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개/2차대전 홀로코스트

그레이 존 (The Grey Zone, 2001) 7.1

슐츠105 2013. 2. 27. 16:42

드라마 | 미국 | 108 분 | 

감독 팀 블레이크 넬슨

출연 데이빗 아퀘트 (호프먼 역), 스티브 부세미 (헤스치 아브라모비치 역), 하비 키이텔 (에릭 무스펠트 역), 벨리자 비네브 (몰 역)

 

줄거리
1944년 가을 폴란드 브레젠스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의 '존데르코만도'인 슐러머와 로젠탈, 호프만은 유태인들이 호송돼 오면 그들의 옷을 벗겨 가스실에 넣고, 죽어서 나오는 사람들의 시체를 태우는 작업을 하는 대신 살 수 있는 특권을 받는다. 하지만 존데르코만도는 4개월에 한번씩 새로운 집단으로 바뀌고 전 집단은 죽음을 맞이한다는 걸 알게 된 이들은 반란을 준비한다. 반란을 꿈꾸던 ‘존데르코만도’들은 중공업 공장단지에서 일하는 여자 유태인 수용자들과 내통해 화약을 조금씩 빼돌리고 어느날 여자들은 독일군에게 이 사실을 들켜 혹독한 고문 끝에 죽게 된다.

어느날 가스실에서 시체를 옮기던 호프만은 우연히 숨쉬고 있는 소녀를 발견하고 니즐리 박사를 찾아가 소녀를 살려줄 것을 부탁한다. 소녀를 살려준 계기로 ‘존데르코만도’들과 유대감을 느낀 박사는 이내 반란의 소식을 듣게 되고 소녀를 살리기 위해 독일군 머스펠트에게 정보를 흘린다. 반란의 주동자인 앱래모비츠는 반란의 눈치를 채고 있던 머스펠트에게 죽임을 당하고 반란은 계획을 미처 세우기도 전에 일어난다. 반란으로 인해 소각장의 반을 없앤 ‘존데르코만도’는 결국 독일군에 의해 총살을 당하고 호프만과 로젠탈은 소녀를 살렸다는 것을 기뻐하며 죽어간다.

 

 

 

 

 

 

 

 

 

 

 

 

 

 

 

 

 

 

 

아우슈비츠에 강제로 끌려간 헝가리 유태인들의 비극
---> http://blog.daum.net/odibo123/2295


 

 

요제프 멩겔레

 

생애
멩겔레는 바바리아의 귄츠부르크(Gunzburg)에서 카를 멩겔레(Karl Mengele, 1881년 ~ 1959년)와 발부르가 후파우어(Walburga Hupfauer, ~ 1946년)의 삼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실업가였으며 동생은 각각 카를(Karl, 1912년 ~ 1949년)과 알로이스(Alois, 1914년 ~ 1974년)가 있었다.
 
1930년 귄츠부르크 김나지움(고등학교)을 졸업한 그는 뮌헨 대학(University of Munich)에서 약학과 인류학을 공부하였으며, 테오도르 몰리슨(Theodor Mollison) 교수의 지도로 1935년 유태인 하층민들의 인종적 차이점에 대한 논문을 작성, 인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프랑크푸르트 대학(Frankfurt University)의 유전 생물학 및 인종 위생학 연구소에서 오트마 폰 페르슈어(Otmar von Verschuer)와 함께 연구를 진행한 그는 1938년 '갈라진 입술과 구개에 관한 가족사 연구'라는 논문으로 약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나치 우생학에 대한 그의 믿음은 이 시기의 그의 논문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었다. 뮌헨 대학과 프랑크푸르트 대학은 전후 1964년 그의 학위를 취소하였다.
 
나치와의 관계
1931년 20세의 나이에 멩겔레는 준군사 조직인 철모단(Stahlhelm)에 가입하였으며, 철모단은 1933년 나치 돌격대(SA)에 흡수되었다. 멩겔레는 얼마 지나지 않아 건강 악화로 이 조직을 떠났지만 1937년 나치당원이 되었고 1938년에는 친위대에 가입하였다. 1939년 멩겔레는 이레네 쇤바인(Irene Schonbein)과 결혼하여 롤프(Rolf)라는 아들을 낳았으며, 1940년 예비군 의무대로 배속된 그는 무장친위대(Waffen-SS)와 함께 작전에 동원되었다. 1942년 러시아 전선에서 부상을 당한 그는 전투 부적합 판정을 받았으며 친위대 대위로 진급하였다. 멩겔레는 1941년부터 1942년까지의 동부 전선에서의 수훈으로 1급 및 2급 철십자 훈장(Iron Cross)과 동부전선 훈장(Eastern Front Medal)을 받았다.
 
수용소 근무 생활
 

 

멩겔레가 의학실험을 했던 아우슈비츠의 건물


1943년 멩겔레는 병에 걸린 전임의사 대신 비르케나우 강제수용소로 배정되었다. 1943년 5월 24일 멩겔레는 아우슈비츠와 비르케나우 강제수용소의 '집시 캠프' 의무관으로 임명되었으며, 1944년 8월 수용자들이 모두 가스실로 간 이후 캠프가 해체되면서 비르케나우 강제수용소의 주임 의무관이 되었다. 당시 아우슈비츠의 주임 의무관은 그의 상관 에두아르드 비르츠(Eduard Wirths)였다.
 
수용소에서 머문 21개월간 그는 죽음의 천사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으며 다른 의무관과 교대로 가스실로 보낼 유태인들과 강제 노역에 동원할 유태인들을 선별하는 작업을 담당하였다.
 
멩겔레는 수용소에 있는 동안 수감자들을 이용하여 그의 유전학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였다. 그는 특히 쌍둥이들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이들을 선별하여 특별 병영에 따로 수용하였다. 멩겔레는 또한 집시 캠프에 있었던 시절 발병하여 특히 어린이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던 수암(Noma)이라는 질병을 연구하였으며, 수암의 원인은 밝혀내지 못하였지만 이 질병이 영양실조 등으로 면역체계가 무너진 아이들에게 주로 발병하여 홍역과 결핵 등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멩겔레는 수암이 인종적 열성요소 때문에 발병한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였지만 실패하였다.
 
멩겔레는 수용소에 도착한 수감자들 중 기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았는데, 이들 중에는 오비츠(Ovitz) 가족도 포함되어 있었다. 루마니아 출신의 예술가 가족인 이들은 열 명의 가족 중 7명이 난쟁이였으며, 끌려오기 전에는 릴리풋 곡예단(Lilliput Troupe)이라는 이름으로 동유럽을 전전하며 공연을 하였다. 멩겔레는 이들을 종종 '나의 난쟁이 가족'이라고 부르며 아꼈다. 멩겔레의 실험들은 과학적 가치가 모호한 것들이 많았는데, 아이들의 눈에 염색약을 주사해 눈 색깔을 바꾸는 실험이나 마취 없는 늑골 적출, 기타 잔인한 외과 실험들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숨을 거둔 피실험자들의 눈은 멩겔레의 수집품이 되었다. 레나 겔리센(Rena Gelissen)이 아우슈비츠에 있었던 동안의 증언에 따르면 1943년 10월경 멩겔레는 여자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멩겔레는 특별 작업을 할 사람을 선발한다는 명목으로 여자 수감자들을 선택하였으며, 이를 중노동에서 해방될 기회로 생각한 여자 수감자들은 멩겔레에게 끌려가 불임 수술과 충격 요법 등을 받았고, 대부분 실험 또는 사후 감염 등으로 인하여 죽음을 맞았다.
 
헝가리에서 온 유태인 의사 니슬리 미클로시 (Nyiszli Miklos)는 법의학과 독일어를 공부한 덕에 멩겔레에게 선발되어 그의 조수로 일하였으며, 훗날 멩겔레의 실험들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그에 따르면 멩겔레의 실험 대상이 된 이들은 일반 수감자들보다 나은 주거 환경에서 보다 좋은 음식을 먹었으며 가스실에 갈 위험도 없었지만 멩겔레는 이들을 실험 재료로 생각하였을 뿐 결코 이들을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았다고 한다. 멩겔레는 필요에 따라 이들을 간단히 살해하고 해부용으로 사용하였다.
 

전후 생활
전후 독일 내에서 가명을 쓰며 숨어지내던 멩겔레는 남미로 도주, 아르헨티나를 거쳐 1959년 브라질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