슐츠의 자막공방/태평양의 기적 (2011)

사이판 ‘정신대 동굴’

슐츠105 2013. 10. 12. 09:57

사이판 ‘정신대 동굴’ 들어가보니 방처럼…
 
기사입력 2012-09-21 14:53:00 기사수정 2012-09-22 21:31:12
 

조선인 위안부 흔적 찾기, 태평양전쟁 격전지 사이판·팔라우를 가다

 

“파라오(팔라우)에 간 지 1년쯤 있다가 전쟁이 났다. 하루에 20, 30명이 보통이었다.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줄을 길게 서서 군인이 옷 벗을 사이도 없이 벨트를 풀어 총대 옆에 놓고 당고바지 단추를 풀곤 했다. 질이 너무 부어서 들어가지 않으면 남근에 연고를 바른다. 그러면 미끄덩거려서 들어갔다. 들어오자마자 싸는 놈, 밖에서 싸는 놈, 커튼 열고 들어와 빨리 가라고 끄집어내는 놈도 있었다. 어떤 때는 총대로 얼굴을 때렸다. 군인을 받은 다음엔 정신이 없었다. 일어나려고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고 사타구니 양쪽이 툭 터져서 그냥 피고름이 나왔는데, 자궁 안에 생긴 고름이 썩은 후 부풀어 저절로 터진 것이었다. 다리도 부었다. 밑이 뒤집어져서 대소변도 못 봤다.”(강무자·가명)

 

위안부 실태조사 미흡

 

 


김영길 사이판 가이드가 '정신대 동굴'이라 불리는 곳의 연원을 설명하고 있다.
8월 27일 일본 노다 요시히코 총리가 “일본이 일본군위안부를 강제로 동원한 증거가 없다”고 발언해 우리 국민을 자극했다. 이에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21년 동안 ‘수요집회’에 참석하며 일본 정부의 사과를 촉구하고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은 “나만큼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느냐”며 거세게 항의했다. 하지만 역사의 증인인 위안부 할머니는 그 수가 점점 줄고 있다. 강무자 할머니 또한 망인이 돼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위안부들 증언집 2’(한울)를 통해 증언할 뿐이다.

팔라우. 일본은 1914년 괌과 파푸아뉴기니 사이에 위치한 이곳을 점령한 뒤 남양군도(1914~45년 일본의 위임통치를 받은 적도 이북의 중부태평양 지역) 통치기구인 남양청을 설치해 남태평양 진출을 도모했다. 조선인 노무자 6000여 명을 비행장 등 군사시설 공사에 투입한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벌어진 펠렐리우 전투, 앙가우르 전투, 미 해군 제58기동함대의 팔라우 공습 등으로 조선인을 포함한 일본군 4만여 명이 사망했다. 팔라우 인근의 사이판(현 미국령)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미군이 일본군 사령부가 있던 사이판을 점령하기 위한 작전에서 일본군 3만여 명과 미군 3000여 명이 전사했다. 사이판 인근 티니언 섬(현 미국령)은 원자폭탄을 실은 폭격기가 발진한 곳으로 유명하다.

 

사이판 노인정에서 만난 호세 아이토레서, 만요엘 알 메사 씨는 “조선인 위안부가 사이판에 살았다”고 증언했다.
그렇다면 태평양전쟁의 격전지였던 이곳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 위안부는 몇 명이나 될까. 오랫동안 위안부 문제를 연구해온 정진성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일본이 팔라우에 남양청을 두고, 남양군도에서 위안소 행정관리를 관장한 데다 일본군이 전선을 확대하면서 조선인 위안부를 대규모로 동원했을 것”이라고 진단하면서도 “그 규모를 파악하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현재까지 이 지역 위안부 실태 조사는 미흡한 상태. 2001년 발간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책임을 묻는다’(풀빛)에 조최혜란 한국정신대연구소 연구원이 현지 조사보고서를 내고, 해외희생동포추념사업회가 1995년 답사를 진행했을 뿐이다. 기자는 이런 이유로 9월 3~7일 사이판, 팔라우 지역에 머물며 위안부 흔적 찾기에 나섰다.

9월 3일 사이판에 도착한 뒤 먼저 ‘수요집회’ 1000회 기념으로 사이판 현지에서 동시 집회를 진행한 김영길 씨를 만났다. 사실상 사이판의 조선인 위안부에 대한 자료는 전무한 상태라 교민들이 ‘정신대 동굴’이라고 부르는 곳부터 찾았다. 라오라오 베이로부터 150여m 떨어진 이 동굴은 깊이 10여m, 길이 30여m에 달했다. 들어가 보니 그 안에는 인위적으로 동굴을 판 흔적뿐 아니라 동굴 안에 방처럼 보이는 공간 서너 개가 있었다. 관광가이드들은 1990년대부터 정글투어 코스에 이곳을 넣어 “방처럼 보이는 공간에 위안부들이 들어가 일본군과 강압적으로 성관계를 맺었다”고 설명해 왔다.

하지만 기자는 동굴 연원에 대한 간접 증언조차 확보할 수 없었다. 사이판 이민개척 세대에 속하는 임재열 사이판한인회 부회장은 “1980년대에 이민을 왔는데, 정신대 동굴 안에 야전침대가 있었고 동굴 밖에 철창이 있다는 증언만 들었을 뿐 정확한 건 모른다”고 말했다. 관광가이드 1세대들조차 “위안부가 등장하는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를 이곳에서 촬영한 뒤 관광 코스가 된 것 같다”(이는 사실과 다르다.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는 필리핀에서 촬영했다), “동굴을 탄약고로 썼다고 들었다”고만 답했다. 이 같은 전언만 난무해 위안부 존재에 의문을 갖자 김영길 씨는 “많은 군인이 있었던 곳에 위안부가 없었을 리 없다”면서 “흔적이 없다면 모두 몰살됐을 개연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뒤이어 조최혜란 연구자가 현지 조사한 카라베라 동굴로 향했다. 당시 사이판 교민인 임윤재 장로는 연구자에게 “이곳에 위안소가 있다는 말을 현지인에게 전해 들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차를 타고 ‘정신대 동굴’에서 홈이 깊게 파인 흙길을 40여 분 동안 달려 도착했지만 외진 곳이라 마을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다(기자가 한국에 머무는 임 장로에게 관련 내용을 묻자 그 이상은 모른다고 답했다).

 

티니언시 고위 공직자 익명 요구

 

 

조선인 위안부가 성병 검사를 하러 방문한 팔라우 코롤병원 은 팔라우지역전문대학으로 변했다.


9월 4일 5분여 동안 경비행기를 타고 사이판에서 5km 떨어진 티니언 섬에 도착해 증언자를 물색했다. 티니언 섬 교민인 신창수 씨 안내로 노인 서너 명의 집을 찾아갔지만 조선인 위안부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이후 티니언 섬에 대한 역사책을 쓴 돈 패럴(Don A. Farrell) 씨를 찾아가 위안부에 대해 묻자 “이 사안에 관심이 없어서 조사해보지 않았지만 티니언 섬에 조선인 위안부는 분명 있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때마침 패럴 씨를 찾아온 티니언시 고위 공직자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지자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우리 아버지는 티니언 토박이인데 어린 내게 한국 위안부 여성이 많이 살았다고 알려줬다”고 말했다. 드디어 증언자를 찾았다고 생각했지만 지난주 업무상 일본을 다녀왔다는 그는 기어코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이튿날 사이판 노인 70여 명이 낮에 찾아온다는 ‘마낭코’(Man’amko·노인정)로 향했다. 사이판 현지 원주민의 증언을 들으려고 앞으로 이 사안을 취재해보겠다는 ‘사이판타임스’(사이판 교민신문) 최민석 기자가 동행했고, 어렵지 않게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전쟁 전 한국 여성들이 비즈니스(노인은 성매매라고 표현하지 않고 에둘러 말했지만 비즈니스가 성매매를 뜻하는지 묻자 그렇다고 답했다)를 하려고 1000여 명이 왔다. 오키나와인, 일본인, 한국인 여성이었다. 가라판(사이판 중심가) 지역에 주로 살았다. 이들은 각각 다른 집에서 살았다.”(호세 아이토레서·89)

“당시 나는 어려서 조선인 위안부를 본 기억이 없다. 하지만 아버지가 어린 내게 조선인 위안부 여자들이 주변에 산다고 말했다.”(만요엘 알 메사·71)

 

뒤이어 태평양전쟁박물관으로 향해 제2차 세계대전 멀티미디어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한 결과, 위안부와 관련된 자료로 ‘동굴 안에서 죽은 일본인 여자’ 사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사진 속 주인공이 일본 여성일 수도 있지만 당시 조선인이 일본인에 포함됐던 만큼 조선인 위안부일 개연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

9월 5일 오후 5시 사이판에서 출발해 괌에서 비행기를 갈아타자 밤에 팔라우에 도착했다. 취재할 수 있는 기간은 다음 날 하루뿐이었지만 강무자, 이상옥, 강순애 씨의 증언이 있어 흔적 찾기는 비교적 수월할 듯했다.

다음 날 아침 하순섭 해외희생동포 추념사업회 팔라우 지부장의 안내로 코롤 시내 위안소 터부터 찾았다. 이곳이 바로 강무자 할머니가 “군인들이 데리고 간 집은 코롤 병원 뒤에 있는 위안소였다. 간판이 한자로 쓰여 뭐라고 돼 있는지 몰랐다. 집은 사각형인데 방은 30개가 넘었다. 그들은 방 서너 개를 터서 하나로 만들더니 우리에게 들어가라고 했다”고 말한 그 장소일 듯했다.

 

한국 여성 카후에라고 불러

 
때마침 주변을 걸어가던 토마스 오바(73) 씨에게 조선인 위안부에 대해 묻자 그는 “이곳 마사지 업소에 조센 마사지 레이디가 살았다”면서 인근 찻집에 있는 80대 친구를 소개했다. 이 노인은 익명으로 인터뷰하면 내용을 알려주겠다고 했는데, 주민들은 익명을 고집하는 이유에 대해 “팔라우가 작아서 이름이 나오면 누군지 금방 알아 손해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귀띔했다.

 

“우리는 그곳을 ‘샤워 하우스’라고 불렀다. 거긴 오직 일본군인만 들어갈 수 있었다. 팔라우 원주민은 갈 수 없었다. 그들은 이걸 (자신의 손을 두 손으로 맞잡아 치면서) 하려고 갔다. 여자들은 일본 정부가 데려왔다. 안에서 샤워하게 시켰다. 그런 여자들은 지금은 팔라우지역전문대학(Palau Community College)의 전신인 코롤 병원에도 있었다.”

 

그가 지목한 팔라우지역전문대학을 찾아가 확인하자 그곳은 현재 대학 건물의 핵심 본부로 사용 중이었다. 투티 칠튼 학사처장을 만나 위안부에 대해 묻자 그 내용은 처음 듣는다고 했다. 결국 고인이 된 이상옥 할머니가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위안부들 증언집1’(한울)에 남긴 “육군 졸병이 가슴, 팔, 발을 칼로 찔러 병원에 입원한 뒤 일본인 군의관의 도움으로 간호조무사 구실을 했다”는 말을 떠올리며 그 실태를 짐작하는 수밖에 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100명이 넘는 여자가 검사를 받으러 왔다. 조선 여자가 50명 정도 됐다. 병원에 있으면서 팔라우에는 일본 유곽과 조선 유곽이 각기 하나씩 있다는 것을 알았다. 병이 있는 여자들은 나팔관에 고름이 생겨서 잘 빠지지 않았다. 10명 이상이 늘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증세가 덜한 여자는 2, 3일 만에 나가고 심한 여자들은 한 달 정도 있었다. 검사하면서 보니 애기를 낳은 경험이 있는 사람도 있었다.”(이상옥)

 


막연한 기대를 안고 팔라우 지역문화사회국(Ministry of Community&Cultural Affairs)을 찾았다. 원주민 역사를 기록한다는 한 조사원은 “일본 정부로부터 지원받는 것이 많기 때문에 이름이 노출되는 걸 원치 않는다”면서 “느가드마우(Ngarmau)에 사는 83세 팔라우 여성이 성을 파는 조선인 여성들이 살았다고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고 말했다. 기자의 요청에 그는 그 여성과 통화 후 “당시 팔라우 원주민은 일본 여성을 난카이로, 한국 여성을 카후에라고 불렀다”는 증언을 더해줬다. 앞으로 이 내용을 지속적으로 찾아보겠다는 그를 뒤로하고 코롤 시내에서 이를 기억할 만한 노인을 만나기 위해 노인정을 찾아갔지만 증언은 들을 수 없었다. 다만 팔라우 노인정 봉고차에 그려진 일본 국기가 보였다.

 

나흘간의 짧은 취재 일정에서 잃어버린 역사 흔적을 찾았음에도 한국으로 돌아오는 마음은 편치 않았다. 어느 누구도 제대로 정리하지 않아 버려진 남태평양 조선인 위안부들의 흔적을 살펴보니 “기억되지 않은 역사는 반복된다”는 명언이 귓전에 맴돌았다.

 

이혜민 기자 behappy@donga.com

 

 

 

 

 

66년 전, 만세절벽에서 벌어진 참극

▲ 사이판에서 일본의 패망이 확정된 1944년 7월 9일 4000여 명에 달하는 일본군과 민간인이 이곳 만세절벽에 뛰어내려 자살을 선택했다. 만세잘벽 근처에는 일본이 세운 추모비들이 늘어서 있다. 그중 충혼비는 한국 관광객들의 단골 '껌 테러(?)'대상이다. ⓒ민족21 서유상기자

1944년 7월 9일, 4000여 명의 일본군과 민간인들이 섬의 북쪽 끝에 있는 말피곶에 몰려들었다. 미군의 공격으로 사이판의 일본군은 괴멸됐고 전세는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절벽 밑은 바위들이 칼날처럼 솟아 있었다. 아이들이 무섭다고 울면 어머니가 자식들을 밀치고, 그 뒤에 아버지가 어머니를 밀어 떨어뜨린 다음 절벽 밑으로 몸을 내던졌다. 뛰어내리기를 주저하는 민간인들은 일본군 병사에 의해 무참히 사살됐다. 멀리서 이 장면을 지켜보던 미군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66년 전, 수천 명의 목숨을 빼앗은 바다는 평온하기만 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관광객들은 저마다 즐겁게 포즈를 취했다. 어제 터진 총격사건도 대수롭지 않은 판에 수십 년 전 벌어진 생지옥이야 말해 무엇하랴.

“이 충혼비는 일본 정부에서 세운 것인데 엄지손가락을 형상화하고 있어요. 최고라고 치켜세우는 의미죠. 여기, 이 자국들 보이시죠? 한국 관광객들이 씹던 껌을 붙여 놓은 흔적이에요.”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지금도 가끔 껌을 붙이려는 한국인과 뜯어말리려는 일본인 관광객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곤 한단다. 새삼 돌에 새겨진 글자가 섬뜩하다. 왜 추모비도 아닌 충혼비(忠魂碑)인가. 산 자를 죽인 것도 모자라 일왕의 ‘충성스런 혼’으로 영혼마저 결박할 셈인가. 멈추지 않는 인간의 폭력 앞에 잠시 할 말을 잊는다. 죽음의 그날,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인과 뒤섞여 강제로 떨어졌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전쟁 당시 사이판에는 7000여 명의 조선인들이 있었다. 1971년 일본 후생노동성이 1971년에 작성한 ‘구 일본군 재적 조선출신 사망자 연명부’에 따르면 사이판에서 1101명이 사망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기록에 없는 민간인까지 합하면 수천 명. 아마 그날 이곳에서도 최소한 수백 명이 죽었을 것이라 짐작할 뿐이다. 만세절벽에서 고개를 돌리면 바로 뒤에 자살절벽(Suicide Cliff)이 보인다. 이곳에서도 수많은 일본인들이 떨어져 죽었다. 자살절벽 바로 밑에는 ‘최후 사령부(Last Command Post)’가 있다. 당시 일본군이 천연동굴을 이용해 해안 진지를 만들어 놓은 곳이다. 일본군은 이곳에서 마지막까지 싸우다 패망을 맞았다. 당시 일본군을 지휘하던 사이토 중장과 나구모 중장은 7월 6일 미군에게 일격을 가하고 전원 옥쇄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 명령서에 서명을 한 나구모 중장은 주위의 해군 장교들과 〈우미유카바·海行かば〉(바다로 가면)란 노래를 불렀다.

‘바다로 가면 물 속에 쌓인 시체/ 산으로 가면 풀 속에 있는 시체/ 천황 옆에 머물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

사이토는 이날 병사들이 마지막 공격을 위해 출발하는 것을 바라본 뒤 할복자살했다.

▲ 일본군이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최후사령부의 모습. ⓒ민족21 서유상기자


미국과 일본의 운명을 가른 섬, 사이판

다음날, 가이드를 졸라 가라판 시내에 있는 박물관에 가기로 했다. 그러나 하필 이날 주지사 선거가 있어 운영을 안 한단다. 대신 미국 기념공원(American Memorial Park) 내에 있는 전쟁기념관으로 향했다. 일본인 관광객 몇 명이 있을 뿐 전시실 안은 한가했다.

전쟁기념관에는 사이판을 포함해 마리아나 제도에서 있었던 태평양전쟁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었다. 사이판은 전쟁 전 스페인, 독일의 식민지였다가 1차 세계대전 직후인 1914년부터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1941년 진주만 습격 당시 미국령이었던 괌까지 점령한 일본은 태평양으로 전선을 확대했다. 사이판은 일본에게 있어 본토 침략을 막는 방파제나 다름없었다. 반면 미국에게는 일본으로 들어가는 현관이었다. 당시 미군의 신형 폭격기 B-29는 사이판에서 도쿄까지의 거리 2400㎞를 충분히 왕복할 수 있었다. 1944년, 미국은 사이판을 제 1차 공격 목표로 설정했다. 이로써 사이판은 ‘운명의 섬’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