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개/고대 ~중세 전쟁

아이언 클래드 (Ironclad, 2011) 6.1

슐츠105 2013. 2. 23. 02:16

액션, 어드벤처 | 영국, 미국 | 121 분 | 

감독 조나단 잉글리쉬

출연 제임스 퓨어포이 (마르쉘 역), 브라이언 콕스 (알바니 역), 데렉 자코비 (콘힐 역), 케이트 마라 (레이디 이자벨 역)

 

줄거리
영국을 배경으로 마그나 카르타(대헌장) 이후 교왕의 지지를 얻어 덴마크 용병들을 모아 자신을 반대했던 세력에 잔인한 복수를 시작하는 영국왕 존을 대항해 반군들이 올때까지 로체스터 성에서 시간을 벌어야 하는 기사들과의 싸움을 그린 역사물


 

 

 

 

 

 

 

 

 

 

 

 

 

 

마그나 카르타

 

 

 

마그나 카르타(라틴어: Magna Carta, Magna Carta Libertatum, 영어: the Great Charter of Freedoms) 혹은 대헌장(大憲章)은 1215년 6월 15일에 영국의 존 왕이 귀족들의 강요에 의하여 서명한 문서로, 국왕의 권리를 문서로 명시한 것이다. 왕에게 몇 가지 권리를 포기하고, 법적 절차를 존중하며, 왕의 의지가 법에 의해 제한될 수 있음을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국왕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문서화하기 시작하여 전제 군주의 절대 권력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흔히 영국 민주주의의 시발점으로 강조되는 것과 달리, 문서 자체에 민주주의적 요소는 없다. 이 문서에서 민주주의의 시사점은 후대에 국왕과 대립이 발생했을 때 계속 확대 해석된 것이다.


배경
1189년 헨리 2세의 뒤를 이어 리처드 1세가 즉위했다. 그러나 그는 10년간을 십자군 전쟁과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외국에 있었고, 본국에는 단지 6개월 가량만 있었다. 따라서 사실상 그의 동생인 존이 왕 역할을 하고 있었다(존은 헨리 2세의 아들이자 리처드 1세의 동생이다).

 

10년 뒤인 1199년, 사자왕 리처드 1세가 사망하자 존이 정식으로 대관식으로 즉위했다. 프랑스의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의 아들인 아서 왕자(브르타뉴 공)가 정당한 왕위 계승자라고 주장하였고, 프랑스로 존 왕을 소환하였으나 존 왕은 거절하였다(이때는 영국 왕은 프랑스 국왕에 대해 신하 관계에 있었다).

존 왕은 프랑스와 영토 전쟁을 명목으로 조세를 대폭 상향 조정했다. 그러나 프랑스와 전쟁에서 크게 패하여 노르망디의 대부분을 빼앗겼고, 교황과의 충돌로인해 파문을 당했다.

노르망디의 대부분을 빼앗기고 영주들과 대립 관계에 놓였고, 교회와도 맞섰으며, 귀족이나 도시에 대해 과도한 세금을 매긴 존 왕에게 귀족과 성직자들이 반발을 일으킨 것은 당연했다.

결국 영국 내에서는 반란이 일어났다.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라 불리는 이 문서는 존 왕과 귀족들 간의 이러한 무력 충돌의 결과, 수세에 몰린 존 왕이 전통적으로 귀족들이 누리던 봉건적 권리와 지위를 재확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봉신과 주군 간의 봉건적 관계에서 봉신이 지는 의무는 흔히 "조언과 원조(concilium et auxilium)"로 요약된다. 존 왕은 당시 프랑스에서 자신이 오래 수행해 온 전쟁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봉신들의 이 의무를 악용하여 수탈을 거듭하였으며, 이것이 봉건 귀족들을 자극하게 된 것이다.

이 문서 중, "어떠한 군역세 또는 봉건 원조도 우리 왕국의 공통된 조언(commune consilium)에 의하지 않고서는 징수하지 않는다"는 조항(제12조)은 특히 유명하다. 이 조항은 후일 일반적으로 징세에 대해서는 의회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의미로 해석되게 된다. 또한 "자유민은 그와 동등한 자의 적법한 판정(judicium parium suorum)에 의하지 않고는 체포, 구금되거나, 재산이 박탈되거나, 법적 보호가 박탈[되지 않는다]"는 조항(제39조)은 후대의 법률가와 역사가들에 의하여 배심재판을 보장하는 뜻으로 해석되어 왔지만, 원래의 의미는 봉건 영주가 전통적으로 누리던 봉건법정을 열 권한을 보장하는 내용이었다.

 

"카르타(Carta)"는 중세 영국 법제하에서 특정 집단에게 국왕이 부여하는 특혜나, 구체적 양허사항을 담고 있는 문서를 말한다. 도시, 직업 집단, 대학교 등에게 국왕이 부여하는 특혜(libertates; liberties)를 규정한 문서들이 바로 그것이다. "마그나 카르타" 또한 이 범주를 넘어서는 것은 아니며, 따라서 현대적 의미의 "인권선언"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법제도의 변천과정에서 흔히 그러하듯이, 과거의 문서가 담고 있는 의미는 후세의 해석자들이 지배하게 되며, 마그나 카르타는 후대의 해석을 통하여 민주주의와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문서로 각인되게 되었다.


존왕
존 (1167년 11월 24일~1216년 10월 19일)[1][2]은 잉글랜드의 왕이다. 1199년 4월 6일에 즉위하여 그가 죽을 때까지 왕위에 있었다. 존은 친형인 사자심왕 리처드 1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며,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프랑스지역의 땅을 지키지 못하였기 때문에 "실지왕"으로도 불린다.

역사적으로 존은 귀족들의 강요에 의해 대헌장에 서명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는 근대 민주주의로의 발전의 첫 단계로 널리 알려져 있다. 존은 로빈 후드와 같은 역사 소설에 자주 등장한다.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중인 존 왕

 

 

1215년, 존 왕의 마그나 카르타 뒤집기 한 판 (출처 : http://blog.daum.net/uesgi2003/193)

 

중세 왕들의 장기라고 하면 복수를 빼놓을 수 없는데, 영국의 존(John) 왕처럼 복수에 매진했던 사람도 흔하지 않다. 형이었던 리차드 사자심 왕은 유명한 전사로 이름을 남겼고, 존은 자신이 입은 상처를 복수하는 것에 재능을 보였다.

1215년, 제후들이 존 왕을 압박해서 역사를 바꾸는 문서 권리대장전(Magna Carta)에 서명하게 만들었는데, 이 협정으로 존의 왕권은 크게 약화되었고 제후는 자유인의 권리를 보장받게 되었다. 왕과 제후가 서로 약간만 존중했다면 권리대장전을 계기로 오랜 갈등을 끝낼 수도 있었겠지만 양쪽 모두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다.

제후들은 권리대장전의 서명을 받아내자 마자 축배를 들며 존 왕을 '불명예', '나라에 아무런 도움이 안되는 왕', '노예', '쓰레기'라고 노골적으로 비웃었고, 이런 모욕을 전해 들은 존은 '이를 갈고 눈을 찌푸리고 나무가지를 씹으며' 분노했다. 분노가 진정되자, 그는 제후들에게 복수하기로 마음먹고 행동에 옮겼다.

 

존은 먼저 성을 지키는 용병들에게 성채를 단단히 지킬 것을 명령하고 전쟁준비를 시작했다. 자신의 옆에 남아있던 7명의 귀족과 함께 와이트 섬(Isle of Wight)으로 가서 병력을 모았다.

그는 2달 동안 군자금을 모으고 남부 항구 수비대의 충성심을 굳히는데 애를 썼다. 그 동안 외교사절은 로마를 오가며 교황의 지지를 얻어냈고 프랑스에서 용병들을 모집했다. 존에게는 천만다행으로, 2년 전에 이노센트(Innocent) 3세 교황과 분쟁을 끝내고 교황의 신하가 되기로 합의했던 것이 큰 힘이 되었다.

그 때부터 교황은 존의 가장 가까운 지지자가 되었고, 제후들의 반란과 권리대장전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영국 제후들은 사도좌(Apostolic See, 카톨릭 최고의 법률주체)가 보호하는 왕을 권좌에서 몰아내겠다는 것이냐? 성 피터의 이름으로, 반드시 처벌하겠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교황은 '수치스럽고 천박한 문서'를 저주하며 영원히 무효화시켰고 제후들에게 반란을 그만두지 않으면 파문시키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제후들은 왕이 평화를 해치고 있으며 자신들은 평화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교황의 협박은 거의 효과가 없었다.

 

교황의 축복과 많은 용병을 모은 존은 1215년 9월 말에 진군하기 시작했다. 반면에 제후들은 권리대장전 서명이후 한 달 동안 런던에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며 무방비상태로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존의 전쟁계획이 눈에 보여서야 군대를 모으고 옥스포드와 노샘프톤(Northampton)에 있는 왕의 성을 포위했다. 10월 초, 제후들은 켄트(Kent)까지 진격해 왕과의 일전을 준비했는데, 소수의 정찰대와 함께 있던 존은 자신이 제후부대와 겨우 몇 km 거리 밖에 있는 것을 알고 즉시 도버(Dover)로 후퇴했다. 제후부대는 왕이 캔터베리(Canturbury)에서 전진하고 있다는 루머를 듣고 후퇴하면서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

제후들은 왕의 진격을 늦추고 이미 충분한 병력에 더 많은 숫자를 더하기 위해, 콘힐의 레지놀드에게 로체스터(Rochester) 성을 넘기라고 설득했다. 영국 성 중에 가장 강력한 로체스터 성은 도버에서 런던에 이르는 길목을 가로막고 있었으며, 이 성을 장악하는 사람이 런던에서 남부와 바다로 이어지는 모든 통로를 장악할 수 있었다.

 

 

로체스터 성

 

 

 

기원이 로마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로체스터 성은 11세기 후반에 노르만족이 석벽을 쌓으며 성의 모습을 갖췄다. 헨리 1세가 1127년에 크렌베리 대주교에게 성을 바쳤고 대주교가 돈을 들여 거대한 본채(Keep)를 지었다.

13세기 당시만 해도, 로체스터 성은 난공불락으로 알려져 있었다. 공격측은 3개의 수비선을 만나게 되는데, 로체스터 마을 외곽의 벽, 성의 외벽 그리고 마지막으로 6층 높이에 4개의 탑을 가진 본채를 넘어야했다.


제후들은 140명의 기사를 뽑아 로체스터 성에서 존 왕의 공격을 막게 했고 역전의 용사 윌리암 도비니(William d'Aubigny)에게 지휘를 맡겼다. 그러나 성은 명성과 달리 공성전을 버틸 상태가 아니었고 임무를 포기하려는 기사들을 도비니가 막아세웠다. 그는 기사들의 수치심과 명예욕을 동시에 자극시켰다. 기사들이 수성 준비로 3일을 보내는 동안 존의 부대가 로체스터 성벽 앞에 나타났고 그 규모는 예상을 벗어나 대단한 병력이었다.

왕과 친위 귀족의 병력에 앙주(Anjou, 프랑스 북부최대 가문)가문에 충성하는 푸아투(Poitou)와 가스코뉴(Gascony) 기사들이 합류했고, 전쟁승리 후의 전리품을 노린 전사들과 '인간의 피말고는 생각이 없는' 용병 석궁병부대까지 대거 합류해, 기록에 따르면 '그 광경을 본 사람은 누구나 공포로 정신이 흐릿해질 정도였다.' 로체스터 성이 이미 적의 손에 넘어간 것을 안 존은 즉시 전면공격을 명령했다.

 

로체스터 마을의 외곽벽을 지키던 마을주민들은 존의 악명에 이미 기가 질린데다가 부대의 규모를 보고 겁에 질려 바로 도망쳤다.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은 왕의 기사들은 마을 성문을 열어 젖혔고 치열한 전투 끝에 도비니의 기사들을 본성 안으로 밀어넣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수비군은 달아나기 위해 싸웠을 뿐 런던으로 바로 도망갔다고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어쨌든 로체스터 성의 명성만 믿고 들어왔던 수비군은 본성 안에 갇히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

 

 최근에 존에 대해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있지만, 그에 대해 좋은 평가를 내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는 존을 '우리가 가진 왕 중에 최악의 왕... 신뢰를 저버린 아들이자 배신을 일삼는 형제... 온갖 범죄로 점철되고... 어떤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 아무리 좋게 봐도 칭찬할 구석이 없다"라는 윌리엄 스텁의 의견에 동의한다.

존은 '무딘 칼 존(John Sotfsword)'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새 신부의 침대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동안 노르망디를 프랑스에게 내준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존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는 것은 무리가 있다. 한 때 광활했던 노르망디와 앙주 제국의 영토를 프랑스에게서 계속 지켜낼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존과 항상 비교되는 리차드 사자심왕조차도 아버지 헨리 2세가 점령했던 프랑스 영토를 간신히 지켜낼 정도로 프랑스의 역공이 거세었다. 결국 존이 프랑스 영토를 잃었고 역사의 판단은 존에게 책임을 묻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존에게도 영광스러운 훈공이 있었다. 1202년 어머니 아끼뗀의 엘레노르(Elenor of Aquitaine)이 미라뷰(Mirabeau) 성에 갇혔을 때에 이틀 만에 130km를 달려 방심하던 적을 물리치고 귀족들을 모두 포로로 잡았었다. 1206년에는 난공불락이라던 몽또벙(Montauban) 성을 점령해 공성전에서도 전과를 올린 적이 있었다. 동시대를 살았던 귀족 중에 존을 무시했던 사람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1215년 당시 제후들은 월등한 병력을 가지고도 존과 정면대결하려고 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존은 무능한 지휘관이 아니라 거꾸로 평화를 유지하지 못한 비난을 받고 있다. 그는 적이 머리를 숙이면 아량을 보이지 않고 모욕을 줬으며 후환을 자초한 일이 많았다. 존이 적을 무찌르고 성을 빼앗을 때마다 더 많은 적과 더 많은 성이 그에게 저항했다.

 

런던에 있던 제후들은 존의 신속한 기동과 로체스터 성 공격에 당황했다. 그들은 도비니가 공격을 당하면 바로 달려가겠다는 맹세를 해놓고도 2주 동안이나 런던을 떠나지 않았다. 10월 26일, 로버트 피츠왈터(Willam Fitzwalter)가 700명의 기사를 데리고 구원을 갔지만 런던에서 겨우 35km 정도 갔을 때에 존의 부대가 자신에게 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피츠왈터의 부대는 존의 군사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는데도 런던으로 돌아가 술판을 벌이고 도박을 하며 나서려하지 않았다.

공성전 첫 날에 볼리(Boley) 언덕에 막사를 차린 존은 5개의 공성무기 제작을 명령했다. 그리고 런던에서 어떤 지원도 받지 못하게 메드웨이(Medway) 강의 다리도 부쉈다. 마지막으로 캔터베리의 모든 대장장이에게 삽과 곡괭이를 24시간 쉬지 않고 만들어서 보낼 것을 명령했다.

 

밤낮으로 로체스터 성을 공격했고 공성무기는 수비군에게 바위세례를 퍼부었다. 도비니와 기사들은 역전의 용사답게 존의 파상공격을 모두 물리쳤다. 살아남기 위해 수비군은 몇 주 동안이나 '성벽과 방어탑에서 적을 향해 돌을 던지고 무기를 던지며'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결국 포위군이 성벽을 뚫는데 성공했다. 기록에 따르면 '왕의 병사들은 부숴진 성벽 틈으로 밀고 들어갔고 큰 피해를 입었지만 수비군이 성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공격에 밀린 수비군은 본채(Keep)으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지만 도비니는 따라오는 적을 베어넘기며 더이상 추격하지 못하게 막았다. 식량이 떨어진 수비군은 썩어가는 말고기로 1주일을 버텼지만 그나마도 모두 떨어졌다.

존은 수비군을 아사시켜 성문을 열게 할 생각이 없었다. 갱도인부를 동원해 본채 밑을 파기 시작했다. 11월 25일, 4m기 넘는 벽 밑에 갱도가 완성되었고 지지대로 받쳐놓았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존은 내무관리에게 '40마리의 살찐 돼지를 지금 당장 보내기 바란다. 식용이 아니라 성을 무너뜨릴 목적이니까 상태가 좋지 않아도 된다.'라는 명령을 내렸다. 현재 로체스터 성의 기념물에는 40마리의 돼지가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지하갱도 작업은 성공해서 본채의 남동쪽 벽을 무너뜨렸고 존의 병사들이 본채 안으로 난입했다. 도비니는 반격에 나서 적을 밀어냈지만 거듭된 공격에 구석에 몰리게 되었다. 다행히도 본채 안의 구조 덕분에 존의 부대는 수비군이 막아낼 수 있을 정도로만 차례로 들어갈 수 있었다.

존은 하루 빨리 본채를 함락시키고 싶었지만 궁지에 몰린 수비군의 집념과 투지는 대단해서 결국 시간싸움이 되었다. 아사직전인 수비군은 혹시라도 있을 지 모르는 런던의 구원군을 기다리며 마지막 선택으로 부상이나 굶주림으로 싸울 수 없는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도비니는 존의 관용을 기대했지만 존은 절대로 그럴 아량이 없었다. 지긋지긋한 저항에 화가 나있던 존은 밖으로 밀려난 기사들의 손과 발을 잘랐다.

굶어죽기 직전인 도비니는 기사들의 의견을 물었고, '전투에서 패한 것도 아닌데 아사하는 것은 불명예'라며 차라리 존에게 죽겠다는 기사들의 의견에 따라 11월 30일 2개월의 공성전을 끝내고 투항했다. 존은 잃어버린 시간과 피해를 생각해 전원을 목매달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측근 기사가 '왕이시여. 전쟁은 이제 시작입니다. 전쟁의 무게가 어디로 기울지 모릅니다. 그들을 목매달라고 하신다면 우리의 적도 우리에게 똑같이 할 것입니다. 그러니 제발 명령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병사들이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라며 간청했다.

존은 지휘관급 기사들은 투옥시키고 나머지는 몸값을 받는 것으로 마음을 바꿨다. 처형당한 유일한 병사는 용병 석궁병으로 큰 피해를 입은 병사들이 처형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로체스터 성을 함락시키고 도버 항까지의 연결로를 확보한 존은 제후들이 항복하도록 복수의 원정길에 올랐다. 런던은 로체스터 성과 비교도 안되는 요새인데다가 계절도 겨울이어서 그는 노쌤턴으로 향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존은 군대를 분산시켜 제후들의 영지에 있는 집과 건물을 불태우고 물건과 가축을 약탈하며 하나도 남기지 말 것을 명령했다. 그는 저항하는 사람들은 모두 비참하게 처형했다. 그리고 파괴하는 것만으로도 성에 안차면 진격로에 있는 모든 초원과 마을에 불을 질러 만족감을 느꼈다.

 

존의 약탈 원정이 길어지면서 제후들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고 1216년에 프랑스의 필립 2세의 아들  루이 왕자에게 영국왕에 오를 것을 제안했다. 루이는 5월 21일에 군대를 이끌고 런던에 입성했다.

존은 프랑스 용병들이 루이와의 전투에서 배반할 것이 두려워 서쪽으로 후퇴했고 제후들은 이제서야 공세에 나섰다.

양쪽의 대결은 어이없게도 1216년 10월, 존이 이질로 사망하면서 막을 내리게 된다.

 

윌리암 도비니는 미국 건국에 간접이지만 큰 영향을 미친다. 도비니는 1236년에 사망하면서 아들 윌리암을 남겼고 윌리암은 1247년에 죽으면서 딸들에게 가문을 넘겼는데, 그 중에 이사벨이 로버트 드 로스(Ros)와 결혼하며 미국 건국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의 선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