슐츠의 자막공방/첩혈고성 (2010)

[중일전쟁] 대륙타통작전당시 중국의 대응에 대해

슐츠105 2011. 9. 21. 15:01

펌 : http://cafe.naver.com/nuke928.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230595&

 

 

이른바 "대륙타통작전"은 1944년 4월 17일부터 12월 10일에 걸쳐 중국 대륙 남북에 걸쳐 일어난 일본군 최후의 대공세입니다.

일본측 정식 작전명은 "이치고작전"이라고 하며, 중국은 "예상계회전"이라고 부릅니다.

 

일본군이 만주에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까지 연결하여 중국대륙을 남북으로 횡단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인데, 이는 남방의 자원을 만주를 거쳐 일본 본토까지 육로로 가져오겠다는 목적과 중국내의 센놀트휘하의 미 공군 비행장들을 공격해 파괴함으로서 미 폭격기들이 일본 본토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결과만 놓고볼때 일본군의 공세자체는 성공적이었으나 제공권이 없었기 때문에 점과 선으로 연결된 중국내 점령지의 상황에서 남방의 자원을 육로로 운송하겠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것이었고, 마리아나해전에서 일본군이 참패하고 오키나와가 함락되어 여기서 발진한 B29 폭격기들이 동경까지 폭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역시 무의미한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1호작전"중 이른바 "상계작전"은 상은 호남성, 계는 광서성의 별칭으로, 호남-광서성에 대한 대규모 공세에 대한 작전계획입니다. 일본쪽 참가병력은 36만 2천명, 군마 6만 7천두, 차량 9450량에 달했으며 여기에 만주의 관동군에서 특별히 빼낸 전차 약 100여량도 참가하고 있었습니다. 같은 시기에 버마에서 무다구찌도 예의 희대의 삽질로 이어지는 작전을 펼쳤죠. 그러나 나름대로 일본군이 전력을 다해 치밀하게 사전준비를 했다고 하지만(양떼나 몰고갔던 무다구찌군단과 달리) 남방에서의 연패로 일본의 국력 자체가 이미 대규모 공세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무리하게 벌인 것으로, 극도의 식량과 물자부족에다 소총 한정을 3~4명이 나눠쓰는 최악의 입장이었습니다.

44년 5월 말부터 일본군은 한구와 광서를 연결하는 오한철도를 남하하여 공세를 개시합니다. 호남성에는 명장 탕은백장군이 이끄는 30만의 중국군이 있었으나 일전도 제대로 치루지 못한 채 붕괴되어 버리고 맙니다. 탕은백장군은 중국군에서 가장 유능한 장군중 하나였으나 그의 군대는 제대로 무장하지도 못했으며 말라리아와 기아에 허덕이고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전투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편, "장사의 호랑이" 설악(제9전구 사령관) 휘하 제10군(군사령관 : 방선각)이 장사와 형양을 방위하고 있었습니다. 광복군에게도 많은 지원을 해 주어 나중에 우리 정부로부터 독립무공훈장도 받게 되는 설악은 처음에는 장사 사수를 천명했으나 곧 장사를 포기하고 형양쪽으로 철수합니다. 이 바람에 6월 18일 장사는 쉽게 함락되고 맙니다. 6월 23일부터 형양성에 대해 대규모 공세가 시작되는데 공격군은 제 11군 휘하의 제 11 및 16사단(교토사단), 제 58사단(구마모토사단), 제 68사단(오사카사단)등 총 4개 사단이었습니다.(최초 2개사단에서 추가로 2개사단 증원, 여기에 제11군 직속 야전중포부대도 참가) 여기에 대항하는 중국군 제10군은 총 4개 사단(제3사단, 제119사단, 예비10사단, 임시54사단)에 2만명이었고 숫적으로 공격측이 1:4~5로 압도했습니다.

 

형양성주변에는 다수의 토치카와 대전차호가 설치되어 있었고 계림에서 출격해 오는 미공군의 엄호사격과 보급품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에서는 처음부터 악전고투의 연속이었습니다. 게다가 일본군은 이탈리아군처럼 대공화력이 매우 빈약했기 때문에 공중공격에는 대단히 취약했습니다. 또한 당시 중국에는 미 제 14공군휘하 750기에 대해 일본육군 제 5항공군 160기로, 제공권은 압도적으로 미국쪽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식량도 부족하여 주변 논에서 익지 않은 벼이삭을 훝어 밥을 지어야 할 정도로 형편이 좋지 않았습니다.

형양을 완전히 포위한 일본군을 대해 중국군 3개 사단이 역포위를 하여 보급까지 끊기게 됩니다. 중국군은 밤마다 역습을 가하나 탄약이 부족한 일본군으로서는 제대로 응사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오면 일제 사격을 가해 격퇴했기 때문에 중국군도 지레 겁을 먹고 전면적으로 야습을 해 오지는 못합니다.

일본군은 형양성 교외에 포병을 배치한후 지속적으로 돌격전을 벌리고 철조망으로 결사대를 보내나 중국군의 기관총 사격에 사상자가 속출하고 계속 실패합니다. 이 때문에 그때까지 약한 중국군을 상대로 쉽게 승리를 거두던 일본군들은 "형양성안에는 미군 지상군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라고까지 여기게 됩니다.

8월 4일 제 58사단이 장사로부터 도착하자 오후 4시 포병의 집중포격을 시작으로 총공격이 시작됩니다. 여기에는 일본 육군 항공대의 99식 폭격기도 동참하여 형양성을 폭격합니다. 중국군의 응사도 심했으나 야습으로 중국군 제 1선 고지들이 함락되면서 8월 7일 시가지에 일본군이 돌입하는데 성공하고 시가전에서 일진일퇴가 거듭됩니다. 일본군은 제57여단장 겐키치소장을 비롯해 연대장, 대대장 등 주요 지휘관들이 줄줄히 전사하는등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8월 8일 오전 7시 방선각이 정식으로 항복함으로서 형양은 함락되고 맙니다.

1개월이상의 지루한 공방전만에 형양전투는 끝나는데 중국군 전사자 4000명이상, 포로는 1만 3300명에 달하였습니다. 일본군쪽 피해도 엄청난 것으로 전사 3860명, 전상 8327명, 병상 1만 9288명에 달했습니다.(이 중 약 1할이 미군기의 폭격, 기총사격으로 인함)

일본군에거 형양전투는 예상밖의 고전이었습니다. 제11군 사령관 요코야마 이사무 중장은 휘하 참모들과 지휘관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단지 계림으로 가는 통로일뿐이라 여겼던 형양에서 막대한 희생을 치루었으니 미공군의 본거지인 계림에서는 더욱 치열한 저항을 받을 것으로 예상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 11군은 계림에 당도하기전에 전멸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계림성 위에 일장기를 게양하는 것은 우리 11군이 아니라 우리의 시체를 넘고 진군하는 후속부대일 것이다."

 

 그리고 곧장 계림, 유주공략에 나서는데 패주하는 중국군을 추격해 엄청난 강행군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11월 10일 계림과 유주는 예상외로 하루만에 함락되고 마는데 중국군의 전의 상실과 전차부대의 지원덕분이었습니다. 중국군은 제대로 된 대전차무기가 없었기 때문에 전차에 대해서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어쨌든, 이것으로 대륙타통작전의 목적은 달성했습니다만, 미공군은 사천성에 새로운 공군기지를 건설했고 마리아나해전의 패배, 이오지마의 함락으로 B-29 장거리 폭격기들은 얼마든지 일본 본토를 폭격할 수 있어 전략적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전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전역에 대해 라이프 2차대전사 "중국-버마-인도"편에서는 설악의 충성심을 의심한 장개석이 "일부러" 패배하도록 버렸다느니, 최정예부대는 공산군 포위에만 쓰고 의도적으로 일본군과의 전투는 피했다느니 라고 묘사되어 있고 저도 그동안 그렇게 생각해 왔습니다만, "장제스 일기를 읽다(레이 황 著)"에서는 그런 주장이 매우 일방적인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우선, 장개석은 결코 "의도적"으로 패배를 조장한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 했다는 것입니다.

 

설악이 사령부를 장사에서 훨씬 안전한 남쪽으로 옮긴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독단으로, 방어를 강화하라는 장개석의 명령을 정면에서 어긴 것입니다. 이는 장개석의 방어계획을 애초부터 흔든 것이었습니다. 설악은 광동계 군벌로 장개석 직속이 아니었고 군벌 사령관들은 걸핏하면 장개석의 명령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행동했습니다.

 

장개석은 7월 15일 참모 회의를 열어 제62군, 제 79군을 구원군으로 파견했고 방선각에게는 잔존부대를 규합해 형양 포위망을 뚫고 구원군과 합류하라고 명령합니다. 또한 24대의 전차까지 동원되어 구원부대의 최선봉에 서서 진격합니다.

 

그러나 전차들은 30년대에 제작된 구식 경전차들이었고 매복한 47mm 대전차포의 공격을 받자 간단하게 격퇴되고 말았습니다. 구원부대는 화력과 장비가 매우 빈약했고 차량이 없어 병사들은 도보로 장거리를 행군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국지적인 공격은 대부분 실패로 끝났으며 일부 부대가 형양 근처까지 진출했지만 그 직전에 방선각은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항복했습니다.

 

무엇보다 참패의 가장 큰 이유는 장개석의 전의 부족이 아니라, 중국의 전쟁 수행 능력 자체가 바닥이 났다는 것에 있습니다.

중국은 37년이래 근 7년간이나 외부와 차단된채 자신들의 역량만으로 싸워야 했습니다. 중국의 중공업, 무기공업은 동부해안의 도시들과 무한, 한양 일대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개전초에 모두 상실했고 서부 지역은 청나라시절과 다를바가 없었습니다. 44년 1년간 철 생산이 겨우 13,361톤에 불과했습니다. 모든 군수공장에서 매월 생산하는 소구경탄환(소총,기관총)은 1500만발에 불과했고 이는 전 중국군 병사에게 평균 4발씩 나눠줄 수 있는 수준이었습니다.

 

이시기 미국의 지원 역시 형편없었는데 매달 1만톤의 물자가 중국에 공수되었지만, 이중 85%가 스틸웰 부대에게만 집중되었으며 그 나머지는 센놀트의 공군에게 주어졌고 실제로 중국군이 사용할 수 있는 물자는 거의 없었습니다. 이것이 개선되는 것은 45년 1월 버마와 운남을 잇는 육로(이른바 레드공도)가 중국인들의 큰 희생을 통해 준공되면서입니다.

 

스틸웰은 전술 역량은 뛰어났으나, 중국의 주권을 무시하기 일쑤였고 장개석에게서 중국군의 지휘권을 빼앗기 위해 악선전을 펼쳤습니다. 그는 물자를 자기 휘하 부대에게만 지급했고 그 외의 중국군에게는 나눠주지 않았습니다. 장개석을 실각시키고 육군 참모총장인 백숭희로 대신하려고 꾸밉니다. 이는 말그대로 중국에 대한 내정간섭이었고 장개석과 충돌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죠.

 

그러나 스틸웰의 주장과 달리, 당시 중국군은 장개석 직속의 중앙군조차 급식 해결을 하지 못해 연안의 공산군 포위에 배치된 호종남 휘하의 부대도 40%의 인원이 탈영,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최정예부대는 빼돌리고 약한 부대만 일본군과 싸우게 했다, 라는 라이프지의 설명은 스틸웰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기사로 실었을 뿐입니다.

 

워낙 자료가 적어서인지 관심이 부족해서인지 중일전쟁사만큼 왜곡과 편견, 잘못된 상식들이 많은 것도 없는 듯 합니다. 이때문에 왠지 장개석은 할만큼 했음에도 "무능", "친일"로 오해를 많이 받고 있는듯..

 

그러고보니 중일전쟁사는 정말 간만에 적어보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