슐츠의 자막공방/태평양의 기적 (2011)

[남태평양 징용 한인들의 恨] (중)알려지지 않은 사이판 징용 한인

슐츠105 2013. 10. 12. 10:16

남태평양 북마리아나제도 중 가장 큰 섬인 사이판은 한국인에게 신혼여행지와 휴양지로 유명하다. 일본인들이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 때문에 한국인들이 징용이나 징병, 정신대로 사이판 등 남태평양으로 끌려와 억울하게 숨져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한국인은 거의 없다.

 


◆징용 한국인 희생 잘 몰라

해외희생동포추념사업회와 대구대 관계자 80여명이 희생동포들을 추념하기 위해 사이판을 찾은 지난주에도 일본인 관광객들은 사이판 곳곳에 수없이 세워진 기념비 또는 추모비를 찾아 참배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특히 가족 단위 관광객들이 일본군을 기리는 비석 앞에서 어린 자녀들에게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일본 군국주의의 피해자인 한국인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곤 사이판 등 남태평양에서 억울하게 숨져간 선조들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고 있다. 희생동포 추념행사가 진행될 기간에도 한국인 관광객 수백명이 이 섬에 머물고 있었지만, 징용 한국인을 추념하는 '태평양한국인추념평화탑'을 찾은 사람은 전무했다. 이전에 사이판을 찾았던 한국인도 위령탑을 찾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는 것이 현지 관계자의 증언이다.

사이판 북부 마피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태평양한국인추념평화탑은 1979년 해외희생동포추념사업회가 건립했으며, 월드건설이 '사이판 월드리조트'를 개관한 2006년 3월 재정비됐다.


◆ 몸서리치는 일본군 만행

사이판에 처음 발을 디딘 한국인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 남양척식회사가 사탕수수밭에서 일을 시키기 위해 데려온 노무자들로 알려져 있다. 이 당시 사이판에 끌려온 노무자들은 대부분 독립운동가였다. 이들은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모두 징용체제에 편성됐으며, 이후 징용으로 끌려온 수많은 한국인과 함께 강제 노역에 시달렸다. 특히 사이판 등 남태평양에는 경북을 비롯해 경남 및 전북 출신들이 주로 배치됐다고 알려지고 있다.

1944년 7월 미군에 대항하며 최후까지 저항하던 일본군은 전세가 기울자, 일왕의 옥쇄령(玉碎令)에 따라 생존자들이 모두 자결할 것을 강요했다. 일본군 집단자살의 무대는 사이판 최북단에 있는 80m 높이의 '만세절벽'과 이 절벽 뒤쪽에 있는 마피산(해발 249m) 서쪽 절벽인 '자살절벽'이다.

일본군들은 이곳에서 한국인들에게도 자살을 강요했다고 한다. 어린 아이를 업은 한국인 여성이 자살절벽에서 뛰어내리기를 거부하자, 일본군이 아이를 빼앗아 절벽 아래로 내던지는 바람에 어머니도 아이를 따라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가 현지에서 전해지고 있다.

이용택 해외희생동포추념사업회장은 "이처럼 억울하게 숨진 한국인의 명단은 물론, 정확한 숫자도 파악되지 않고 있다"면서 "구한말 지도층의 오판으로 억울한 희생자가 부지기수로 발생한 만큼, 국민들은 아직도 지도층에 대한 적개심에 가까운 불신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