슐츠의 자막공방/펠라스카 (2002)

7만의 유대인을 구한 스웨덴 외교관 라울 발렌베리 (Raoul Wallenberg)

슐츠105 2015. 12. 5. 05:05

 

 

출처 ---> http://tip.daum.net/openknow/39505566

 

1994년 겨울,부다페스트에 있는 독일군들은 생전 처음보는 광경에 어리둥절했다.
머리가 약간 벗겨진 스웨덴 외교관 한사람이 군본부로 들이닥쳐 아우구스트 슈미트후버 장군을 협박했다. 아구구스트 슈미트후버 장군에게 협박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슈미트후버 장군은 50만 병력을 지휘하는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장군의 부하들은 어서 장군이 이 오만불손한 외교관을 제거하라고 명령하기를 기다렸지만 오히려 장군은
"부다페스트의 유대인 거주지를 독일군의 보호아래 그대로 보호하라. 만약 한 사람이라도 다치면 그 자리에서 총살해도 좋다."
라고 명령을 내린 후 스웨덴의 외교관인 발렌베리와 악수했다.


라울 발렌베리는 스웨덴의 뷰유한 금융집안에서 태어났다. 은행가 집안인 발렌베리 가문에서는 라울 발렌베리를 은행가로 만들기 위해 교육했다. 라울 발렌베리는 6개국어에 능통할 정도로 언어감각이 뛰어났다. 그래서 그는 출장을 많이 갔었는데 한번은 팔레스타인에 가문을 대표해서 출장을 갔다가 유럽에서 피난해온 유대인들을 만났다. 이들은 나치가 유대인들에게 저지르는 만행에 대해 말했고 그 만행을 막는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하는 상황을 발렌베리에게 말했다. 그는 이 일로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그 후 스톡홀름에서 만난 유대인 사업파트너는 그의 운명을 결정짓는 말을 한다. 그는 자신이 전에 살던 헝가리 정부가 나치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이른바 인종법을 제정했고 여행, 다른 사람과의 접촉, 거주지 제한 등 독일의 유사법을 모델로 하여 '인종청소'를 할 만발의 준비가 되어있다고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 파트너는 더이상 헝가리로 갈 수 없었으므로 발렌베리가 그를 대신해 출장을 갔다. 그는 그곳에서 일명 '사냥개'라고 불리는 아돌프 아이히만이 저지르는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다. 그는 헝가리에 도착하자마자 헝가리의 유대인들을 하루에 3000명씩 가축 수송용 차에 실려서 수용소로 보내졌고 1944년까지 25만명의 헝가리 유대인이 가스실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독일의 군대가 소련의 진군을 막을 수 없을 것 같자, 헝가리가 점령되기 전에 '유대인 청소'를 더 서둘러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이러한 학살을 막기위해 고민하던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과 전쟁난민위원회,세계유대인위원회는 스웨덴 출신의 정의감 넘치는 청년에게 기대를 걸었다. 그는 유대인들에 대한 이해도 깊고 여러 언어에 능통했기 때문에 이 일의 적임자였다. 아이히만은 1994년 가을 부다페스트에서 발렌베리를 처음 만났다. 처음에 그는 발렌베리를 이렇게 평가했다.

"전형적인 퇴폐적 외교관"
만약 그에게 조금만 더 사람보는 눈이 있었다면 자신의 '청소'임무를 끝까지 해낼 수 있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아이히만은 사람보는 눈이 없었다. 발렌베리는 도착하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소재 확인이 안될정도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나타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는 매수, 감언이설, 협박 등 유대인을 아이히만의 손아귀에서 빼내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동원했다. 화가난 아이히만은 당장 발렌베리를 죽이려 했지만 당시 중립국이던 스웨덴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던 독일은 아이히만에게 털 끝하나 건드리지 말 것을 명령했다. 아이히만은 하는 수 없이 자신에게 잡힌 유대인들을 죽이는데 더 혈안이 되었다. 아이히만은 더 많은 유대인들을 죽이려 했고 발렌베리는 더 많은 유대인을 구하려 했다. 그가 가장 많이 사용한 방법은 스웨덴 비자를 무더기로 발급하는 것이었다. 스웨덴비자를 받으면 스웨덴의 국적을 획득하게 되고 독일은 스웨덴사람을 건드리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에 적절한 선택이었다. 그는 서류를 위조하기도 하고 심지어 포로수용소까지 간여했다. 그는 그 곳을 운영하는 헝가리인들에게 뇌물을 주거나 전범으로 기소 하겠다고 협박을 했다.
1944년 겨울까지 그는 스웨덴 서류를 위조해서 유대인 2만명을 구했고, 헝가리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난 사람들을 위해 은신처를 제공했다. 그리고 독일군 사령붇에 압력을 엏어서 부다페스트 유대인 주거지에 갇힌 유대인 7만명을 구했다.
그는 독일이 헝가리에서 철수하기만 하면 유대인들이 안전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유대인을 가능한 많이 구하려고 애썼다.


'청소'는 소련군이 소련군이 헝가리에 들어오자 끝났다. 그러나 발렌베리는 KGB요원이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1945년 1월 17일, 부다페스트 외각에 위치한 소련 군사령관 본부는 유대인들의 처후 문제를 위해 회의할 것이 있다고 발렌베리를 불렀다. 그러나 그는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그가 사라진 후 여러 터무니 없는 소문이 나돌았지만 진실은 1990년, 영국으로 망명한 KGB의 고위 간부,올레크 고르디프스키에 의해 밝혀졌다.
그를 납치한 것은 KGB였다. KGB가 발렌베리를 주목하게 된것은 그의 가문때문이었다. 그의 가문은 앞에서도 밝혔지만 스웨덴에서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 했다. 그런데 스웨덴이 중립을 선포했을 때, 소련은 은밀히 철강을 제공해줄 것을 제안했다. 이 일의 중개역을 맡은 것이 발렌베리 가문이었다. 이 일로 발렌베리 가문을 알게 된 소련은 그의 가문이 독일의 고위층과도 밀접한 친분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로 인해 KGB는 발렌베리 가문을 이용해 독일에게 피해를 주기 위해 궁리하게 되었고 그러던 중 힘든일을 자청해서 하는 라울 발렌베리를 주목하게 되었다. KGB는 부자집 도련님의 이러한 고행을 이해하지 못하고 스탈린은 그가 그의 가문을 대표해서 미국과 독일의 정보원역활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그가 유대인을 구하기 위해 독일 장교와 접촉하는 장면을 목격한 KGB는 스탈린의 추측을 확실하게 했다. 그는 모스크바로 납치되어 처음에는 비교적 정중하게 심문 받았다. KGB는 그를 정보원으로 역이용하기 위하여 그를 다래보려 했지만 라울 발렌베리는 그것을 단호히 거절하고 자신은 정보원이 아니라고 밝혔다. 정중한 방법이 통하지 않는 다고 생각한 KGB는 그를 거칠게 다루기 시작했다. 그는 시베리아의 가장 혹독한 곳으로 끌려갔고 악명 높은 빅토르 아바쿠모프의 손에 넘겨졌다. 그는 잔학성으로 악명이 높은 사내였다. 그는 날마다 끔찍한 고문을 받으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러면서도 그는 절대 굴복하지 않았다. KGB는 그가 생각했던것 보다 끈질기자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의 아버지가 그들을 의심하기 시작하자 당신의 아들은 소련에서 귀빈대접을 받고 있고 매우 양호한 상태라고 짧게 통보했다. KGB는 스웨덴이 압력을 가해오자 발렌베리의 소련내에 존재가능성을 없어보이게 만들려고 소문을 퍼트리기 시작했다. 그 결과 발렌베리가 고문을 버티며 시베리아의 수용소에 갇혀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KGB의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고 발렌베리에 대한 헛소문 덕분에 KGB는 자신들조차 발렌베리의 존재를 모르게 되었다. KGB의 상부는 스웨덴의 압력을 견딜 수 없게 되자 유일한 증거를 없애버리기로 했다.


1947년 7월 17일, 독방에서 나온 발렌베리는 약을 먹으로 진료소로 간다는 말을 듣고 진료소로 향했다. 진료소에서 독약이 섞인 약을 집었고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스탈린이 죽고 3년뒤, 소련은 그가 독일의 스파이였다고 밝혔고 다시는 그에 대한 언급을 안하겠다고 선언했다. 1990년 수수께끼를 푼 장본인인 올레크 고르디프스키는 당시의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설명했고 발렌베리의 비문에는 "매우 위대하고 용감한 사람" 이라고 적혀있다고 했다.
그는 헝가리에 있는 동안 약 10만명의 유대인들을 구했고 후에 그리스는 그를 '정의로운 이방인'이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