슐츠의 자막공방/라운드 업 (2009)

앙리 필립 페탱 (Henri Philippe Petain)

슐츠105 2011. 9. 28. 10:44

 

출처 : 브래태니커 백과사전

 

 

소속 국가 프랑스
죽은 곳 일되.
죽은 때 1951. 7. 23
직업 장군
태어난 곳 프랑스 코시알라투르
태어난 때 1856. 4. 24

 

1856. 4. 24 프랑스 코시알라투르~ 1951. 7. 23 일되.

프랑스의 장군.

 

제1차 세계대전 때 베르됭 전투에서 승리하여 국민적 영웅이 되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중 비시 프랑스의 국가원수직을 맡아 명예가 실추되었다. 금고형을 선고받고 요새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죽었다.

 

 

프랑스 북부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페탱은 시골 마을 학교와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중학교를 다닌 후 프랑스 제일의 육군사관학교인 생시르에 입교했다. 그는 한 높은 산에 있는 연대에서 젊은 소위로 부하들과 함께 거친 야영생활을 하면서 병사들을 이해하게 되었는데, 훗날 그가 제1차 세계대전 때 사병들 사이에서 누린 인기의 근원이 거기에 있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그는 승진이 느렸는데(육군 대장으로 마지막 승진을 했을 때 그의 나이는 58세였음), 그것은 그가 국방대학 교수로 있을 때 제출한 전술이론들이 고위 사령부의 이론들과 상반되었기 때문이었다. 고위 사령부측은 어떤 희생을 무릅쓰고서라도 공세를 취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주장한 반면, 페탱은 잘 조직된 수세를 취하는 것이 때로는 바람직하며 공격을 시작하기 전에 사령관은 반드시 자기 군대의 화력이 우세한지를 확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단·군단·군 사령관을 차례로 역임한 페탱은 1916년 요새도시 베르됭에서 독일군의 공격을 저지해야 되는 책임을 맡았다. 정세는 사실상 절망적이었지만 그는 전선과 수송체계를 훌륭하게 재편성하고, 포병활동을 빈틈없이 했으며, 장병들의 마음속에 영웅심을 고취시켰다. 그는 대중적인 영웅이 되었으며, 프랑스 군대에서 당시의 총사령관 로베르 조르쥬 니벨 장군의 분별없는 공세에 뒤이어 심각한 하극상이 발생했을 때 페탱이 그의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페탱은 최소한의 억압책으로 군기를 회복했는데, 그것은 자신의 의도를 병사들에게 직접 설명하고 그들의 생활조건을 개선해줌으로써 가능했다. 그의 휘하에 있던 프랑스 군대는 연합군 총사령관 페르디낭 포쉬 원수가 지휘한 1918년의 공세에 참가하여 승전에 한몫했다. 페탱은 1918년 11월 프랑스 육군 원수로 승진했고 이어 최고위 군사직(최고 군사회의 부위장 겸 육군 감찰감)에 임명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중 1940년 5월 독일군의 공격이 있은 후 당시 프랑스 정부의 수반인 폴 레노는 페탱을 부총리로 임명했으며, 6월 16일 당시 84세였던 페탱 원수는 새 내각을 조직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프랑스군의 패배를 지켜본 '베르됭의 영웅'은 휴전을 요청했다(→ 색인 : 프랑스-독일 휴전협정, 비시 프랑스). 휴전 조약이 체결된 후 비시에서 소집된 상하 양원은 페탱에게 '국가 원수'로서 거의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했다. 독일군이 전국토의 2/3를 점령하고 있는 상태에서 페탱은 독일에 협력해야만 침략으로 입은 피해를 복구하고 수많은 전쟁포로를 석방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휴전 협정으로 침략을 모면한 프랑스 남부에서 페탱은 '일·가족·조국'을 모토로 한 정부를 수립했다. 기질적으로나 교육적으로 보수적인 그는 정부가 프리메이슨의 지부들을 해산하고 유대인들이 일정 직업에 종사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률을 공포하는 것을 허용했다. 그는 피에르 라발 총리가 주장한 독일과의 긴밀한 협력정책에 반대하여 1940년 12월 라발을 해임하고 프랑수아 다를랑 제독을 그의 후임으로 앉혔다. 그런 다음 페탱은 중립과 유예를 원칙으로 하는 외교정책을 실시하려고 계획했다. 그는 비밀리에 특사를 런던에 파견하고, 스페인의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만나 히틀러 군대가 북아메리카로의 자유통행을 거부하도록 촉구했으며, 주(駐) 비시 미국 대사 윌리엄 레이히 제독과 1942년까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1942년 4월 독일의 강요로 라발을 행정부 수반으로 다시 앉히고 페탱 자신은 이름뿐인 원수직으로 물러났다. 그렇지만 그는 자기가 사퇴하면 히틀러가 프랑스 전체를 독일의 직접 통치하에 두게 될 것이라고 믿어 사퇴를 완강히 거부했다. 1942년 11월 연합군이 북아프리카에 상륙한 후 페탱은 당시 알제리에 머물러 있던 달랑 제독에게 비밀지령을 내려 아프리카 주둔 프랑스군을 연합군에 합세하게 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연합군의 상륙에 항의하는 공식 메시지를 발표했다. 그의 이러한 이중적인 처사는 잠재적인 패배의식을 드러낸 것이었다. 1944년 8월 샤를 드골 장군에 의해 파리가 해방된 후 페탱은 평화적인 정권이양 준비를 위해 특사를 파견했다. 드골은 그 사절을 맞이하기를 거부했다. 8월말 페탱은 비시에서 독일로 옮겼다. 프랑스에서 1940년 이후의 행동에 대해 재판을 받게 된 페탱은 1945년 8월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 직후 그는 종신 독방형으로 감형되었다. 그는 대서양의 일되에 있는 한 요새에 투옥되어 95세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