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개/2차대전 홀로코스트

컨스피러시 (Conspiracy, 2001) 7.7

슐츠105 2013. 2. 23. 05:39

드라마, 전쟁 | 영국, 미국 | 96 분 |

감독 프랭크 피어슨

출연 케네스 브래너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역), 스탠리 투치 (아돌프 아이히만 역), 콜린 퍼스 (빌헬름 슈투카르트 역), 데이비드 스렐펄 (빌헬름 크리칭어 역) 

 

줄거리
1942년 1월 20일, 미국이 세계 2차 대전에 참전한다는 소식과 함께 독일의 나치는 베를린 외곽의 한 별장에서 유럽에 거주하는 유태인들의 운명을 결정지을 비밀 회의를 한다. 히틀러의 직접 명령으로 나치의 친위대 라인하트 하이드리히 장군(케네스 브래너)이 주재한 반세 회의에는 독일의 고위급 관리들이 대거 참여했으며 이 곳에서 논의된 내용은 절대로 외부에 알려져서는 안 된다는 약속들을 참여자들로부터 받아낸다. 이들은 추후에 유태인 대학살로 알려진 유태인 수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모였으며, 그 방법론에 있어서는 의견의 차이를 보였으나 유태인들을 전부 몰살함으로서 그 문제를 해결한다는 데에는 전부 찬성하였고 결국 수백만 명의 유태인들의 운명은 1시간 남짓 되는 이들의 모임에서 결정되고 만 것이다. 뉘른베르크 법안을 창안한 스투카르트 박사(콜린 퍼스)는 이 유태인 처리문제에 이의를 제기하나 묵살 당하며 은근한 협박에 의해 결국 지지를 표명하게 되는데...

 

 

 

 

 

 

 

 

 

 

 

 

 

 

 

 

 

반제 회의 (Wannsee konferenz)  출처 : http://blog.naver.com/mirejet/110095625976

 

반제 회의는 히틀러 정권의 15명의 고관들이 모여 유럽 내의 유대인의 이송과 살해에 관한 분담과 연대를

토의하기 위해 주최된 회의로, 1942년 1월 20일에 베를린의 고급주택지인 그로센 반제 거리에 있는 친위대 소유의 저택에서 주최되었다.

 

회의가 열리기 이전부터 아인잣츠그루펜이라는 살육부대가 점령치하의 동유럽과 소련에서 유대인을 조직적으로 살해했지만 나치정권은 광대한 점령지역에 분산하여 거주하는 다수의 인간들을 이송, 살해하기 위해 필요한 관료조직의 협동체제를 확립하려고 했다.

 

당시 관료조직은 서로 다른 관청에 소속되어 서로 경쟁을 벌였는데, 홀로코스트 계획을 완전하게 실행하지 못했던 것은 각 청이 유럽내 유대인의 말살을 최우선 사항으로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반제 회의가 개최된 것은 유대인 절멸을 우선사항으로 하는 것을 재확인하고 각 관청의 상급간부에게 필요한 권한을 돌려 주며 복잡한 관료조직의 최종해결을 공동으로 풀어나가기 위함이었다.

 

회의 이전에도 유대인 절멸을 국가목적으로 한다는 증거문서와 히틀러의 연설이 있었지만 반제 회의가 유대인에 대한 나치 독일의 정책을 이해하는 바탕에서 특별한 지위를 점유하게 된 이유는 첫째, 회의개최에 관한 완전한 문서기록과 회의의 의사록이 전쟁으로 소실되지 않은 점, 둘째로 회의의 출석자가 유대인의 추방과 조직적 살해를 실행한 상급자들이었다는 것.

셋째는 회의 이후 수용소에서 조직적 학살이 격화된 점, 넷째로는 회의 의사록이 뉘른베르크 법정에서 고문의 증거로 제출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반제 회의의 의장은 국가보안본부의 장관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친위대 대장이 맡았는데 회의의

출석자들은 다음과 같았다.

 

1. 알프레드 마이어 - 동부점령지구 장관

2. 게오르그 라이브브란트 - 동부점령지구 국장

3. 빌헬름 슈트카트 - 내무성 차관

4. 에리히 노이만 - 4개년 계획청 차관

5. 로렌트 프라이슬러 - 사법성 차관

6. 요제프 뷜러 - 폴란드 총독부 차관

7. 마르틴 프란츠 율리우스 루터 - 외무성 차관보

8. 게르하르트 크롭퍼 - 나치당 법무국장

9. 프리드리히 빌헬름 크리친거 - 총통관저국장

10. 오토 호프만 - 친위대 인종, 이주본부장, 친위대 중장

11. 하인리히 뮐러 - 국가보안본부 비밀경찰국장, 친위대 중장

12. 아돌프 아이히만 - 국가보안본부 비밀경찰국 제 4부 유대인 담당과장, 친위대 중령

13. 카를 에버하트 쉔가르트 - 폴란드 총독부 친위대 지휘관, 친위대 상급대령

14. 루돌프 랑게 - 라트비아지구 친위대 지휘관, 친위대 소령

 

 

                                                 반제 회의가 열린 친위대의 별장

 

 

 회의의 공식적인 의사록에선 회의의 목적은 <최종해결>을 실행하기 위해 관계 각 청의 업무를 조정하는 것으로 적혀있다.

의사록은 친위대 전국지도자인 하인리히 히믈러의 수석부관인 국가보안본부 장관이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지시를 받은 아돌프 아이히만에 의해 작성되었다.

 

회의의 요약에는 독일에서 유대인을 배제하는 방법과 국외이주의 추진에서 이송, 강제노역과 조직적 살해가 특기되어있다.

여러가지 방법(이송, 강제노동, 계획적 살해)의 조합이 의사록에 기술되었는데, 이러한 방법의 조합이 나치스의 유대인 절멸계획의 상호 연관을 의미한다.

 

강제노동자들은 동시에 두 가지 목적을 만족시켰는데, 특히 도로건설 같은 대규모 사회기반의 정비를 담당하는데 있어 비용도 적게 들며 중노동을 부릴 수 있었다. 노동은 극도의 피로를 야기했기에 결과적으로 다수의 노동자가 사망하는 것이 기대되기도 했던 것이었다.

 

가혹한 조건에서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실험대상이나 연구로 이용되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기도 했다. 아이히만은 후에 이스라엘에서 열린 재판에서 의사록에 담긴 내용과 최종해결의 수단이 살해였다는 것을 인정했다. 반제 회의 이후 홀로코스트는 가속화되어 유대인들의 대다수가 죽음의 수용소에 보내져 살해대상자와 강제노역자로 분류된 뒤 조직적인 살해가 이루어지게되었던 것이었다.

 

반제 회의가 존재가 알려진 회의의 의사록은 1947년에 미군이 외무성의 문서 속에서 찾아냈다. 때문에 독일 국내에서도 반제 문서가 진짜가 아니라는 의견이 존재한다. 그러나 회의가 개최되기 이전에 의장이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와 출석자인 오토 호프만, 마르틴 루터 사이에서 여러 문건이 교환되어졌다.

 

이것들은 반제 회의의 개회예정일과 회의 주제 등이 명기되어 있어 반제 회의가 유대인 절멸을 토론하기 위한 회의였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특히 1942년 2월 26일자로 하이드리히가 루터에게 보낸 편지에는 반제 회의에서 유대인 문제의 최종적인 해결을 실행하는데 앞서 행정상의 지원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회의의 존재를 부정하는 자들도 있다. <반제 회의를 증명하는 공식서류는 없다, 의사록에는 작자, 작성시기, 작성장소가 확실하지 않기에 역사학자적 관점에선 반제 회의 의사록은 보충자료에 지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반제 회의가 정말 있었는지는 아직 단정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뮌헨 재정재판소의 판사인 빌헬름 슈테그리히는 이 반제 의사록을 뉘른베르크 재판의 국제검찰국 소속의 켐프너가 작성한 위조문서라 주장한다. 그 이유로는 당시 독일에선 공식문서를 작성시 일련번호와 작성자, 혹은 회의 참가자들이 육필로 사인하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관명도 없는 보통 용지에 쓰여진 의사록은 연대번호와 사인도 없는 것에 단지 <최고기밀>이란 고무도장만 찍혀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연대번호가 없는 대신에 첫 장에 <D, II, 29, g, Rs>라는 기호가 기입되어진 것에 대해서는 이것은 형식적인 관용기록번호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회의록의 내용에 이해할 수 없는 점은 <동방으로 이송>된 유대인들 중 노동이 가능한 자들에게 도로건설을 시키는 조항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작업이 이루어진 흔적이 없다. 당시 나치 독일에선 아우슈비츠 등으로 <동방이송>은 철도를 이용했지, 도로건설에 필요한 도로건설은 실시되지 않았다는 것이 그 주장이다. 역사수정주의자인 게르머 루돌프는 반제 회의록에는 유대인 절멸에 관한 내용이 확실히 기록되어 있지 않고 유대인을 어떻게 절멸할 것인가 하는 방법조차 없기에 이 문서를 유대인 절멸의 근거로 보는 것은 어렵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독일 근대사의 에른스트 놀테 교수와 베르너 마저 박사는 문서의 형식, 기록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문서가 위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만 반제 회의에 히틀러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그가 실질적인 주최자였다는 사실은 확인되었다.

반제 회의가 열린 반제 별장은 전후 미군이 접수하여 이용하다가 잠시 유스호스텔로 사용되었다.

 

1965년부터 1972년까지 역사가인 요제프 볼프가 기념관 건립을 추진했지만 뜻을 이루진 못했는데, 1992년이 되어서야 반제 회의가 열린 별장은 반제회의 기념관으로 새로 오픈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