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문관 미츠나리 ¶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한 후에는 행정업무가 중시되었기 때문에 크게 중용되었다. 실제로 산술에 엄청난 재주가 있어, 임진왜란에 동원되는 물자를 며칠만에 다 처리했다고 한다. 중앙의 행정업무에 바쁜 와중에도 자신의 영지를 잘 통치하여 백성들에게 크게 인심을 얻었다.
유학을 공부해서 그런지 왠지 선비 같은 기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항시 '무사란 자고로 주군께 받은 것은 남김없이 모두 써버려야 하는 법이다. 이를 남기고자 하면 도둑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를 너무 써버려 빚을 지게 되면 이 또한 어리석은 멍청이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미츠나리는 자신의 봉록 대부분을 가신들에게 주고 자기 자신은 청빈한 생활을 하였다고. 특히 시마 사콘을 영입하기 위해 자신의 총 봉록의 절반을 사용하기까지 했다.
그 밖에 가문(家紋)은 '大一大万大吉(대일대만대길)'을 사용했다. 그 의미는 '한 사람이 만인을 위하고, 또한 만인은 한 사람을 위한다면 세상엔 복이 온다'. 삼총사의 총사대가 칼을 모으고 외치는 구호 "tous pour un, un pour tous(모두는 하나를 위해, 하나는 모두를 위해)"와 비슷한 의미다.
이시다 미츠나리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첫 만남은 이렇다. 당시 이시다 미츠나리는 동자승이였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신이 있는 사찰로 찾아오자 처음에는 큰 잔에 먹기 좋게 미지근하고 연한 차를 내왔다. 차를 단숨에 마신 히데요시는 한 잔을 더 청했고, 이번에는 처음 잔보다 조금 뜨겁고 진한 차를 조금 작은 잔에 가져왔다. 히데요시가 한 잔을 더 달라고 하자 이번에는 뜨겁고 진한 차를 작은 잔에 가지고 왔다고 한다. 히데요시가 목이 마를 것이라 여겨 첫 잔은 한 번에 마시기 좋게 미지근하게 타온 것. 이를 대접받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시다 미츠나리가 안목이 있는 인물이라 여겨 자신이 거두어 가게 되었고 중용했다.
호죠가 공략 당시 미츠나리는 오시성(忍城)공략을 맡았는데 성주인 나리타 우지나가(成田氏長)는 오다와라 수비를 위해 없어서 아들 나리타 나가치카, 딸인 카이히메(甲斐姫)가 지키고 겨우 500여명의 병력으로 지키고 있었다. 이시다 미츠나리는 2만여 대군으로 몇 차례 공격을 가하나 군관민이 일체단결한 오시 성의 저항에 패퇴하였다. 그래서 생각한게 히데요시가 빗츄 다카마츠성(備中高松城)을 공략했을 때 쓴 수공. 그러나 정작 수공을 벌였는데 물이 역류해 이시다군을 덮쳤고, 물이 빠지고 난 뒤엔 전장이 진흙탕이 되버려 오히려 공격이 더욱 어려워졌다. 결국 미츠나리는 소환되었고 오시성은 오다와라성이 함락된 이후 항복하였다(...).[1]
호죠가 공략 당시의 수공 실패의 경우, 미츠나리가 총대장으로서 참가한 최초의 전투임에도 보기 좋게 실패하여 이후로 '미츠나리 = 전투에는 젬병'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지게 되었으나, 실은 미츠나리의 판단이 아니라 히데요시의 압력에 의한 전략이었다고도 한다.
이시다 미츠나리를 위한 변호 또는 변명을 하자면 오시성은 사라지고 없지만[2] 현재 지형과 당시 지도를 보아도 수공을 하기에는 부적합한 지형이라고 한다. 오시성 주변 지형은 평지인데다 주변에 자연제방으로 사용할 만한 구릉 등의 지형이 없으며 오시성은 저습지로 둘러쌓여 있는데다 이시다 미츠나리가 제방을 쌓은 장소에 비해 다소 고지대에 있는 등, 도저히 수공을 펼칠만한 장소가 아니라고 한다.[3] 게다가 결정적으로 당시 쌓은 제방의 총길이는 약 28km. 아무리 다죠다이진(太政大臣)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지휘권을 일임받았다지만 일개 봉행(奉行)이 독단으로 실행할만한 규모의 작전이 아니다. 더군다나 수공을 시작한 시기에 미츠나리와 히데요시가 주고받은 편지의 내용을 보면 미츠나리는 수공에 비판적이며, 히데요시가 수공을 명령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여럿 있다. 히데요시가 자신의 힘과 제력을 알리기 위해 시켰다고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더군다나 군사적 역량보다 행정업무에 더 밝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수공을 시도하였을 때 얻을 수 있는 이익과 손해를 계산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참고: 노보우의 성 - 전국시대 중간 관리직 미츠나리의 비극
참고: 노보우의 성 - 전국시대 중간 관리직 미츠나리의 비극
2.1 문치파의 선봉에 서다 ¶
또한 이시다 미츠나리의 가혹한 성격과 싫은 것을 너무 노골적으로 티내는 것은 많은 무사들에게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같은 시동 출신이면서도 야전 무사들이었던 시즈가타케의 칠본창 무리와는 특히 사이가 나빠, 세키가하라 전투 때 이들은 모두 동군에 붙었다. 가토 기요마사는 특히 악연이었는데, "문관 주제에 군무까지 아는 척 하는 놈"이라고 깠다고.
이들과 사이가 나빴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오와리 시절부터의 가신들인 칠본창 등은 오랜 고참인 자기들을 제치고 오우미 출신인 미츠나리 등이 권력을 차지한 것을 못마땅해 한 것, 근본적으로 문치파와 무단파로 생각 자체가 달랐음이 가장 큰 이유이며, 또한 임진왜란 시에도 전투보다는 화평 쪽에 무게를 둔 행동 등 많은 부분에 있어서 대립되는 관계였다.
결국 히데요시의 핵심 가신들은 오와리 당과 오우미 당으로 나뉘게 되었다. 미츠나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충성심이 큰 데다가 내정 능력까지 뛰어나서 오와리 당의 견제 속에서 자연스럽게 오우미 당의 영수가 되어 버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들이 둘로 나뉘어 버린 것이다.
야마토 국의 낭인으로 전국에 이름 높던 시마 사콘을 자기 봉록의 반으로 군사로써 임관시킨 일로 유명하다. 물론, 미츠나리의 봉록 반 정도가 아니라 이시다 미츠나리 그 자체의 모든 것조차 사콘의 몸값으로는 어림도 없었지만 미츠나리의 열의에 감동하여 사관했다. 또 사와야마 성(佐和山城)을 가지고 있어, 사와야마 성과 시마 사콘은 '미츠나리에 과분한 두 가지'로 알려져 있다.
시마 사콘 외에도 자신의 부족한 군재를 보충하기 위해 가모 사토이에, 마이 효고 등 용맹스런 가신을 많이 영입했다. 무능한 인물이지만 자신의 가신들에게는 인망이 있었는지 시마 사콘 다음 가는 가모 사토이에는 세키가하라의 전투에서 부대가 전멸할 때까지 싸우다 죽었다.
2.2 임진왜란에서 드러난 무능한 군재 ¶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 등과 선발대로서 참전했는데 주로 전투 지원 위주의 임무를 맡다가 평양성을 빼앗긴 이후(평양 전투) 벽제관에 숨어 있다가 명나라 군대를 요격했다(벽제관 전투). 당시 명나라 군대는 패잔병을 뒤쫓느라 여념이 없어서 다른 곳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을 신경쓰지 않고 있다가 요격을 당했다. 명나라 군대를 요격한 이후에는 행주산성으로 향했다. 그렇다. 행주대첩이다.
그러나 이시다 미츠나리는 군재(軍才)는 거의 전무한 편이라 덮어놓고 덤볐다. 당시 조선 측에서 권율이 지휘관인 행주산성은 한강을 뒤에 둬서 배수진의 상태인데 문제는 입구가 좁아서 대군이 한 번에 다 들어가지 못한다는 점이다(호리병 같은 지형이다). 이런 지형은 그 지형에 맞는 전술[4]을 짜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시다 미츠나리가 군사적 식견이 문외한인데다가 같이 지휘하던 우키타 히데이에나 킷카와 히로이에 역시 군사적 식견이 부족하여[5] 결국 일본군은 보병 돌격, 그것도 3열 횡대의 보병 돌격으로 승부를 보려 했다.
그러나 이시다 미츠나리와 나머지 두 다이묘들의 군사적 식견이 없었던 탓에 행주산성에다 병력을 한꺼번에 들이붓는 과오를 범하고 만다. 게다가 상대가 의병이라면 모르겠는데 전쟁이 일어난지도 꽤 됐고 나름 전장에 적응한 조선의 정규군. 권율에게는 아주 훌륭한 먹잇감이 된 셈. 결국 이시다 미츠나리가 지휘하는 일본군들은 말 그대로 '총알받이'가 되었다. 권율은 오직 그 비좁은 입구에다만 화력을 집중시킬 수 있으니 굉장히 편하게 전투를 치를 수 있는 반면 일본군들은 횡대로 줄을 선 상황이라 이건 조선군의 화력이 집중돼서 앞으로도 못나가고 뒤에 줄 선 아군 병력 때문에 뒤로 빠지지도 못하고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였다. 병력을 이런 식으로 굴리니 패배는 당연했다. 그래도 이시다 미츠나리는 숫적 우세로 조선군의 화력이 바닥나기를 바랬으나 신기전, 비격진천뢰, 각종 총통 등 각종 기상천외한 무기들이 쏟아져 나오는 통에 일본군은 계속 일방적으로 당하고만 있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조선군 진지에 불을 지르기 위해 불화살로 대응해보기도 하지만 조선군 진지 바로 뒤가 한강이다. 조선군은 목책에 물을 뿌려 불화살 공격도 무력화시켰다.
일방적으로 쳐발리고 있던 일본군들은 결국 경기수사 이빈의 지원 부대가 화살을 잔뜩 갖고 도착하자 일제 퇴각을 감행했다. 이 와중에 우키타 히데이에는 승자총통에 맞아 땅바닥을 뒹굴며 사경을 헤메게 되었다. 그걸 왜병들이 들춰 업고 도망쳐서 간신히 살았다. 이시다 미츠나리나 킷카와 히로이에. 안코쿠지 에케이 역시 모두 승자총통을 맞고 부상을 당했다. 대망신... 결국 3만 명을 끌고 2000명을 상대하면서 적에게 거의 피해를 못 입히고 1만 5000명 전사 + 9000명 부상이라는 경이적인 피해를 입었다. 변명이 가능한 호죠가 공략과는 달리 이는 빼도박도 못할 참패이며 게다가 조선에 투입된 일본군의 전체 숫자가 처음에는 16만이었지만 다수의 병력이 손실되어 1593년에는 이미 절반 이하로 줄어든 상태였음을 고려한다면 한마디로 목을 내놓아도 할 말이 없는 실수.
결국 그의 군사적 무능 때문에 더 이상 지휘관으로는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고, 정유재란이 되자 주로 외교 및 행정 쪽에 전념하게 되었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인하여 임진왜란은 끝나게 되었다.
3 이에야스에 저항을 시도하다 ¶
히데요시가 죽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대두되기 시작하자 미츠나리는 반 이에야스 세력을 규합, 이에야스를 제거하고자 한다.[6] 이 당시에는 이에야스와 동등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마에다 토시이에가 생존해 있어서,[7] 무게추는 도요토미 파[8]인 미츠나리 쪽이 유리했으나, 토시이에가 1599년 3월에 사망하면서 반전되게 된다.
이 때를 틈 타 가토 기요마사 등이 모의하여 자신을 암살하려 하자 이를 감지하고 탈출, 그렇게나 증오하는 이에야스에게로 도망쳤다. 그리고 그렇게나 증오하는 이에야스에게 보호를 받았다.[9]
이에야스로서는 눈엣가시인 미츠나리가 제발로 굴러들어온 셈이었으나, 당장 미츠나리를 제거하기보다는 더 큰 이익(토요토미 파의 분열과 자신의 인망쌓기)을 위하여 미츠나리와 무단파 인물들과의 화해를 중재한 뒤, 이시다 미츠나리를 안전하게 사와야마 성까지 배웅하게 된다.[10]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미츠나리는 이에야스에게로 도망쳐서 보호를 받은 것이 아니라, 사전에 사타케 요시노부의 도움을 받아서 후시미성으로 도망, 무단파 무장들과 대치하던 와중에 이에야스의 중재를 받았다고도 한다.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미츠나리는 이에야스에게로 도망쳐서 보호를 받은 것이 아니라, 사전에 사타케 요시노부의 도움을 받아서 후시미성으로 도망, 무단파 무장들과 대치하던 와중에 이에야스의 중재를 받았다고도 한다.
어찌되었건, 이에야스의 도움을 받아서 무단파와 화해 아닌 화해를 한 것은 사실이나, 그 댓가로 무단파의 요구인 오봉행에서 물러나는 조건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는 결국 토시이에의 사망에 이어서 그를 견제할 수 있는 토요토미 세력의 유력인물인 미츠나리도 힘이 크게 약화되는 결과를 만들었고, 이에야스는 더 큰 힘을 얻게 되었다.
4 세키가하라 전투 ¶
자신과 은밀히 친교를 맺고 있던 나오에 카네츠구, 사타케 요시노부등과 내통하여 세키가하라의 결전을 구상하였다. 이는 카네츠구가 이에야스를 도발하여 동쪽으로 끌어내면 우에스기 집안[12][13]이 아이즈에서 동군을 맡아 수비하고, 그 틈에 미츠나리는 서쪽의 군세를 모아 이에야스를 친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 이시다 미츠나리가 군사에 대한 문외한이라는 점을 방증했을 뿐이다.
자세한 전술은 동군 방향으로 산 꼭대기에서 학익진을 펼쳐 공략한다는 점인데 문제는 학익진의 한쪽 날개가 바로 다름 아닌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였다는 점이다. 왜 콕 찍어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여야만 했을까?[14] 용병술은 군사를 다루는 능력의 기본인데 이런 점에서 이시다 미츠나리의 용병술은 행주대첩에 버금가는 대실패로 볼 수 있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서군 측에서도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상태라서, 비록 그의 군대가 수가 많고(1만5천) 강력하기는 하지만 이 때문에 주력으로 사용하긴 무리가 많았다.[15] 결국 이 우려대로 히데아키는 전투 도중 동군으로 돌아섰다. 더군다나 정작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본대는 그 학익진에 갇힌 형태가 아니라 그 학익진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상태이며 학익진 안에는 칠본창의 군대만 주둔해 있을 뿐이다. 격투기에서 머리가 아닌 허벅지를 노리고 공격하는 셈. 그 상태에서 학익진을 한 것 자체가 손자병법의 병세편(兵勢篇)에 위배되는 짓이고 그 학익진의 한쪽 날개를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로 쓴 건 손자병법의 군형편(軍形篇)과 완벽하게 정반대로 행동한 것이다.
군략이 모자라면 권모술수라도 부렸어야 했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에게 접촉한 것과 같은 정치공작은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없었다. 결국 모리 가문 같은 아군까지도 미츠나리를 의심해서 도쿠가와파인 킷카와의 진언 때문에 전투를 방기한다. 결국 이것은 서군의 상당수가 서군을 배반하는 결과로 나타난다.
자연 이런 상황을 서군이라고 모를 리 없었고, 오오타니 요시츠구가 내놓은 비책은 인망은커녕 널리 원수를 지고 혐오를 받는 이시다 미츠나리 대신 명문가로서 명망이 높은 다이묘 모리 데루모토의 이름을 바지사장(...)으로 사용하는 것. 그래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비록 이시다 미츠나리가 전적으로 서군의 거병을 주관했음에도 불구하고 서군의 총사령관은 명목상 이시다 미츠나리가 아니라 모리 데루모토였으며, 모리를 무시하고 사령관처럼 행동한 것을 이유로 모리는 싸움에서 이탈하기로 결심하고, 모리의 사령관으로 참전한 모리 히데모토는 병사들에게 도시락을 먹여야 해서 안 된다는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로 싸움을 방기한다.[16]
아니나 다를까. 이에야스는 카네츠구의 도전장을 받고 심히 분노했다고는 하나, 이시다의 움직임과 자중지란을 유도하는 신중한 태도를 취한다. 우에스기 가게카쓰가 쳐들어오자 다테 마사무네에게 우에스기 가게카쓰를 막게 한 것 외에는 먼저 군사를 움직임이 없이 사태를 관망하는데, 특히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시다 미츠나리가 학익진을 전개할 것을 미리 간파하고 자신의 본진을 뒤로 빼고 7본창의 부대를 들어가게 하여 서군이 어떻게 나오나 지켜보고 있었다.
군사회의에서 무시했다는 이유로 시마즈 요시히로가 삐진데다[17][18] 쵸소카베 가문은 별로 싸우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맹주 격인 모리 가문은 아예 가문 내 여론이 완전히 둘로 갈라진 상태라 수적으로는 비슷했지만[19] 내실은 동군이 유리했다.
동군에서 서로 선봉을 서겠다고 다투는 사이에 어영부영 전투가 개시되고, 오전은 서군측에서 선봉인 우키다 군이 매우 분전하였지만[20] 시마즈 군의 원호를 받지 못해 결국 중과부적으로 퇴각했다.
서군 쪽에서는 시마 사콘이 기마 돌격을 하며 동군의 구로다 군을 마구 짓밟았는데, 시마 사콘이 저격을 당하는 바람에 일시후퇴했다. 동군 쪽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최측근이자 당시 일본 최고의 맹장인 혼다 타다카츠가 기마 돌격을 하며 서군의 우키타 히데이에 군을 마구 짓밟았는데 그만 혼다 타다카츠의 말이 머리에 총을 맞고 전사하여 혼다 타다카츠는 낙마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 다시 말을 빌려 타고서 분전하였다.
미츠나리는 밀려드는 동군들에 맞서 방어전을 비교적 잘 수행했다. 이것도 미츠나리 본인의 기량이 아니라 가신들의 노력 덕택이었다. 시마 사콘의 저격으로 1진이 무너지고, 동군의 대부분이 미츠나리만 베면 끝난다고 생각해서 (공훈도 노리고) 쇄도했던 시점에서는 대단한 것이었다. 다나카 요시마사는 역궤멸을 당했을 지경. 지휘를 하던 도쿠가와가 불안해서 전장의 앞쪽으로 나아가 시야를 막는 장수가 있으면 칼을 휘두를 정도로 초조해했다. 하지만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 역공의 주력이 되어야 할 코바야카와나 모리가 배신하면서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된다.
낮에는 고니시 군이 싸우는 둥 마는 둥 하다가 퇴각, 오오타니 요시츠구가 매우 분전하며 동군 군단들을 모두 끌어들였지만 결국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을 시작으로 그동안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서군의 군소 무장들, 와키자카 야스하루, 쿠치키 모토츠나 등이 차례차례 배신하는 통에 포위되어 전멸되었다. 그러나 오오타니 요시츠구의 군사적 식견이 대단했던 것은, 이 와중에도 단 몇 백 명의 병력[21]만으로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1만 5천 병력을 산으로 밀어붙였다는 점이다. 본격적으로 코바야카와 군이 내려오자 중과부적으로 전사[22].
오후에는 이시다 군 직속 부대만 남아, 시마 사콘이 최후의 돌격을 감행하다가 전사(부상을 입고 살아남았다는 설도 있음), 가모 사토이에의 부대도 전멸했다.
5 최후 ¶
패배가 거의 확실시되자 미츠나리는 재기하고자 거성인 사와야마 성으로 도주하려 했으나, 가는 도중에 다나카 요시마사(田中吉政)에게 붙잡혀 이에야스의 진영으로 끌려왔다.
이에야스는 도요토미의 시대가 끝났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미츠나리의 비참한 모습을 로쿠조가와라[23]의 성문 앞에 세워두고 모두가 구경하게 했다고 한다. 동군의 제장들이 지나가며 모두 비웃고 욕을 하고 침을 뱉거나 심지어는 육모방망이로 머리를 때리기까지 했지만 미츠나리는 끝까지 의연했다고 한다. 그 뒤 사형이 결정되어 처형되었다.
처형되기 직전에 목이 마르니 물을 달라고 하였으나 없어 때마침 가을이라 잘익은 홍시를 건네자 몸에 해롭다 하여 먹지 않았다. 더더욱 어이가 없어진 간수가 '곧 죽을 놈이 몸을 아껴서 뭐하겠소?'라고 묻자, 미츠나리는 '큰 뜻을 품은 자는 마지막 순간까지 목숨을 아끼는 법이다'라고 한 뒤 처형되었다.[24]
6 총평 ¶
총평하자면 강한 충성심과 뛰어난 행정 능력을 가진 정치가로서 도요토미 가문 최후의 기둥이었다. 그러나 좋고 싫음을 너무 노골적으로 내색하는 성격 탓에 적을 만들고 말았고, 결국 주가(主家)의 멸망을 막지 못했다. 에도 막부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는 '미츠나리는 도요토미에 충성을 다 했을 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좋고 싫음을 표가 나도록 확실히 하는 성격'은 적을 많이 만들고 말았지만, 반대로 그의 솔직함에 끌린 인물 또한 많았다. 또한 그는 자신의 편에 선 사람.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정말 잘 대해 줬기 때문에 수하 가신들 대부분이 목숨을 바친 것도 특징이다. 최초의 영지 500석을 받았을 때, 자신의 모든 영지를 주고서 영입한 와타나베 신노죠(渡辺新乃丞)는 히데요시가 2만 석을 줄테니 자신의 가신이 되라 하자 '10만 석을 주면 생각해보겠다'고 했던 정도의 인물이었고, 후에 4만 석의 영주가 되었을 때는 절반인 2만 석을 주고서 시마 사콘을 자신의 가신으로 만들었다. 이 때 히데요시는 '어떻게 사콘 정도나 되는 인물을 영입할 수 있었는가.', 그리고 '주군과 가신의 봉록이 같은 경우가 어디에 있는가.'라며 놀랐음에도 나중에 따로 사콘을 불러 '미츠나리를 잘 부탁하네.'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미츠나리 휘하로 참가하였던 무장들의 대다수가 훗날, 세키가하라 싸움에서 서군에 참가하였는데 오오타니 요시츠구, 사타케 요시노부, 사나다 마사유키 등등의 인물들은 인정, 우정 때문에 이시다 미츠나리의 편에 서기 위해 승리보다는 패배가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서군에 가담했고 전장에서 살아남고 용서를 받은 자들조차 도요토미 가를 지켜야 한다는 미츠나리의 유지를 성실히 지켜 이후 오사카 성 전투에 가담했다가 전사하는 길을 택했다. 특히 오오타니 요시츠구는 이시다 미츠나리에게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등을 돌리지 않는 쪽으로 설득을 시도했으나 이시다 미츠나리의 의지가 워낙 단호하였기 때문에 오오타니 요시츠구도 같이 서군에 가담한 것이다. 결국 오오타니 요시츠구는 일생의 친구로서 미츠나리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것과도 같은 최후를 맞이했다.
싫어한 자에게는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움을 받았고, 좋아한 자에게는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줄 정도의 사랑을 받았던 인물. 실로 전국시대의 인물로서는 이색적인 성격에 이색적인 삶을 살아간 인물이다.
하지만 이시다 미츠나리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싫고 좋음에 대해서 너무도 확실하게 표현하는 성격이었으며, 이 성격은 그의 일생에 있어서 많은 위기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상대방은 일부러 그의 취향을 맞춰주려다 마음에 들지 않아 도리어 호통이나 면박을 듣기도 했으며[29] 이런 이시다 미츠나리의 성격으로 인하여, 인망은 바닥 수준으로 떨어졌으며 그래서 결국 세키가하라 전투 때에는 자신이 직접 거병하질 못해서 모리 테루모토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싫으면 너무 싫은 티를 심하게 냈기 때문인 데다가 적에게서는 아무리 큰 장점이라 해도 그 어떤 점도 배우기는 커녕 시종일관 증오로 일관했기 때문이였다. 같은 서군 다이묘끼리의 자질 비교를 하더라도 이시다 미츠나리는 고니시 유키나가에 비해서도 한참이나 함량 미달이였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적장인 송상현에게서조차 배울 것이 있다며 융숭하게 장례를 치뤄줬지만 이시다 미츠나리에게 있어서 한 번 적은 영원한 적일 뿐이였다. 실제로 오사카 성 전투에서 수많은 다이묘들이 도요토미 가를 지키기 위해 모든 걸 버렸을 만큼 도요토미 가에 심정적으로나마 충성을 바치던 자들이 많고 미츠나리에 대해서도 좋게 본 이들이 적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가 적에게 관용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7 여담 ¶
여담으로 그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천수를 누렸다. 차남인 이시다 시게이에는 세키가하라 합전 직후 쿄토 쥬쇼인이라는 절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는데 대인배 이에야스는 사면해주었다.[30] 그리고 그는 102세까지 살았다. 장남인 이시다 시게나리는 츠가루 다메노부가 보호해주었다. 다메노부는 원래 난부 가의 신하였다가 반란을 일으켜 독립했는데 이 반란으로 아버지 이시카와 다카노부를 잃은 난부 노부나오는 다메노부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다. 이 와중에 오다와라 합전이 일어나게 되고 히데요시는 동북쪽 다이묘들에게 참전하라고 명령, 다메노부와 노부나오 두사람은 모두 참전하였다. 이 때 노부나오가 다메노부가 반란을 일으켰으니 토벌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미츠나리가 중재하여 다메노부는 다이묘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 일로 미츠나리에게 큰 은혜를 입은 다메노부는 세키가하라 합전 때 서군에 속했던 아들 노부다케에게 미츠나리의 식솔들을 모두 데리고 오라고 명령하였다. 이후 미츠나리 일족은 히로사키 번의 보호를 받게 되었으며 시게나리는 스기야마 하치베로 개명하였고 여동생 다츠히메가 다메노부의 며느리가 되어 히로사키번의 중신이 된다.
8 창작물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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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오시성 전투는 '노보우의 성'이란 제목으로 소설화 되었으며, 2012년 11월 일본에서 영화로 개봉 되었고(2011년에 촬영이 완료되었고 당해 9월에 개봉 예정이었으나 대지진으로 인해 많은 장면이 바뀌었다고 한다), 신장의 야망 PS판에 군웅패권모드로도 존재한다.
- [2] 메이지 시대에 폐성(廢城)되어 현재는 혼마루와 정문 등만 남았고, 혼마루에는 향토 박물관이 있다고 한다.
- [3] 외부링크에 있는 당시 평면도와 향토박물관의 복원모형만 보아도 육상전을 시도할게 아니라 수상전을 시도해야 할 것으로 보일 정도다. 오죽하면 당시 오시성은 '떠있는 성(浮き城)'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 [4] 조총을 쏘거나 하는 장거리전 등.
- [5] 특히 이들 중 우키타 히데이에를 제외한 나머지 두 명은 아예 무예를 접해본 적이 없는 문관이었다.
- [6] 반대로 이에야스 또한 미츠나리와 사이가 나쁜 무단파 인물들을 규합한다.
- [7] 히데요시 정권 하에서 이에야스의 무게는 압도적으로, 고쿠다카 255만 석으로 휘하 다이묘들 뿐만 아니라 고쿠다카 222만석을 보유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본인보다도 영지가 넓었고 2, 3위인 고쿠다카 120.5만석의 모리와 고쿠다카 120만석의 우에스기를 합친 것보다도 컸다! 더군다나 군력으로 따지면 더 심한 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군력이 그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다이묘들을 합친 것과 대등했으며 특히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종속된 이유라는게 전투에서 패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완전히 쳐발라버리고 있는 상황에서 오다 노부카츠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배신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 쪽으로 붙었기 때문이였다. 결국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정통성을 잃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하로 전락한 것이지 싸움에서 패한 것은 아니였다. 단지 마에다가 도요토미 직계 영주들 쪽과 관계가 깊어 영향력 측면에서 이에야스도 무시할 수 없었다는 것.
- [8] 정확히 말하자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첩인 요도기미 파.
- [9] 이 때, 혼비백산한 미츠나리가 홀홀단신 이에야스의 집으로 도망갔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이는 메이지시대 이후에 씌여진 자료에 의한 창작일 가능성이 크다. 다만, 정치적으로 거세당할 것을 각오해야 할 정도의 파격적인 행동이기도 했다.
- [10] 실제 그를 배웅한 인물은, 이에야스의 차남인 유키 히데야스이다.
- [11] 이시다 미츠나리의 인망이 너무 바닥이라 어쩔 수 없이 모리 데루모토를 옹립할 수 밖에 없었다. - 사실 19만석밖에 안 되는 미츠나리가 250만석이나 되는 이에야스에게 대항하는 맹주로 올라서기에는 무리였고, 데루모토는 엄연히 오대로의 일원, 120만석에 달하는 대영지의 주인으로 이에야스와 맞설 만한 정치적 위치에 있었기에, 인망만의 문제는 아니다.
- [12] 세키가하라 당시 우에스기가는 히데요시의 명에 의해 원래 영지인 에치고에서 아이즈 120만석의 영주로 영지이전한 상황.
- [13] 물론 세키가하라 전투 때문에 후에 우에스기가는 또다시 요네자와로 영지이전했는데 고쿠다카는 30만석으로 아주 왕창 깎여버렸다.
- [14] 심지어 코바야카와는 그의 34만석 영지를 미츠나리의 간언으로 히데요시가 1/3인 12만석으로 줄여버렸다는 악연도 있었다. 이는 서군에게 전투가 기울 수 있었던 결정적 순간에 히데아키가 참전하지 않은 것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난다.
- [15] 사실 이는 애초에 애매했던 히데아키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기도 했다. 전투에서 약간 떨어진 반대편 날개에서 사태를 관망하고 이기는 편을 들고 싶었던 것.
- [16] 여기서 '재상(히데모토의 관위를 중국식으로 표기하면 재상이 된다)님의 빈 도시락'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긴다. 어이없는 핑계를 일컫는 말.
- [17] 단, 시마즈 요시히로는 본래 동군에 가담하려 상경한 상황이라 전투에 대해 소극적이었던 점도 감안해야 한다. 결국 이런 이유도 서군의 조직력이 엉망인 많은 이유들 중에 하나가 됐다.
- [18] 시마즈 요시히로가 주장한 야습을 시마 사콘이 우리 병력이 더 크다며 반대한 까닭도 있는데 사실 이건 시마즈가 잘못된 아이디어를 낸 게 맞다. 하지만 이시다는 시마즈에게 면박을 줬다고 전해지니, 완전한 자폭.
- [19] 똑같은 고쿠다카 350만 석이다. 중요한 것은 동군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것을 대부분 혼자 갖고 있다는 점이고 서군은 우에스기 가게카쓰와 모리 데루모토가 양분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동군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수 있는 반면 서군은 이미 지휘관부터 이원화된 게 문제.
- [20] 미츠나리의 대포 5문은 도움이 되지 못했다.
- [21] 600명으로 추정된다(!!)
- [22] 정확히는 휘하 부하에게 목을 베어달라고 했다.
- [23] 이 장소는 현재의 쿄토 외곽인데 일본 전국에서 참수집행 장소로서 매우 유명했다.
- [24] 일본어위키: 三成が処刑直前に喉が乾いたので警護の者に水を所望した際、「水は無いが、柿がある。代わりにそれを食せ」と言われたのに対し、三成は「柿は痰の毒であるのでいらない」と答えた。これを聞いた警護の者は「もうすぐに首を切られる者が、今から毒断ちをして何になる」と笑ったが、三成は「大志を持つ者は、最期の瞬間まで命を惜しむものだ」と言い、泰然としていたという
- [25] 원래 일본의 전국 시대의 암묵적 규칙에 의하면 명목상이든 실질적이든 간에 패배한 세력의 총사령관은 할복을 하는 것이 관례였다. 즉 모리 데루모토도 참수당하는 것이 원칙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모리 데루모토에게 비록 영지를 거의 몰수에 가까운 대폭 삭감을 단행하였으나 목숨은 살려줬고, 시마즈 요시히로의 경우도 처음부터 적극 가담하지 않은 점. 그리고 가문을 이끌고 나선 게 아니라 직속 병력만 데리고 참전한 점 등을 고려해 일선에서 물러나는 정도로 처리를 마무리했다. 하지만 이시다 미츠나리만은 죄질이 영 좋지 않아 참수된 것이다. 이외에도 정말 파격적인 것은 소 요시토시. 패장임에도 불구하고 아무 형벌도 안받았다는 것이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대신 소 요시토시는 1607년까지 7년 동안 조선을 상대로 임진왜란을 용서해달라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 [26] 할복과 사형(참수)에는 사후 엄청난 대접의 차이가 있다. 고니시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천주교에서 자살은 금기 사항이며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스스로 죽지 않고 법의 형벌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에 참수당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이후 천주교 탄압 과정에서 신자들 대부분이 순교했는데 이들 가운데 자결을 택한 경우는 없다고 봐도 좋았고 대부분 사형을 받아들였다.
- [27] 안코쿠지 에케이를 참수한 그 행동 자체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모리 데루모토에게 다음에는 당신의 목이 날아갈 것이라는 경고였다.
- [28] 시마즈와 모리의 전후 외교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을 뿐더러, 결과적으로야 시마즈가 위협적인 활약을 했지만 시마즈는 겨우 1600명, 모리는 2만 명을 넘는 대군을 파견한 상황이었다. 애초에 시마즈가 서군에 붙은 것도, 원래 동군에 참가하려다 지각해서이다.
- [29]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이시다 미츠나리에게 미인을 대접했다가 호통을 들은 일화나 이시다 미츠나리가 목이 마르다고 호소하는 것을 홍시를 건네며 목을 좀 축이라고 한 옥졸의 배려에 거절한 점 등.
- [30] 원래 이런 경우는 일본 뿐만 아니라 조선이나 명나라의 경우도 얄짤 없이 3족을 멸했다. 이괄의 경우가 가장 대표적인 예. 그런데 사면해줬다는 것은 굉장히 파격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