슐츠의 자막공방/새벽의 7인 (1975)

유인원 작전 (Operation Anthropoid)

슐츠105 2015. 9. 18. 15:55

2차대전 유일의 표적사살작전, 안드로포이드

 

목표: 프라하의 학살자 (세계의 특수작전1, 2012. 10. 30., 플래닛미디어)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837831&cid=42161&categoryId=42161

 

 

---> https://books.google.co.kr/books?id=uRWjBAAAQBAJ&pg=PT222&lpg=PT222&dq=%ED%95%98%EC%9D%B4%EB%93%9C%EB%A6%AC%ED%9E%88+%EC%95%94%EC%82%B4+%EC%9E%91%EC%A0%84&source=bl&ots=RO0jrfmc0v&sig=ykV6-lSkXvFeeFlkKDkVml-qCSo&hl=ko&sa=X&ved=0CEMQ6AEwCWoVChMIoKPrwP7_xwIVRTamCh30NAVi#v=onepage&q=%ED%95%98%EC%9D%B4%EB%93%9C%EB%A6%AC%ED%9E%88%20%EC%95%94%EC%82%B4%20%EC%9E%91%EC%A0%84&f=false

 

 

 

나치(Nazi) 정권의 엘리트 수호부대인 친위대(SS)는 유럽 전역의 유대인을 말살하는 계획인 '최종 해결'의 실행과정에서 핵심역할을 수행했다. SS사령관 하인리히 히믈러(Heinrich Himmler)를 필두로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Reinhard Heydrich), 쿠르트 달루게(Kurt Daluege) 등은 SS와 경찰의 지위를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직속으로 확립하고 나치 정권의 이념을 실행해 나갔다.

2차대전 말까지 SS는 엄청난 대량학살을 자행했다. SS 및 경찰 사령관인 프리드리히 예켈른(Friedrich Jeckeln) 및 한스 아돌프 프뤼츠만(Hans-Adolf Prützmann)과 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 이동 대량학살 부대) 사령관인 아르투르 네베(Arthur Nebe), 칼 예거(Karl Jäger), 프란츠 발터 슈탈레커(Franz Walter Stahlecker), 에밀 오토 라슈(Emil Otto Rasch) 및 오토 올렌도르프(Otto Ohlendorf)는 소련 내 독일 점령지에서 남성과 여성, 어린이들을 무자비하고 조직적으로 총살하도록 지시했다.

폴란드 점령지 내에서 오딜로 글로보츠니크(Odilo Globocnik), 빌헬름 코페(Wilhelm Koppe), 크리스티안 비르트(Christian Wirth), 프란츠 슈탕글(Franz Stangl), 오스발트 폴(Oswald Pohl), 리하르트 글뤽스(Richard Glücks) 및 루돌프 회스(Rudolf Höss) 같은 SS 대원들은 대량 학살을 조직적으로 시행하기 위하여 가스실을 갖춘 집단 학살 수용소를 설립했다.

 

대량학살을 막아라

 

 

가장 오른쪽이 하이드리히.히틀러는 독일의 주요생산기지인 체코슬로바키아를 관리하기 위하여 냉혈한 국가보안본부의 수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총독으로 파견했다.
CC BY-SABundesarchiv

 

 

특히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골수 나치분자로 이미 1931년 하인리히 히믈러에 의해 SS 내의 정보부대인 보안방첩대(Sicherheitsdienst; SD)의 수장으로 임명되었다. 주로 나치에 대한 헌신이 전부였던 비전문 인력의 친위대 정보부서에 해군 정보장교 출신인 하이드리히의 전문성이 더해지자 그 능력은 크게 향상되었다. 하이드리히는 아마추어적이던 SS의 정보업무를 군 정보기관 수준으로 끌어올려 조직을 발전시켜 나갔다. 이후 보안방첩대(SD)는 폴란드 침공 시 폴란드 쪽에 전쟁책임을 떠넘기기 위한 정보조작임무를 성공리에 수행했다.

하이드리히의 능력에 만족한 히믈러는 그를 1933년 바이에른(Bayern) 주 부경찰청장으로 임명했다. 이듬해인 1934년에는 헤르만 괴링(Hermann Göing)으로부터 게슈타포(Gestapo) 지휘권까지 넘겨 받게 되었다. 괴링의 사설조직에 불과했던 게슈타포가 SS와 융합하여 비밀경찰로서 악명을 떨치게 된 것도 역시 하이드리히가 조직의 수장을 맡게 된 이후였다. 이후 보안방첩대(SD)와 게슈타포는 통합되어 국가보안본부(RSHA)로 명명되었으며, 하이드리히는 1939년 9월 RHSA의 초대 수장에 임명되었다.

그리하여 히틀러의 정적을 제거하는 선봉에는 언제나 하이드리히가 서 있었다. 특히 하이드리히는 인종학살을 고안한 주요인물 중 하나였다. 1942년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방안'을 모색한 반제 회의(Wannsee Conference)를 주관하기도 했다.

한편 1941년 9월, 하이드리히는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Konstantin von Neurath)를 대신하여 보헤미아(Bohemia) 및 모라비아(Moravia)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히틀러는 체코에서 벌어지는 활발할 저항활동이 노이라트의 온건노선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하이드리히를 파견했다. 체코에 대한 독일의 통제능력을 견고하게 하는데 하이드리히 만한 적임자는 없었다. 하이드리히는 공포를 통한 지배능력을 체코 전역에 과시했으며, 이로 인하여 '프라하의 학살자', '금발의 야수', '사형집행인' 등의 별명으로 불렸다. 점령군 사령관으로서 하이드리히는 언제나 오픈카를 타고 다니며 자신감을 과시하기도 했다.

1941년 말에 이르자 히틀러는 유럽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고, 독일군은 모스크바(Moskva)로 진군하고 있었다. 에드바르트 베네시(Edvard Beneš) 대통령이 수장으로 있던 체코 망명정부는 영국 정보부로부터 압박을 받고 있었다. 수데텐란트(Sudetenland) 지역이 점령된 이후 체코의 저항활동이 미약했기 때문이다. 폴란드나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등 전쟁에서 패배하여 독일에게 점령당한 국가들은 강한 저항활동을 펼쳐왔지만, 체코의 경우 초기부터 독일에게 제압당하여 본격적인 저항활동을 수행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독일의 생산기지로서 입지를 굳혀가고 있었다.

이에 연합국은 나치 정권의 핵심인물이자 체코의 강력한 지배자인 하이드리히를 제1사살목표로 지정하고 '표적 사살(Targeted Killing)'작전을 수립하기에 이른다.

 

암살 준비

 

 하이드리히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총독으로 체코 국민을 공포로 지배하면서 '프라하의 학살자'로 불렸다.
CC BY-SAHeinrich Hoffmann / Bundesarchiv

 

하이드리히 암살작전에는 '안드로포이드(Anthropoid)'라는 암호명이 붙었다. 영국군 비밀작전의 메카인 특수작전국(SOE)은 1941년 10월 20일부터 암살작전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기념일인 1941년 10월 28일, 요제프 가브치크(Jozef Gabčík) 준위와 카렐 스보보다(Karel Svoboda) 하사가 작전팀 요원으로 선발되었다. 스보보다 하사는 훈련 중 입은 부상으로 얀 쿠비시(Jan Kubiš) 준위로 교체되었다. 한편 작전요원 교체로 인하여 필요한 위조서류 준비가 늦어지는 바람에 작전 또한 연기되고 말았다.

SOE 2인조 작전팀은 다른 체코군 정보요원들과 함께 제138비행대대의 핼리팩스 수송기 편으로 1941년 12월 28일 체코로 공수되었다. 동승한 정보요원 7명은 실버 A와 실버 B팀 소속으로 영국과 체코의 비밀통신망을 구축하기 위한 임무를 띠고 파견되었다. 가브치크와 쿠비시는 프라하 동쪽의 네흐비즈디(Nehvizdy)에 강하했다. 원래 계획은 플젠(Plzeň) 동쪽에 강하하는 것이었으나, 조종사가 방향감각을 잃어 프라하를 플젠으로 착각한 덕분에 엉뚱한 곳에 내린 것이다. 강하한 병사들은 플젠에서 저항세력과 접선한 이후 다시 프라하로 잠입하여 작전계획을 구상했다.

프라하에서 이들은 몇몇 가족 단위의 저항단체 및 반나치 조직과 접선했다. 또한 사전에 잠입하여 정보활동을 수행하고 있던 체코군의 아웃디스턴스(Out Distance) 정보팀(지휘관 아돌프 오팔카(Adolf Opálka) 중위)과 접선하면서 본격적인 암살 준비를 시작했다.

가브치크와 쿠비시는 제일 처음에는 기차에서 하이드리히를 사살하기로 계획했었다. 그러나 지원 절차를 확인한 이후 기차에서 암살이 불가능함을 깨닫게 되었다. 두 번째 계획은 하이드리히의 저택에서 프라하로 향하는 도중에 숲속에서 매복공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도로에 케이블을 설치하여 하이드리히의 관용차량을 정지시킬 계획이었지만, 무장 콘보이가 있음을 확인한 정보팀의 오팔카 중위가 작전을 중지시키고 2인조를 프라하로 불러들였다. 세 번째로 수립한 계획은 하이드리히를 프라하에서 암살하는 것이었다.

프라하의 총격전

1942년 5월 27일 10시 30분, 하이드리히는 파넨스케 브르제자니(Panenské Břežany)의 자택에서 프라하 성의 사무실로 출발했다. 가브치크와 쿠비시는 프라하 8번 국도상에 있는 불로브카(Bulovka) 병원 골목의 전차 정거장에서 잠복하고 있었다. 아웃디스턴스 정보팀 요원 요세프 발치크(Josef Valčík) 소위는 두 사람으로부터 북쪽으로 100미터 지점에서 하이드리히의 접근 여부를 감시하고 있었다.

지붕을 연 하이드리히의 메르세데스 벤츠 320C 컨버터블 차량이 속도를 줄이면서 코너를 돌자마자, 가브치크가 하이드리히의 차량 앞을 막아섰다. 그들은 품속에서 스텐(Sten) 기관단총을 꺼내서 발사하려고 했으나, 갑자기 기관단총이 기능고장을 일으켰다. 이때 하이드리히는 운전사인 클라인(Klein) 상사에게 차량을 멈출 것을 명령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권총을 꺼내들었다.

좌석에서 일어난 하이드리히가 가브치크를 향하여 권총을 발사하려는 순간, 쿠비시는 개조한 영국제 73식 대전차용 수류탄을 오픈카 안으로 던져 넣었다. 쿠비시의 행동은 비상상황에 대비하여 SOE의 훈련에서 치밀하게 연습했던 동작이었다. 수류탄은 완전히 차안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차량의 오른쪽 뒤편에 부딪히면서 폭파했다. 폭발과 함께 수류탄과 차량 부속의 파편이 하이드리히의 몸으로 파고들었다. 쿠비시 역시 파편에 부상을 입고 말았다.

 

 

암살 시도로 파손된 하이드리히의 관용차량 모습.수개월 동안 잠복과 연구를 반복하던 가브치크와 쿠비시는 드디어 하이드리히의 출근길에 기습을 감행한다.
CC BY-SABundesarchiv

 

 

한편 자신이 파편으로 부상당한 사실도 인지하지 못했는지, 하이드리히는 차 밖으로 뛰어 나와서 권총을 쏘아대면서 가브치크를 쫓아갔다. 그러나 하이드리히는 몇 발자국 걷지 못하고 곧 쓰러지고 말았다. 클라인은 쿠비시를 쫓아가다가 하이드리히의 명령에 따라 가브치크를 추격했다. 작동불능에 빠진 스텐 기관단총을 버리고 이제는 리볼버를 손에 든 가브치크는 클라인에게 두 발을 발사하여 부상을 입혔다.

사력을 다하여 현장을 빠져나온 가브치크와 쿠비시는 처음에는 자신들의 암살 시도가 실패한 것으로 생각했다.

가브치크와 쿠비시는 차량이 속도를 줄이는 코너에 대기하여 기습을 가했다.

 

처절한 나치의 보복

한편 하이드리히는 곧바로 250미터 앞에 있는 불로브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하이드리히를 수술하기 위하여 프라하 카를로바 대학교(Universita Karlova)의 외과 과장 홀바움(Hollbaum) 박사가 집도에 나섰다. 의료진은 함몰된 하이드리히의 왼쪽 폐를 되살리고 부러진 11번 갈비뼈를 제거했으며, 찢어진 횡경막을 봉합하고, 파편이 박힌 비장을 제거했다. 1시간 동안 계속된 수술은 별다른 문제없이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하이드리히의 직속상관인 히믈러는 자신의 주치의까지 보냈다.

5월 29일부터 하이드리히는 철저한 치료 속에서 회복하는 듯 보였다. 의사들은 상당량의 모르핀을 투여하여 하이드리히의 고통을 완화하고자 했다. 사건 발생으로부터 1주일이 지나자 하이드리히는 완치된 듯이 보였다. 그러나 여느 때와 같이 점심 식사를 하려고 앉은 하이드리히는 갑자기 의식을 잃고 쇼크 상태에 빠졌다가, 다음 날 사망하고 말았다. 의료진은 하이드리히의 사인을 '혈액 감염에 의한 패혈증'으로 진단했다. 일설에 의하면 하이드리히의 사살에 사용된 수류탄에는 SOE가 개발한 보툴리누스균이 삽입되어 있었고, 이것이 사망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한다.

아끼던 수하인 하이드리히가 사망하자 히틀러는 SS와 게슈타포에게 처절한 복수를 지시했다. 하이드리히의 살인자를 찾을 때까지 보헤미아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라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수많은 체코인을 사살함으로써 피의 보복을 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참모들과 회의를 한 이후 수천 명 정도만 사살하는 선에서 보복 범위를 줄이도록 했다. 독일의 중요한 생산기지인 체코에서 많은 인명을 살상하여 생산능력이 감소하는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결국 1만 3,000여 명의 체코인이 체포되었다. 얀 쿠비시의 애인 안나 말리노바(Anna Malinová)도 체포되어 마우트하우젠-구젠(Mauthausen-Gusen)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오팔카 중위의 숙모인 마리 오팔코바(Marie Opálková)는 1942년 10월 24일 마우트하우젠에서 처형당했다.

한편 나치의 광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들은 1942년 6월 9일 프라하 북서쪽의 마을 리디체(Lidice)로 난입했다. 2차대전에서 악명 높은 집단학살 가운데 하나인 리디체 학살사건이 이곳에서 벌어졌다. SS 대원들은 주민들을 한곳에 모아놓고 이튿날 남성 172명을 총살했다. 여성들은 현장에서 총살당하거나 그 이전에 도망치려다 총살된 7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라벤스브뤼크(Ravensbrück) 수용소로 이송되어, 이곳에서 47명이 죽고(그중 7명은 가스실에서 처형), 3명은 실종되었다. 도망치려다 총살된 1명을 제외한 어린이 90명은 그 혈통을 조사한 후, 독일인 혈통의 아이들은 이름을 바꾸고 독일인으로 양육되었다. 1차 체포에서 빠졌던 이 지역 광부들(남성 19명)은 이후 프라하에서 처형당했다. 학살과 강제수송이 끝나자 친위대는 리디체를 불사르고, 무너지지 않은 모든 구조물을 폭파했으며 잔해를 갈아 없앴다.

 

최후의 7인

한편 암살에 성공한 가브치크와 쿠비시는 안가 몇 곳을 전전하다가 성 키릴과 성 메토디우스(Saints Cyril and Methodius) 교회에 은신했다. 이들은 작전 초기부터 교회 측의 협조로 이곳을 활용해오고 있었다.

그러나 아웃디스턴스 정보팀의 일원이었던 카렐 추르다(Karel Čurda) 하사가 6월 16일 게슈타포에 자수하면서 현지 접선책의 이름을 자백함에 따라 결국 은신처가 발각되고 말았다. 추르다가 자수하기 전까지 게슈타포는 암살자가 누구인지 어떤 세력이 존재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제 발로 게슈타포를 찾아간 추르다는 자신이 만난 모든 레지스탕스 일원을 낱낱이 공개했다.

추르다의 배신으로 인하여 레지스탕스 안가와 체코군의 정보셀이 속속 발각되었다. 결국 6월 17일에는 지주코프(Žižkov)의 모라베츠(Moravec) 가족에게까지 나치의 손길이 닿게 되었다. 게슈타포가 아파트를 급습하자, 모라베츠 부인은 청산가리 캡슐을 물고 자살했다. 모라베츠 부자()는 이후 게슈타포에게 끌려갔고, 아들 아타(Ata Moravec)는 쉼 없이 고문을 당했다. 특히 게슈타포는 그의 어머니의 시신에서 목을 잘라 어항에 넣어 아타에게 보여주었다. 결국 고문에 굴복한 아타 모라베츠는 게슈타포에게 모든 사실을 자백하고야 말았다.

 

 

                                           Saints Cyril and Methodius church

오늘날 교회당의 모습.가브치크와 쿠비시는 안가를 전전하다가 성 키릴 & 성 메토디우스 교회에 은신했다.
CC BY-SALudek at cs.wikipedia.org

 

 

6월 18일 03시 45분, SS 병력 700여 명이 성 키릴 교회로 신속히 출동하여 04시 15분경에는 교회 인근에 차단선을 구축하고 공격 준비를 마쳤다. 게슈타포와 SS는 우선 교회 관사부터 수색을 시작한 이후 교회 내부로 진입했다. 예배당을 지키고 있던 쿠비시와 오팔카 등 3인조는 치열하게 사격하면서 독일군의 진입을 막았다. 이들은 무려 2시간에 걸쳐 치열하게 저항하다가 결국 최후를 맞이했다.

 

 

 

 

 

 

창 주위의 총알 자국이 그날의 치열한 총격전을 말해준다.

 

한편 가브치크를 포함한 4인조는 교회 지하실에서 SS의 공격에 대항했다. SS와 게슈타포 측은 이들의 치열한 저항으로 약 14명이 사망하고 21명이 부상을 입었다. 가브치크 일행이 손쉽게 항복하지 않자 SS는 처음에는 매연을 지하실로 뿜어 넣어 제압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것이 여의치 않자 이후 소방차를 불러 지하실로 대량의 물을 밀어 넣었다. 결국 가브치크 일행은 전원이 권총으로 자살했다.

 

 

 

7인의 전사가 활약함으로써 체코는 전후 영토 탈환에 있어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작전 결과

하이드리히의 죽음은 나치에게는 프로파간다의 장이 되었다. 그의 장례식은 프라하와 베를린에서 동시에 진행되었으며,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 수뇌부가 모두 모였다. 반면 체코 망명정부는 안드로포이드 작전의 성공으로 수많은 동포를 잃었지만, 전후 영토를 보장받았다. 영국과 프랑스가 뮌헨 협정(München agreement)을 파기하고, 나치가 패배하면 수데텐란트 지역을 체코슬로바키아로 복귀시키기로 합의한 것이다. 이와 함께 독일인을 이 지역에서 추방하는 것 또한 합의내용에 포함되었다.

한편 안드로포이드 작전이 성공한 지 2년 후에 영국은 또 다른 표적사살 작전을 기획했다. '폭슬리(Foxley)'란 암호명의 히틀러 암살작전이었지만 결국 승인되지 못했다. 이에 따라 안드로포이드 작전은 2차대전을 통틀어 독일 정부 고위인사에 대한 유일한 암살작전으로 기록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2차대전 유일의 표적사살작전, 안드로포이드

- 목표: 프라하의 학살자 (세계의 특수작전1, 2012. 10. 30., 플래닛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