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개/고대 ~중세 전쟁

킹덤 오브 헤븐 (Kingdom of Heaven DC, 2005)

슐츠105 2013. 1. 21. 21:59

액션, 전쟁 | 독일, 스페인, 영국, 미국 | 137 분 |

감독 리들리 스콧

출연 올랜도 블룸 (발리안 역), 에바 그린 (시빌라 역), 리암 니슨 (고프리 역), 에드워드 노튼 (볼드윈 4세 역)

 

영화사를 다시 쓰는 21세기 최고의 걸작!
2005년 5월, 새로운 영웅의 신화가 시작된다!

 

운명이 이끈 만남… 새로운 세상을 향한 여정이 시작된다!
전쟁으로 가족을 잃고 깊은 슬픔에 잠겨있는 프랑스의 젊고 아름다운 대장장이 ‘발리안(올랜도 블룸)’에게 부상당한 십자군 기사 ‘고프리(리암 니슨)’가 찾아온다. 무언가 비밀을 품고 있는 듯한 그의 정체는 바로 발리안의 아버지. 발리안에게 숨겨진 전사의 자질을 꿰뚫어본 고프리는 자신과 함께 떠날 것을 제안하고, 결국 발리안은 성스러운 도시를 지키기 위한 영예로운 여정을 시작한다.

 

명예로운 서약… 세상을 바꿀 새로운 운명이 펼쳐진다!
발리안은 고프리로부터 여러 가지 검술과 전술 등을 배우며 용맹한 전사로 거듭난다. 그리고 고프리가 죽기직전 수여한 작위를 받아 정식기사가 되어 성스러운 도시 예루살렘의 국왕 ‘볼드윈 4세(에드워드 노튼)’에 대한 충성을 서약한다. 그 후 발리안은 뛰어난 검술과 용맹함으로 맹위를 떨치며 국왕의 신임을 한 몸에 받게 되고, 왕의 동생인 아름답고 신비로운 공주 ‘시빌라(에바 그린)’와 격정적인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그녀는 악명 높은 교회 기사단의 우두머리 ‘가이 드 루시안’과 정략 결혼을 한 상태.

 

거역할 수 없는 사랑… 사랑과 명예를 위한 전쟁이 시작된다!
운명적인 사랑은 거역할 수 없는 것. 명예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기사 발리안은 고뇌하지만, 금지된 사랑은 더욱 뜨겁게 타오른다. 시빌라를 빼앗긴 가이는 발리안을 향해 분노를 폭발 시키다가, 마침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일으킨다. 이에 발리안은 예루살렘 왕국과 사랑하는 시빌라 공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고 최후의 전투를 시작한다.

과연 발리안은 시빌라 공주와 예루살렘의 백성들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이제, 명예로운 젊은 영웅 발리안의 위대한 전쟁이 시작된다!

 

 

 

 

 

 

 

 

 

 

 

 

 

<살라딘>

본명 : 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
재위 : 1174년 - 1193년
대관식 : 1174년 카이로
종교 : 무슬림 수니파
출생일 : 약 1137년 - 1138년
출생지 : 이라크 티크리트
사망일 : 1193년 3월 4일 (나이 55-56세)
사망지 : 시리아 다마스쿠스
매장지 : 시리아 다마스쿠스 우마이야 모스크

 

 

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아랍어: صلاح الدين الأيوبي, 쿠르드어: سه‌لاحه ‌دينێ ئه ‌يووبى, 페르시아어: صلاح الدین ایوبی, 터키어: Selahaddin Eyyubi) 또는 살라딘 (1138년? ~ 1193년 3월 4일)은 12세기경 티크리트(현재 이라크 북부) 출신의 쿠르드족 무슬림 장군이자 전사였으며 이집트, 시리아의 술탄이었다. 3차 십자군 원정에 맞서서 이슬람을 이끌었다. 전성기에 그는 이집트, 시리아, 예멘, 이라크, 메카, 헤자즈 등지를 아우르는 아이유브 왕조를 세웠다. 서양에서는 살라딘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하지만 그의 본명은 유수프(Yousuf) 였다. 그는 그의 지도력과 군사적 역량으로 무슬림과 기독교계 모두에게 알려졌으며, 십자군과 맞서 전쟁을 치를 당시에 탐욕스럽고 무자비했던 십자군의 군주들에 비해 온건하고 약속을 잘 지키는 자비로운 군주로 덕망이 높았으며 그가 보인 기사도 정신과 자비심은 서방세계에 널리 전해져 수많은 전설과 기록으로 남았다. 살라딘이라는 그의 이름은 아랍어로 "정의와 신념"을 의미한다.

 

생애

성장1138년 티크리트의 쿠르드 가문에서 태어난 살라딘은 다마스쿠스에서 학업을 마쳤다. 그의 아버지 나짐 앗딘 아이유브(Najm ad-Din Ayyub, ? - 1173년)는 1139년에 티크리트에서 쫓겨나 삼촌 아사드 알딘 시르쿠(Asad al-Din Shirkuh)와 함께 모술로 갔다. 나짐 앗딘 아이유브는 나중에 이마드 앗딘 장기(Imad ad-Din Zengi)의 부하가 되었으며 이마드 앗딘 장기는 나짐 앗딘을 발베크(Baalbek) 요새 수비대장으로 임명했다. 다마스쿠스에 머무는 10년 동안 누르 앗딘의 법원에서 수니파의 교리를 배운 살라딘은 그의 삼촌인 시르쿠에게서 기초 군사 교육을 마쳤으며, 1160년대 이집트 파티마 왕조의 분파와의 전투끝에 승리하여 1169년 삼촌 시르쿠가 장관으로 이 지역에 대한 지배를 시작하였다. 예루살렘의 아모리 1세가 통치하는 예루살렘 왕국으로부터 이집트를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한 살라딘은 이집트 왕가의 혼란 속에서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예측을 깨고 점차 영향력을 키워갔다.

 

행운

시리아의 외인부대 지휘관이었던 살라딘은 이름뿐인 칼리프 알아디드가 죽자, 1171년 9월 이집트에 대한 실제적인 통치권을 행사하였다. 살라딘은 이집트의 경제를 재건하고 군대를 양성하는 한편, 그의 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살라딘의 명목상 주인이었던 누르 앗딘과의 마찰을 피했다. 누르 앗딘이 죽기 전까지 살라딘은 가급적 군사행동을 피했지만 이내 십자군과의 대대적인 전쟁에 들어가게 되었다. 1174년 누르 앗딘이 사망하자 살라딘은 이집트의 술탄이 되었다. 그는 셀주크 투르크로부터 독립을 선포하였으며 아이유브 왕조를 세우고 이집트에 수니파 교단을 회복하였다. 그는 영토를 확장하고 파티마 왕조 지지세력을 소탕하였으며 홍해를 건너 예멘까지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였다. 수니파 신도들은 그에게 '신의 친구'(Waliullah)라는 호칭을 붙였다.

 

십자군과의 전쟁

1170년과 1172년 살라딘은 누르 앗딘의 예루살렘 왕국 침공으로부터 퇴각하였다. 살라딘은 시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얻게 되기 전까지 예루살렘 왕국이 이집트와 시리아 사이의 완충지대로 남아있기를 희망하였기 때문이다. 누르 앗딘 사후 그의 직위는 아직 소년이었던 살리흐 이스마엘 알말리크에게 계승되었지만 이 소년 역시 1181년 사망하였다. 누르 앗딘 사후 살라딘은 다마스쿠스로 행군하였으며 대중의 환영을 받았다. 그는 선왕을 존중하는 의미로 누르 앗딘의 미망인과 결혼하였다. 누르 앗딘이 통치한 다른 두 대도시 알레포와 모술은 그의 수중에 떨어지지 않았지만 살라딘은 이 도시들에 대한 그의 영향력을 계속 행사하였다. 살라딘은 1176년과 1186년 이들 도시에 대한 공성에 나섰지만 1176년 5월 22일 알레포 공성 당시 해시시를 먹는 자들(Hashshashins)이라는 정예 암살자 조직 아사신의 공격을 받고 공격을 철수하기도 하였다.

살라딘은 시리아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해 나갔으며 십자군과의 대규모 전투에서도 늘상 승리하였다. 단 한번, 1177년 11월 25일의 몽기사르 전투에서 살라딘은 패배를 기록하였는데, 예루살렘의 보두앵 4세와 샤티용의 레날드, 성전 기사단 연합군과 맞닥뜨린 살라딘은 대패하여 병력의 대부분을 잃고 본국 이집트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1178년 살라딘은 십자군과 휴전 협정을 맺었다. 살라딘은 패전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며 군대를 재건하였고, 1179년 벌어진 십자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십자군의 거듭된 반격은 살라딘을 자극하였고, 특히 사티용의 레날드는 홍해 함대를 동원하여 무슬림의 교역과 순례길을 습격해댔다. 이어서 레날드는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를 위협하였고, 살라딘은 1183년과 1184년 응징 차원에서 케라크의 레날드 요새를 공격하였으며, 레이널드 또한 1185년 하지의 순례자들을 공격해 보복하였다.

 

1187년 7월 살라딘은 예루살렘 왕국을 함락시켰다. 1187년 7월 4일 하틴 전투에서 뤼지냥의 기와 예루살렘 왕 트리폴리의 레몽 3세 연합군과 대치한 살라딘은 십자군 부대를 괴멸시켰으며, 십자군의 재앙으로 끝난 이 전투는 십자군 원정사에 전환점이 되었다. 샤티용의 레날드는 살라딘에게 사로잡혀 처형되었는데, 유럽측의 기록에 따르면 이는 레날드가 상단을 습격하는 과정에서 살라딘의 누이를 살해한데 대한 보복이었다고 하지만 무슬림측의 기록에는 없는 부분이다. 무슬림의 기록에 따르면 살라딘은 누이가 없었으며, 그를 따르는 여자 무슬림이 있었다고 전할 뿐이다. 뤼지냥의 기 역시 사로잡혔지만 살라딘은 그의 목숨을 보전해주었다.

하틴 전투가 있은 지 이틀 후 살라딘은 모든 군인 포로들을 끌어내 목을 벨 것을 명령하였고, 이 처형은 살라딘의 비서인 이마드 앗 딘의 기록에 남았다. 기록에 따르면 살라딘은 감옥에 있느니 죽는게 낫다며 그들의 목을 베라고 지시하였고, 그의 주위엔 많은 학자들과 수피(Sufi) 교도들, 독실한 신도들과 수도자들이 모여들어 칼을 뽑고 소매를 걷으며 자신들의 손으로 포로들을 처형하고 싶다고 애걸하였다고 한다. 살라딘은 밝은 표정을 하고 있었으며 기독교인들의 얼굴에는 절망의 빛이 서렸다고 전해진다. 이는 살라딘의 첫 처형이 아니었다. 1179년 8월 29일 살라딘은 바이트 알아존의 성을 함락시켰을때 700 명의 포로들을 처형한 전례가 있다.

바하 앗딘의 기록에 따르면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전 바하 앗딘에게 팔레스타인 뿐 아니라 무슬림에게 속하지 않은 모든 땅을 비신도들로부터 해방시키고 싶다는 의지를 피력한 바 있다고 한다. 이어서 살라딘은 모든 십자군 도시에 대한 정복을 시작하였다. 88년간 십자군 도시였던 예루살렘을 1187년 10월 2일 접수한 살라딘은 본래 협상 같은 것은 하지 않으려고 하였지만, 예루살렘을 사수하던 이벨린의 발리앙은 3천에서 5천에 이르는 예루살렘의 무슬림들을 학살하고 무슬림의 성지를 파괴하겠다는 협박으로 살라딘을 협상에 끌어낼 수 있었다. 도시 안의 프랑크족들은 남녀노소를 불분하고 몸값을 지불하고 무사히 예루살렘을 떠날 수 있게 되었지만 사실상 살라딘은 몸값 일부만을 지불한 사람들도 무사히 도시를 떠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이마드 앗딘의 기록에 따르면 몸값을 지불하지 못한 7천에서 8천 가량의 남녀가 노예 신세가 되었다고 한다.

이제 남은 것은 티레(Tyre)였다. 티레의 십자군을 지휘하던 몬페라토의 코라도는 티레의 수비를 강화하고 살라딘의 두 차례에 걸친 공성을 막아냈다. 1188년 살라딘은 뤼지냥의 기를 석방하여 그를 그의 아내인 예루살렘의 시빌라에게 돌려보냈다. 기와 시빌라는 티레로 입성하여 피난민들을 찾고자 하였지만 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코라도는 이들을 돌려보냈고, 기는 아크레에 대하여 공성을 단행하였다.

하틴에서의 패배와 예루살렘의 함락은 제3차 십자군 원정의 발단이 되었다. 영국이 재정을 부담한 3차 십자군은 아크레를 점거하였으며, 영국의 국왕 리처드 1세는 아크레의 무슬림들을 처형하였다. 살라딘은 8월 28일부터 10월 10일 사이에 포로로 잡은 모든 프랑크인들을 처형함으로써 이에 보복하였다. 무슬림의 기록에 따르면 전위부대가 잡아온 프랑크인 포로를 살라딘이 목을 베어 처형하자 병사들이 남은 몸통을 난자해 복수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고자 하였다고 한다.

1191년 9월 7일 살라딘의 군대는 사자왕 리처드 1세의 군대와 맞닥뜨려 아르수프 전투를 벌였다. 비록 살라딘은 리처드와 싸워 전투에서 패배하였지만 리처드 역시 예루살렘을 정복하는데는 실패하였다. 두 왕은 내심 상대방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고, 일련의 기품있는 일화들을 낳았다. 리처드 1세가 부상을 당하자 살라딘은 공격을 중단하고 그의 개인 의사를 보내 상처를 돌보게 하였으며 리처드 1세가 전투중에 말을 잃자 살라딘은 두 필의 말을 보내 그가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살라딘은 눈으로 채운 신선한 과일을 선물로 보내기도 하였고, 호의에 감복한 리처드 1세는 자신의 누이와 살라딘의 동생을 결혼시키자는 제안을 하였다. 예루살렘은 결혼 선물로 하자는 것이다. 결국 두 왕은 1192년 평화 협정을 맺었고, 예루살렘은 무슬림의 지배하에 두되 기독교인 순례자들이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게 되었다.

 

사망

리처드 1세가 십자군 원정에서 이탈한 지 오래 지나지 않은 1193년 3월 4일, 살라딘은 다마스쿠스에서 눈을 감았다. 그의 사후 살라딘의 금고를 열어본 사람들은 그의 재산이 장례식을 치르기에도 부족한 정도의 수준임을 보고 놀랐다. 그는 대부분의 재산을 어려운 이들을 돕는 데 사용하였던 것이다.

현재 그의 무덤은 시리아 다마스쿠스의 우마야드 모스크(Umayyad Mosque) 복서쪽 모퉁이에 위치하며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대리석으로 만든 석관을 기증하였지만 살라딘의 시신은 아직도 석관 옆 목재로 만든 관 안에 안치되어 있다. 이곳은 현재에도 많은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기독교도들과의 많은 전투에도 불구하고 살라딘은 유럽에 관대하고 예의바른 사람으로 알려졌으며, 14세기경 그를 칭송하는 많은 시들이 나타났다. 단테 또한 그를 미덕을 갖춘 이교도로 묘사한 바 있으며, 월터 스코트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저작에서 훌륭한 사람으로 그려졌다. 살라딘은 특히 리처드 1세의 존경을 샀는데, 리처드 1세는 살라딘을 위대한 왕으로 평하며 의심할 여지 없이 이슬람 최고의 지도자라고 하였다. 살라딘과 리처드 1세는 많은 선물을 교환하며 지냈지만 직접 대면하지는 않았다.

살라딘의 자비심을 보여주는 일화가 1191년 4월에 발생한 바 있다. 프랑크족 여인의 3달 된 아기가 유괴되어 노예시장에 팔리자 프랑크인들은 이 여인에게 살라딘에게 자비를 구할 것을 권하였고, 사연을 전해들은 살라딘은 사재를 모아 아기를 사서 여인에게 돌려주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에 따르면 여인은 눈물을 쏟으며 크게 감사하였다고 한다.

살라딘에 의하여 건축된 구조물들이 일부 현재까지 남아있다. 1175년부터 1183년까지 카이로에 쌓은 성채가 그러하며, 시리아와 이집트 전역에 걸쳐 크고 작은 구조물들이 남아있다. 특히 그가 산 정상에 구축한 콸랏 알긴디(Qalaat Al-Gindi) 요새는 상단의 통행로를 잘 관측할 수 있는 요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석재로 만들어진 큰 방들과 상점, 수도시설이 포함되어 있다.

 

 

 

보두앵 4세(프랑스어: Baudouin IV, 1161년 - 1185년 3월 16일)

예루살렘의 아모리 1세와 그의 첫 번째 아내 쿠르트네의 아그네스의 아들로 1174년부터 1185년까지의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이다. 그의 친누이로는 예루살렘의 여왕 시빌라가 있으며,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예루살렘의 보두앵 5세가 시빌라의 아들이다. 그의 배다른 누이로는 예루살렘의 이사벨라 1세가 있으며, 어린 남동생도 있었으나 유년기에 일찍 죽었다. 별칭은 ‘문둥이왕 보두앵’(Baudouin le Lépreux)이다.


초기 삶

보두앵이 아직 어렸을 때, 예루살렘 궁정에 있던 그의 아버지와 그의 어머니인 야파와 아스칼론의 백작부인이나 나중에는 시돈의 영주가 된 쿠르트네의 아녜스는 짧은 교제를 한 후 강제로 헤어졌다. 보두앵의 나이가 아홉 살이 되었을 때 고전학자이자 언어학자이면서 동시에 역사학자인 티레의 기욤(나중에 티레의 대주교와 왕의 비서를 겸임하게 됨)이 가정교사로 배치되어 그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하루는 보두앵이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가 그만 서로의 손을 할퀴어 부상을 입게 되었는데, 보두앵만이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기욤이 즉시 보두앵을 의사에게 데려갔다. 의사가 진찰한 결과, 보두앵은 심각한 피부병인 나병에 걸렸으며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이후 보두앵의 나병은 급속도로 확산되어 몸 전체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보두앵의 아버지가 1174년에 죽음에 따라 같은해 7월 15일 보두앵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당시 그의 나이 열세살이었다. 당시 예루살렘 왕국은 귀족들이 서로 파벌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었으며, 최대의 적인 살라딘의 지도 아래 이슬람 세력이 이집트에서 시리아까지 그 영향권을 넓혀가면서 다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기에 존망이 불투명한 상태였다. 그런 시기에 왕이 된 보두앵은 국정을 맡기에는 나이가 아직 어렸기 때문에 비공식적으로 그의 아버지의 사촌인 트리폴리의 레몽 3세와 플랑시의 밀 등 두 명의 섭정을 계속적으로 두었다. 1175년 레몽 3세는 예루살렘 왕의 대행자로서 살라딘과 조약을 맺었다.

나병환자였던 보두앵이 오랫동안 재위하거나 결혼해서 상속자를 낳을 가망은 없었다. 그리하여 신하들과 영주들은 다음 왕위의 강력한 후보자로 떠오른 보두앵의 누이 시빌라 공주와 배다른 누이 이사벨라 공주의 영향력을 받게 되었다. 시빌라는 베타니아 수녀원에 있는 대고모 로베타의 보살핌을, 이사벨라는 그의 어머니인 나블루스의 왕태후 마리아 콤네나의 보살핌을 받았다.

 

보두앵의 통치

레몽의 섭정은 보두앵의 즉위 2주년에 끝났다. 소년왕은 이제 성년이 되었다. 그는 레몽이 살라딘과 맺은 조약을 비준하는 대신에 다마스커스와 베카 계곡의 주변을 급습하였다. 그는 자신의 외삼촌인 조슬랭 3세를 청지기에서 해방시켜 에데사 백작의 작위를 주었다. 조슬랭은 그에게 가장 가까운 남자 친척이었지만 왕위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믿을 수 있는 보조자로 평가받았다. 실제로도 그는 자신의 충성심을 증명해보였다.

그의 섭정으로서 트리폴리의 레몽이 시빌라 공주의 결혼 상대자로 프랑스의 루이 7세와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의 사촌인 몬페라토의 굴리엘모와의 교섭을 시작하였다. 굴리엘모는 자신의 혼인을 위해 10월 초에 도착해 야파와 아스칼론의 백작이 되었다. 그는 시빌리와 더불어 무능력한 왕의 뒤를 이어 왕국을 통치할 수 있기를 기대하였다.

한편 보두앵은 이집트에 있는 살라딘의 세력 기반에 대한 공격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는 마누엘 1세 콤네누스에게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샤티용의 레날드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냈다. 최근에 레날드는 알레포의 감금 생활에서 해방되었다. 그가 왕후 안티오키아의 마리아의 의붓아버지였기 때문에 마누엘이 그의 몸값을 지불하였다. 마누엘은 예루살렘 총대주교의 부활과 자신의 조카딸이자 마리아 왕태후의 자매인 테오도라 콤테나와 안티오키아의 보에몽 3세의 중매 결혼을 요구하였다. 1177년에 돌아온 레날드는 부유한 미망인 밀리의 스테파니와의 결혼이라는 보상을 받았다. 이 결혼으로 그는 사해 근처의 알 카라크 성채를 손에 넣었다. 보두앵은 레날드와 몬페라토의 굴리엘모에게 남쪽의 방위에 대한 협력을 보증받았다. 하지만 6월에 굴리엘모가 말라리아에 걸려 시빌라에게 아들 보두앵 5세를 남겨준 채 시름시름 앓다가 수개월 후에 아스칼론에서 죽어버렸다.

8월에는 보두앵의 사촌 플랑드르의 필리프가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에 왔다. 필리프는 가신을 통해 왕의 누이들과 레몽의 섭정 지위를 자신에게 달라고 요구하였다. 이벨린의 보두앵이 필리프의 요구를 대중 앞에서 무례하다고 항의한 것에 대해 예루살렘 대법원도 동의하자 마음이 상한 필리프는 예루살렘을 떠나 그 대신에 안티오키아 공국으로 종군하였다.

1177년 11월 살라딘이 수비군이 적은 예루살렘 왕국의 서남부에 위치한 아스칼론 요새를 노려 이집트 방면에서 2만 6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급습하려 하였다. 보두앵은 이 정보를 입수하고 아스칼론을 도우러 약 4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살라딘보다 먼저 요새에 도착하였으나 곧 살라딘의 군대에 포위당하였다. 이때 보두앵은 말에서 내려 땅에 엎드려 예수가 못박혀 매달렸다고 전해지는 성십자가 앞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면서 구원의 기도를 하였다. 그 모습을 본 모든 병사가 고무되어 끝까지 항전할 것을 맹세했다. 사기가 충전된 보두앵 4세의 군대는 살라딘의 대군을 맞아 승리를 거머쥐는 이를 몽기사르 전투라고 부른다. 왕은 군사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개선하였다. 같은해, 보두앵은 자신의 의붓어머니인 왕태후 마리아와 이벨린의 보두앵의 혼인을 승낙하였다. 그러나 이는 이벨린 가문에게 야심을 불러일으키는 위험을 가져왔다. 마리아가 지지함에 따라 이벨린 가문은 시빌라 공주와 이사벨라 공주와의 혼담도 시도하였다.

 

보두앵과 뤼지냥의 기

1180년 여름 보두앵 4세는 과부가 된 시빌라를 총사령관 뤼지냥의 아말릭의 형제인 뤼지냥의 기와 결혼시켰다. 일부 역사가들은 시빌라의 두 번째 혼인이 왕의 어머니의 영향 아래 추진되었다고 주장한다. 트리폴리의 레몽도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이벨린의 보두앵과 공주의 결혼을 시도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외국의 원조를 받기 위해서는 외국인 배우자는 필요 불가결한 존재였다. 기의 신분이 프랑스의 새 왕인 필리프 2세와 왕의 사촌 헨리 2세의 가신이라는 점이 강점으로 부각되었다. 그렇게 해서 기는 보두앵 5세의 후견인으로서 중요한 인물로 부상하였으며 아스칼론의 봉토를 하사받았다. 보두앵은 또한 여덟 살의 이복 누이 이사벨라를 토론의 험프리 4세와 약혼시킴으로써 험프르의 할아버지에게 진 신세를 보답하였다. 그리고 이사벨라를 그녀의 어머니와 이벨린 일족의 통제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샤티옹의 레날드의 의붓아들임).

기는 성급하게 레날드와 손잡고 그의 진지인 케락의 이점을 이용하여 이집트와 다마스커스를 오가는 대상(隊商)을 괴롭혔다. 이에 살라딘의 군대가 출정하여 1182년 벨보어 성 전투를 통해 앙갚음을 하였다. 보두앵의 병세가 나날이 악화되어 눈이 멀고 걷는 것이 불가능해질 지경에 이르자 기가 보두앵의 대리청정으로 위임받았다.

그러나 당대 제일의 미남자라는 것만 빼고는 아무 장점도 없었던 기가 정책을 돌보면서 곧 그의 무능함이 드러나자 보두앵은 당장 그에게 준 섭정의 지위를 박탈하고 다시 왕국의 지배권을 장악했다.

 

죽음

비록 보두앵이 시빌라에게 어떠한 악의도 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왕위 계승권에서 그녀를 제외시켰다. 그리고 아그네스와 그녀의 남편인 시돈의 뤼지냥, 레몽 그리고 다른 많은 봉신들의 지지와 함께 아직 다섯 살에 불과한 자신의 어린 조카를 자신의 후계자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죽은 후에는 조카가 성년이 될 때까지 레몽은 그의 보호자로서 섭정을 맡도록 하였다. 레몽은 당시 기와 대립하고 있던 처지였다. 보두앵 4세는 통치를 계속하면서 어린 조카를 1183년 11월 20일 보두앵 5세로서 공동 지배자로 내세웠다.

1184년 초 보두앵은 시빌라와 기가 맺은 혼인을 무효화 시키려고 하였다. 이에 반발한 기는 보두앵의 엄중한 경고를 무시한 채 아내 시빌라를 데리고 자신의 영지인 아스칼론으로 돌아갔을 뿐 아니라 이미 예루살렘 왕국에 귀순하여 보호를 받던 베두인족을 대량 학살하기까지 하였다. 왕실 내분과 케락을 구원하기 위한 군사 원정을 강행한 탓에 보두앵의 건강은 상당히 나빠졌다. 결국 1184년 아크레에서 모후인 아그네스가 죽은 지 몇달 후인 1185년 봄에 보두앵 4세가 예루살렘에서 서거하였다. 향년 24세였다.

 

 

 

<르노 드 샤티용>

레날드 또는 르노 (1125년 – 1187년 7월 4일)는 제2차 십자군에 참가한 기사로 십자군이 철수한 이후에도 성지에 남아 1153년부터 1160년까지 안티오키아 공국을 다스렸다. 그는 당시에 이슬람과의 휴전협상을 빈번히 어기고 논란을 일으키는 것으로 유명했고 결국 살라흐 앗 딘에게 붙잡혀 직접 살라흐 앗 딘의 손으로 처형당했다.

 

생애

레날드의 출신은 명확하지 않다. 1147년 이전 어느 시점에선가 십자군에 참가하여 팔레스타인으로 왔고 안티오키아 공국에서 일하다가 1153년 안티오키아의 콩스탕스와 몰래 결혼 했는데 당시 예루살렘 왕국의 왕이던 보두앵 3세는 레날드의 비천한 신분 때문에 이 결혼에 반대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1156년 레날드는 비잔티움 황제 마누엘 1세 콤네누스에게 자신의 공작위를 승인하는 댓가로 아르메니아의 반란을 공격한다고 했다가 마누엘이 자신과의 약속을 어겼다며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인 키프로스를 침공하였다. 이 과정에서 안티오키아의 라틴 총대주교 이메리가 이에 반대하고 원정비용을 대는 것을 거부했는데 레널드는 총대주교를 붙잡아 발가 벗기고 머리의 상처에 꿀을 발라 뜨거운 태양아래의 성채에 매달아 놓았다. 태양과 벌레에 시달린 결국 총대주교 이메리는 원정비용을 지급할 수밖에 없었다. 레날드의 군사들은 키프로스를 약탈하고 파괴하고 유린했다.

비잔티움 황제 마누엘은 키프로스에 대한 복수로 군사를 일으켜 시리아로 진격해 왔다. 강력한 대군앞에 두자 레날드는 맨발로 벌벌 기면서 황제에게 자비를 구했고 1159년 황제에게 배상금을 지불하고 안티오키아를 동방 정교회로 개종할 것을 서약했다. 마누엘이 안티오키아에 입성했을 때 레날드는 굴종의 표시로 황제의 말을 끌고 입성했다.

이듬해 레날드는 이슬람군에 포로로 붙잡혔고 7년동안 알레포에 감금되었다. 그는 막대한 몸값을 주고 1176년 풀려났다. 이 때의 복수로 그는 평생동안 이슬람에 대한 적개심을 품고 이슬람교도를 무자비하게 다뤘다.

아내 콩스탕스가 1163년 죽고 그는 또다른 부유한 미망인 스테파니와 결혼했는데 이 결혼으로 사해 근처의 알 카라크 성채를 손에 넣었다. 이 성채는 다마스쿠스와 이집트를 연결하는 통상로의 요충지였다. 이 성채의 영주로 있으면서 레날드는 적들과 이슬람 포로를 잔인하게 다루어 성채에서 밀어 바위로 떨어뜨리는 잔학 행위로 악명을 떨쳤다.

1177년 그는 예루살렘의 보두앵 4세와 함께 몽기사르 전투에 참가하여 살라흐 앗 딘을 물리치는 데 일조했다. 살라흐 앗 딘은 겨우 도망치고 십자군과 휴전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1181년 레날드는 휴전조약을 깨고 알 카라크 성채 근처를 지나던 카라반을 공격했고 살라딘은 이에 항의 했지만 보두앵 4세는 레날드를 통제 할 수 없었다. 결국 이듬해 이슬람과 기독교국가들과의 전쟁이 재개 되었다. 레날드는 홍해에 선단을 띄워 해적행위를 시작했고 이슬람의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 근처까지 유린하고 다녔다. 이 행위는 살라흐 앗 딘의 분노를 샀고 살라흐 앗 딘은 레날드에게 복수할 것을 맹세하고 카라크를 공격했다. 당시 카라크에서는 레날드의 양자 엥프레와 예루살렘 공주 이사벨은 결혼식을 올리고 있었다. 이때 트리폴리 백작 레몽의 도움으로 카라크는 함락되지 않았다.

1186년 시빌라와 뤼지냥의 기가 예루살렘 왕이 되자 왕국은 기의 "궁정파"와 트리폴리의 레몽, 이벨린가문의 귀족파로 나뉘었는데 레날드는 기의 편에 섰다. 그해 말 레날드는 또 다시 살라딘과의 휴전협정을 어기고 다마스쿠스와 이집트를 오가는 카라반을 공격했다. 티레의 기욤등 당시 기독교측 사료에는 이 카라반에 메카의 순례여행을 다녀오던 살라흐 앗 딘의 누이들이 있었고 레날드로부터 모욕을 당했다고 전해지지만 이슬람측 자료에는 이런 언급이 없다. 예루살렘의 왕 기는 레날드를 처벌하여 사라흐 앗 딘의 환심을 사려했으나 레날드는 자신의 땅은 자신이 주인이라며 처벌을 거부했고 살라흐 앗 딘은 두번이나 휴전협정을 어기고 이슬람의 성지를 모욕한 레날드를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목을 벨 것을 맹세했다.

1187년 7월 4일 살라딘은 예루살렘 왕 기와 레몽, 레날드, 성전 기사단, 병원기사단등 기독교 연합군과 하틴 전투에서 맞붙었다. 이 전투는 십자군의 전략적 실수로 기독교군의 몰살로 이어졌고 기와 레날드는 포로로 붙잡혔다. 살라흐 앗 딘은 기와 레날드를 자신의 천막으로 끌고 오게 했다. 살라흐 앗 딘은 레날드에게 협정위반을 준엄하게 꾸짖고 기 왕이 보는 앞에서 직접 그의 목을 쳤다. 기는 벌벌 떨면서 다음 차례는 자신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살라딘은 기를 살려주었다.

레날드는 당시에는 이슬람의 손에 순교된 전사의 이미지로 알려졌지만 현재는 포악한 강탈자, 해적질 및 수차례의 협정 위반과 비신사적 약탈행위로 예루살렘 왕국의 멸망에 상당한 책임이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