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개/2차대전 홀로코스트

카운터페이터 (The Counterfeiter_Die Falscher, 2007)

슐츠105 2013. 2. 10. 03:38

범죄, 드라마 | 오스트리아, 독일 | 98 분 |

감독 스테판 루조비츠키

출연 칼 마르코비치 (살로몬 '샐리' 소로비치 역), 오거스트 디엘 (아돌프 부르거 역), 데비드 스트리에소브 (스트럼반퓌러 프리드리히 헤르조크 역), 마틴 브람바흐 (홀스트 역)

 

줄거리
역사상 최대의 위조지폐 작전에 투입된 천재적인 위조 전문가!
세상조차 속일 수 있었지만 영혼만은 속일 수 없었다!

독일에서 ‘위조의 제왕’으로 명성을 떨치며 화려한 삶을 살던 살로몬 소로비치는 경찰에 체포된 후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로 끌려가게 된다. 타고난 그림 실력과 예술적 재능으로 나치 친위대 간부들의 초상화 등을 그려주며 다른 수용자들보다 나은 생활을 누리던 소로비치는 수용자 중에 전직 인쇄 기술자, 은행 직원들과 함께 나치의 대규모 위폐 생산과 공문서 위조 작전인 ‘베른하트 작전’에 투입된다.

실패하면 죽음 뿐인 작전에서 탱고 선율이 흐르는 작업 환경과 탁구대 등 다른 수용자와는 비교할 수 없는 혜택이 이들에게 주어지지만, 영국 파운드에 이어 미국 달러까지 완벽한 위조를 눈앞에 둔 이들은 삶과 영혼의 양심이라는 선택 속에서 갈등하기 시작하는데…

 

*역사상 최대 규모의 위조지폐 작전, 베른하트 작전 (Operation Bernhard)

제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이 유태인 수용자들 중 은행직원, 인쇄 기술자, 위조 전문가 등을 선별하여 세계 경제를 흔들기 위해 총 1억 3천 2백만 파운드라는 당시 영국 국고의 네 배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위조한 위조 지폐 작전. 1942년부터 1945년까지 140여명의 유태인 수용자들이 투입된 역사상 최대 규모의 위조 지폐 사건으로 남아있다.

 

 

 

 

 

 

 

 

 

 

 

 

 

 

 

 

 

 

 

 

 

 

 

<베른하르트 작전>

1939년 9월 18일, 2차대전이 발발한지 불과 2주후, 독일의 재무성은 영국의 경제를 파괴하기위한 하나의 비밀작전을 수립한다.
그것은 대량의 위조지폐를 만들어 영국상공에 투하시켜, 영국의 경제구조를 패닉으로 몰아간뒤 붕괴시킨다는 계획. Andres작전이었다.

그러나 재무성의 이 야심찬 계획은 SS장관 히믈러의 정치적 방해로 좌절되었다. 아마 히믈러는 재무성의 계획이 월권행위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재무성에 의한 이 첫시도는 좌절되었지만, 독일의 이 막장 계획자체가 사라진것은 아니었다. 계획을 좌절시킨 SS가 도리어 1942년,계획을 이어받아 추진했다. 작전의 책임자로는 친위대 중령 베른하르트 크루거가 임명되었고, 작전은 그의 이름을 따 베른하르트작전이라고 명명되었다. 작전의 총책임자가 된 베른하르트는 작전을 위한 인력을 집단수용소의 유대인들로 충당했다. 30여명의 인쇄공, 회계사, 심지어 저명한 패션사진작가까지 이 나치의 위조지폐제조계획을 위해 수용소에서 차출되었다. 이들 인력의 핵심은 불가리아 출신의 유대인 위조범 솔리 스몰리아노프였다.

 

                                                            <베른하르트 크루거>


 

그들은 베를린근교의 19구역이라는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19구역에서의 생활은 나치가 유대인에게 배풀수있는 가장 호화로운 생활중 하나였다. 화장실과 세면실은 구역한가운데 위치해 구역어디에서든지 100피트내의 거리에 잇었다. 수감자들은 개인침대-3~4명씩 꾸역꾸역 집어놓은 수용소 침대가 아닌-와 개인사물함이 제공되었으며, 후줄근한 줄무늬죄수복대신 일반 사복의 착용이 허용되었다. 단 사복은 바지한쪽에 붉은 줄무늬를 칠해야 했고, 자켓에는 붉은 십자가를 칠해야 했다. 입기 쪽팔리긴 햇겠지만 그들이 일반 수용소에서 입었던 줄무늬죄수복에 비하면 휠씬 편하고 따뜻했다.


이어서 비누, 수건, 그리고 기타 식기구와 나무탁자도 도착했다. 또한 그들에겐 식사로 독일의 전시배급식량인 검은 빵과 스프-그들은 이 스프를 시금치 스프라고 불렀다. 풀과 토마토잎, 그리고 감자로 끓인 이스프에 시금치는 들어있지 않았다. 다만 먹고나면 이빨에 끼는 흙이 시금치 같다는 이유로 그렇게 불렸다.-가 배급되었다. 대부분이 독일, 체코출신이었던 이들은 독일인 아내를 두었거나 아는 사람이 있어 사식을 반입하기도 했다.
아우슈비츠에 있다가 1944년 초 19구역으로 차출된 아브라함 하르코프스키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냄비에는 우유와 설탕이 들어간 오트밀이 끓고 있었다.  크림과 설탕이 들어간 커피가 후식으로 제공되었다. 내가 수용소에서 그토록 갈망하던 것들이었다."

 
이외에도 유고슬라비아산 담배 Zora가 10갑씩 지급되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휴일에는 꼬박꼬박 쉬면서 체스나 탁구, 라디오방송을듣는등 개인여가가 보장되었다.

그러나 수감자들이 반드시 행복한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들 스스로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나치스 치하에 있는 유대인들의 운명의 끝은 죽음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들은 베른하르트가 일이 끝나게 되면 자신들을 모두 죽일것이라는 사실을 잘알고 있었다. 결국 그들의 선택은 두가지였다. "가스실에서 죽거나, 혹은 영국군에게 발각되어 폭격으로 죽거나"


시행착오

19구역의 위폐의 퀄리티는 나날히 성장했다. 그에 따라 19구역은 18구역을 병함해 더욱 규모가 커지고 인원도 늘어났다. 최신의 인쇄기와 제본실, 사진 연구실, 인쇄소에 회계사무소까지 갖춘 본격적인 형태로 확장된것이다. 그들은 지폐말고도 여권, 인증서류등도 위조했다.

그러나 베른하르트는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위조를 잘해도 원본 파운드와 위조지폐(베른하르트 노트, 통칭 B노트라고 불렸다.)사이에는 분명한 넘사벽이 존재했던것이다. 워터마크 투명도 도절이 힘들다든가, 선이 약간 희미해진다든가 하는 문제는 유대인수감자들의 노력과 근성으로 극복이 가능했다. 하지만  석영램프불빛을 비추었을때, 윈본파운드지폐의 색깔과 위조지폐의 색깔이 틀려지는 문제만큼은 도저히 해결할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것은 별문제가 아니었을지 모른다.
베른하르트본인이 기록하듯히

"전시에 석영램프 불빛을 일일히 비춰가며 선별작업이 가능이나 하겠냐?"

하지만 말은 그렇게 했어도 베른하르트는 이문제 해결에 끝까지 매달렸다. 그리고 문제가 해결될때까지 위폐생산과 수송을 중단했다. 수감자들은 공포에 질렸다. 위폐생산이 중단된다는것은 자신들의 필요성이 사라졌다는것이고, 그렇게되면 이제 자신들이 갈곳이 소각장 뿐이었다.

그러던 중 당시 수감자들의 심리를 대변해주는 사고가 발생했다.1942년 12월 2일 위폐생산을 위한 대형인쇄기가 설치되었는데, 엔진과열로 화재가 발생한것이다. 유대인들은 이때를 이용해 탈출하려 했다. 당시 베를린 출신의 인쇄공이었던 아서 레빈은 탈출을 독려하며 말했다.

"친구들, 여기는 출구가 없어, 오직 사고만이 우릴 구원해 줄수있으니, 이 사고를 믿어보자고."

그러나 그들의 탈출은 불가능했다. 베른하르트는 기밀유지를 위해 경비들로 화재건물을 둘러쌓고 건물내부에서 무엇이 벌어지는지 알려지는 것을 막기위해 소방관의 출입마저 통제했다.
회재가 진입된 이후, 수감자들은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베른하르트는 19구역의 기밀을 누설한다면 죽여버리겠다고 경고했다.
연판인쇄공 모리츠는 거기서 뭐했냐는 내과의사의 질문에
"모래를 파고 있었다."
라고 대답했다. 무장한 경비들에게 둘러 쌓인채.

파운드화 위조에 성공하다

화재사고 이후, 탈출은 꿈도 꿀수없다는 냉혹한 현실을 깨달은 수감자들은 필사적으로 대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결과, 그들은 특정시기 이전에 만들어진 파운드화는 쉽게 위조할수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당시 영국 파운드화에 사용되는 잉크와 완전히 유사한 잉크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1943년 어느 아침, 크루거는 수감자들을 집합시킨뒤, 주머니에서 안벽하게 복제된 5파운드지페를 꺼내 흔들며 말했다.
"이걸 보게. 제군들. 이제 베른하르트노트는 대영제국의 은행에도 유입되고 실제 거래에도 쓰이고 있어. 난 자네들이 자랑스럽네. 자 이제 공장을 확장하자구!"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가스실에 갈 위기를 모면했다는데서 기뻐했고, 베른하르트는 성공에 기뻐했다.
"그는 이미 자신의 영국은행의 총재라도 된 것 마냥 기뻐했다."
베를린 출신의 인쇄공 막스의 회고였다.

성공에 힘입어 베른하르트는 인력을 더 충당했다. 대략 100명의 수감자들이 일하게 되었고 12시간 교대근무로 하루종일 위조지폐가 생산되었다. 1943년 여름 중순부터 1944년 중순까지 매달 평균650,000장이 생산되었다.  전후 가장 마지막으로 만들어진 모델, Monopol Type 4의 경우에는 특별 인증기관과 전시 생산우선권까지 부여되었다.화폐는 1-,5-,10-,20-, 50파운드가 각각 복제되었는데 100파운드이상의 고액권은 언제나 영국측에서 세밀한 검증을 거치는 관계로 베른하르트가 생산을 금지시켰다.

체코의 사업가출신이었던 슈타인의 증언에 따르면, 베른하르트노트는 적어도 1억3천4백만파운드이상, 위조되었다고 한다. 그는 위조지페들이 4단계로 구분되었다고 회고했다.
우선 1급에는 전문가들조차 구분할수없는 완벽한 위조품이 분류되었다. 이것은 주로, 타국에 있는 독일 스파이들의 공작금으로 지불되었다. 이 위조품들은 영국에서 통용되어도 괜찮을만큼 높은 완성도를 자랑했으며, 전체 생산량의 10~15%를 차지했다.  

2급은 그보다 낮은 완성도의 위폐들이었다. 이들은 일반인을 충분히 속일수있었고, 경우에 따라선 전문가도 속일수있는 완성도였다.

3급으로 분류된 위폐들은 독일이 중립국들과 무역을 하는데 사용되었다.

가장, 완성도가 떨어지는 4급은 영국상공에 살포할 계획이었다. 그렇게 해서 영국경제를 패닉으로 몰가는데 사용할 목적이었지만, 괴링이랑 히믈러의 손발이 안맞다보니 그것도 어쩌다가 가능했고, 1944년즈음에는 아에 제공권을 상실하다시피해서 작전은 불가능해졌다. 4급의 위폐들은 '모르는 사람은 그럭저럭 속일수있는 수준이지만 전문가는 못속이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에도 포함되지 못하는 저질 위폐들은 소각되었다. 소각장굴뚝에는 특수한 필터가 있어 위폐조각이 날라가는 것을 막았다.

 


 

                             <이 위조지폐들이 159여명의 유대인들의 목숨을 구한 샘이다.>


 

 

                        <19구역에서는 전쟁 막판에 드물지만 달러화를 위조하기도 했다.>



1944년 늦은 봄이 되자, 베른하르트는 더이상 영국경제를 위조지폐로 영국경제를 초토화한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위조지폐의 기밀유지를 더욱강조했다. 독일은 패하고 있었다. 그것은 명백한 상황이었다.
1945년 초, 연합군이 베를린 근처에 접근하가 베른하르트는 19구역을 해체하고, 장비와 유대인들을 오스트리아 알프스의 지하동굴로 수송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다시 일을 시작하기엔 너무 늦었다. 베른하르트는 장비와 위조지폐들을 토플리체 호수에 버리라고 명령하는 한편, 유대인들을 모두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남은 SS잔당들이 유대인들을 처형하기 직전, 패튼의 기갑차량들이 접근해왔고, SS들은 달아났다. 유대인들은 그렇게 목숨을 건졌다.

그후

종전후 베른하르트작전이 남긴 위폐들중 일부는 유대인들에게 흘러들어왔다. 그들은 그돈으로 황폐화된 유럽을 떠나 팔레스티나지방에 정착촌을 차리고 무기를 구입해 초창기 이스라엘군을 만들었다.  유대인을 몰살시키려했던 나치스가 만든 위페들이 유대인들을 살렸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다.

또한 연합군도 베른하르트작전과 유사한 작전을 구상했으나, 독일로 흘러들어가기도전에 발각될것이며, 흘러들어가봤자, 독일경제에 도움이될뿐이라는 판단하에 취소되었다.

종전후, 몇십년동안, 토플리체호수는 나치스가 남긴 위폐를 찾으려는 트레저 헌터로 붐볐다. 그들은 낚싯대부터 잠수장비까지 온갖수단을 동원했다.  1959년 7월, 슈테른지는 적지않은 비용과 인원을 동원해 상당량의 베른하르트 노트를 건져내었다. 토플리체호수에는 아직도 적잖은 양의 위폐들이 잠들어있다고 한다.

베른하르트는 작전에 대한  별도의 보수를 받지 않고 매번 1급으로 구분된 위조지폐를 각각 20장씩 챙겼다.당시 이러한 형태의 부패는 SS전체에 만연해 있었다고 한다. SS대원들은 아우슈비츠를 캐나다라고 불렀는데 말그대로 자원의 보고라는 의미였다.

베른하르트작전이 사실상 실패한 이유는 독일측의 소심함이 한몫했다. 독일은 베른하르트노트의 오류를 찾아낼때마다 수정하기위해서 기를 썼다. 영국의 철저한 파운드화 감정시스템을 피하기위해서 였지만, 전쟁 전 하루에만 10만달러치가 인쇄되는 판국에 베른하르트 노트정도의 퀄리티면 충분히 먹혀들어갈수 있었다는게 이른바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토플리체 호수속에서 건져올린 위조지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