 조금만 더 귀기울였더라면 네에게 지휘를 전담하거나, 그루시에게 과도한 추격부대를 주는 실수는 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결국 워털루의 패배의 원인을 여러가지 들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모두 나폴레옹 자신의 책임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그러나, 설령 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영국군을 격파했다고 해도 그가 오랫동안 프랑스 황제 자리를 지켰을 것이라고 보장할 수는 없다. 웰링턴군이 격퇴 되었어도 곧바로 프로이센군과의 제2라운드를 치러야 했고, 뒤이어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군과 연달은 전쟁을 치러야 했고, 바다를 장악한 영국 해군을 상대할 해군력이 없었기 때문에 나폴레옹이 결국은 패배를 맛봐야 했을 가능성이 높다. 어떤 의미에서 나폴레옹은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워털루 전투에 나선 셈이지만, 그나마도 자신과 부하들의 삽질로 날려먹었다.


이 전투에서 가장 유명한 대사는 피에르 캉브론느가 적군의 항복 요구에 한 대사. "그대 질문에 다섯 글자로 대답하겠다. M.E.R.D.E." 물론 연합군은 대포로 화답했다.


이 전투와 관련한 반유대주의 음모론도 있다. 당시 전투의 진정한 승자는 영국도 프로이센도 아닌 유대계 로스차일드 가문이라는 내용.


워털루 전투 당시, 로스차일드 가주의 아들이었던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시장에서 정보의 중요성을 일찍이 파악하고 있었고, 로스차일드는 국채에 대한 투자를 했다. 워털루 전투에 앞서 로스차일드는 영국의 승리가 확실하다는 정보를 입수, 공격적으로 보유하고 있던 영국 국채를 투매, 즉 팔아넘긴다.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접하게 되제 영국의 패배가 기정사실화하고 로스차일드 따라 영국 국채를 매각, 하루아침에 영국 국채는 급락하고 만다. 이렇게 휴지조각이 된 영국 국채를 몰래 재매수한 로스차일드는 20배 이상의 차익을 올리고 작전의 레전드, 인생한방 유럽 경제를 뒤흔드는 대부호로 자리잡게 되고 이 기반은 아직도 세계 최고의 부호 가문으로 자리매김한다...

 

사실은 반유대주의자들이 퍼트린 주장이다. 당시 로스차일드일가는 전쟁이 장기화 될것으로 봐 금에 막대한 투자를 했지만 전쟁이 조기종결되면서 금값이 폭락, 오히려 손해를 보았다.

 

 

8 여담
코드 기아스 세계관에서는 워털루 전투 직후 나폴레옹이 독살당했다.


1972년 소련, 영국, 이탈리아, 미국 4개국 합작으로 영화화되었다. 엄청난 엑스트라를 동원한 대작이지만 흥행은 실패. 자세한 내용은 영화 워털루 항목참조.


1800년대 초반 프랑스가 유럽 각국과 벌인 전쟁을 나폴레옹 전쟁이라 부를만큼 영향력이 컸던 인물의 몰락이기에 그 파급도 컸고 이 후로 meet one's waterloo (대패를 당하다) 라는 숙어도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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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의 대포는 주퇴 복좌 장치가 없어 한번 쏘면 반동으로 원래의 포격 위치에서 한참을 이동하고, 그걸 인력으로 제자리에 돌려 놔야 한다. 그걸 진창에서 한다면 포병들은 몇 발 쏘기도 전에 나가 떨어질 수 밖에... 게다가 당시의 포탄은 구형의 금속 덩어리일 뿐이어서 파편을 만들지 못하며 볼링공으로 볼링핀을 때리는 식으로 적병을 때려 눕혔다. 만일 사람을 맞추지 못하고 땅에 떨어질 경우 마른 땅이면 튕겨 나오면서 다시 적병을 쓰러뜨리겠지만 진창일 경우 그냥 땅에 박히고 끝...
[2] 샤프 시리즈에도 등장하는 콜드스트림 연대와 라이플 연대가 방어했다.
[3] 영화 워털루에서 혼자 군복이 아닌 사복 정장을 입고 참전했다가 전사한 사람(존 홉킨스 역)이 그이다. 이는 역사적 사실로, 급히 전투에 참여하느라 군복 등의 개인 물품을 챙기지 못해서 사복을 입고 싸운 것.
[4] 출처는 아집과 실패의 전쟁사

Waterloo.1970.720p.WEB-DL.AAC2.0.H264-FGT.s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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