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전쟁 | 아르헨티나, 스페인 | 88 분 |
감독 트리스탄 바우어
출연 가스통 파울스 (에스테반 레귀자몬 역), 파블로 리바 (알베르토 바르가스 역), 세사르 알바라신 (후안 차모르 역), 빅토르 휴고 카리조 (피자로 역)
줄거리
이것은 가공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도 세계 어디에선가 일어나는, 현실의 지옥인 것이다.
1982년, 대서양에 떠있는 포크랜드 제도 , 아르헨티나의 젊은 병사들과 압도적 위력을 자랑하는 영국군이 대치한 극한의 전장. 공포와 절망만이 지배하는 나날. 거기서 그들이 본 너무나도 냉혹한 전쟁의 진실은 무엇인가?
1982년. 대서양에 위치하는 포크랜드 제도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아르헨티나와 영국 사이에서 무력충돌이 발생하게 된다. 섬에 파견된 에스테반 등 젊은 병사들은 가혹한 전쟁의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극한의 대지, 부족한 식량, 빈약한 장비. 숨 쉴틈 없이 퍼 붇는 폭격, 갑자기 날아드는 전투기의 위협. 최신식장비를 갖춘 영국군에 필사적으로 대항하지만 아무런 수도 쓰지 못하고, 아르헨티나 군은 서서히 후퇴하게 된다. 그리고 드디어, 에스테반들은 최전선으로 이동명령을 받는데…
제작노트
1982년 영국과 아르헨티나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 아르헨티나 남단의 한 섬에 대한 영유권 분쟁으로 발발한 이 전쟁은 영국에서는 포클랜드 전쟁, 아르헨티나에서는 말비나스 전쟁으로 불린다. 영화는 이 전쟁에 보내졌다가 전쟁으로부터 치명적인 상처를 안고 돌아온 두 젊은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실제 참전용사인 아르헨티나의 에드가르도 에스테반 기자의 자전적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 <포탄의 섬광>이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있다.
포클랜드 전쟁
포클랜드 전쟁은 1982년 4월 2일, 아르헨티나가 자국과 가까운 포클랜드 섬(혹은 말비나스 섬)을 '회복'하겠다고 선언하며 침공한 전쟁이다. 이 전쟁은 2개월 만에 아르헨티나군의 항복으로 종료되었으며, 이로 인해 갈티에리의 군사독재정권은 실각하게 된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이 전쟁을 두고 말비나스 전쟁이라고 부른다.
배경
아르헨티나가 “말비나스”라고 부르는 이 섬은 1690년 영국의 존 스트롱이 처음으로 상륙한 기록이 있다. 1764년 프랑스의 루이 앙트완 드 부갠빌이 처음으로 정착민을 데려와 살게 했다. 이 후, 섬에 정착했던 프랑스 정착민들은 1766년에 이 섬의 권리를 스페인에게 판다. 그 후 50년간 영국과 스페인은 이 섬의 일부를 각각 통치하고 있었다.
1766년에 영국인들은 이 프랑스 정착촌의 존재를 모르는 채로 영국 정착촌이 세워졌고 프랑스 정착촌을 넘겨받은 스페인과 영국이 1771년 전쟁을 벌일 뻔하기도 했으나, 영국은 1774년, 스페인은 1811년에 각각 경제적인 이유로 철수했다. 이들이 철수한 이후 이 섬은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가 되었다. 1816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아르헨티나는, 스페인 식민지에서 벗어나면서 당시 스페인의 영토였던 이 섬도 같이 승계했다고 주장했다.
이 때 영국이 이 섬을 바다표범과 고래잡이 산업의 기지 및 남극 진출의 교두보로 만들고자 했고, 영국계 정착민들이 유입되기 시작한다. 1826년 아르헨티나는 이 섬의 영유권이 아르헨티나에 귀속된다고 공식 선언한다. 1828년에 아르헨티나는 주둔군을 파견해서 관리한다. 영국으로써는 자신들이 최초로 상륙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이 생각을 바탕으로 자국민들이 거주하고 있는 영토를 되찾았다는 입장이었다. 1833년 영국은 군사력을 사용해서 이 섬을 접수하고, 이 섬에 거주하던 아르헨티나계 주민들과 관료들을 모두 강제로 퇴거시킨 후, 천 명 이상의 영국인들을 이주시킨다. 당시 갓 독립한 약소국에 불과했던 19세기의 아르헨티나는 당시 최강국 영국에 정면으로 맞선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후 100여 년 동안 영국이 이 섬을 지배한다. 강대국 대영 제국에 항의할 수 없었던 아르헨티나 정부는, 1946년 전 세계의 탈식민지화 추세가 나타나자 이 섬의 영유권을 다시 주장하기 시작한다. 1965년 유엔총회는 식민지의 독립을 추구하는 결의(결의 2065/XX)를 채택했다. 영국계 주민들이 대다수였던 이 섬의 주민들은 아르헨티나에 의한 지배를 반대했다.
1973년 아르헨티나가 이 섬에 대해 영유권을 다시 주장하기 시작했고, 평화적인 해결을 권고한 유엔의 결의에 따라 1973년부터 영국과 협상을 시작했다. 하지만, 협상이 진행되지 않으면서 1982년 3월, 아르헨티나 정부는 영토 문제 해결을 위한 '다른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고 공식 선언한다. 이로써 영국과 갈등을 겪는다. 1982년 4월, 아르헨티나는 이 섬을 '회복'할 것이라고 선언하며 침공한 후 짧게나마 점령에 성공한다.
침공의 배경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영유권 때문이라기보다, 아르헨티나의 군사 독재 정권에 의한 내부 문제를 외부의 위기로 해결하려는 고전적인 정치 수단의 일환이었다. 즉, 인플레이션과 실업, 정치 혼란, 강제수용소에 반독재 투쟁인사들을 투옥, 고문한 군사독재정권의 인권침해를 비판하는 목소리 등을 잠재우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또한, 영국 정부가 남대서양의 끝에 있는 별볼일없는 섬에 무력으로 개입할 것 같지는 않다는 판단도 무력 점령을 시도한 원인이라는 설도 있다. 실제로 이 당시 포클랜드 주둔 영국군은 해병대 코만도 소속 수십 명에 불과하였으며, 이들 모두는 포로가 되었다.
외교
당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와 총리 마가렛 대처는 아르헨티나에게 이 섬을 빼앗기자 발빠르게 움직여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영국의 편에 서도록 종용했다.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아주 노골적으로 영국의 편을 들었으며 심지어는 아르헨티나를 국가가 아닌 테러단체로 규정하기까지 했다. 칠레의 피노체트 역시 자국의 영공을 영국 군대에 개방하기에 이르렀는데 이것이 이 전쟁에서 아르헨티나가 패배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프랑스와 스페인은 오히려 아르헨티나의 편에 섰으며 특히 프랑스 정부는 엑조세 미사일을 아르헨티나 정부에 공여하기까지 했다. 당시 아르헨티나 대통령이었던 레오폴드 갈티에리는 영국이 이 섬에 대해 적극적이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을 했으나, 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으며 영국은 이 섬을 마치 자국의 영토와 동일하게 취급하여 아르헨티나와 전면전을 하기에 이르렀다.
경과
포클랜드를 침공한 아르헨티나 군
4월 02일 : 아르헨티나, 포클랜드 등 3개 제도에 대한 무력점령; 영국의 항의, 국제 연합의 중재노력; 영국, 기동부대 파견 결정
4월 26일 : 영국군의 대규모 기동부대와 아르헨티나군간 전투; 영국군, 남부 조지아 섬 탈환
5월 2일 : 영국군, 아르헨티나군 순양함을 격침
5월 21일 : 영국군, 산 카를로스(San Carlos)섬 상륙
6월 14일 : 영국군, 포트 스탠리(Fort Stanley)을 탈환/포클랜드 주둔 아르헨티나군 항복
1982년 5월 21일 전사한 아르헨티나 병사들의 철모가 나뒹굴고 있다
결과
이 전쟁에서 패배한 아르헨티나 군부독재 정권은 실각하게 되어 민간인에게 정권을 이양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후 아르헨티나는 순탄하지만은 않지만 민주화를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전쟁에서 아르헨티나의 패전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준 원인이 다름아닌 징병제였다. 이 때문에 억지로 전장에 끌려온 아르헨티나 군인들의 전투에 대한 동기부여가 부족했다. 반면 영국은 모병제를 하고 있는 데다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둘째 아들인 요크 공작 앤드루가 직접 전투기를 몰고 맨 앞에서 참전하였으므로 영국 국민들의 포클랜드 전쟁에 대한 동기부여가 매우 충만했다. 이 전투의 패전에 심하게 충격받은 아르헨티나는 이 전쟁을 일으킨 레오폴드 갈티에리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실각했으며, 패전의 원인이 되었던 징병제도 역시 폐지되었다.
아르헨티나의 침공에 대해 즉각 무력 대응을 결정하고 군대를 파견하는 결단을 내린 "철의 여인" 대처 수상에 대한 영국인들의 지지는 확고하였다. 결국 대처 수상은 이 전쟁의 해결을 바탕으로 1983년에 재집권하는 데 성공하였고, "철의 여인"의 개혁정책은 계속 추진되었다.
포클랜드 제도의 영유권 주장에 대해서는 국제사회의 의견이 엇갈리거나, 중립을 지킨다. 영연방 국가들은 이 제도에 대한 영국의 영유권을 인정하고 있으나, 이들 중 카리브 공동체 국가들은 최근 아르헨티나의 입장을 지지함을 밝혔다. 유럽연합은 이 곳을 회원국의 특수해외영토로 간주하고 있다.
한편 페루는 아르헨티나의 영유권 주장을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으며, 포클랜드 전쟁 중 물자지원을 하기도 했다. 중남미 제국(諸國)과 그 국제기구들(메르코수르(MERCOSUR), 남아메리카 국가 연합)은 아르헨티나의 영유권 주장을 지지하고 있다. 칠레는 포클랜드 전쟁 중 영국의 입장을 지지하였으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퇴임 이후에는 아르헨티나의 주장을 지지하고 있다. 유럽연합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은 아르헨티나의 영유권주장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또한 아르헨티나의 영유권 주장을 공식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미합중국은 1940년대 이래 공식적으로 이 제도의 영유권주장에 대해서 중립적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포클랜드 전쟁 중에는 영국에 대해 물자 및 정보지원을 실시했다.
이 제도에 대한 국제연합(UN)의 수십 년 된 입장은, 중립적 관점에 의거하여 영국과 아르헨티나 양측이 이 문제에 대해 협상을 시작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포클랜드 전쟁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 http://blog.ohmynews.com/gompd/149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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