슐츠의 자막공방/태평양의 기적 (2011)

태평양의 기적 : 폭스라 불렸던 사나이 (太平洋の奇跡 - フォックスと呼ばれた男, Oba The Last Samurai, 2011) 한글자막

슐츠105 2013. 1. 21. 20:26

한글자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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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의 기적 (Oba The Last Samurai, 2011) 720p.BRRip.XviD.AC3-ViSiON.smi

 

 

 

드라마, 전쟁 | 일본 | 128 분

감독 히라야마 히데유키

원작 돈 존스(Don Jones)
출연 다케노우치 유타카, 카라사와 토시아키, 션 맥고완, 이노우에 마오

 

영화소개 ---> http://cafe.naver.com/jqmd/3910

 

 

 

 

 

 

 

 

 

 

 

 

 

 

 

 

 

 

 

 

 

 

 

 

 

 

 

 

 

 

 

 

1944년 7월 7일 역사적인 옥쇄돌격으로 거의 전멸당한 일본군 사이판 수비대는 오바 대위를 중심으로 49명이 생존. 게릴라전을 전개하면서 8월 15일이후에도 항복하지 않다가 직속상관의 항복명령서를 받고 45년 12월 1일 정식 항복했다.(47명)

항복할때도 대오를 갖춰서 군가 보병의 본령을 부르며 행진한 후 미국주둔 사이판 사령관에게 군도를 바치는 식으로 완료했으며, 전사자 추모를 위해 조총까지 3발 쐈다고 한다.

 

오바 사카에(大場榮) 대위

 

 

실제 항복장면

 

 

사이판 전투(Battle of Saipan)

사이판 전투(Battle of Saipan)는 2차 세계대전중 태평양 전선에서 발생한 전투로, 1944년 6월 15일부터 7월 9일까지 마리아나 제도의 사이판 섬에서 전개된 전투였다. 연합군은 유럽에서 오버로드 작전(Operation Overlord)이 개시되기 하루 전인 1944년 6월 5일 진주만을 출발했다. 미국 제 2 해병사단, 제 4 해병사단 그리고 제 27 보병사단은 홀랜드 스미스(Holland Smith) 중장의 지휘하에 일본 제국 육군(Imperial Japanese Army) 사이토 요시쓰구(Saito Yoshitsugu) 중장의 제 43 사단을 격파하였다.

 

배경

1943년에서 1944년 전반부까지의 작전을 통하여 연합군은 솔로몬 제도, 길버트 제도, 마셜 제도와 뉴기니의 파푸아 반도를 점령하였다. 이제 일본에게 남은 것은 필리핀, 캐롤라인 제도, 팔라우 제도, 그리고 마리아나 제도 뿐이었다.

미국의 작전 담당자들은 언제나 캐롤라인과 파푸아를 내버려두고 곧장 마리아나 제도와 타이완을 점령하고자 하였는데, 이 계획이 실행에 옮겨진다면 일본 본토와 일본 남서부의 주둔군들은 상호 차단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또한 마리아나 제도에 비행장을 건설하게 되면 일본 본토는 새 B-29 수퍼포트리스(B-29 Superfortress) 장거리 폭격기의 작전반경 2,400 km 하에 놓이게 된다.

본래 작전 수행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던 남서 태평양 지역의 지휘권을 잡고 있던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는 뉴기니와 모로타이 방면으로 진군하도록 승인을 받았다. 맥아더는 이를 통하여 필리핀에 다시 돌아오겠다는 자신의 맹세를 지킬 수 있게 되었으며, 남서 태평양 전선의 대규모 병력을 동원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미국이 캐롤라인 제도로 공격해올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었다. 해당 지역의 주둔 병력을 증강하고 보급하기 위해 이들은 제공권과 제해권이 절실하였기에, 일본은 1944년 6월 아고 작전(Operation A-Go)이라는 이름하에 대규모 항모 공격을 계획하고 있었다.

 

전투

사이판에 대한 포격은 1944년 6월 13일 시작되었다. 15척의 전함이 총 165,000 발의 포탄을 쏟아부었으며 7척의 최신예 고속전함들은 2,400 발의 410 mm 포탄을 퍼부었지만, 기뢰가 있을지 몰라 9,100 m 거리에서 포격을 하였는데다가 승무원들은 연안 포격에 익숙치 못하기까지 하였다. 다음날 제시 올든도프(Jesse B. Oldendorf) 대장 지휘하에 있는 8척의 구형 전함과 11척의 순양함이 고속전함 전력을 대신하였지만 시간과 탄약 모두 부족하였다.

상륙은 1944년 6월 15일 개시되었다. 09:00 시경 300 대의 LVT가 8천 해병 전력을 사이판 서부 해안에 상륙시키는 동안 11척의 함선들이 화력지원을 하였다. 해군 전력은 전함 테네시(USS Tennessee)와 캘리포니아(USS California) 호, 순양함 버밍엄(USS Birmingham)과 인디아나폴리스(USS Indianapolis) 호, 구축함 노먼 스코트(USS Norman Scott), 몬센(USS Monssen), 칼라한(USS Colahan), 할시 파웰(USS Halsey Powell), 베일리(USS Bailey), 로빈슨(USS Robinson) 그리고 알버트 그랜트(USS Albert W. Grant) 호가 참여하였다. 일본군 포병대는 거리를 표시하기 위해 깃발을 설치하여 20대의 수륙양용 전차를 격파하였고, 그 외에도 일본군은 철조망과 포대, 기관총좌, 참호를 곳곳에 설치하여 미군의 피해를 극대화하고자 준비하였지만, 미 해병대가 야간 시간을 틈타 폭 0.8 km, 너비 9.7 km 구간에 걸쳐 상륙하였기에 큰 피해를 주지 못하였고, 야습 또한 큰 손실만 남긴채 실패로 돌아갔다. 6월 16일 미국 제 27 보병사단이 추가로 상륙하여 아슬리토 비행장(Aslito airfield)으로 진군하였고, 일본군은 다시 야습을 가하였지만 18일 결국 비행장 탈환을 포기하였다.

예상치 못한 사이판 침공에 일본군 수뇌부는 허를 찔렸다. 해군 참모총장 도요다 소에무(Toyoda Soemu) 대장은 아고 작전을 위해 준비한 전력으로 사이판의 미국 해군을 퇴치할 수 있다고 보았다. 6월 15일 그는 이를 실행에 옮겼지만 필리핀 해 전투(Battle of the Philippine Sea) 결과는 참담하였다. 이 전투르 일본 제국 해군(Imperial Japanese Navy)은 3척의 항모와 수백대의 항공기를 잃었다. 이제 마리아나 제도의 일본 주둔군에 보급이나 증강의 희망은 사라졌다.

보급조차 받지 못하게 된 사이판 주둔군의 처지는 절망적이었지만 이들은 최후의 1인까지 결사항전하자는 의지를 다졌다. 사이토는 병력들을 모아 사이판 중앙부의 타포차우 산(Mount Tapotchau)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이곳에서 전투를 치른 미군은 이곳을 ‘지옥의 포켓(Hell’s Pocket)’ 또는 ‘부상장 마루(Purple Heart Ridge)’라고 불렀는데, 이곳에서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하였는지를 표현한 내용이다. 일본군은 화산지형의 동굴들을 활용해 낮에는 숨고 밤에는 공격에 나서는 방법으로 미군의 진격을 저지하였고, 결국 미군은 동굴을 화염방사기로 하나 하나 처리하면서 나아가는 전술을 사용하게 되었다.

제 27 보병사단의 성과에 불만족한 홀랜드 스미스는 사단장 랄프 스미스(Ralph C. Smith)를 보직해임하였는데, 이는 27 보병사단의 진격로를 감안하지 않은 경솔한 조치였기에 이는 작전 수행에 타격이 되었다. 27 보병사단의 진격로는 일본군 점거하의 고지와 절벽으로 둘러싸인 협곡이었기에 진격에 많은 피해가 야기되었고, 랄프 스미스는 결국 1개 대대가 버티는 동안 2개 대대가 측면돌파하는 전략을 고안하여 진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7월 7일경 일본군의 퇴로는 완전히 봉쇄되었다. 주둔군을 지휘하던 사이토는 만세 돌격을 계획하였다. 그는 섬 내의 민간인들에게도 죽창을 쥐어주며 군과 민의 구분 없이 돌격에 동참할 것을 요구했다. 새벽녘 12명이 붉은 깃발을 휘날리며 선봉에 선 가운데 3천 병력이 최후의 돌격을 감행하였다. 이들의 뒤에는 머리에 붕대를 감은 부상자나 목발을 짚은 이들, 제대로 된 무기조차 없는 이들도 뒤따라 돌격하였다. 일본군은 미군의 최전선으로 돌격하여 미국 해병대 및 육군과 맞붙었다. 미국 제 105 보병연대 제 1, 제 2 대대와 중대본부는 도합 650여명의 사상자를 내며 거의 궤멸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격렬히 저항하는 동안 105 보병연대의 남은 전력과 제 10 해병대 포병사단은 4,300 이상의 일본군을 살상하였다. 15시간에 걸친 전투를 치른 105 보병사단 소속 3명의 병사들이 사후에 명예 훈장(Medal of Honor)을 받았다. 이 돌격은 태평양 전쟁 사상 최대 규모의 만세 돌격이었다.

7월 9일 16:15시경 리치몬드 터너(Richmond K. Turner) 대장은 사이판의 확보를 공식 발표했다. 사이토는 다른 지휘관들과 함께 동굴 안에서 자결하였으며, 진주만 공격과 미드웨이 해전의 주역이었던 주이치 나구모(Chuichi Nagumo) 해군 중장도 자결하였다.

사이판 방어병력 3만은 거의 전원 사망하였다. 미국측에 있어서도 이 전투는 당시 태평양전쟁 사상 가장 비싼 댓가를 치른 전투였다. 상륙전력 71,000명 중 2,949명이 전사하였으며 10,364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부상자들 중에는 배우 리 마빈(Lee Marvin)도 있었다. 그는 일본군의 총을 엉덩이에 맞고 좌골신경이 손상되었다.

 

민간인 피해

사이판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에 의하여 점령되었고, 전투 당시 적어도 약 25,000 명의 일본 민간인들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6월 23일 미국이 설치한 민간인 수용소에는 약 천명 이상이 수용되었다. 수용소에는 밤에도 환한 불을 켜서 다른 민간인들이 찾아오기 쉽게 하였으며 하루 세번의 식사가 제공되고, 전투로 인하여 피해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이 홍보되었다.

민간인들의 피난처가 섬 곳곳에 산재해 있었는데다가 민간용 피난처와 일본군 벙커의 가시적 차이가 거의 없었고, 전투에 사용된 무기나 전술 때문에 민간인 사상피해는 대단히 높았다. 일단 벙커로 의심되는 곳이 발견되면 고폭탄이 사용되었는데, 때로는 네이팜이나 디젤유와 같은 유류물이 함께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폭파된 곳이 민간용 피난처였을 경우 민간인 피해가 높은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천황 히로히토(Emperor Hirohito) 또한 개인적으로 민간인 피해 규모를 늘리는데 일조하였다. 당시 사이판 거주 일본인들은 낮은 신분의 사람들이었기에 미국인들의 우호적 태도에 감화될 가능성이 있었다. 때문에 일본은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정신무장을 종용하는 정치선전을 하였으며 6월경엔 히로히토 본인이 사이판의 주민들에게 전원 옥쇄를 지시하기도 하였다. 그는 또한 사이판에서 싸우다 죽음을 맞는 민간인은 사후 전사한 병사들과 같은 위치에 놓인다고도 하였다. 도조 히데키(Tojo Hideki)는 6월 30일 이 명령이 방송에 나가는 것을 막고 지연시켰지만 방송은 결국 다음날 이행되었다. 미국 해병대가 섬 북쪽 끝점에 도달한 7월 8일~12일 시점에는 대부분의 피해 야기가 끝난 시점이었다. 20,000명 이상의 일본 민간인들이 전투 마지막 3일 사이에 자결하였는데, 사후에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해서였다. 절벽에서 뛰어내린 이들도 많았다. 결국 22,000여 민간인들이 사망하였다.

 

수훈

해럴드 에퍼슨(Harold G. Epperson) – 1944년 6월 25일 제 2 해병사단 소속 에퍼슨 일병은 수류탄에 자신의 몸을 던져 분대원들을 구했다. 그의 용맹과 희생정신에 명예 훈장이 추서되었다. 훈장은 1945년 7월 4일 수요일, 오하이오주 마실론의 타이거 스타디움(Tiger Stadium)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그의 어머니에게 전달되었다.

벤 살로몬(Ben L. Salomon) – 1944년 7월 7일 제 27 보병사단 105 보병연대 2 대대 소속 군의관이었던 벤 살로몬은 부상당한 병사들의 퇴각을 돕고 네 명의 일본군 공격으로부터 환자들을 지켜냈으며, 기관총좌에 앉아 부상병들이 퇴각하기까지 시간을 벌며 수많은 적들을 막아냈다. 전투가 끝나고 그의 시신이 발견되었는데, 그의 앞에는 무려 98명의 일본군 시신들이 쓰러져 있었다. 그의 용맹함에 2002년 5월 명예 훈장이 추서되었으며 그는 제 2차 세계대전중 명예 훈장을 받은 세 명의 유대인중 한명이 되었다.

가이 가발던(Guy Gabaldon) – 로스앤젤레스에서 온 멕시코 혼혈 가이 가발던 일명은 전투중 천명이 넘는 일본군을 포로로 잡는 공을 세웠다. 재미 일본인에 의하여 양육된 가발던은 일본어를 구사하며 일본 병사들과 민간인들에게 미국인이 야만인이 아니며 항복할 경우 잘 대우해주겠다고 설득하였다. 그의 지휘관은 명예 훈장을 요청하였으나 그에게는 은성 훈장(Silver Star)이 수여되었다. 이는 이후 해군 수훈장(Navy Cross)으로 올라갔고, 1998년 이후 명예 훈장 수여 청구가 다시 이루어져 진행되고 있다.

 

사후

마리아나 군도의 15개 섬중 하나인 사이판은 일본 본토와 2,100 km 거리에 있었기에 미국에게는 매우 중요한 전략적 거점이었다. 미국이 이곳을 점령한다면 일본 본토 공격이 가능하였다.

전투 이후 사이판은 마리아나 제도의 다른 섬들을 공략하는 토대가 되었으며 1944년 10월 필리핀 침공의 전초기지가 되었다. 사이판을 출발한 폭격기들은 필리핀, 류큐 제도와 일본을 맹폭하였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일본은 1944년 11월부터 1945년 1월까지 사이판과 티니안을 여러차례 항공기로 공격하였다. 사이판 확보로 지상병력의 필리핀 진입도 가능해졌으며, 중국의 우군과도 직접 연계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의 입장에서 사이판을 잃은 것은 전쟁에서 진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 되었다. 전투가 있은지 4개월이 지나서 100 대의 B-29 폭격기들이 사이판을 출발하여 도쿄를 폭격함으로써 미국의 사이판 공략이 전략적으로 옳은 선택이었음을 증명하였다.

사이판 상실은 일본의 야심을 꺾은 결정타였다. 상급 육군 해군 장성들은 회의를 열고 총리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지도부의 변혁을 촉구하였다. 천황 또한 패전의 책임을 뒤집어쓰지 않기 위해 점차 정계에 관여하지 않게 되었다. 도조는 사임하라는 요구를 받아들였지만 그를 신뢰하던 천황은 그의 사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내각 인사들이라도 교체하고자 하였지만 반발이 심하여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7월 18일 도조는 다시 사임 의사를 밝혀 관철시켰고, 내각 총사퇴가 이어졌다.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일본 내에서는 무사정신 고취와 미국 피해가 막심하다는 내용을 보도하는데 집중하였다. 그러나 보도중 언급되는 지명만 따져보아도 미국이 점차 북쪽으로 진군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일본 언론은 마지막 전투 이후 보도를 중단하여 전투 결과를 공공에 알리지 않았다. 상세한 전투 결과가 알려진 것은 도조 히데키가 사임한 이후였다. 육군과 해군은 사망자 수는 물론 대규모 자결이 이루어졌다는 것도 밝혔다. 이는 미드웨이 이후에도 승리를 장담하던 일본군이 상세 정보를 밝힌 첫 사례가 되었다.

일본 제국 육군 대위 사카에 오바(Sakae Oba)가 이끄는 46명의 일본 병사들은 1945년 12월 1일까지 산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다가 항복 명령을 전달받고서야 무기를 놓고 내려왔다. 이들의 512일에 걸친 생존 이야기는 ‘태평양의 기적 – 여우라고 불린 사나이(太平洋の奇跡−フォックスと呼ばれた男−)’라는 제목의 영화로 제작되어 2011년 2월 11일 일본에서 개봉되었다.

전후 히로히토 천황을 비호하는 사람들은 그가 내린 자결 명령이 사이판의 민간인들이 좋은 사후 세계를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다고 주장하였다. 역사가 데이빗 버가미니(David Bergamini)는 이를 두고 천황의 옥새가 잘못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알게되면 이들중 절반은 아마 배를 가르고 싶어질 것이라고 썼다.

 

 

다른 참고자료 (엔하위키 미러)

---> http://mirror.enha.kr/wiki/%EC%82%AC%EC%9D%B4%ED%8C%90%20%EC%A0%84%ED%88%AC

 

 

태평양의 기적 (Oba The Last Samurai, 2011) 720p.BRRip.XviD.AC3-ViSiON.s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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