슐츠의 자막공방/스기하라 치우네 (2015)

스기하라 치우네 (杉原千畝)

슐츠105 2016. 6. 23. 17:19

 

 

스기하라 치우네(일본어: 杉原 千畝, 1900년 1월 1일 - 1986년 7월 31일)는 일본의 외교관이다. 와세다 대학교 고등사범부(현 교육학부)를 중퇴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중에 나치 독일의 박해를 받고 있던 수천 명의 유대인에게 비자를 발급함으로써 그들의 생명을 유대인 학살로부터 구했다. 유럽에서는 센포 스기하라라고도 부르는데, 치우네라는 이름이 발음하기 어려워, 스기하라 자신이 유대인에게 센포라고 부르도록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센포는 지우네의 한자 千畝를 음독으로 읽은 것이다)

 

걸어온 길
 
외교관이 되다
 
1900년 기후 현 야오쓰 정(八百津町)에서 태어났다. 구 아이치현립 제5중학교(현 아이치현립 즈이료고교)를 졸업한 뒤, 의사가 되기를 희망한 부친의 의사에 반하여, 1918년 와세다 대학교 고등사범부 영어과예과에 입학했다. 이듬해인 1919년에는 대학교를 중퇴하고, 외무성의 관비 유학생으로서 중국 하얼빈에 파견되어 러시아어를 배웠다. 1920년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 제국 육군에 입대했다(지원병). 1924년에는 외무성 서기생으로 채용되어 정식 외교관이 된다.
 
1924년 하얼빈에서 스기하라는 러시아 여성 클라브디아 세묘노브나 아폴로노바와 결혼했으나 곧 이혼했다. 이 때 스기하라는 정교회로 개종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1932년에서 1935년 사이에 괴뢰 만주국에서 보낸 외교관 시절에는 소련과 북만주 철도를 둘러싼 교섭을 러시아 외교의 전문가로서 담당했다. 귀국 뒤에 기쿠치 유키코와 결혼했다. 이후 1937년에는 핀란드 헬싱키의 일본 대사관에 부임하였고, 1939년에는 리투아니아 카우나스의 일본 영사관 영사대리가 된다.
 
유대인 난민들과의 만남
 
1940년 여름에 나치 점령 아래 폴란드에서 탄압을 피해 리투아니아로 도망쳐온 많은 유대인들이 각국 영사관 및 대사관으로부터 비자를 취득하고자 했다. 그러나 소련이 리투아니아를 병합하고, 리투아니아에 있던 여러 나라들의 영사관과 대사관의 폐쇄를 요구했기 때문에, 유대인 난민들은 아직 업무중이던 일본 대사관에 통과 비자를 얻기 위하여 몰려 들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유대인에 대한 중립 정책이 공식 입장이었으나, 통과비자발급은 충분한 여비를 갖추고, 규정을 충족할 것 따위의 자세한 조건이 많았다. 일본 외무성은 표면적으로 유대인 난민을 다른 난민과 공평하게 다루기 위한 중립적 정책이라고 하였으나, 비자 발급 자격 조건을 다른 난민에 비해 까다롭게 함으로써 사실상 유대인들에 대한 비자 발급을 제한한 것이었다.
 
유대인 난민의 대부분은 자격 미달 상태였기 때문에 스기하라가 본국 외무성에 문의하였으나, 비자 발급은 허가되지 않았다. 일본정부의 이런 지시에 반하여 1940년 7월 끝 무렵 치우네는 일본 통과 비자를 자격 조건 미달의 유대인에게도 제한없이 발급하기로 결단하였다.
 
소련 정부와 본국 일본에서 거듭된 퇴거 명령을 받으면서도 스기하라 부부는 베를린으로 옮겨가는 9월 초까지 약 한달 남짓한 기간동안 비자를 계속 발급한 것으로 보인다. 그 기간 동안 발행된 비자 수는 번호를 붙여 기록에 남은 것만 해도 2139장에 이르며, 도중에 기록을 그만두었으므로 실제 발행된 비자와 도항 증명서는 그 밖에도 수천 장에 이를 것이라 보기도 한다. 또 가족 가운데 1장의 비자만 있어도 가족이 모두 건너갈 수 있었으므로, 이런 점을 감안하여 스기하라의 도움으로 국외탈출한 유대인 수를 약 6000명으로 추산하기도 한다.
 
탈출에 성공한 유대인은 시베리아 철도를 통해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일본 쓰루가(敦賀)에 상륙하여 유대계 러시아인의 공동체가 있었던 고베시에 다다랐다. 그들 가운데 1,000명 정도는 미국과 팔레스타인으로 떠났고, 나머지 사람들은 뒤에 상하이로 송환될 때까지 일본에 남아 있었다. 상하이에도 유대 난민 공동체가 있어서, 그 곳에서 유대인들은 일본이 항복하는 1945년까지 지내게 되었다.
 
나치독일의 리투아니아 유대인 탄압
 
한편 그들이 떠나왔던 리투아니아는 독소전쟁이 발발한 1941년에 나치 독일의 맹공격을 받아 소련군이 물러났으며 이후 1944년의 여름에 소련군이 다시 이곳을 탈환할 때까지 나치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 그 기간 동안 리투아니아에서 희생된 유대인은 약 20만 명을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일본 정부의 대응
 
치우네의 유대인 비자 발급에 대해 일본 정부의 태도에 대하여 여러 견해가 엇갈린다.
 
양자대립구조론
 
우선 이미 동맹관계였던 나치 독일과 관계를 중시하여, 유대인을 방관하도록 한 비정한 외무성과 그런 외무성에 반대한 치우네라는 양자 대립 구도로 보는 견해이다.
 
이 견해를 지지하는 근거의 하나는 치우네가 전후 소련의 수용소에서 귀국한 다음, 1947년 외무성에서 사직하도록 압력을 받았던 사실이다. 명목상으로는 1946년부터 외무성뿐 아니라 일본 행정 조직 전체에 대해 실시되었던 "행정정리임시직원령 쇼와21년 칙령 제40호"에 근거한 기구 축소에 따른 정리해고이나, 부인 스기하라 유키코는 구두로 "그때 그 일"에 대한 책임으로 면직을 통보받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묵인론
 
다른 견해로 일본 정부 입장에서 독일과의 관계 때문에 공공연히 유대인을 돕는 것은 불가능했으나, 실제로는 치우네의 비자 발급에 대해 묵인해준 것이 아닌가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전전 일본을 미화하려는 의도가 끼어들기 쉽다. 만약 일본 정부가 유대인을 통과시키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하는 입장이었다면, 치우네의 비자에 따른 일본 입국을 어떤 형식으로든 저지하려고 하는 것이 자연스러웠겠지만, 실제로는 많은 유대인들이 고베의 유대인 공동체까지 도착하고, 또 미국이나 팔레스타인으로 떠난 1000명 이외에 그 뒤에도 일본 세력권에서 종전 때까지 무사히 지낼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는 스기하라 비자로 일본으로 도항하려고 했던 유대인들은 입국 심사에서 발급 조건을 미비하고 있다는 이유로 입국을 거부당하는 사례가 있어서 당시의 신문에서 보도되었지만, 이러한 난민들은 고베 유대인 협회와 주일 네덜란드 대사관이 분주히 움직인 탓에 입국이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태평양 전쟁 발발로 일본에서 미국으로의 도항이 불가능해지면서, 체류 기간이 만료된 유대인들은 당시 비자가 필요하지 않았던 상하이 조계로 이동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상하이에서는 독일의 경우를 모방하여 유대인 게토가 설치되어, 상해의 유대인들은 그곳에 수용되게 되었다.
 
또한, 치우네가 외무성의 뜻에 반하는 비자 발급을 허가한 후에도 1945년 소련에 의한 수용소 송환 때까지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 주재 총영사관 총영사 대리 및 독일의 쾨니히스베르크 주재 총영사관 총영사 대리,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주재 일본 공사관 일등 통역관 등을 역임하고, 1944년에는 훈5등서옥장을 수여받은 일 등도 치우네 영사대리의 유대인들에 대한 비자발급을 일본정부가 묵인했다는 주장의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이 주장에 대해서는 치우네가 비자 발급 후 즉시 사임할 수 없었던 것은 첩보활동상, 어학에 능통하여 소련 사정 등에 대해서도 정통한 치우네의 능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반론도 있다. 실제로 전전 주소련일본 대사관에 부임 예정이었지만, 스기하라의 러시아어 실력이 매우 뛰어났기 때문에(러시아 사람도 회화만으로는 비 러시아인과 식별 불가능할 정도의 실력이었다고 함) 페르소나 논 그라타(Persona non grata)로써 소련 정부로부터 거부당해, 할 수 없이 소련 첩보의 전진기지가 된 리투아니아에 부임되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이다.
 
일본외무성의 사과
 
이러한 여러 가지 설명들에 대해 당사자인 외무성은 1991년 10월 외무성의 스즈키 무네오(鈴木宗男) 정무차관(당시)이 스기하라 치우네 영사대리의 부인 사치코 여사를 초청하여 일본 정부의 대응에 대하여 사죄한 사실이 있다. 그러나 1992년의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당시 외무대신 와타나베 미치오(渡辺美智雄)는 비자 발급의 건으로 퇴직했다는 기록은 외무성에 남아 있지 않다고 답변했다. 또한 퇴직금과 연금에 대해서도 불리한 처우는 없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 근거로 스기하라 유키코 여사는 저서에서 퇴직금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전후 스기하라 치우네의 소식을 묻는 유대인 협회의 문의에 대해 일본 외무성에는 센포 스기하라라고 하는 외교관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답변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외무성 내의 스기하라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미루어 볼 수 있다고 해석하는 견해도 존재한다.
 
스기하라에 대한 평가
 
외무성 퇴직 후에는 러시아어를 비롯한 발군의 어학 실력을 살려, 무역상 및 번역자로서 생활을 꾸려갔다.
 
그러던 중 1969년에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은 후, 1985년에는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야드바셈상을 수상하고, "열방의 의인"으로 기려진다. 현재도 예루살렘 언덕에는 그 당시의 표창비가 세워져 있다. 일본의 오스카 쉰들러라고도 불린다.
 
일본 외무성의 외무자료관에는 "용기있는 인도적 행위를 실행한 외교관 스기하라 치우네 씨를 기리며"라고 기록된 스기하라의 표창비가 세워져, 2000년 10월 10일의 제막식에는 이스라엘 및 리투아니아 임시 대리 대사, 당시의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외상, 스즈키 무네오, 스기하라 유키코 부인 등이 참석했다.
 
기타 국가에서도 오스카 쉰들러에 비하여 지명도는 낮지만, 의인으로서 일정한 평가를 받고 있다.