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개/고대 ~중세 전쟁

페티 1453 (Fetih 1453, 2012) 7.6

슐츠105 2013. 5. 30. 18:00

액션, 어드벤처 | 터키

감독 파룩 악소이

출연 데브림 에빈 (술탄 메흐메드 2세 역), 이브라힘 셀릭콜 (우루바틀리 하산 역), 디렉 서베스트 (에라 역), 젠기즈 조스쿤 (지오바니 역)

 

줄거리

오스만투르크의 술탄 메흐메드2세가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

 

 

 

 

 

 

 

 

 

 

 

 

 

 

 

 

 

 

메흐메트 2세(오스만 터키어: محمد ثانى, 터키어: II. Mehmet, 1432년 3월 30일 - 1481년 5월 3일)

 

 

 

오스만 제국의 제7대 술탄이며, 초대 황제이다. 1444년부터 1446년까지 짧은 기간 통치하다가 퇴위되고 나중에 1451년부터 다시 즉위하여 1481년에 죽을 때까지 집권하였다. 그는 젊은 나이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고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켰으며 오스만 제국의 판도를 대폭으로 넓혀 ‘정복자(Fatih)’란 별명으로 불렸다.

 

생애
초창기

메흐메트 2세는 1432년 3월 30일 당시 오스만 제국의 수도인 에디르네에서 술탄 무라트 2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당시 세르비아의 흄 지방(현재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출신의 그리스도인 노예로 알려져 있다. 태어난 지 2년 만에 메흐메트는 맏형이 총독으로 있던 소아시아의 도시 아마시아로 옮겨갔다. 3년 뒤 메흐메트가 다섯 살이 되었을 때 맏형이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아마시아의 총독에 임명되었다. 나중에 둘째형이 아마시아 총독으로, 메흐메트는 마니사 총독으로 바뀌었다. 1443년 둘째형이 죽자 메흐메트는 술탄의 계승자가 되었고 다음해 아버지 무라트 2세는 아나톨리아의 카라만 연합군과 평화협정을 맺고나서 돌연 은퇴를 선언하고 12살의 메흐메트에게 술탄의 지위를 넘겨주고 남부 아나톨리아도 돌아가서 은둔했다.

메흐메트는 아버지가 다시 돌아와 헝가리군과 싸워주길 바랐는데 아버지 무라트는 처음에는 거절했다. 메흐메트는 결국 이런 편지를 아버지에게 썼다고 한다.

“ 당신이 술탄이시거든, 돌아와 당신의 군대를 이끌어주소서. 만약 내가 술탄이라면 지금 당신에게 술탄으로서 명령하노니, 돌아와 나의 군대를 이끌어주시오. ”


결국 무라트는 전장으로 돌아와 1444년 바르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게 되고 2년 후 아들 메흐메트를 퇴위시키고 다시 술탄에 복귀한다. 그러한 무라트 복귀의 배후에는 재상 할릴 파샤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와 메흐메트는 서로 반목했다고 전해지며 나중에 할릴 파샤는 메흐메트가 다시 정권을 잡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할 때 동로마 측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죄로 처형당했다.

 

동로마 제국 정복
1451년 아버지 무라트가 죽자, 그는 다른 형제들을 죽이고 정식으로 다시 술탄에 즉위했다. 두 번째로 치세를 시작하면서 아나톨리아 내륙부에 있던 카라만 제후국을 격파하고, 1452년 귀환하던 도중 보스포루스 해협에 루멜리 히사르(Rumelihisari, '유럽의 성')라는 요새를 건설하고 동로마 제국을 압박했다.

1453년 재상 할릴 파샤의 반대를 물리치고 출병한 그는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여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켜 역사의 무대에서 끌어내렸다. 제국을 정복한 이후 그는 다시 아나톨리아와 발칸 반도에 남아있던 비잔틴계 제후국들을 차례차례 정복하기 시작하였는데, 1460년 펠로폰네소스의 모레아, 1461년에는 아나톨리아 북서부에 있던 200년간 존속하던 비잔틴계 국가 트라페주스 제국을 차례로 멸망시켰다.

콘스탄티노플 정복 이후 메흐메트는 자신이 새로운 로마 제국의 황제로 자처하고 나섰다. 330년 로마 제국의 수도가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바뀌었고 동로마 제국이 로마 제국을 계승하였기 때문에 이를 점령한 자신에게 로마 황제의 권한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800년에 샤를마뉴가 교황 레오 3세로부터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임명된 데다가, 동프랑크 왕 오토 1세는 교황으로부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임명되었으며, 모스크바 대공국이 스스로를 제3의 로마로 선언하면서 러시아 제국으로 승격하였기 때문에 메흐메트의 주장은 빛을 잃게 된다.(이것은 러시아가 동로마의 마지막 공주와 결혼한 것과 동로마의 동방정교를 계승한 것을 근거로 선언한 것이다.)

 

 

 

 

아시아와 유럽의 정복

발칸반도에서는 베네치아 공화국 등 유럽의 여러 나라와 싸워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세르비아를 정복했다. 이후 그의 관심은 아나톨리아 지방으로 쏠렸다. 아나톨리아에서는 룸 셀주크 왕조의 해체 이래 각지에 할거한 여러 제후국을 정복하고 현재의 터키 공화국의 국토라 할 수 있는 아나톨리아 전부를 손안에 넣었다.

1475년에는 크림 반도에 할거하던 몽골 제국의 후예국가인 크리미아 칸국을 복속시키고 흑해를 오스만 제국의 바다로 만들었다. 30년에 걸친 두 번의 치세에 이르러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발칸 반도의 여러 왕국, 아나톨리아의 튀르크계 여러 세력을 정복해 오스만 제국의 세력을 급속도로 확대시켰다. 이로 인해 오스만 왕조는 제국이라 불릴 수 있는 내실을 획득할 수 있었다.

소아시아가 안정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으로 힘을 얻은 메흐메트는 자신이 로마 제국의 황제의 계승자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에 1480년 이탈리아 반도를 침공한다. 로마를 점령하여 로마 제국을 다시 재건할 그의 의도는 좋았으나 때마침 알바니아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배후를 모두 차단당하고 교황 식스토 4세가 이끈 강력한 군대에 밀려 퇴각했다. 그러나 그는 발칸 지방에서 작은 군주국을 제압하는 데 성공하여 오스만 제국의 세력을 발칸지방으로 확대하고 베오그라드까지 진출했다. 이후 1481년 이집트 원정을 나서던 도중 사망했다.


내정

내정면에서는 수도를 종래의 에디르네에서 새롭게 정복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기고 그곳에 무슬림을 대거 불러모아 살게 하면서 동로마 제국 시대부터 살아왔던 동방 정교회 교도와 서방으로부터 온 가톨릭교도, 아르메니아 정교도나 유대인도 살게 했고, 모스크와 상업시설 등의 인프라를 건설해 이스탄불이란 새로운 이름으로 붙여진 이 도시를 부활시키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또한 관습법이나 법령을 집대성한 《카눈나메》라 불리는 법전을 편찬하고, 카프쿠르라 불리는 자식같은 군인관료를 재상이나 주지사 등의 고관으로 임용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중앙집권적인 통치기구를 정비했다.


군주평

메흐메트 2세 자신은 페르시아어로 시를 짓고, 아라비아어로 풀이할 정도로 경건하고 교양있는 무슬림이었으나, 동시에 전통적인 이슬람 문화만을 고집하는 마음을 갖지 않아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와 예술가를 모았고, 자신의 초상화를 베네치아 출신의 화가 젠틸레 벨리니에게 그리게 하는 등 고전적인 이슬람 국가의 이미지에 머물지 않고 코스모폴리탄적인 제국의 군주로써 군림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1453년 6월 7일에 함락됐다. 당시 오스만제국의 군주 메메드2세는 13만이상의 육.해군과 우르반의 거포란 신무기를 동원해 콘스탄티노플을 압박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로마군은 외국용병과 일반 시민중 무기를 들 수 있는 사람까지 총 7천여명이 안되었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11세의 힘으로 로마군은 헌신적으로 버티었으며 약 50여일간 압도적인 병력과 식량,무기 차이를 극복하고 항전할 수 있었다.

이 도시를 함락시킨 술탄 메메드 2세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겼다. 오스만투르크 치하에서는 그리스어 이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터키어 이름인 이스탄불이 모두 사용되었으나, 서구에선 여전히 콘스탄티노폴리스란 이름이 사용되었다. 이스탄불은 1930년에 와서야 도시의 공식 명칭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그리스가 이 도시의 연고권을 주장하며 강제 접수하려 했으나 후에 터키공화국 초대대통령이 되는 무스타파 케말(케말 아타튀르크)의 방어로 저지되었다. 1923년 터키 공화국이 건국되면서 수도는 이스탄불에서 앙카라로 옮겨졌다.

 

 

 

소피아 대성당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거한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드 2세는, 그 날 오후에 도시로 입성하자마자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으로 향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하느님은 없고, 알라만 존재한다” 고 외치면서 영토 확장 목적의 달성을 기념하기 위해 대성당의 흙을 자신의 머리에 뿌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부터 이 대성당을 몰수, 모스크로 사용할 것을 선언하였다. 이 때에 대성당과 연결되어 있는 총대주교 자택의 통로는 파괴되고 대성당 내부는 십자가가 떼어지고 성화(아이콘)는 석회칠로 덮어지고 메카의 방향을 나타내는 메라브가 더해졌다. 그 후, 네 개의 미나렛(첨탑)이 증축되어 교회내에는 민발로 불리는 설교 단상도 장착되었다.

아야 소피아 자미로 불리게 된 이 정교회 대성당은 토프카프 궁전 쪽에 위치해 있어,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매주 금요일 예배마다 방문하게 되어 오스만 제국에서 가장 격식 높은 모스크 중 하나로 여겨지게 되었다.

1923년 오스만 제정이 무너지고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었을 때 그리스를 중심으로 유럽 각국은 하기아 소피아의 반환과 종교적 복원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터키 정부는 하기아 소피아를 인류 모두의 공동유산인 박물관으로 지정하고 아야소피아 박물관(Ayasofya Müzesi)으로 개조해 그 안에서 기독교든 이슬람이든 종교적 행위를 일절 금지했다.

 

 

 

금각만(터키어: Haliç, 그리스어: Χρυσόν Κέρας 영어:Golden Horn)

 

터키의 도시 이스탄불을 끼고도는 해협어귀의 이름이다. 마르마라 해와 함께 이스탄불 곶을 둘러싸고 있다.

천혜의 항구이자 자연적인 방어 요충지로 비잔티움 제국의 해군선단의 본부가 위치하고 있었고 해안선을 따라 성벽이 세워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보호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